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만순 13분 ·
불탄 청주형무소 복원
뭔가 싸한 냄새가 났다. ‘무슨 냄새지’라는 생각은 잠시, ‘이러다 불에 타죽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동료들과 함께 구사일생으로 감방을 뛰쳐나온 날은 1950년 9월 24일 경이었다. 추석을 이틀 앞둔 날이었다. 청주형무소가 불타던 날의 상황에 대한 문철근(1928년생)의 증언이다.
문철근은 해방 후 박기운(당시 태극청년단 단장)으로부터 치안대 활동을 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지금 누군가 희생이 되더라도 시민들을 보호해야 한다. 그러러면 깡패를 제압해야 한다. 그런데 친구들도 호응을 하지 않는다. 동지가 함께 해줬으면 한다”
박기운의 제안에 문철근은 흔쾌히 동의했다. 박기운은 일본 와세다대 중퇴생으로 초대, 3대 국회의원을 지낸 인물이다. 청주경찰서에서 99식, 38식 총을 나눠 받은 치안대원들은 박기운으로부터 사격법을 배우고 치안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현실은 총보다 주먹이 먼저였다. 푸른색 하의에 붉은색 상의의 단복을 입은 의열단(단장: 김팽조)원 이창구에게 죽도록 맞아 신명의원에 입원했다. 병원에 입원하면서까지 치안대 활동을 열심히 한 것이 후일 반동으로 몰릴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6.25가 터진 후 인민군이 청주를 점령하던 인공시절 문철근은 정치보위부로 연행되었다. 해방 직후 치안대 활동을 한 것이 반동으로 규정된 것이다. 더군다나 초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박기운과 활동을 한 것도 또 하나의 증거물(?) 이었다.
청주형무소에 구금되었던 우익인사, 경찰 가족, 형무관(간수) 가족들은 UN군이 진주하기 직전인 1950년 9월 24일~25일까지 당산(현재 명장사 뒷산)과 형무소 안에서 죽임을 당했다. 당산에서는 주로 쇠망치에 맞아 죽었고, 형무소 내에서는 불타 죽었다. 형무소가 불타던 날 문철근과 동료 약 200명이 옥문을 부수고 탈출했다.
이념의 과잉시대가 빚어낸 역사의 비극이었다. 청주형무소는 6.25를 거치면서 상당수 건물이 불타 버렸다. 청주형무소는 이후 건물을 복원했다.
당산에서 학살된 우익인사들의 사진은 미국립문서보관청(NARA)에서 나온 자료이고, 복원된 청주형무소 사진은 법무연수원에서 나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