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2월 20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 대통령실
윤석열 대통령은 2월 20일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일은 국가안보, 치안과 함께 국가가 존립하는 이유이자 정부에게 주어진 가장 기본적인 헌법적 책무”라며 “의료 현장의 주역인 전공의와 미래 의료의 주역인 의대생들이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볼모로 집단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의대 증원에 반대해 전공의들이 집단 사직서를 제출하고 의대생들이 집단 휴학을 결의했는데 정말 안타까운 일”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이어 “의사는 군인, 경찰과 같은 공무원 신분이 아니더라도 집단적인 진료 거부를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의료개혁의 필요성은 이미 오래전부터 제기돼왔다”며 “필수의료가 아닌 비급여 진료에 엄청난 의료인력이 유출돼 필수의료에 거대한 공백이 생긴 현실을 우리 국민은 일상에서 마주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의료개혁이 시급한데도 역대 어떤 정부도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 30년 가까이 지났다”며 “의료서비스의 수요는 빠르게 증가하는데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특히 필수의료 분야의 의료인력은 더 현저하게 줄어들었고 그 결과 지역·필수의료도 함께 붕괴됐다”고 했다.
이어 “정부는 지난 27년 동안 의대정원을 단 1명도 늘리지 못했다. 오히려 2006년부터는 의대정원이 줄어서 누적 합계 7000여 명의 의사를 배출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의사 증원만으로는 지역·필수의료의 붕괴를 해결할 수 없음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의사 증원이 필수의료 붕괴를 막기 위한 필수조건임은 명백하다”고 강조했다.
정부가 발표한 ‘의대 2000명 증원’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확충 규모”라고 했다. 윤 대통령은 2025년부터 의대정원을 증원해도 2031년에나 의대 첫 졸업생이 나올 수 있고 전문의를 배출해서 필수의료체계 보강 효과를 보려면 최소한 10년이 걸린다고 했다. 그러면서 “2035년에야 2000명의 필수의료 담당 의사 증원이 실현된다”며 “의대 증원은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시대적 과제”라고 했다.
‘의대 증원으로 의학 교육의 질이 떨어질 것’이라는 의료계의 주장과 우려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윤 대통령은 “서울대의대 정원은 현재 한 학년에 135명이지만 지금부터 40년 전인 1983년에는 무려 260명이었다”며 “40년 동안 의료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한 데 반해 의대정원은 절반으로 줄어든 것”이라고 했다. 경북대, 전남대, 부산대 등 국립의과대도 모두 마찬가지 상황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정원이 더 많았던 그때 교육받은 의사들의 역량이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며 “오히려 뛰어난 역량으로 대한민국 의료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려놓았다”고 했다.
또한 “대한민국 의료 역량은 세계 최고”라며 “그러나 환자와 국민이 지역에서 마주하는 의료서비스의 현실은 너무나 실망스럽고 어떻게 보면 비참하기 짝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의료인들에게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의료개혁에 동참해주길 부탁드린다”고 했다. 이를 위해 “지역·필수의료, 중증진료에 대해 정당하게 보상하고 사법 리스크를 줄여 여러분이 소신껏 진료할 수 있는 환경을 책임지고 만들겠다”고 말했다.
한편 윤 대통령은 이날 늘봄학교와 관련해 “국가가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해결해야 할 인도적 문제이자 인권의 문제”라며 “방과후에 아이들이 방치되지 않도록 우리 사회 모두가 내 아이를 돌본다는 생각으로 동참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우리 사회에서 아이들을 기르는 문제에 행여라도 정치가 개입해서 영향을 미치면 안 된다”며 “교육부, 지자체뿐만 아니라 전 내각이 늘봄학교 안착에 힘써달라”고 당부했다.
학교폭력 대응과 관련해선 “학교폭력 문제를 조사하고 심의·의결하는 과정에서 교사나 학교가 일을 떠안지 않게 하라”며 “심의·의결기관도 전국 공통의 기준을 만들어 어디서든 비슷한 비행에 대해서는 비슷한 제재가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대 입학 정원 확대를 포함한 의료개혁안을 두고 정부와 의사들이 강 대 강 대치를 이어가고 있다.
정부는 지난 6일 의과대학 입학 정원 증원 계획을 발표했다. 오는 2025학년도부터 5년 동안 의대 입학정원을 2000명 늘려 연간 총 5058명을 선발하겠다는 방안이다.
정부가 발표한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에는 의료인력 확충안뿐만 아니라 지역의료 강화, 의료사고 안전망 구축, 보상체계 공정성 제고 등 크게 네 가지 의료개혁안이 담겼다.
의사들은 정부 정책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다음 달 전국 집회를 계획하는 등 정부 압박에 물러서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1일 오후 10시 기준 주요 100개 수련병원 점검 결과 사직서 제출자는 소속 전공의의 약 74% 수준인 9275명이다.
아직 사직서 수리가 이뤄진 사례가 없는 것으로 파악되는 상황에서 근무지를 이탈한 이들은 이 중 8000명을 넘었다. 정부는 근무지 이탈이 확인된 전공의에게 업무개시명령을 발령했다.
의대생들도 휴학으로 반대 의사를 표하고 있다. 교육부에 따르면 지난 21일 기준 22개 의과대학에서 3025명이 휴학을 신청했다.
정부와 의사들의 입장이 이렇게 강하게 충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연 2000명' 증원 근거는?
현재 전국 40개 의과대학 입학정원은 총 3058명으로, 2006년 이후 19년째 동결 상태다.
이전 정부에서도 의대 입학 정원을 확충하려는 시도는 여러 차례 있었지만, 의사들의 반발에 부딪혀 무산됐다. 2020년 문재인 정부는 매년 400명씩, 10년간 총 4000명을 증원하는 방안을 제안한 바 있다.
