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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를 가든 역사는 좀 알아야 한다)
여행과 글의 공통점은 호기심에 있다. 이는 관찰력으로 연결돼 많은 흥밋거리를 유발하는 것이다. 내가 글에 배고프다면 이는 무료하지 않으려는 안간힘이라 할 것이다. 대만에 가기 전 나는 신라면 4봉지가 묶인 세트와 홍삼 캔디와 젤리를 따로 준비했었다. 내 여행길에서 이는 줄곧 따뜻한 온정과 고마움을 대변해왔었다. 이번에는 누가 내게 고마움을 선사할까. 내가 탄 비행기는 차이나 항공, 서비스가 괜찮은 편이고 기내식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버젓이 차이나란 단어를 쓰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중국보다는 먼저 이 말을 쓴 덕분이 아니겠는가 싶다. 아마 이 항공 명을 경매 붙이면 시진핑이 조 단위를 주더라도 사지 않을까. 도착 30분 쯤 전 바다위에 섬이 둥둥 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옆 좌석 대만 친구는 기륭항구를 손으로 가리켰다. 나는 대만해협이 궁금했다. 시진핑이 항공모함을 얼마 전 급파했다는 뉴스를 봤던 터다. 마침내 공항, 도착 쯤 나오는 배경음악, 분명 중국음악인데 알지 못해 감질났다. 음악을 들으면 그들의 취향이나 서정이 바로 느껴진다. 등려군 노래도 좋지만 내가 대만 노래중 제일 졿아하는 노래는 85년도에 대 히트를 쳤다는 最後一夜라는 노래다. 화사한 밤 파티 풍경 속에 이제 떠나야만 하는 안타까움이 그대로 배어있는 곡, 이 한 노래로 나는 그들을 알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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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칠 줄 모르는 춤에 스탭은 엉키고 술 취해 진한 술을 다 마시지 못하네 이 좋은 밤 누가 나를 위해 머물러 줄까?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이며...
화려하게 차려입은 젊은 남녀는 떠나지 못하고 수많은 사람들 속에 휩쓸려 다 볼수가 없네 누가 나의 옛일을 헤아려 줄까?
화려한 장식등 아래 부질없이 근심을 털어놓네 내게도 절절한 사랑에 도취된 적이 있었지 춤추듯 날아 오르는 오색나비처럼
그리곤 서글픈 이별에 아파 했었네 이슬젖은 계단에 쓰러져 흐느꼈지 붉은 등은 머지않아 꺼질테고 술도 깨면 이제 이곳과도 이별해야 하네
노래가 끝나고 사람들이 흩어지는 모습을 고개 돌려 바라보네 아... 마지막 밤이여
最後一夜 作詞:慎芝/Op:常夏 作曲:陳志遠 編曲:陳志遠 踩不完惱人舞步 喝不盡醉人醇酒良夜有誰為我留 耳邊語輕柔 走不完紅男綠女 看不盡人海沉浮往事有誰為我訴 空對宖愁 我也曾陶醉在兩情相悅 像飛舞中的彩蝶我也曾心碎於黯然離別 哭倒在露濕台階
대만 친구는 도착을 하자 자기들은 술을 산다고 하며 먼저가라고 했다. 면세점이 제일 싸다는 그 말을 나는 기억해두기로 했다. 대만 금문 고량주, 중국집에서 엄청 비싸게 받는 고량주다. 내가 봐도 공자 후손이 빚은 공부가주보다 더 맛이 있고 품위가 있다. 공항엔 이 박사 부부가 잘 아는 여자 분이 마중을 나왔다. 과거 파리에 이박사가 OECD에 근무하던 시절, 집식구가 프랑스공부를 하다 친해진 사람인데 여자는 한국 남자는 대만사람으로 현재 남편이 대학교에 교수라고 했다. 예약을 한 밴이 나타났다. 나는 직감했다. 그녀가 라면봉지를 가져갈 사람임을. 나는 그 여자 바로 뒤에 착석을 했는데 그것은 행운이었다. 그녀는 내 갈증을 해소하기에 충분했다. 뭐 그렇게 물어볼 것이 많은 것인지, 그래도 그녀는 정색하지 않고 소상하게 꾸밈없이 알려줬다. 그녀 역시 오랜만에 평소 쓰지 못한 모국어에 빠져 신나게 설명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서로는 주고받은 셈셈 이다. 문답의 주요골자는 다음과 같다. 대만 경제가 안 좋다. 젊은이들이 결혼을 안 한다. 미래가 불안한 것이 지진 때문만은 아니다. 비가 자주 오는 이곳답게 여기 우산 중 빗물이 땅에 안 떨어지는 특이한 우산이 있다. 내일 바자회를 열어 같이 못해 아쉽다. 지금 대만에도 K-POP열풍은 분다. 대만은 이상하게 수산업을 안 키웠다. 그래도 회는 먹을 수 있다. 교수 봉급이 생각보다 작다. 남편은 사회학을 가르친다. 부교수가 넘어야 정년이 보장된다. 대만은 교수 퇴직을 년 수로 계산한다. 말은 맞장구를 쳐줘야 제 맛이다.
