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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8. 묵상글 들 ( 사순 3주 월요일 - 생각에서 믿음으로.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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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8.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순 3주 월요일 - 생각에서 믿음으로
사순 3주 월요일-2011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인도를 방문하였을 때 저는 여러 가지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보편적인 생각이나 정서를 뛰어넘는 것들 때문이었지요.
그중 하나가 강가 강(갠지스 강)에 갔을 때입니다.
인도 사람들은 이 강을 성스러운 강이라고 생각하기에
죽기 전에 꼭 한 번 이 강을 성지순례 하는 것이 소원입니다.
저도 마침 그곳 바라나시 대학에 볼 일이 있어서 갔다가
힌두 사원과 강가 강을 가봤습니다.
역시 수많은 순례자로 붐볐는데
여기저기서 시신을 화장하고 있는 가운데
순례자들은 강가 강에 들어가 몸을 씻고 심지어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물이 얼마나 더러운지 모릅니다.
돈이 많으면 장작을 많이 사서 시신을 완전히 태워 강에 뿌리지만
돈 없는 사람은 조금 태우다 시신을 버리고
아주 가난한 사람은 그냥 시신을 강에 버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가 배를 빌려 강 한 가운데로 저어가서 보니
사람 시신이 강을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인도 사람들은 그 물에 몸을 씻고 그 물을 성수라며 먹는 것입니다.
저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저 물로 씻고 피부병이 생기지 않을까,
저 물을 마시고 각가지 병이 생기기나 않을까 걱정을 하는데
그들은 깨끗함과 더러움의 인간적인 구별을
성스런 강이라는 믿음 하나로 간단히 넘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깨달은 것이 믿음과 초월의 관계입니다.
하느님을 믿을 때 우린 인간적 어리석은 생각들을 초월케 됩니다.
우리는 나아만처럼 인간의 손이 치유한다고 생각합니다.
병을 잘 고친다고 소문이 난 사람이 고치면 나을 거라고 생각하고,
거기다가 손까지 정성껏 얹어주면 더 잘 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더러운 물로 씻으면 병이 나고
깨끗한 물로 씻으면 병이 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상식적으로 맞는 말이고 과학적으로는 더더욱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꼭 그런 것이 아니고
영성적으로 보면 더더욱 그렇지 않습니다.
고쳐 주시고 씻어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시기에
사람의 정성과 손의 재주가 중요하지 않고
물의 깨끗함과 더러움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고치신다는 것을 믿고,
물이 아니라 성령께서 씻어주신다는 것을 믿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무엇으로 고치고 씻어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을 때
우리는 인간의 생각과 걱정과 의지 따위를 가볍게 초월할 수 있고
우리에게는 고쳐짐과 씻어짐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나아만은 생각에서 믿음으로 바뀐 사람입니다.
자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사람이었는데
믿음으로 생각을 벗어나고 하느님께로 올라가고 넘어갔습니다.
엘리사가 한 것은 다만 그 생각을 깬 것입니다.
이 사순절,
우리도 생각에서 믿음으로 넘어가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수많은 생각들, 고정관념들을 깨야겠습니다.
이것이 회개의 또 다른 한 측면일 듯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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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8. 사순 제3주간 월요일 /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같은 학교에서 십 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공부하고 생활한 친구들이 있습니다. 젊음의 열정을 함께 불태웠고 서로의 꿈을 응원해 주던 친구들입니다. 시간이 흘러 지금은 각자의 자리에서 생활합니다. 화려한 대도시에서 바쁘게 생활하는 친구도 있고, 한적하고 조용하지만 인심 좋고 가족 같은 공동체에서 생활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친구도 있고, 기관에서 좀 더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그 친구들과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저마다 삶의 자리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그들의 삶이 부러울까요? 그냥 너무 행복해서 투정하는 소리 같이 들립니다. ‘나는 왜 여기에 있을까? 내가 그들보다 못난 것이 무엇일까?’ 왠지 모를 자괴감이 듭니다. 내 자리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늘어납니다. 나를 이곳에 보낸 사람이 원망스럽습니다.
누군가와 비교하기 시작하면 불평과 불만, 원망과 짜증이 늘어납니다. 그래서 시기와 질투라는 악의 씨앗이 마음 한가운데 자리를 잡습니다. 그 악의 씨앗은 우리의 눈과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아무것도 볼 수 없도록 주위 사람들의 고마움을 가려 버립니다. 내가 받아 누리고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것을 잊게 만들어 버립니다.
오늘 복음의 나자렛 사람들 마음에도 악마의 씨앗이 자리를 잡고 싹을 틔웁니다. 예수님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삶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늘어났고, 그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이제 그들은 악마에게 마음을 빼앗겨 예수님뿐 아니라 자신들까지도 죽음의 벼랑 끝으로 내몰아 버립니다. 어둠이 그들을 뒤덮어 버립니다.
악은 어둠처럼 조용히 찾아옵니다. 그 세력은 빠르게 마음을 잠식해 갑니다. 어둠을 없애는 방법은 빛을 밝히는 것뿐입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그리스도의 삶과 가치를 고민하고 묵상할 때 우리는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시기심 때문에 악에게 마음의 자리를 내어 주지 마십시오.
- 최종훈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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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8.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하느님의 선택, 기준과 목표를 제시함
하느님께서는 생명을 지어주신 창조주이시며 또한 생명을 완성하실 심판주이십니다.
이 창조 신앙이 기준이며 심판 신앙이 목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기준과 목표를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셨으며,
몸소 그 기준에 따라 목표를 성취하시는 삶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사물을 헤아릴 때 쓰는 숫자의 기준은 0과 1이며 그 완성은 10인 것과 같고,
원(圓)이라는 도형을 그려서 완성하자면 반드시 그 중심에 점을 찍고 그 점을 기준으로 같은 길이로 둘레를 그려야 하는
이치와도 같습니다. 이러한 이치를 한 번만 가르쳐주면 우리는 얼마든지 필요한 대로 필요한 경우에 응용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엘리야 시대에 가뭄이 심하게 들어 모두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을 때
시돈의 과부 사렙타에게 엘리야를 보내시어 음식이 떨어지지 않고 죽은 아들이 살아나는 기적을
보여주심으로써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표징을 보여 주셨고, 엘리사 시대에는 나병에 걸린
시리아 장군 나아만을 이스라엘에 보내시어 엘리사로 하여금 요르단 강물로 그를 낫게 해 주시는
기적을 보여주심으로써 또한 그 시대 사람들에게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두 표징의 공통점은 하느님의 자비와 말씀에 의탁하면,
굶주림이든 나병이든 나을 수 있다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런데 엘리야 시대의 시돈 사람들이나 엘리사 시대의 시리아 사람들도
회개하지 않았고 하느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카파르나움을 비롯한 갈릴래아 지방 여러 고을에서 기적을
일으키시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으며, 당신께서 자라나신 고향 나자렛에서도 마찬가지로
복음을 선포하셨는데 고향 사람들은 카파르나움에서 보여준 기적을
또 다시 자신들의 눈 앞에서 보여달라고 억지를 부리며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회개하거나 믿기는커녕 예수님을 벼랑에까지 끌고가서 떨어뜨려 죽이려고까지 하는 적개심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익히 보아온 예수님께서 설사 기적을 일으키셨다고 해도
그분을 메시아로 인정하는 것이 고까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예수님께서는 엘리야 시대와 엘리사 시대에 있었던 옛 일을 상기시키며
복음선포를 포기하고 물러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그 어떠한 기적도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었고,
설사 그네들의 요구대로 기적을 그들 눈앞에서 일으킨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듯 사납고 살벌해진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무사히 빠져나오셨습니다.
그들의 적개심에 굴복하는 것은 결코 짊어질만한 십자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옷자락에도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이 기적 같은 탈출이 그분의 공생활 내내 사람들의 불신과 냉소
그리고 무관심에 부딪치실 때마다 일어났습니다(요한 7,30.44; 8,59; 10,31).
하지만 진정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사람들의 믿음이었습니다.
