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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여리고에서 맹인 두 사람을 고치는 이적을 행하시다
마태복음 20장 29-34절/ 29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30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31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32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3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34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병행구절. 마가복음 10:46-52; 누가복음 18:35-43)
본문 사건에 관한 공관복음서의 기록 관점
예수께서 두 사람의 맹인을 고치는 이적을 행하신 사건은 두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마태복음 9:27-31에서이며, 두 번째가 마태복음 20:29-34 입니다. 이 두 곳에서 보는 맹인을 고치는 이적은 동일한 사건을 다룬 것이 아닌 별개의 사건입니다. 첫 번째 사건은 예수께서 구속주로서의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는 초기 사역 때인 산상설교를 하신 후 가버나움에 계실 때 행하신 이적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사건은 예수께서 구속주로서의 공생애 사역을 마치기 위해서 마지막 방문 길인 예루살렘의 입성을 향하여 가시는 여정 중에 여리고에 들르셨을 때인 말기 사역 때 행하신 이적입니다. 그 두 번째인 예수께서 여리고에 계실 때 맹인 두 사람을 고치는 이적을 행하신 것을 기록해 주신 것이 본문입니다.
이 사건은 이곳 마태복음 20:29-34과 함께 공관복음을 이루고 있는 마가복음 10:46-52과 누가복음 18:35-43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여리고에서 맹인 두 사람을 고치는 이적을 행하신 것에 대해 공관복음서 세 곳은 조금씩 기록상 차이가 있습니다. (1)먼저 마태복음에서는 눈 먼 사람을‘맹인 두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으나, 그들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2)이에 반해 누가복음에서는‘한 맹인’이라고 기록하고 있어서 맹인을 숫자상 한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3)그런가 하면 마가복음에서는 한 사람, 또는 두 사람이라는 숫자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라고 밝히고 있어서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여 고쳐주신 한 사람이 디매오의 아들로 사람들에게 구걸하여 생활을 연명해 나가는 맹인 바디매오였다는 것을 밝히고 있어서 가장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의 시점에 대해서도 각 복음서의 기록에는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1)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여리고를 들렀다가 떠날 때에 있은 일로 말하고 있습니다만, 누가복음은 예수께서 여리고에 가까이 오셨을 때에 이적을 행하신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서로 다른 이적의 사건이어서가 아니라 같은 사건을 다룸에 있어서 기록상의 관점의 차이 때문입니다. 우선 여리고에 들어오실 때와 떠나실 때의 차이는 누가는 예수께서 여리고에 들어오시게 되면서 이곳에 있게 된 사건으로 다루고 있는 반면에 마태와 마가는 예수께서 여리고를 떠나실 때 있게 된 시점으로서의 사건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2)그리고 마태는 맹인 두 사람이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는 이 두 사람이 함께 예수께 자비를 베풀어주실 것을 간청하는 것을 다룸으로서 그때에 고침 받은 맹인 두 사람을 다 들어 기록하고 있으나, 마가와 누가는 단지 그 두 사람 중에서 소경 한 사람(바디매오)을 마음에 두고 그가 겪은 관점에서 다룸으로써 한 사람을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공관복음을 종합하여 정리하면,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던 중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서는 함께 큰 소리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면서 자비를 베풀어 자신들의 눈을 뜨게 해주실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그 두 맹인 중에 한 사람은 바디매오, 곧 디매오의 아들이었습니다.