그녀의 바자회 이야기에 대해, 우리 한국여자들은 독하고 강하다고 했다. 외국 나가 사는 여자들 특히 외국인과 결혼한 사람들을 보면 파워가 대단해 덩치 큰 남편을 코끼리 다루듯 종교까지도 바꿀 정도로 마구 주물러댄다고 응수를 해줬다. 실제 내가 본 대부분 한국여성들은 리더 격에 충실한 내조를 한다싶었다. 그러자 그녀가 까르르르 웃는다. 아마도 정확히 들어맞은 모양이다. 그녀가 산위 쪽에 산다는 말에 대해, 부자임에 틀림이 없다고 했다. 홍콩은 애초 영국 사람들이 산위를 차지해 중국 사람들은 아예 올라오지도 못하게 한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 아열대성에선 산위가 당연 쾌적하고 그래서 비싸다. 홍콩에 유명한 명물 중 하나가 에스컬레이터가 산위까지 난 것이다. 그녀도 케이불카를 타고 집에 간다고 했다. 그렇게 그녀와 한참을 떠드는 중에 圓山大飯店 / 위엔샨따판띠엔(Grand Hotel)을 스쳐 지나갔다. 과거 내가 대만에 왔을 때는 중국의 궁궐모양을 재현해 만들어진 호텔 외관의 크기와 모습으로 단연 돋보여 한눈에 알아본 호텔인데 지금은 다소곳한 표정인 게 그 만 큼 주변도 많이 번창했다는 소리다. 거의 한 시간 지나 이제는 시내 한복판이다.
과거 타이베이에 지진이 났을 때 이상하게 옛 건물이 즐비한 서문 쪽 건물들은 안 무너지고 무사하다고 했다. 집은 오래돼 허름해 보여도 안에 들어가 보면 놀랄 정도로 화려하다고도 했다. 나는 그 말에 무조건 동감한다. 그들은 조상대대로 내려 온 금은보화가 집안에 꽁꽁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유럽은 귀족이라고 넓은 정원에 호화로운 대저택을 뽐냈지만 그들은 그런 위세로는 황제로부터 ‘먹을 쳐라 ’가 하사 될 수도 있어서 되도록 숨기고 감추며 내실을 기했다. 그 밖에도 여자를 중시하는 풍속 등등 아무튼 그녀 덕분에 재밌게 경청했고 즐거웠다. 마치 대만을 바로 알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우리는 북문 역 바로 앞에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그들은 5개 문이 있다고 들었다. 그곳이 바로 구시가지이기도 한 셈이다. 그들은 지하철을 6개 갖고 있는데 노선도를 보면 대충 감이 잡힌다. 이는 북경도 오사카도 어디든 마찬가지다. 그들이 왜 언제쯤 문을 지었을까. 이틀 후 24시간 운영한다는 까르푸 가는 길에 본 기념물에서 그 의문이 풀렸다. 나는 조선 초쯤 해당이 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1866년 문을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돌아와 그들 역사를 들춰 보았다.