그것은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는 그분의 신적인 권능으로도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을 때 목이 말라 물을 청하신 그분은,
정작 그 여인의 믿음에 목마르신 것이었으며 따라서 그 영적인 갈증을 해소하시려고
믿음의 물을 청하신 것이었고(요한 4,7), 그 믿음이야말로 그분이 배고프지 않을 수 있는
‘양식’(요한 4,32)이었는데, 제자들은 이 사실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분이 십자가 상에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목 마르다”(요한 19,28) 하고 말씀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믿으면 결코 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처럼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물을 마시면 우리는 다시는 갈증에 시달리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제 영혼이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 하나이다.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오리이까?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그리나이다”(시편 42,2-3. 화답송). 그래서 우리는,
“주님 없이는 교회가 온전히 서 있을 수 없사오니 언제나 주님의 은총으로 교회를 이끄시고
무한하신 자비로 깨끗하게 하시어 저희를 보호하소서”(본기도) 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눈치를 챈 제자들이 스승이신 예수님께,
“주님, 저희의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루카 17,5) 하고 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과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은
그분이 우리 삶의 기준이시며 또한 완성이심을 깨닫게 해 줍니다.
이 깨달음과 믿음을 위해서 이미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 자녀로 선택해 주셨습니다.
비록 우리 눈앞에서 사렙타 과부에게 일어난 일이 벌어지지 않아도,
또한 시리아 장군 나아만 같은 나병환자가 깨끗하게 낫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도,
우리는 그 일들이 성경에 기록되고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만으로도 우리 역시 성령을
받을 수 있도록 선택되었으며 우리의 믿음을 하느님께서 바라신다는 것을 얼마든지 믿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선택은 삶의 기준과 완성을 표징으로 보여주신 것으로 우리에게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실질적으로 생명을 받아 태어난 이들 모두가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무상으로
그것도 필요한 때에 필요한 만큼 받고 있는 현실이 그 근거입니다.
거저 주어진 이 은총을 알아보는 눈이 그래서 귀합니다.
기준이 모호하고 목표가 없는 삶은 겉모습이 아무리 그럴듯해도 좋은 삶이라 할 수 없습니다.
정확한 기준과 확실한 목표, 그리고 믿을 만한 모범을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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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8. 사순 제3주간 월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4,24-30: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예수님은 당신이 자라나신 고향과도 같은 나자렛을 당신의 공생활 초기에 방문하신다. 나자렛을 위하여 방문하셨지만 나자렛 사람들의 태도는 달랐다. 그들을 회당에서 가르치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24절) 하시면서 하느님 앞에 회개하라고 하신다. 나자렛 사람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믿음으로 대하지도 않았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엘리야가 찾아간 사렙타 마을의 과부 이야기와 엘리사 시대에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을 고쳐주신 이야기(24-27절) 하시면서, 기적을 팔레스티나 밖에서 행하신 것은 바로 당신의 백성들이 믿음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사실 사렙타 마을의 그 과부(1열왕 17-18장)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2열왕 5장)이 얼마나 큰 신앙을 입증해 보여주었나를 알 수 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의 영역을 넓혀주고 확장한다. 예수님을 자신의 편의와 이익을 위해서만 잡아두려고 하는 것은, 즉 하느님을 나의 편의와 이익만을 위해서 이용하려고만 한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계획과는 거리가 먼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더는 새로운 길로 나아가지 못하고 하느님께서 제시하시는 새로운 일들도 받아들일 마음의 문을 열 능력도 없게 된다. 그런 마음에는 하느님께서 들어가실 자리가 없다.
바로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께서 선포하신 새로운 것들에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에게 적개심을 갖게 되었고 그분을 배척하고 마침내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이 불편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선 영원한 예언자이신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는 어떤가? 그분은 어떤 면에서 ‘불편한’ 분이시다. 이 불편한 분의 말씀에 부응하여 우리 자신을 변모시켜 나가고자 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자렛 사람들과 같이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더라도 그분에게 어떤 제약을 가하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결국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산벼랑으로 예수를 끌고 가 그곳에서 떨어뜨려 죽이려고 한다. 사람이 악하다는 것이 여기서도 드러나고 있다. 거부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곧 박해로, 죽음에로까지 가게 하는 인간의 잔인성이 보이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 안에도 어떤 면에서 이러한 나자렛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날 수도 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면서도,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선지식으로, 혹은 선입견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못하고 만다면, 그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주님을 산벼랑으로 밀어내어 죽이려고 하지나 않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항상 주님의 자녀로서 어떠한 판단을 갖지 않고, 이웃에게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실천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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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8. 사순 제3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첫발이 중요하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가득 차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전해 주시는 복음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어떤 말씀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듣고 싶은 만큼 듣고, 보고 싶은 만큼만 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은 나자렛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그러한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나를 비추어보기보다는 나의 잣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내 입맛에 맞게 선택하고 맞지 않으면 흘려버립니다.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진리이고 능력이 넘치지만, 그 능력을 간과하고 사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실 하느님에 대한 알량한 지식과 편견이 그분과의 만남을 가로막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안다는 것이 장애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겸손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부드러운 마음을 달라고 청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돌같이 강한 마음을 살과 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시길 기원합니다.
회당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무지를 일깨워 주실 때 오히려 화를 내고,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자기들의 기득권과 자존심을 지키려 취한 방법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기득권을 포기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면 더 큰 존경과 권위가 살아날 것인데 눈앞의 이익을 위해 악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니 첫발이 중요합니다. 선을 택할 수 있는 첫발이 그의 미래를 열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든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루카4,30). 그야말로 정면 돌파를 하신 것입니다. 결코 어둠이 빛을 이길 수는 없는 법입니다(요한1,5-9). 그런 확신으로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이룩하신 위대한 업적의 증인들은 고향 사람들이 아니라 이방인들이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현실과 타협하고 싶은 충동을 받습니다. 그리하면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나만 바보처럼 손해를 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적당히 눈 감으면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의심과 배척,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넘어지시고 또 일어서시는 십자가 길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 대한 사랑을 일깨웁니다. 진정 “사랑은 크면 클수록 행동치 않을 수 없고, 진실될수록 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박병해 신부).
예언자도 예수님께서도 미움과 배척을 받으셨으나 그분의 말씀은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말씀에 순명할 수 있는 은혜를 청합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55,10-11). 참 사랑은 이랫다, 저랫다하지 않습니다. 영원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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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8.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님.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24)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예언자’로 자처하시면서, 예언자가 자기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배척하고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그들은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루카 4,29)
이는 예수님의 전 생애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받으실 배척을 예고해줍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성문 밖으로 내몰리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이 사실은 이스라엘 밖으로 당신 구원이 퍼져나가게 될 것을 예시해줍니다. 곧 완고한 이스라엘 대신 장차 당신을 맞아들이게 될 다른 민족들의 교회를 미리 가리켜줍니다.
그러나 그분을 죽이려는 그들의 음모는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루카 4,30)
이는 당신이 수난을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당신이 고난을 받으실 때가 아직 오지 않은 까닭입니다. 때가 되면, 당신께서는 수난을 스스로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강제로 끌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몸소 당신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실로 당신은 원하시면 붙잡히시고, 나무에 달리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덕 위 벼랑에까지 그분을 떨어뜨리려 내몰아갔지만, 그들 한가운데를 유유히 가로질러 가시는 그분을 그 누구도 어찌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직 수난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완고하여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거역하였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1사무 15,23)
그러기에, 우리는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고집할 때,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자신의 피조물인 자신의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완고함이야말로 불신의 씨요, 믿음이야말로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입니다. 그러니, 오늘 <말씀>은 완고함과 고집으로 형제를 불신하고,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를 믿음에로의 초대입니다.
주님! 오늘 제가 결코 당신을 배척하지 않게 하소서!
저에게서 결코 당신을 배척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제 형제를 배척하는 바람에 당신을 배척해버리는 일이 없게 하소서!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30)
주님!
원하시어 붙잡히시고 원하시어 빠져나가신 당신께서는
원하시어 고난을 받으시고 원하시어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벼랑에 내몰려도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가셔야 할 길을
유유히 가시는 당신을 따라 유유히 걷게 하소서.
당신이 원하시는 바를 저도 원하게 하시고,
당신이 원하시면 저도 따라 걷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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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8. 사순 제3주간 월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 30)
비난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시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선입견이
만들어
놓은 아픈
우리의
현실이다.
지나친
과신은
언제나
금물이다.
나의 시각과
관점이 다
옳은 것은
아니다.
선입견은
더더욱
소중한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드는
걸림돌이 된다.
우리를
겸손으로
초대하시며
새 길을 여시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진실을 가리는
선입견의
꺼풀을
벗겨내신다.
남의 삶에
소금을 뿌리는
삶이 아닌
축복하는
기도의 삶이
되게한다.
선입견은
또다른
폭력이다.
구원의 역사는
편견이
만들어가는
역사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이
만들어가는
가능성의
역사이다.