두 맹인이 보인 예수님에 대한 신인식
디매오의 아들을 뜻하는 바디매오를 포함한 맹인 두 사람은 당시의 맹인이 생활해 나가는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그들은 세상을 볼 수 없는 눈으로서 손 기술을 가지고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어서 단지 길가에 앉아 구걸하여 지나다니는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끼니를 이어가려고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여느 사람에 비해서 비참하고 궁핍하여 불행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같은 처지에 있는 맹인 두 사람은 여느 날에 했던 것처럼 어느 날도 길가에 앉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날과는 다르게 많은 사람이 모여 들면서 들리는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이상히 여기며 무슨 일인지 궁금하여 자신 앞에 있는 사람에게“지금 무슨 일이 있기에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여들고 있는 것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한 사람이 말해주었습니다.“나사렛 예수께서 지금 이곳을 지나가시고 있소.”이 말을 들은 두 맹인은 지나가시는 예수님이 들으시라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하며 큰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이 사람들아, 시끄러우니 제발 좀 조용히 하게”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두 맹인은 사람들의 만류에 전혀 개의치 않고 더욱 크게 소리를 질러“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그 소리를 들으시고는 걸음을 멈추시며 사람들에게“저들을 불러 나에게로 데리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있자 사람들이 두 맹인에게 가서“선생님이 너희를 부르신다. 그러니 어서 이리로 오라”고 일러주며 그들의 손을 붙잡고 예수께로 이끌었습니다. 그러자 두 맹인 중에 한 사람인 바디매오는 입고 있던 낡은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께로 나아갔습니다.
두 맹인이 예수님 앞에 서자 그들을 보며 예수님은 물었습니다.“내가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두 맹인은“주님, 저희 두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눈을 만지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눈을 뜨고 보아라! 너희 믿음이 너희를 낫게 하였다.”예수님의 이 말씀이 있자 두 맹인은 그 자리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들의 눈을 뜨게 한 다윗의 자손 예수님을 뒤따랐습니다.
예수께서 바디매오를 포함한 두 맹인의 눈을 뜨게 해주는 이적을 베푸신 것이 갖는 의미는 예수님이 눈먼 자의 비참하고 불행한 모습을 보고 불쌍히 여겨 치료하여 주는 자비를 베풀었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에는 병자의 상태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고치는 사건이 있습니다만, 그 모두는 그들의 처지를 보시고 그 병이나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단지 낫게 해주는 치료를 해주기 위한 것으로는 단 하나의 이적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치고 본문의 두 맹인을 고치는 이적을 행하신 것은 치료의 목적에서가 아니라, 예수님 자기 계시의 목적으로 행하신 것이었습니다.
두 맹인을 예수님이 고치는 이적을 행하신 것도 그렇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 길에 계신 예수께서 여리고에 이르셨을 때의 맹인 두 사람의 등장은 앞서의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상태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죽음을 당하는 고난을 받으신 후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과 관련해서 주의 영광스런 나라가 임할 때 주의 곁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욕망에 저마다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주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른 자신이 주의 곁 가장 가까이에서 주를 위해서 충성할 기회를 갖고자 하는 저마다의 욕망이 표출되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주께로부터 영광을 얻을 것을 기대해서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요구를 하는 것과 또한 이를 곁에서 들은 다른 제자들이 분노한 그 모두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죽음에 이르는 고난을 당하시는 것이 대속주로 오신 그리스도로서의 구속 사역을 수행하시는 것임을 알게 해 주시며 그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 또한 그리스도가 마신 고난의 잔을 마심에 있음으로써 주의 영광스런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맹인 두 사람을 고치는 이적은 이런 일이 있으면서 있게 되었습니다. 이 이적의 행하심이 있기까지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수행하셔야 할 그리스도의 사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두 맹인을 고치는 이적을 행하시는 것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나사렛 사람이신 예수님이 구약성경에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으로 예언된 왕으로서의 큰 권능을 행사하여 베푸시는 자비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해주시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자비를 두 맹인의 눈을 뜨게 해 주는 것이라고 봅니다만, 두 맹인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앎이 예수님의 큰 권능에 의해서 베풀어지는 자비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예수께로 모여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두 맹인의 눈을 고쳐 뜨게 해 주시는 것에서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해서, 예수님은 두 맹인이 이 자비를 입음에 있음을 먼저 그들에게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부르는 믿음에 있게 하는 것에서 해주셨습니다. 