이미 7세기에 중국인들은 타이완과 말레이폴리네시아인의 후손인 원주민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기는 했지만, 중국인들이 이 섬에 정착한 것은 17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1590년 포르투갈인이 이곳을 처음으로 방문해 '아름다운 섬'이란 뜻의 일하 포르모사(Ilha Formosa)라고 이름지었지만 정착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1626년 이전에 네덜란드인과 스페인인들이 섬의 서쪽 해안을 따라 요새화된 상업 지구를 세웠다. 뭐 그 점에 있어서는 베트남 다낭과 거의 유사하다. 그 당시 왜 그들은 이곳까지 찾아온 것일까. 바로 향신료 때문이다. 당시 유럽귀족은 향신료로 부자 자리위치 매김을 했다. 다들 그래서 혈안이 돼 찾은 게 후추 같은 향신료다. 그 무렵은 콜롬버스의 후예로서 무적함대를 자랑하는 독무대나 다름이 없었다.
대만도 아마 그랬던 모양이다. 스페인은 정착촌을 장악하고는 이 섬의 지배권을 얻었다. 그뒤 1616년 네덜란드인들은 멸망한 명나라(1368∼1644)의 관리들이 대규모로 이 섬에 들어옴에 따라 쫓겨났다고 한다. 나는 이대목이 아주 흥미롭다. 중국은 한나라 이후 많은 나라의 흥망성쇠가 거듭됐다. 그들이 패주해 도주한 곳이 바로 지금의 평양쪽이다. 낙랑공주라는 고구려 때 이야기는 바로 그들 즉 중국본토에서 도망쳐 도시국가 형태로 지은 나라를 말하는 것으로(이는 연세대 어모교수의 주장이기도 하다.) 당시는 고구려 본토가 평양이 아니고 지금의 요양 그러니까 요동 땅이 바로 그들의 본거지로 평양성은 요동을 말하는 것이다. 일제 때 반도사관이라 하여 한반도에 꾸역꾸역 모든 것을 한정시키려는 만행으로 아니 이병도 학풍으로 말미암아 고구려 수도는 늘 평양인 양 둔갑을 했었을 뿐 역사적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이는 이제 재야사학자를 넘어서 지금은 학계에서도 수용하는 태세다. 대만 오기 며칠 전 모 사학자가 발표한 것을 나는 뉴스로 보았다.
아무튼 이들 중국인의 대거 유입으로 인해 섬의 주민은 약 20만 명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1683년 청나라(1644∼1911/12)의 지배민족인 만주족이 타이완에 대한 통치권을 장악하고는 타이완을 푸젠 성에 병합시켰다. 1796년 만주족들이 섬의 동쪽 해안에 정착하기 시작했으며 1842년까지 주민은 약 250만 명으로 증가했고, 중국으로 설탕과 쌀을 주로 수출했다. 1875년에 이르러 타이베이는 타이완 북부의 수도가 되었으며, 1886년에는 타이완이 중국의 1개성이 되었다. 1894년 타이베이는 드디어 성도가 되었다. 그런데 그 다음해에 타이완은 청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에 할양되었다. 대만을 가보시면 알겠지만 집이나 과자 상점 등등이 일본풍이 나는 것은 다 그런 연유에서다.
일본 치하에서 타이완은 일본에 쌀과 설탕을 공급하는 주요공급처였다. 1930년대에 일본의 타이완 정책은 값싼 수력전기 에너지에 바탕을 둔 공업 발전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1940년 섬의 인구는 587만 명으로 증가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타이완은 중국에 되돌려졌다. 1945년 당시에는 국민당이 이곳을 통치했다. 1949년 본토에서 공산당이 승리하자 장제스[蔣介石] 장군이 이끄는 국민정부와 그 지지자들은 타이완으로 피해왔다. 1954년 국민정부와 미국은 상호방위조약에 서명했으며, 타이완은 거의 30년간 미국으로부터 군사·경제 원조를 받았다. 이 기간 동안 타이완은 극적인 경제발전을 이루기 위해 미국의 원조와 자유시장정책을 활용했다. 그런데 의문이 생긴다. 분명 내가 본 성의 설치년도는 1866년인데 와서 본 어느 글에는 1879∼1882년의 공사 끝에 5개 성문을 가진 성벽이 완성되었으며 당초 타이베이성(城) 안은 대부분이 논이었으나 차차 점포가 세워지고 시가지가 이루어져 상업이 활발해지면서 청네이[城內]·완화·다다오청 등 세 지구를 갖춘 도시가 되었다고 적혀 있다.