중요한 것은
출신배경이
아닌 건강한
삶의 방식이다.
너무나 많은
비판과 비난
험담과 왜곡의
피곤한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사순시기는
과감하게
삶의 방식을
바꾸는
시간이다.
십자가의
겉모습이
아닌
십자가의
마음을
만나는 것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는
선입견을
가로질러
복음이 필요한
이들을 향해
떠나가신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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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8.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잔 루이즈 칼망(Jeanne Louise Calment)은 1875년 2월 21일에 태어나 122세였던 1997년 8월 4일에 사망했습니다. 장수하셨다는 것을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녀의 장수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녀는 85세부터 펜싱을 시작했고, 110세까지 자전거를 탔다고 합니다. 이렇게 운동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그녀는 21세부터 117세까지 흡연을 했다는 것입니다. 담배가 몸에 아주 안 좋다고 하지만, 그녀는 100년 가까이 담배를 피우면서도 영화배우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부분에서 아주 열정적으로 사셨습니다. 단순히 오래만 산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 중 최고령 생존자였던 리처드 오버틴은 112세까지 사셨습니다. 그에게 장수비결을 묻자, 담배(하루 10개피)와 위스키 그리고 커피(설탕 세 스푼을 넣은 커피)를 말했습니다. 모두 건강하고는 거리가 있는 조건입니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음을 깨닫습니다. 따라서 미래에 대해서 미리 단정하는 삶이 아닌, 지금 이 순간을 열정적으로 그리고 힘차게 살아가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들이 거룩한 예언자나 아주 비범한 인물에게서 이루어지리라고 믿었습니다. 이를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 기준에 예수님을 놓고 보니,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목수인 요셉의 아들로 어렸을 때부터 쭉 봐 왔지만 그렇게 특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그릇된 확신을 깨버리십니다. 엘리야가 사렙타 과부에게만 갔고, 엘리사가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고쳐 주셨다고 하십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이라는 이유만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맞아들이는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자기 생각에 갇혀서는 주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습니다. 세상의 관습에 얽매여서는 주님이 옆에 계심에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주님을 거부하게 됩니다.
열린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일은 늘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열린 마음을 갖고 열정적으로 지금을 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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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서 시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시도하지 않아서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다(토니 로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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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
불행한 사람들은 ‘기적’ 같은 일을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행복한 사람들은 ‘당연’한 일상을 ‘기적’이라 여깁니다.
이 삶의 태도 하나가 행, 불행을 나눕니다.
어느 책에서 본 구절입니다. 태도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갖추느냐가 이렇게 중요한데도 자신의 태도를 바꾸기보다는 ‘기적’ 같은 일만을 요구할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행복해하지 못하고, 불행의 길만을 쫓았습니다.
이런 바른 태도를 갖추려면 우선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를 실천해야지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정하는 말, 함께하는 시간, 선물, 봉사, 육체적 접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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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8. 사순 제3주간 월요일. <나자렛 사람들>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루카 4,24ㄴ-27).”
1) 여기서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모르던 이방인들은 나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데, 하느님을 믿는다는
너희는 왜 나의 복음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느냐?”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으로 가신 것은 환영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신에 대한 편견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 사람들을 꾸짖으신 것은,
환영받지 못한 것이 서운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구원의 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입장에서는 나자렛 사람들도 ‘잃은 양들’이었는데,
그들은 목자이신 예수님을 거부했고, 그들 스스로 목자를 등지고
‘떠나버린 양들’이 되었습니다.
2) 예수님께서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을 언급하신 것은,
“하느님의 은총은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 민족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내린다.”, 또 “은총은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받게 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시는데도 자기들이 받으려고 하지 않아서
못 받고 있다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군중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는 말은 아예 혼잣말로라도 꺼내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루카 3,8).”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회개하면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만이 구원받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후손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라는 말은,
아브라함의 후손답게 살지 않는다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은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들만큼의 가치도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 자체가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조상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의 유산은 분명히 중요하고 고귀합니다.
그러나 회개하지도 않고, 신앙생활도 하지 않는 것은,
자기가 물려받은 신앙의 유산을 헛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이 됩니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28-30).”
1) 나자렛 사람들은 왜 화가 났을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방인들은 구원받지 못할 자들, 즉 저주받은 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이스라엘로 귀화해야 하고,
유대교로 개종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을 언급하시면서
“하느님의 은총은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 민족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내린다.”고 말씀하시자, 이 말씀을 ‘하느님을 모독하는 발언’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화를 내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들은 왜 예수님의 말씀을 ‘하느님을 모독하는 발언’이라고 생각했을까?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만 특별히 선택하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예수님 말씀을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부정하는 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만 선택하셨을까?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특별히 선택하셨다는 생각은 맞습니다(창세 12,1).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만 선택하셨다는 생각은 틀린 생각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세상의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12,3).”
나자렛 사람들은 자기들이 성경을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2)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너희는 이방인들만도 못한 자들이다.”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차렸고,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고,
그래서 화가 났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은총이 왜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에게만
내렸는지를 먼저 생각했어야 합니다.
그 두 사람의 이야기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은총이 내린 일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그 두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자격도 없는
이방인들일 뿐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신 하느님을 모독하는 생각입니다.
하느님께서 분별없는 일을 하셨다고 마음대로 판단하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다른 사람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것을 볼 때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느님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이해가 안 된다고 투덜거리기도 하고,
그것은 겉으로만 은총으로 보일 뿐이고 실제로는 은총이 아닐 것이라고
부정하기도 합니다.
은총을 받은 사람을 깎아내리면서 비방하거나 중상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잘못된 성경 지식, 오만한 자존심, 다른 사람들에 대한 시기, 질투 등은
신앙생활에서 대단히 위험한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은 그 자체로 죄가 되는 일이기 때문이고,
또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분별력을 잃게 만들고,
이성보다는 감정에 사로잡히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도 회개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회개는 자기 자신의 상태에 대한 냉철한 인식과 반성에서부터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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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8.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에서 교포사목으로 오신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코로나19의 여파로 10개월 정도 늦게 미국에 도착했습니다. 조금 먼저 온 선배로서 환영하는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영화대사 중에 ‘살아있네’라는 말이 기억납니다. 신부님은 눈빛이 살아 있었습니다. 마치 물을 만나 물고기 같았습니다. 거침이 없었고, 걱정도 없었습니다. 혼자서 요리도 잘 하고, 본당을 소개하면서 앞으로의 계획도 이야기하였습니다. 신부님과 대화를 하면서 뿌듯하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신부님은 예전에 호주에서 5년 동안 현지인들을 위한 사목을 하였다고 합니다. 영어에 어려움이 없었고, 외국 생활에서의 적응에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예전에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준비된 교포사목 신부님’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부님과 신부님께서 함께 하실 공동체를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저도 16년 전에 캐나다에서 3년 지냈었습니다. 그 경험이 미국에서의 생활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캐나다의 제도와 문화는 미국과 많이 닮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교포사목 신부님들은 준비가 덜 되었어도 주교님의 인사이동에 따라서 외국으로 떠나게 됩니다. 파리 외방선교회 신부님들도 조선에 대한 지식이 없었지만 먼 길을 기꺼이 떠나올 수 있었습니다. 외모가 달랐고, 언어가 달랐지만 신부님들은 열정적으로 사목하였고, 순교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모든 것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비록 말이 서툴러도, 문화의 차이가 있어도, 음식이 맞지 않아도 대부분의 교포사목 신부님들은 잘 적응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파리외방 전교회 신부님들이 그랬듯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맡기는 것입니다. 토비야가 맡겨진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천사 라파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협조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겸손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경청하면 엉킨 매듭이 하나둘 풀리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늘 ‘겸손’을 강조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직접 씻어 주셨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십자가의 무게를 견길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갈등과 분란은 ‘교만’에서 시작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을 믿지 않았습니다.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겉모습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선행을 베풀었던 사렙타의 과부는 기근 중에서도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겸손했던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나병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사순시기입니다. 신앙의 길도 멀고 험난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하루 감사드리며, 기뻐하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그 길을 충실하게 걷다보면 하느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느끼며, 세상이 주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감동과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사랑의 눈으로, 희망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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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8.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의 순례자 -경청과 겸손, 인내의 사람-
복음에 앞선 화답송 후렴이 강렬한 느낌으로 마음에 와닿습니다.