두 맹인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예수께 가진 신인식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름은 예수님이 다윗의 왕국에서 나온 왕, 즉 다윗 왕조를 잇는 왕이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예수님은 그 다윗의 왕국을 다스릴 왕으로 약속된 다윗의 자손이시니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인 메시야라는 뜻입니다(참조, 9:27).1) 그런데 두 맹인이 예수님을 이렇게 부른 것은 마태복음 16:14에서 알 수 있는 대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나 예레미야나 그와 같은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알 뿐인 가운데서 나온 것으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한 것이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알게 해주셨던 것인 것처럼 예수님에 대한 신인식에 있어오게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서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을 통해 언약해 주신 다윗의 자손이라는 메시야 사상이 확산됨에 있게 하셨고, 이 전파의 소문은 두 맹인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그에 따라서 그 소문을 들은 두 맹인은 구약 성경에서 예언해 오신 다윗의 자손이 예수님이심을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2)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이 자기들이 있는 곳 앞을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는 예수님을 향하여 크게‘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외치며 자신을 불쌍히 여겨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을 구하였으며,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만류하여 막는데도 불구하고 더욱더 큰 소리로 외치는 것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두 맹인이“불쌍히 여기소서”라며 자신을 돌아보아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을 구함은 단지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 된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시며 불쌍히 생각하여 줄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부르짖음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메시야이심을 믿고 주로 받아들인데 따라 그분의 권능 속에 자신들을 두고 다스림 받기를 원하는 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으로 두 맹인이“보게 되었다”는 것의 의미
예수님은 소리쳐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며 불쌍히 여길 것을 구하는 두 맹인을 데리고 오게 했습니다. 그리고서는 그들에게 물었습니다.“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그러자 두 맹인은“눈을 떠서 보기를 원합니다”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눈을 어루만지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두 눈이 떠져 보게 되었다고 마태는 간략히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가의 기록에서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좀 더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가라, 네(너희)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해 주자 바디매오(와 또 다른 맹인)는 곧 눈이 떠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을 좇았다고 하였습니다(막 10:32). 여기서 예수님은“가라, 네(너희)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였는데, 누가는“보라, 네(너희)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눅 18:42). 이는“눈을 뜨라. 그리고 너희에게 믿음을 주셔서 보게 하시고 있는 다윗의 자손 예수를 보아라. 너희가 보고 있는 다윗의 자손인 그가 너희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각 복음서 기자의 말을 종합하면,“너희가 다윗의 자손 예수를 보기 원하느냐? 과연 너희는 그 예수를 볼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이제 눈을 뜨고 너희 앞에 있는 너희가 부르짖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를 보아라. 너희 믿음이 너희를 구원하였다. 그러니 너희가 가고 싶은 곳, 너희 집으로 가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바디매오를 비롯한 두 맹인의 눈을 뜨게 하여 그들이 부르짖는 다윗의 자손을 볼 수 있게 해 주었는데, 이것을“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는‘네 믿음이 너를 고쳤다(낫게 하였다)’는 것인데 맹인 되어 있는 보지 못함의 죄의 비참한 저주로부터 놓였다(풀려났다, 자유하게 되었다)는 의미에서입니다. 