분명 성내가 시가지가 형성이 된 것은 지금의 구시가지로 맞는데 성을 세운 시점에 차이가 있다. 뭐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그들 기념물에서 본 1866년이 맞는다면 이를 추정해볼 수있다. 중국본토는 당시 제2차 아편 전쟁(第二次阿片戰爭: 1856년부터 1860년까지 4년 동안 벌어진 전쟁)으로 영국·프랑스 연합군에게 쑥대밭이 된 상태였다. 당연 위기를 느낀 사람들이 성벽을 쌓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그 성벽의 흔적은 지금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 폭격을 맞은 타이베이도 아니고 오래 돼 자연 망실된 것도 아닐 텐데 어인 일일까. 이 또한 기록에 나와 있다.
1895년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난 뒤에는 성벽이 제거되고, 그 자리에 너비 40m의 3선도로(三線道路:지금의 中山南路·中華路·中正路·愛國西路)가 건설되었다고 한다. 서문(西門) 이외의 동문(東門:景福門)·남문(南門:麗正門)·소남문(小南門:重熙門)·북문(北門:承思門)의 4개 성문은 지금도 남아 있지만 성벽 흔적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없앴을까. 이미 점령한 땅, 그들은 수탈이 주 목적이기 때문에 사통팔달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무렵 성문을 잇는 도로로 둘러싸인 청네이구[城內區]에는 총통부(總統府)·타이완 은행·군사령부(軍司令部)·박물관·방송국 등의 중요 시설이 집중되어 있어 타이베이의 중추부를 이루도록 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그 기념물에서는 철로가 깔리고 기차가 들어온 시기를 집중해 설명해 놓았는데 이는 일본이 우리에게 수탈을 하기위해 그렇게 한 것처럼 경우가 똑같다 싶다. 1904년, 그들은 대만 산천을 마구 파헤치기 시작한 것이다. 요즘 뜨는 그들의 풍선 날리며 뜨는 탄광지구가 노약질의 현장임을 알아둘 필요는 있다.
또 드는 의문, 이 나라 곳곳에 일본풍이 남은 것은 그런대로 인정하겠는데 50년간 일본의 식민지로서 억울하기 짝이 없을 텐 데 그럼에도 대만사람들은 일본에 대해 호의적이라고들 한다. 오히려 장개석 이후 미국의 원조를 받고 번영도 했으니 미국이 구세주일 것인데 참 이상한 백성들이다. 내 나름의 판단은 이렇다. 이에는 한국전쟁이 있다. 한국전쟁으로 돈을 번 것은 일본이다. 그들은 하청업체로 말 잘 듣고 일본식 문화를 잘 이해하는 대만을 하청업체로 선정을 해 중소기업을 키웠다. 도시바 미쯔비시 쏘니 히다찌 등등이라면 깜박 죽는 때 그 배경에는 대만도 한 몫 한 거다. 그때는 대만이 우리보다 훨씬 잘 살았다. 미국은 윈조를 받기는 받았지만 노하우에 대해 숨기는 게 많았고 일 창출은 없었다.
더욱이 닉슨이 등소평을 만나 1970년대 초반 탁구를 치고 난 후부터는 양상이 크게 달라졌다. 오히려 얄미운 존재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아무튼 일본풍이 밴 대만에서는 원래 쌀하고 땅콩이 잘 자랐는데 거기에 일본 소 화우가 껴들어가 밥은 비교적 찰지고 땅콩 아이스크림이라든지 소고기는 제법 알아준다. 나는 그곳에서 우육면을 사올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불가능함을 나중 알았다. 그들은 소고기 한 조각을 아예 라면에 껴 주는데 바로 그것이 검역 법에 걸리는 것이다. 우리는 여장을 풀고 지하철을 타고 101층 건물로 향했다. 그 길 또한 그녀가 맡아서 해주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그들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들만의 풍경 과연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