“제 영혼이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하나이다.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오리이까?”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의 마음 깊이에 내재해 있는 하느님 향한 갈망을 표현하는 시편입니다. 참으로 살아있는 하느님을 만날 때 영육의 목마름과 굶주림의 해소요 근원적 치유입니다.
평화의 순례자,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이라크 방문이 연일 감동의 물결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순교자들은 똑같은 하늘에서 별들처럼 함께 빛나고 있다.”
시공을 초월하여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한 성인들은 어디서나 영원히 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황님은 변화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야 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교황님의 가르침에 감격한 바그다드 교수의 감사의 고백입니다.
“이라크 교회는 살아있다(alive)”
미사시 교황님의 강론중 말마디입니다. 새삼 옛 사막교부들의 유일한 삶의 목표는 ‘참으로 사는 것(to be truly alive)’이란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살아있다 하나 유령처럼 살아가는 죽어있는 삶은 얼마나 많은지요. ‘사랑이 빠지면 헛것이요 유령이다. 헛것이, 유령이 되어 살지 말자!’ 어제의 순간적 다짐이 새롭습니다.
오늘은 반대로 제1독서의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믿음의 순례자’가 되어 나병을 치유받고자 이스라엘 땅을 향해 방문 여정에 오릅니다. 엘리사가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주는 이야기가 참으로 흥미진진하며 많은 깨우침을 줍니다. 차별없이 세상 곳곳에 미치는 하느님 섭리의 사랑을 깨닫게 합니다. 참으로 매력적인 인물이 나아만이요 이를 상대하는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의 의연한 처신도 신선한 충격의 감동입니다.
‘아람 임금의 군대 장수인 나아만은 그의 주군이 아끼는 큰 인물이었다. 주님께서 나아만을 시켜 아람에 승리를 주셨던 것이다. 나아만은 힘센 용사였으나 나병 환자였다.“
평범한 묘사같지만 깊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나아만 역시 하느님 사랑의 섭리의 손길하에 있는 익명의 믿음의 순례자임을 깨닫습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전화위복, 천형이라라는 나병이 하느님 섭리의 맥락중에 바야흐로 천복이 될 순간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편견과 선입견을 일거에 날려 버립니다. 나병이 없었다면 나아만은 결코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하느님 섭리의 손길중 하나가 이스라엘에서 잡혀온 보잘 것 없는 어린소녀입니다. 이 또한 우리의 편견을 깹니다. 나아만의 아내는 소녀의 말을 전했고 경청의 사람, 나아만은 겸손히, 많은 선물을 가지고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를 찾아 나섭니다. 나아만의 방문에 놀라 전정긍긍하는 이스라엘 임금을 진정시키는 엘리사의 의연하고 침착한 모습이 참 인상적입니다.
“임금님께서는 어찌하여 옷을 찢으셨습니까? 그를 저에게 보내십시오. 그러면 그가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라는 작아도 이런 보물같은 하느님의 사람, 예언자를 지닌 나라가 참으로 부자 나라임을 깨닫습니다. 나아만의 방문을 받은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경청과 겸손, 인내의 믿음을 수련할 기회를 줍니다. 집문 앞에 대기 중인 나아만에게 심부름꾼을 시켜 해야 할 일을 전합니다.
“요르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시오. 그러면 새살이 돋아 깨끗해질 것입니다.”
이 또한 너무나 시시해 보이는 선입견과 편견을 깨는 요구요, 아직 겸손과 순종의 수련이 덜된 교만한 나아만은 경솔한 조건반사적 반응을 보입니다. 너무 합리적이고 타당한 자신의 생각이요 엘리사의 처사에 분노해 발길을 돌리는 순간, 부하들의 지혜로운 조언을 경청하여 순종하는 나아만입니다. 역시 부하들의 지혜로운 조언, 역시 우리의 편견과 선입견을 깹니다. 참으로 겸손히 주위에 활짝 열려 깨어 경청하며 모든 것들로부터 배워야 함을 깨닫습니다. 우리를 눈멀게 하는 선입견과 편견 때문입니다.
마침내 나아만은 경청과 겸손, 인내의 믿음으로 응답하여 하느님의 사람이 일러준대로 요르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담그니 어린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지니 완전 치유됩니다. 천형이 천복이 되는 놀라운 기적적 치유입니다. 결국 나아만의 나병을 치유한 것은 엘리사도 아니요, 요르단강물도 아닌 순전히 나아만의 겸손한 믿음에 하느님의 은총이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경청과 겸손, 인내의 믿음에 하느님의 은총만 있으면 일상의 모두가, 오늘 지금 여기가 치유의 장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굳이 성지를, 영험있는 분을 찾아나서지 않아도 됩니다. 최고의 의사이신 하느님은 언제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입니다. 인도의 성자, 간디는 하느님의 이름을 정성껏 부르며 웬만한 병은 다 치유받았다 합니다. 나아만의 믿음의 고백이, 해피엔드로 끝나는 나아만의 치유 일화가 참 깊고 아름답습니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육신의 나병만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고백으로 영혼의 병까지, 전인적 치유를 받은 나아만입니다. 말 그대로 나아만의 믿음의 승리,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참으로 근원적 치유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고백에서 이뤄짐을 봅니다. 이런 나아만의 일화가 오늘 복음의 이해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편견과 선입견에 눈먼 나자렛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몰라봤습니다. 예수님은 엘리야와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 그리고 엘리사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실화를 예로 들면서 편견과 선입견의 무지에 눈먼 이들의 각성을 촉구하십니다. 편견과 선입견에 눈이 멀어 엘리야와 엘리사를 능가하는 참 예언자 예수님을 몰라 본 고향사람들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예수님의 깊은 좌절감을 느끼게 하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나자렛 고향 사람들을 전혀 탓할 수 없습니다. 바로 편견과 선입견은 우리 인간의 보편적 무지의 병이기 때문이요, 이에 대한 결정적 처방은 참된 회개의 은총뿐입니다.
편견과 선입견의 무지에 눈먼 고향 사람들이 회개하기는 커녕 악행이 점입가경입니다. 화가 잔뜩 난 이들은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를 가로질러 정면돌파하여 미련없이, 표표히 떠나십니다. 이 아름다운 장면 또한 우리 독자들에게는 편견과 선입견의 무지에서 눈뜨라는 강렬한 회개의 표징이 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 모두의 편견과 선입견의 영적 나병을 말끔히 치유해 주시어, 전인적 건강의 삶과 더불어 경청과 겸손, 인내의 ‘믿음의 순례자’ 되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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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8.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구원을 알아보는 안목에 대해 들려 주십니다.
"내가 진실로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24)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 회당에 가셔서 가르치실 때 그분의 출신을 잘 아는 고향 사람들이 못마땅해하자 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은 근본이 모호한 목수 출신 예수님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한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합니다. 어설픈 앎이 편견이 되어 오히려 구원을 방해하는 형국이지요.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루카 4,26)
"시리아 사람 나아만"(루카 4,27)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나자렛 사람들에게 믿음과 순종으로 구원 받은 구약의 두 인물을 예로 들어 주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알아듣고 돌아서기보다 불에 기름을 붇듯 분노해 들고 일어나지요.
사렙타의 과부는 오랜 기근 때문에 마지막 남은 양식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고 죽으려다가, 엘리야 예언자가 명한 대로 음식을 만들어 먼저 그에게 대접한 이방 여인입니다. 그 덕에 그녀의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게 되었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게 되었지요.(1열왕 17,8-16 참조) 그리고 시리아의 나아만의 순종에 대해서는 오늘 제1독서의 대목에서 잘 드러납니다.
"주인 어르신께서 사마리아에 계시는 예언자를 만나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분이라면 주인님의 나병을 고쳐 주실 텐데요."(2열왕 5,3)
"아버님, 만일 이 예언자가 어려운 일을 시켰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런데 아버님께 몸을 씻기만 하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지 않습니까?"(2열왕 5,13)
시리아 임금의 총애를 받는 장수 나아만은 먼저 어린 히브리 노예 소녀의 조언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예언자에게 기대한 만큼의 대접을 받지 못해 분개할 때에도 부하들의 권유에 귀를 기울이지요.
고통스런 육신에 온전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날 때까지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자신을 향한 구원의 소식이 누구를 통해서 오든, 설령 가장 힘 없고 보잘것없는 존재를 통해서일지라도 귀를 기울이는 나아만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지요.
