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보여주신 참 사랑(빌2:5-11)
2023.12.24 크리스마스 이브,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손에 잡고 있고, 마음에 담고 있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아픔은 많아진다. 이런 말이 있다.
‘손이 아픈 것은 잡고 있는 것이 많아서이고, 가슴이 아픈 것은 담고 있는 것이 많아서이고, 어깨가 아픈 것은 지고 있는 것이 많아서이고, 머리가 아픈 것은 생각하는 것이 많아서 이다“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는 온갖 삶의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래야 평안이 온다. 그런데 어디에 이런 것들을 내려놓아야 할까? “주 안에 있는 나에게”라는 찬송에 이런 가사가 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정말 그렇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모든 짐을 내려놓고 풀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위로와 평안을 얻을 수 있다(요14:27). 특정한 사람이나 독사의 꼬리 같은 헛된 것들(우상, 이단, 세상의 방탕한 것들 등) 앞에 내려놓다가 오히려 더 깊은 어둠에 계곡으로 한없이 빠져 들어가고 만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참된 평안은 그냥 값없이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동등 됨을 포기하고 이 땅에 오신 성자 예수님의 권리포기와 십자가라는 값비싼 희생이 있었다. 주님의 권리포기와 희생이 온 인류를 죄악과 절망의 계곡으로 부터서 우리를 이끌어 올리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권리포기 정신과 십자가적인 희생은 참된 제자의 길을 가기 원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신앙의 덕목이다.
편안하면서 존경받는 삶은 없다. 내가 가진 것들을 다 누리면서 존경받기를 원하는 것은 욕심일 뿐이다. 참 사랑은 오직 사랑의 마음으로 자신을 비우고, 심지어 자신이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권리마저도 포기하며 낮아지는 것이다. 이러한 참 사랑의 가장 좋은 모본이 바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다. 성탄절을 하루 앞 둔 오늘(12/24) 하나님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이 품기 원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바로 이것이라고 확신한다.
오늘 본문인 빌립보서 2장에 5절 말씀에 보라.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들이 생활 속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맺을 때, 예수님이 가지셨던 마음(사고방식)을 가질 것을 강조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In your relationships with one another, have the same mindset as Christ Jesus)
그러면서 계속된 되는 6절 이하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나)를 위해 어떤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는지를 설명한다. 그렇기에 여기서 강조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들도 실천해 가기를 힘써야 한다.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 놀랍게도 사도 바울은 우리들이 가장 올바르고 건강한 관계형성을 위해서 반드시 마음에 품고, 실천해야할 예수님의 모습의 출발을 권리포기와 십자가의 희생에서 찾는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누구신지 알 수 있다. 그분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다(6절).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의 동등 됨의 권리를 포기하고 이 땅에 오셨다(“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자기를 낮추시고”). 이것을 보통 성육신(聖肉身, incarnation,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이라고 하고, 이것을 기념하는 날이 바로 성탄절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께서 이처럼 비우고,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는다는 말 앞에 붙어 있는 표현이 하나 있다. 바로 “자기를”이라는 표현이다. 주님은 자기를 비우셨고, 자기를 낮추셨다.
욕심에는 두 종류가 있다. 잘못된 세속적인 욕심과 정당한 욕심이다. 세속적인 잘못된 욕심을 보통 탐심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한 더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세속적인 욕심을 갖고 사람을 대하면 그 관계는 결코 건강할 수 없다. 이에 반해 정당한 욕심이란, 내가 받아야할 당연하고 정당한 권리나 대우를 기대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비우고 낮추신 것은 바로 이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님은 어쩔 수 없이 등 떠밀려서 이 땅에 와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체이심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정당한 권리를 포기하고 스스로 오신 것이다.
그러면 주님은 왜 그렇게 하셨을까? 이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명확하다. 바로 사랑 때문이다(요3:16).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죄악 가운데 죽어가는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래서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요한복음 10장 17-18절에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 10:17-18)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권리포기와 십자가의 희생에서 진짜 참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참 사랑은 자아의 욕심과 욕망으로 가득찬 마음을 비우고 심지어 자신이 주장할 수 있는 권리마저도 포기하면서 스스로 버리고, 낮아지며, 섬기는 것이다. 이것이 성도들이 평생 닮아가야 할 주님의 모습이다.
흔히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사랑타령이나 노래를 하면서, 잘못된 행동이나 감정을 미화한다. 자신의 욕망과 탐욕은 비우지 않으면서, 상대방에게는 비움을 요구한다. 모두가 위장된 사랑이고 위장된 겸손일 뿐이다. 선거를 앞둔 요즘은 그런 모습들이 더 많이 보인다. 이런 모습들은 결코 감동을 주지 못한다.
어떤 경우에는 심지어 성도 임에도 불구하고 이들과 별반 다름이 없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경우도 있다. 재미나 외로움을 핑계대면서 습관적인 도박이나 술이나 방탕한 것들에 인박혀 살면서도 돌이키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성도가 일장춘몽의 물거품 같은 것들을 붙잡고 놓지 않는 것은 감동은 커녕 오히려 마치 독사의 꼬리를 잡고서도 아무 일이 없기를 바라는 것과도 같을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과 삶을 본받아서 나의 자아와 욕심과 모든 짐들 심지어 나의 권리마저도 십자가 밑에 다 내려놓으면, 그 최종 결론은 축복과 회복과 치유와 하나님의 영광이다. 오늘 본문 말씀인 빌립보서 2장 9-11절 말씀이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다함께 믿음으로 읽자.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이 말씀은 역으로 말하면 우리들의 삶 속에서 사람들을 대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권리포기와 희생의 태도를 실천하면, 하나님은 결국 예수님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 앞에 모든 무릎들을 꿇게 하시고, 그를 통해서 예수님을 시인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겠다는 약속이 숨겨져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들이여,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성육신적인 삶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삶과 인간관계 속에서 주님의 참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자. 우리의 모든 짐을 다 십자가 밑에 내려놓자. 독사의 꼬리 같은 탐심과 욕심도 심지어 복음을 위해 정당한 권리까지도 내려놓자. 우리들 자신의 삶의 변화와 가정 복음화와, 지역복음화 그리고 세계복음화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이 성탄절을 하루 앞둔 오늘 이 시간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