그러한 것에서 두 맹인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부르면서 눈을 떠 볼 수 있기를 원한다는 구함에 예수께서“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다윗의 자손이 자기의 눈을 뜨게 하여서 볼 수 있게 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두 맹인에게 있기 때문에 그 믿음대로 두 눈을 뜨게 하여 정상인의 눈이 되게 해주는 고침을 해 주겠다는 의도에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너희가 나를 다윗의 자손 이라고 믿고 나를 보고자 하느냐? 그렇다! 과연 나는 너희가 보고자 하는 다윗의 자손으로 온 메시야이다. 너희에게 그 믿음에 있게 한 다윗의 자손인 예수가 너희 눈을 뜨게 하여 보게 한다. 그러니 너희는 눈을 떠 너희가 보고자 하는 메시야를 보라!”고 말씀하여 두 맹인이 보게 되는 것과 이것을“너희 믿음이 너희를 구원하였다”고 두 맹인의 믿음을 연결시켜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두 맹인은 단순히 자기들의 눈을 뜨기 위한 구함으로써가 아닌 구약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그리스도)로 오실 다윗의 자손과 예수님을 일치시켜 같이 본 믿음에서 그 메시야를 볼 수 있고자 하는 소망에서 불쌍히 여겨 자비를 베풀어 볼 수 있게 해 주실 것의 부르짖음을 다루고 있는 것이기에 그에게 눈을 떠서 보라고 한 것은 그가 믿음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그 다윗의 자손인 예수를 보게 해 주시는 의도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부르는 두 맹인이 바라봄에 있는 메시야, 곧 그들의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이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그들이 바라보고자 하는 믿음의 주를 볼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에서“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니”라고 하였는데, 두 맹인이 그러합니다. 그들에게 있은 믿음이 그들이 바라는 것을 반드시 이룸에 있으며, 아직 눈앞에 보이지 않는 장차 다가올 미래의 일일지라도 기대하는 것이 반드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에 확신을 갖게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눈에 있는 복 있는 자
예수님이 두 맹인의 눈을 뜨게 해주어 그들의 주이신 예수님을 보는 눈에 있게 해 주심으로써 그들이 소리쳐 외친 대로 과연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이 예언된 왕이 그들에게 오신 분이심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두 맹인은 그토록 보고자 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메시야를 보는 하나님의 크신 권능을 겪음으로써 예수님이 메시야, 곧 그리스도로서 하실 일에서 나타내실 권능에 깊은 신뢰를 갖고 의존함에 있는 믿음으로 깊이 뿌리를 내려 더욱 그들의 믿음을 굳건히 하였습니다. 이는 이제 예루살렘에서 일어나실 일인 예수께서 예고하신 죽음과 부활의 권능에 계실 때 이 큰 하나님의 일을 믿는 믿음으로 나타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두 맹인에게 행하신 이적의 권능은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앞두고 계신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가 어떤 성격의 것인지를 설명하여 주고 있습니다. 두 맹인은 그동안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어두움에 갇혀 있었는데, 그가 눈을 떠 본 것은 어둔 눈에 있을 때 그들의 마음에 비춘 빛에 의해서만 보아왔던 선지자의 예언에 있은 약속 된 메시야가 자신들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다”(마 13:16) 라고 하신 말씀의 성취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두 맹인은 예수님에 의해서 닫힌 눈을 뜸으로써 그들의 마음에 한 없이 원하고 있었던 자신들의 주님이신 메시야를 보는 복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은 참으로 행복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무엇을 볼 것인지를 헬렌 켈러(Helen Adams Keller, 1880년 6월 27일-1968년 6월 1일; 시각과 청각 장애가 있는 미국의 작가 겸 활동가 겸 교육가)의 경우에서 찾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헬렌 컬러는‘내가 사는 동안 유일한 소원인 죽기 전에 사흘 동안만 세상을 보는 것’에서 첫째 날에는 자기의 스승인 설리반 선생님을 찾아가 그분의 인자한 얼굴과 아름다운 몸매를 바라보면서 그 모습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둘째 날에는 동트기 전에 일어나 밤이 낮으로 바뀌는 가슴 설레는 기적 속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밤하늘의 별을 보고자 하였습니다. 마지막 셋째 날에는 일찍 큰 길로 나가 출근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표정을 보고 마지막 날 눈을 감아야 할 시간에 사흘 동안 눈을 뜨고 볼 수 있도록 해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 후 영원히 어둠의 세계로 돌아가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헬렌 켈러가 왜 그러한 소원에 있었겠는지요. 두 눈을 떠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에서 벗어나 두 눈이 온전한 다른 사람들처럼 그들이 보고 있는 많은 것 중에 단 세 가지를 선택하여서 한 번이라도 보고자 하는 바람에서였겠는지요. 아닙니다. 그녀는 보고자 하는 세 가지를 볼지라도 자신의 눈은 다시 감겨 두 눈을 뜨기 전의 어둠의 상태에 있는 세계에로 돌아갈 마지막 날에 있을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도 영원히 말입니다. 그런 그녀가 진정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한 것은 두 맹인의 경우처럼 그가 바라봄에 있었던 믿음의 실상이요 다가옴에 있은 믿음의 증거로 인해 주님에게서 보는 영광의 빛에 휩싸일 자신을 보는 눈의 믿음에 있은 것이었습니다.