"하느님의 사람이 일러 준 대로"(2열왕 5,14)
결국 나아만은 엘리사의 명에 순종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전쟁 포로인 히브리 노예 소녀의 진언에서 시작된 구원의 길이 나아만의 순종으로 열매를 맺고,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라는 이방인의 놀라운 고백으로 마무리됩니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하나이다.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 가서 뵈오리까?"(화답송)
시편 저자는 하느님의 얼굴을 그리워하며 뵈올 날을 고대하는 영혼의 갈망을 노래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토록 고대하는 하느님의 얼굴은 이 지상의 순례길에서 직접 뵈올 수는 없지요. 그것은 천상 본향에서 우리를 위해 마련된 복락이니 잠시 참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순례 여정 안에 있는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전하시고 구원으로 이끄시려 종종 우리 편에서 얼토당토않게 여길만한 이들의 얼굴을 빌리십니다. 가난하고 약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 세상이 부여한 신분도 위상도 없는 이, 배경을 뻔히 알아 신뢰할 수 없는 이들처럼 겸손으로 유연하게 열린 마음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알아챌 수 없는 이들의 얼굴로, 그들의 목소리로 다가오시지요.
사렙타의 과부나 시리아의 나아만처럼 순히 듣고 따름으로 구원을 얻을 수도 있고, 나자렛 주민들처럼 은총을 걷어찬 것도 모자라 은총의 주님을 죽이려 할 수도 있습니다. 믿고 순종하는 겸손에 따라 결과는 많이 다를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께서 누구를 통해 당신 얼굴을 보여 주시고 사랑의 목소리를 들려 주시는지 깨어 귀기울이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선입견과 편견을 내려놓으면 의외의 인물이 다가와도 놀랄 일이 없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 다가오시는 주님을 경청하고 환대하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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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8.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4,24)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면서, 당신께서 이 세상 구원을 위해 파견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와 나병환자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에게 내려진 하느님의 구원을 언급하시면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에게는 구원으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의미의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선택된 사람들이라고 자처했던 유다인들 만을 위해 파견되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반드시 은총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 은총을 베푸시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도 한 때는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처럼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방인이었습니다.
아니 아직도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더 뜨겁게 믿지 못하는, 죄 안에 갇혀있는 이방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뻐하십시오.
이런 이방인들을 위해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고, 이런 이방인들을 위해 수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지금의 사순시기는 이런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을 더 기억하고, 이 극진한 사랑에로 돌아가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새롭게 다시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시기입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고, 모든 사람에게도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다시 태어나야 하는 때이고, 회개의 때입니다.
그래서 사순시기는 거룩한 시기이며, 은혜로운 때이고, 구원의 날입니다.
그래서 사순시기는 우울한 시기, 슬픈 시기가 아닙니다.
다시 기뻐합시다!
다시 시작합시다!
"저는 하느님의 제단으로 나아가오리다.
제 기쁨과 즐거움이신 하느님께 나아가오리다."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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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8.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미움 받을 용기는 소속감에서 나온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실 뻔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십니다. 당시는 가문과 동향인들의 공동체가 큰 힘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거의 가족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미움에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대단한 ‘홀로서기의 힘’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홀로서기의 힘’이란 무엇일까요? 어른으로서 세상 어떤 힘에도 휘둘리지 않고 주체적으로 나아가는 힘입니다. 나를 돈으로 유혹해도 내 가치관과 맞지 않으면 흔들리지 않고, 나를 명예나 인기, 혹은 애정으로 유혹해도 옳지 않다고 여기는 것에도 휘둘리지 않는 힘입니다.
이 홀로서기의 힘이 부족한 사람들은 어떤 것에든 집착합니다. 자신이 휘청거리기 때문에 무엇이라도 잡으려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이 휘청거리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사람들을 등쳐먹는 사기꾼들도 많이 생깁니다.
찰스 폰지는 최초 다단계 금융사기 발명가입니다. 처음엔 자신도 이것이 먹힐 줄 알았습니다. 그는 ‘45일 안에 50%, 90일 안에 100%’의 수익을 무조건 올릴 수 있는 투자를 사람들에게 제안하였습니다. 이탈리아에서 통용되는 국제반신우표권(IRC)이라는 것을 사서 통화가치가 높은 미국에서 팔면 무려 300%나 높은 수익을 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투자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문제는 미국에서 그렇게 많이 수입된 IRC가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IRC를 팔 수 없게 되자 새로운 투자자들의 돈을 이미 투자한 사람들에게 갚는 식으로 더 투자자들을 늘렸습니다. 그러나 항상 새로운 투자자들이 더 많이 늘어나라는 법도 없습니다. 투자자들이 줄어들자 기존 투자자들에게 이익을 지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사기극으로 인해 8개월 동안 5개의 은행이 파산했고, 나라가 휘청거릴 정도의 액수의 돈이 증발해버렸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2004~2008년까지 조희팔 씨가 전국에 10여 개의 피라미드 업체를 차리고 의료기기 대여업으로 30~40%의 고수익을 보장한다고 속여서 3만여 명의 투자자를 모았고 4조 원을 가로챈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로 남는 것은 고통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홀로 설 줄 모르고 세상 것에 집착하고 휘둘리는 이유는 홀로 설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게 만들어줄 가족과 같은 공동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홀로 설 힘은 가족공동체의 소속감에서만 나옵니다. 아이들이 어디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부모와 형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면 충분하기에 아이들은 세상 유혹에 혹하는 일이 없습니다. 부모와 형제라는 공동체가 아이들이 세상에서 홀로 설 수 있게 만드는 근원적 힘입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의 격리 원숭이 실험에서 새끼 원숭이가 젖을 주는 철사로 된 엄마보다 젖은 주지 않아도 따듯함을 주는 수건으로 감긴 것을 엄마 원숭이로 인식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이는 원숭이는 살아갈 힘을 먹는 것보다 소속감에서 더 얻으려 한다는 것을 증명해줍니다. 원숭이가 그렇다면 사람은 더 그러할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부모님이 주는 힘, 가족이 주는 힘은 한계가 있습니다. 사춘기가 되면 부모보다도 친구 공동체에 더 속하려는 마음이 생기기도 하고, 결혼하면 자신이 만든 가족을 위해 부모를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배우자에게 이용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교회공동체입니다. 교회의 소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의 에너지를 받을 수 있어야 세상 어떤 애정에도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이 공동체는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는 힘을 줍니다.
하지만 지금 교회공동체는 그런 힘을 주는데 지쳐있는 모습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분이 신천지에 빠질 뻔했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살아가기 어렵고 적응하기 힘들 때 교회공동체는 어떠한 힘도 주지 못했습니다. 병이 들고 힘들어도 관심을 두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다만 2~3년 동안 자신이 신천지인지 밝히지 않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따듯하게 말해주는 상담 선생님에게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다른 친구들도 소개해 주며 힘을 주었습니다. 세상 어떤 공동체에서도 힘을 얻지 못할 때 따듯함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그러니 보통사람 같으면 어떻게 그 집단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삶의 힘은 사랑의 공동체에서 나옵니다.