증원을 얘기할 때 가장 흔히 인용되는 수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기준 의사 수다. 2021년 기준 국내 인구 1000명당 임상 의사 수는 2.6명(한의사 포함)으로, 30개 회원국(평균 3.7명) 중 멕시코(2.5명) 다음으로 가장 적다.
하지만 대한의사협회(의협)는 한국과 의료체계가 비슷한 일본(2.6명)이나 미국(2.7명)과 비슷한 수준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또 의료접근성이나 1인당 외래 진료 횟수 및 입원 일수 등 다른 지표의 경우 OECD 상위권이라고 주장한다.
2000명을 ‘단번에’ 증원한다는 점에서도 반발이 거세다.
정부는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서울대학교 연구 등을 토대로 의대 증원을 하지 않으면 오는 2035년에는 의사 1만 명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정부는 의대 교육 기간(6년)과 전공의 수련 기간(4~5년)을 고려할 때 2025년 의대 증원 효과는 빠르면 2031년, 늦으면 2036년 이후에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이 때문에 연간 2000명보다 더 적은 숫자로 증원할 경우 의료 공백기가 길어진다는 것이다.
의료계에서도 의사 증원 자체는 필요하다고 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다만 현재 입학 정원의 65%에 해당하는 인원을 한번에 증원하는 것은 의대 교육 질 저하를 비롯해 시스템적으로 부담이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가까운 미래에 의사 수가 부족할지를 두고도 의견이 엇갈린다.
정부는 국내 인구가 빠르게 고령화하고 있는 데다가, 고령 의사들의 은퇴까지 고려하면 향후 의료 서비스 수요가 의사 공급을 크게 웃돌 것으로 보고 있다.
박민수 보건복지부 2차관은 22일 브리핑에서 “2035년 65세 이상 인구수는 현재보다 70% 늘어나 결과적으로 입원일수는 45%, 외래일수는 13% 증가할 것"이라면서 "2035년 인구가 약 1.6% 감소하더라도 고령인구의 증가로 의료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은 예정된 미래"라고 설명했다.
반면 의사들은 저출생으로 인해 국내 인구 자체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인구당 의사 수가 크게 부족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다.
'의료 불균형' 해결할 수 있나?
정부와 의사들이 모두 공감하는 문제는 지역 및 전공별 ‘의료 불균형’이다.
현재 의료 문제 핵심은 의사들이 수도권에 집중돼 있고 그중에서도 피부과와 성형외과, 안과 등을 선호하면서 내·외과, 소아과, 산부인과 등 필수의료가 약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보건복지부와 국민건강보험공단 등 통계에 따르면 2022년 성형외과 의원 의사 수는 최근 10년간 두 배 가까이 늘었다. 피부과 의사도 40%가량 늘었다.
2024년도 상반기 레지던트(전공의) 모집 결과에서도 성형외과와 피부과는 모집 인원을 훌쩍 넘는 인원이 지원했지만, 소아청소년과(25.9%), 산부인과(67.4%), 응급의학과(79.6%) 등은 정원을 채우지 못했다.
진료과별 선호도에는 소득과 의료사고에 대한 부담감 등이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파악된다.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인력실태조사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안과 의사 평균 연봉은 약 4억5837만원, 피부과는 3억263만원 등으로 의사 평균 연봉(2억3070만원)보다 높았다. 반면 소아청소년과는 약 1억원으로, 진료과 중 10년 전과 비교했을 때 연봉이 유일하게 감소했다.
의사들은 현행 정부안으로는 이러한 현상을 해결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의대 졸업생이 많아지더라도 수도권과 인기과 선호 현상은 여전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지방 의대를 졸업하고 수도권으로 돌아오거나, 필수의료 분야를 전공하더라도 결국에는 피부과, 성형외과 등을 개원하거나 페이닥터로 일하는 이들이 많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일부 의사들은 정부가 국민 안전을 이유로 강경 대응에 나설수록 필수의료 기피 현상이 더욱 악화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반면 정부는 의사 수 증가로 인기과 경쟁이 심화하고, 수가 조정이나 의료사고에 대한 책임 완화 등 별도의 필수의료 지원책이 수반된다면 의료 불균형이 해소될 것으로 기대한다.
또 지방 의대의 지역 인재 선발 비중을 60% 이상으로 높이고 정착 지원을 제공하는 등 지방 의대 출신이 해당 지역에 남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외에도 정부 필수의료 패키지에는 대학병원·종합병원 의사 유출을 막기 위한 건강보험 급여·비급여 항목 ‘혼합진료’ 금지와 비의료인에게도 미용 시술을 허용하는 등의 방안이 포함돼 있으나, 의사들의 주요 소득원을 제한한다는 점에서 반발이 거센 상황이다.
보상은 적절한가?
정부는 의사들의 주요 요구사항인 의료 수가 인상안과 의료 소송 부담 완화안을 내놨지만, 구체성이나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수가란 진료·검사·수술·처치 등 의료서비스에 대해 건강보험공단에서 의료기관에 지급하는 돈을 뜻한다.
정부는 필수의료분야 수가 개선을 위해 10조원 이상을 투입하겠다는 계획이지만, 재원 마련 등과 관련한 구체적인 계획이 없어 실현 가능성에 대해 의문이 제기된다.
또 구체적으로는 소아청소년과의 경우 특성상 입원보다는 단순 진료만 받는 환자 비중이 높은데, 정부가 제안한 수가 개선안은 입원 환자 기준으로 책정돼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에 따르면 국내 소청과 평균 진료비는 약 1만3000원으로 미국이나 일본의 10분의 1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