두 맹인이 눈을 떠서 본 것은 자신들이 소리쳐 부르짖은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보는 그들은 자신들의 두 눈으로 보고 있는 예수님이 자기들의 주심을 알고 그 믿음에 있기에 주저 없이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이“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습니다”(마 19:27)라고 한 제자의 길을 따름에 있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는“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겠습니까?”라고 하는 것에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보고 있는 예수님이 자신들의 주이시기에 주의 사람으로서 그 주와 함께 하며 주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주를 따름에 있고자 하는 이것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음에 있는 진정성입니다.
우리가 그렇습니다. 오직 예수만 바라봄에 있습니다. 해바라기가 해의 빛만을 따라서 움직인다고 하는데, 다른 식물들도 그렇습니다. 어느 높은 산에 올랐더니 나무 가지들이 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햇빛을 제공하는 해가 있는 쪽입니다. 그처럼 대속주가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제공되는 자비의 권능을 힘입음에 의해 우리는 권능 있게 예수만 바라봄에 있는 믿음을 발휘하며 복 있는 자로 살아갑니다. 우리 귀가 들음에 있는 구주이신 예수님으로 기뻐하니 어찌 즐겁지 않으며, 그 주님을 바라봄에 있는 예수님을 즐기니 어찌 행복하지 않으며, 주님을 알면 알수록 깨닫는 구원의 진리가 주는 힘에 넘치니 어찌 믿음으로 살아가지 않겠는지요. 그래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권능으로 자신이 받은 복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복 있는 입에 있습니다.“예수, 그분은 누구신가?”하는 사람들 앞에서,“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이 예언된 메시야(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그 다윗의 자손 예수님을 보는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두 맹인을 고쳐 눈을 뜨게 해주심으로써 그리스도를 볼 수 있게 하신 것처럼, 우리를 사망의 어둠에서 생명의 빛으로 나아오게 하여 그 빛 가운데 거할 수 있게 크신 권능을 베풀어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니, 곧 우리의 주이십니다. 우리가 이분의 이름을 힘입음으로 구원의 복을 받았습니다.”라고 말입니다.“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 6:5)라고 말해야 하는 우리 입에서 자비로우신 주님을 증거하여 전파하는 복음이 나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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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디매오를 포함한 두 맹인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던 것은, 또 그렇게 불러야 했던 것은 예레미야23장 5절에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날 왕을 예언하였는데, 다윗의 이름을 다시 한번 빛낼 것이며, 이 땅에 법과 정의를 실현하여 총명하고 의롭게 다스리는 왕이 될 것이라고 한 데 따른 것이다. 시편 17:23에는 주의 기름부음 받은 자는 다윗의 자손임을 말씀한다.
2) 바디매오를 포함한 두 맹인이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그들은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성경의 가르침을 통해서 선지자가 예언하고 있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왕이 그리스도를 말씀해 주고 있음을 알고 있는 자라는 기본적 이해를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바탕 위에서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소문은 두 맹인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확신하고 기쁨으로 받아들여 그 믿음에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문맥의 이해에 의해서 충분히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