물론 위 자매는 신천지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가톨릭에서 힘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신천지인 것을 알게 된 이후로 그들과의 관계를 끊은 것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도 신천지에 가지 말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사람들을 이끄는 모습에서도 우리 자신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도 ‘소공동체’라는 좋은 제도가 있지만 실상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게 사실입니다. 소공동체가 가족공동체의 모습을 띠어야 소속감과 홀로 설 힘, 더 나아가 미움 받을 힘을 줄 수 있는데 지금의 소공동체는 그런 모습을 많이 잃었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한 번 봅시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4-47)
이 모습이 하느님을 부모로 둔 교회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이상입니다. 이처럼 완전한 믿음을 가질 수는 없을지라도 교회 안에서 가족이라는 따듯함을 느낄 수 없다면 성당에 나오더라도 여전히 세상에 흔들리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소속감이 큰 것과 자신의 것을 내어놓는 것은 비례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성령, 그리고 사도단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당신 모든 것을 내어놓으셨습니다. 그 공동체의 힘으로 동향인들이 당신을 다 미워해도 당당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살아갈 힘은 바로 가족공동체의 소속감에서 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족은 다 내어놓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증거입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본당 공동체에 십일조를 하는 것을 넘어서서 소공동체도 서로 가족과 같은 따듯함을 줄 수 있는 나눔의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복음 묵상 나누기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그 실천이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공동체에서 오는 힘이 없이는 교회도 힘을 잃고 그러면 응집력이 약해져 성당에 나오는 숫자도 점점 줄어들 것입니다. 코로나 시기가 교회공동체의 쇄신을 추구하는데 매우 적합한 시기일 수도 있습니다. 본래 성찬(하느님과 하나 됨)과 만찬(형제들 간의 친교)은 하나였습니다. 사이비에 빠지지 말라고 할 것만이 아니라 우리는 신천지에 갈 필요가 없다고 말할 따듯한 공동체가 준비되어 있는가를 되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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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8.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아버지의 뜻이 내 삶 속에 완결되기까지 고독하고 쓸쓸한 길을 계속 걸어가야겠습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을 방문하셨습니다. 청년으로 성장하기까지 어린 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 호형호제하던 사람들, 사랑했던 사람들, 고마운 인연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을 것입니다. 다양한 감정들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동시에 구원의 기쁜 소식을 고향 사람들에게도 꼭 전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다른 고을에서보다도 훨씬 강도높게 복음을 선포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향 사람들의 반응이 시원찮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저 사람은 우리집 건너편에서 살았던 목수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가 아닌가? 우리 어머니와 별반 다를바가 없는 평범한 여인이었는데...”하면서 도무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냉랭하면서도 완고한 고향 사람들의 태도 앞에 예수님께서도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차근차근 친절하게 설명해도 끝끝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수용하지 않는 고향 사람들의 소극적인 자세 앞에 예수님께서는 태도를 바꾸십니다. 적극적인 강공 모드로 돌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루카 복음 4장 24~27절)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이라는 자부심이 엄청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주눅들지 않으시고 거침없이 말씀하셨습니다. 대기근이 들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 잘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외면하시고, 한 이방인에게 먼저 극진한 사랑을 베푸셨음을, 수많은 이스라엘의 나병환자들은 제쳐두고 이방인 나병환자를 치유해주셨음을 상기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말씀은 유다인들에게 크나큰 수모요 상처였습니다. 그들은 화가 잔뜩 나서 길길이 뛰고 이를 갈면서 손을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작당한 그들은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살해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우르르 예수님을 향해 몰려든 그들은 일단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몰았습니다. 소나 돼지 몰듯이 말입니다. 깎아지르는 절벽까지 예수님을 끌고 간 그들은 거기에서 예수님을 떨어트려 추락사시키려고 안간힘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예수님의 지혜로움과 민첩함이 크게 돋보입니다. 하실 말씀 시원하게 다 하신 예수님, 유다인들의 속을 긁어놓을데로 다 긁어놓은 예수님께서는, 위기 상황이라는 것을 인식하시고, 재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나신 후 홀연히 당신의 길을 가셨습니다.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구원자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셨지만 동족으로부터 환영은 고사하고, 협박당하고 벼랑 끝까지 내몰리고, 죽음의 위협을 받으셨습니다. 정말이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반역 중에도 이런 반역을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쿨하십니다.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유유히 당신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아직 때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이 당신 삶 속에 완결되기까지 메시아로서의 고독하고 쓸쓸한 길을 계속 걸어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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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8. 사순 제3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강만연 어부베드로추천 0조회 321.03.08 01:11댓글 0북마크공유하기기능 더보기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드는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지내신 나자렛에서 새로운 희년을 반포하십니다. 회당에서 하셨던 것입니다. 공생활 초기쯤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미사 복음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이 앞부분에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말인 두루마리를 인용해서 주님께서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라는 청사진을 선포하십니다. 그러시면서 그런 게 지금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내용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게 실현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일단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말씀에 좋은 건 사실일 겁니다.
한편으로는 놀라울 수도 있습니다. 좋게 받아들이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약간 못마땅한 구석이 있습니다. 뭐라고 할까요? 약간 비아냥거리는 듯한 마음을 일부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못 먹는 감 한번 찔러본다는 식으로 지금까지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객관적으로 드러난 사실만으로 판단했을 땐 대단하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그들은 그걸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예수님께서 자라나신 모습을 쭉 곁에서 지켜보고 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모습을 잘 안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냥 단순히 목수의 아들 정도라고 생각하는 모습이 그들 마음속에는 많이 자리잡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다 보니 오늘 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바로 앞 부분에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의도가 바로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그런 심리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현제의 모습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나자렛에서 자라지 않고 전혀 다른 곳에서 그들이 모르는 곳에서 오셔서 복음을 선포하고 하셨더라면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을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십니다. 그게 오늘 미사 복음 말씀이 시작하는 부분입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그러시면서 구약의 두 예화를 언급하십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활동한 시대에 나오는 사렙타의 과부 이야기와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나오는 시리아 장군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두 예에서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이방인입니다. 또 두 사람은 처음에는 예언자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가 나중에 다시 마음을 돌려서 받아들여서 복을 받는 그런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있는 사람들에게 또 예수님을 배척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간접적으로 뭔가 전하는 메시지가 있을 겁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 역할을 하는 사람의 말에 순종하면 복을 누릴 수 있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면도 있을 겁니다.
오늘 복음을 잘 보시면 또 재미난 부분을 하나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과부에게만, 나아만만’ 이라는 표현을 보시면 ‘만’이라는 말로 한정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한정의 의미는 순종의 의미를 한 번 더 강조하는 의미의 강조요법인 것 같습니다. “너만 그 일을 할 수 있을 거야.”라고 하면 이 말에는 다른 사람은 할 수 없다는 걸 의미하지 않습니까? 이 두 사례를 들면서 너희들도 나의 말을 그냥 귓등으로 듣지 말고 잘 받아들여야 그들처럼 너희가 살아가는 길에 복의 통로가 될 수가 있을 거란 의미를 간접적으로 드러내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두 사람처럼 이방인에게 복이 갈 수도 있다는 걸 또한 한 번 더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들도 그런 뜻을 파악하고 이해를 했기 때문에 화가 잔뜩 났던 것입니다. 그래도 눈치는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성경을 잘 몰랐다면 자기들을 향해서 그런 예를 드신 줄도 모르고 특히나 두 사람 모두가 이방인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더더욱 불쾌했을는지 모를 일입니다.
오늘 독서는 복음에 나오는 나아만 장군에 대해서 독서의 지면 전체를 할애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좀 더 복음과 연계해서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나아만은 아람 나라의 장수이고 자신은 나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나병을 앓고 있었지만 독서에 보면 주군이 상당히 아끼는 장수였다고 나옵니다. 한 나라의 임금이 아끼는 장수라면 대충 상상을 해봐도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신분상 위치에 있는지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자기가 앓고 있었던 나병을 치유하려고 무진장 노력을 했을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결국에는 엘리사 예언자의 말을 통해 또 예언자의 말에 순종해서 자신의 나병이 깨끗이 치유됐습니다. 결과는 이렇지만 결과만을 보지 말고 그 과정을 한번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 예언자의 말을 듣게 된 최초의 발단은 어디서 시작하였는가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포로였던 어린 소녀의 말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어린 소녀이고 또 포로였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봤을 때 이런 상황이 잘 납득이 되지 않을 겁니다. 물론 이 소녀는 나아만에게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나아만의 아내에게 했습니다. 아내가 나아만에게 전해줬을 겁니다. 나아만이 아내로부터 소녀가 한 말을 무시했을 수가 있습니다. 근데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한글 성경에 나온 번역상의 뉘앙스로 그대로 만약 나아만 장군이 들었다면 한 번쯤은 조금 고민했을 수 있다고 저는 묵상해봤습니다.
오늘 독서 3절에 보면 ‘그분이라면’ 이 말의 뉘앙스를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말입니다. “그분은 고쳐주실 수 있을 겁니다,”와 “그분이라면 고쳐주실 수 있을 겁니다.”와는 같은 의미이지만 조금 뉘앙스가 다르게 느껴질 수 있을 겁니다. 그분은 이라는 표현에서는 신빙성을 담보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분이라면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분이라면’ 이라는 말에는 이런 느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런 느낌이 있습니다. 만약 나아만 장수가 이런 느낌을 받았더라면 조금은 고민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람은 말의 어떤 표현에서도 미묘한 고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게 독서에 나와서 그렇지 만약 4대 복음에 나오는 말씀이라면 이 부분만을 가지고 묵상해도 상당한 묵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주군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때 나아만이 조금 고민을 했지 싶습니다. 이런 사실을 임금에게 알렸을 때 임금이 어떻게 생각할 것이며 또 핀잔이나 듣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고작 포로였던 어린 소녀의 말을 듣고 보고를 한다고 자신이 생각했다면 못했을 겁니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조금 상상을 해본다면 그만큼 자신의 병을 낫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자존심을 죽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임금은 편지를 써서 이스라엘 임금에게 보내지만 결국 이스라엘 임금은 자신은 하느님도 아니고 그런 병을 고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하면서 자신의 옷을 찢는 일이 벌어집니다.
참 흥미로운 부분이 있습니다. 아람 임금이 이스라엘 임금에게 편지를 한 부분에서 나아만의 병을 고쳐달라고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임금은 그 편지의 내용으로 봐서 자신에게 병을 고쳐달라고 생각한 줄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람 임금의 판단으로는 이스라엘 나라의 임금이라면 소녀가 말한 사마리아 예언자를 잘 찾아낼 수 있는 위치이고 또 임금의 말이라면 잘 들어줄 수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의도로 임금에게 편지를 했을 수도 있을 겁니다.
아무튼 이건 저만의 상상입니다. 근데 이 일이 어그러지자 이때 엘리사 예언자가 등장합니다. 독서에서는 사람을 보내어 자기에게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가 예언자임을 알 수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해서 엘리사의 집 앞에까지 왔습니다만 엘리사는 나아만을 직접 만나지 않고 자신의 심부름꾼을 통해서 나아만 장군에게 “요르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어라.”고 말만 합니다. 그러면 깨끗하게 나아질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 상황에서 나아만은 어떤 태도를 보였습니까? 화가 나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봤을 때 자신을 어느 정도 최소한 집에서 나와 인사를 하며 독서에 나오듯이 마치 신부님이 강복을 주시는 것처럼 그런 걸 기대했을 건데 전혀 예상과는 달리 “요르단강에서 몸을 씻어라.”고 하니 그렇게 할 것 같았으면 그보다도 더 좋은 곳도 있는데 그곳에서 씻으면 나아도 더 잘 나을 거라는 형식으로 말을 내뱉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어떤 뜻이 숨어 있습니다.
자신의 자존심이 엄청 상했다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발길을 돌리려고 했지만 이때 자신의 부하가 등장해서 만류를 하고 설득을 합니다. “이보다 더한 일도 시키면 하지 않았겠느냐?” 하면서 그냥 속는 셈치고 한번 해보시는 게 어떻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때 이 상황에서 부하가 한 말의 의미도 한번 생각해볼 만합니다.
부하의 말 속에는 지금 되지도 않는 자존심을 내세울 게 아니라 장군이 온 목적을 생각하는 게 중요할 거라는 메시지를 전한 것처럼 보입니다. 일단 부하가 하는 말에 따르긴 따릅니다. 이때 이 부하를 오늘 독서에서는 다른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럼 요즘의 이야기로 말을 하면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표현을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결국 이렇게 해서 나아만은 자신의 병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그냥 깨끗하게 나은 정도가 아니라 어린아이 살처럼 깨끗하게 나아졌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나아만은 이스라엘에만 하느님이 계신다는 신앙고백을 하는 걸로 오늘 독서는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들 잘 알고 계시지만 이 이야기에 숨은 걸 한번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나아만의 성격을 하나 봤으면 합니다. 처음부터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남의 말을 잘 경청했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에는 어린 소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다음은 엘리사 예언자의 집에서 심부름꾼의 말을 들었습니다. 심부름꾼 그 자체의 말은 아니고 단지 전달자로서의 말입니다. 여기서 생각할 부분이 같은 말이라도 만약 대통령이 직접 하는 말과 밑에 비서가 하는 말이 같은 말이지만 그 위치가 누가 하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느낌이 다릅니다. 이처럼 이유야 어찌 되었든지 말을 듣는 통로 역할을 한 건 심부름꾼이었습니다. 또 마지막엔 부하의 말을 들었습니다. 이 부하는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말을 합니다. 만약 나아만이 어느 하나라도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병을 깨끗하게 나을 수가 없었을 겁니다.
성경에 이런 사실이 기록됐다는 것은 단순히 이 사실 그 자체에 의미를 둔 것은 아닐 겁니다. 바로 ‘경청’의 의미를 강조하는 면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전혀 말 같지도 않은 말 같은 말 속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가진 것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이런 걸 적용하면 좋은 표양이 될 것 같습니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나아만 장수의 이야기를 말씀하셨듯이 나아만 장군이 그들의 말을 듣게 된 그 바탕에는 자신의 자존심을 내려놓은 것입니다. 또 그들의 말에 따랐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치유의 은혜를 입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도 자신이 알고 있었던 과거의 예수님 모습을 생각해서 예수님을 배척하려고 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들의 알량한 인간 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자존심이 하느님의 아들을 알아볼 수 없도록 막고 있다는 걸 보면서 우리도 우리 속에 이런 게 있다면 우리 역시도 예수님께서 우리 곁에 계셔도 볼 수가 없는 우를 범할 수가 있다는 걸 묵상하게 하는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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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로 시작되는 하느님 나라 - 이마르첼리노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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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홈 – 나눔방 –말씀/삶 - 자유나눔
2021.03.07. 02:46. 이마르첼리노M
듣기로 시작되는 하느님 나라
“이것을 듣고 명심하여 실천하여라. (신명 6,3-4)
이스라엘은 들어라”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마태 13,23)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루가 8,13-14)
“듣고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듣고 간직하여” (루가 8,15)
성서의 많은 말씀이 들음과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그중에서도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타난 하느님 나라는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은,
하느님과 나와 너와 나 사이에 소통에 필수적인 과정이다.
듣고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들음과 해석, 이해하는 능력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국의 문맹률은 세계에서 높다고 하는데 한글을 깨우친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한국 사람의 소통 능력은 세계에서 꼴찌라는 학자가 있다.
왜냐하면 듣지 않고 이해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상대방의 이야기엔 관심이 없고 자기 말만 하기 바쁘기 때문이며
더구나 이해하려는 마음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이야기다.
상대방이 말하고 있을 때 중간에 끼어들거나 끊어버리고
다른 사람이 말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들음은 사랑이다.
잘 들음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말을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자아도취와 자만심과 자기중심적 사고에 갇혀 있기에 관계를 망친다.
그런 사람들이 사목적 책임을 맡거나
공동체 형제들에 대해 봉사를 하게 되면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당사자들에게 묻지도 않을뿐더러 섣부른 판단으로 판단해버릴 때가 많다.
그런 사람들은 사람을 사랑의 대상이 아닌 이용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봉사를 위한 권한으로 통제의 칼을 휘두른다.
“듣기는 빨리하고 말하기는 천천히 하십시오” (야고보서 1:19)
지혜로운 사람은 먼저 잘 듣고 다음에 말한다.
하느님의 자비와 선이 육화되는 현장에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잘 들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므로 들을 줄 아는 마음은 매우 큰 사랑에서 나온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먼저 듣고 들은 다음에 말하는 사람이다.
듣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이다.
“아버지의 이름과 나라와 아버지의 뜻”보다 (주님의 기도)
자신의 이름을 빛내는 일과 자기가 통치하는 나라,
자기의 뜻을 이루려고 하기 때문이다.
잘 들어야 필요성을 안다.
필요성을 채우는 것이 자비다.
너를 중심으로 네가 원하는 방법으로 그 필요를 채우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곳에 하느님의 자비가 꽃핀다.
거기에는 잘 듣고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
하느님 나라는 들음으로 잎이 나오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성장하며
간직하는 마음으로 봉오리가 열리고
실천하는 마음으로 열매를 맺으며
그것이 계속되는 곳에 축제와 잔치가 있다.
너를 위한 축제
우리를 위한 축제
모든 피조물을 위한 축제
삼위일체 하느님과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자유와 평화의 축제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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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8. 김 로마노 형제님.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제1독서 (2열왕5,1-15ㄷ)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십시오. 그러면 새살이 돋아 깨끗해 질 것입니다." (10) "그리하여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이 일러 준 대로, 요르단 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갔다. 그러자 그는 어린아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다." (14)
'요르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십시오'라는 엘리사의 명령은 율법의 명령이다.
"정결하게 되려는 이는 자기 옷을 빨고 털을 모두 민 다음에 물로 몸을 씻으면 정결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진영으로 들어가 자기 천막 밖에서 이레 동안 머무른다. 이레 째 되는 날에 그는 다시 털을 모두 민다. 머리탈과 수염과 눈썹까지 털을 모두 민다. 그런 다음 옷을 빨고 물에 몸을 씻으면 그는 정결하게 된다." (레위14,8.9)
그러나 율법에서 몸을 씻는 것은 나병이 완전히 고쳐지고 나은 다음에 깨끗하게 되었음을 증거하는 상징적인 의식 행위였다. 그런데 열왕기 하권 5장 10절에서는 깨끗하게 되기 위한 예비적 동작으로 몸을 씻는 행위를 명령한 것이다. 그러니까 의미에 있어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와 비슷한 예로 예수님께서 한 소경을 치유하실 때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요한9,7) 하시니, 이에 소경이 즉시 순종하여 가서 씻었드니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다시 말해서 엘리사가 나아만으로 하여금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게 한 것은 치유를 위한 행위이거나 치유 후 행하는 의식적 행위에 대한 명령이라기 보다는 즉각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명령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도 일곱 번이나 씻으라고 한 것은 완전한 순종에 대한 요청으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도의 인내까지도 포함된 명령인 것이다.
왜냐하면 '완전하다','만족시키다'란 뜻의 히브리어 '샤바'(shaba)에서 온 말이 일곱(shibah)을 나타내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곱'을 '완전(충만) 수'라고 하는 것이다.
한편 이것은 예리코성을 점령할 때에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렛날에는 사제 일곱 명이 뿔 나팔을 부는 가운데 에리코 성읍을 일곱 번 돌아라고 명령하신 말씀(여호6,3-5)과 3년 6개월 동안의 가뭄 끝에 엘리야가 자기 시종에게 비올 증거를 찾는데 일곱 번을 다녀오라고 명령한 것(1열왕18,43)과 동일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일곱 번씩이나 같은 행위를 하게 한 것은 사람들이 흔히 갖고 있지 못한 믿음과 신뢰가 있어야만 치유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내용을 고찰해 볼 때, 엘리사의 명령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로, 나아만의 교만을 부수기 위한 것이다.
외연상으로 나아만은 아람의 군대 장군인 반면에 엘리사는 이스라엘의 예언자에 불과했기에 나아만이 교만한 자라면 엘리사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을 것이다. 교만한 자에게는 하느님께서 결코 당신의 전능과 은총을 베풀지 않으신다.
"주님을 경외함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의 길을,사악한 입을 미워한다." (잠언8,13)
"주님께서는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역겨워하시니 그런 자는 결코 벌을 면치 못한다." (잠언16,5)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신다." (야고4,6; 잠언 3,34)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루카16,15)
둘째로, 나아만의 나병이 오직 하느님의 능력으로만 치유됨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
고대 근동 지방에는 불치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여러 가지 주술 행위가 사용되었다. 그런데 엘리사는 그러한 처방은 커녕(1열왕5,12),아주 평범하게 여겨오던 혼탁한 요르단 강에서 씻으라는 처방을 했다.
'그리하여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이 일러준 대로, 요르단 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갔다.'(14)
본절의 '내려가서'라는 말속에는 두 가지 뜻이 들어있다.
첫째로, 나아만이 요르단 강으로 내려갔다는 뜻이다. 당시 엘리사가 있던 곳은 사마리아 땅의 고지대이므로 나아만은 상당한 거리를 여행하여 요르단 강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둘째로, 나아만이 예언자의 말에 순종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몸을 담갔다'에서 '담그다'라는 말은 몸에 물을 완전히 적시거나(2열왕8,15) 물속에 몸을 전부 집어넣는 것을 가리킨다.
또한 모세오경에는 이 단어가 '피에 찍다'(레위14,6),'기름에 담그다'(신명33,24), 사무엘 상권 14장 27절에는 '꿀을 찍어'라는 뜻으로 쓰였다. 따라서 나아만은 예언자의 명령에(1열왕5,10) 보다 더 철저하게 몸을 씻었음을 알 수 있다.
나아만이 병이 치유되고 그가 어린아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진 것은(1열왕5,14) 그의 철저한 순종적 행위에 대한 하느님의 은총이었다.
본절에 나타난 '일곱 번'은 나아만이 엘리사의 요구에 얼마나 철저히 순종했는가를 나타냄과 동시에 나아만의 나병이 오직 하느님의 능력으로 치유받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왜냐하면 일곱은 하느님의 완전함과 충만함을 뜻하는 숫자이기 때문이다.
[사순 제3주간 월요일] 고향방문 (루카4,21-30)
사람들이 좋아하는 세상 가치관으로 유혹하는 그 악마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신 예수님께서(루가4,1-13) 고향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가4,18-19)
= 예수님의 대속으로 얻는 속죄- 해방의 기쁜 소식, 복음을 주십니다.
(레위25,8-11) 8 ‘너희는 안식년을 일곱 번, 곧 일곱 해를 일곱 번 헤아려라. 그러면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 마흔아홉 해가 된다. 9 그 일곱째 달 초열흘날 곧 속죄일에 나팔 소리를 크게 울려라. 너희가 사는 온 땅에 나팔 소리를 울려라. 10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 너희는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고, 저마다 자기 씨족에게 돌아가야 한다. 11 이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 너희는 씨를 뿌려서도 안 되고, 저절로 자란 곡식을 거두어서도 안 되며, 저절로 열린 포도를 따서도 안 된다.
= 속죄일- 어린양의 대속으로 얻는 죄의 용서, 자유, 그 안식, 쉼의 날입니다. 희년은 안식을 지키는,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식은 일곱(7)입니다.
(창세2,2)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 창조는 육일 동안 이루어 졌습니다, 그 창조 육일 안에 쉼, 안식을 누리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속죄입니다. 어린양 예수님의 사흗날의 대속의 죽음, 그 사랑입니다.
창조 사흗날- 씨(제라-후손, 예수) 의 희생, 그 사랑입니다. 희년은 그 하늘의 희생(대속), 죽음, 그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 말씀은 시간과 공간에 갇히지 않습니다. 말씀은 늘~오늘, 지금입니다. 지금 일하십니다.(로마8,28참조) 믿기만 하면, 기쁜 소식-복음입니다.
22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 복음, 그 말씀으로 쉼, 안식을 깨닫지 못한 놀라움입니다. 그것은 목수의 아들? 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말씀이시며 생명, 빛, 안식이신 주님을 못 알아봅니다.
(요한1,4-5.14)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23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 24 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 하늘의 희생,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해 짝하지 못한 과부입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 그 안식의 사랑과 짝하지 못해~ 육(肉)이 썩어 들어가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듯 영(靈)이 죽어가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나병입니다. 창조 육일 그 속에 그리고 하느님의 계명, 그 모든 말씀속에~ 죄인들의 용서, 그 안식을 위한 씨(신)의 죽음, 그 사랑 하나만 들어 있습니다.
(요한7,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한 가지 일을 하였을 뿐인데 너희는 모두 놀라워한다.
(사도13,39.41) 39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 안에서 모든 죄를 벗어나 의롭게 됩니다. 41 ‘보아라, 너희 비웃는 자들아! 놀라다 망해 버려라. 내가 너희 시대에 한 가지 일을 하리라.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어도 너희가 도무지 믿지 못할 그런 일이다.’”
= 예수님의 대속을 진리로 믿는 다는 것은 사람의 지혜로는 믿지 못할 일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엘리사가 나아만을 치료할 때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합니다.
(2열왕5,11.13-14) 11 나아만은 화가 나서 발길을 돌리며 말하였다. “나는 당연히 그가 나에게 나와 서서, 주 그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병든 곳 위에 손을 흔들어 이 나병을 고쳐 주려니 생각하였다.
= 그러면서 나아만이 성을 내며 발길을 돌리려 합니다.
13 그러나 그의 부하들이 그에게 다가가 말하였다. “아버님, 만일 이 예언자가 어려운 일을 시켰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아버님께 몸을 씻기만 하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14 그리하여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이 일러 준 대로, 요르단 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갔다. 그러자 그는 어린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다.
= 인간은 자신들의 그 어떤 행위에 가치를 둡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깨닫기 위한 삶보다 그 하느님의 뜻을 자신들의 행위로 이루려합니다. 그리고 열심한 그 종교행위가 재미도 있습니다. 무언가 하고 나면 뿌듯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사제께서도 알아봐 주며 칭찬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혐오스러운 불법이라 하십니다.(루가16,15 마태7,23참조)
깨달음을 위한 삶은 오롯이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이기에~ 사람들의 눈에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는 사람으로~ 또 믿음 없는 불성실한 신자로 보여 무시하며 이상하게 보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육적으로는 외롭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꼭 잡고 계심을 알기에 마음은 靈으로 충만해 참 삶을 살아갑니다. 사람들이 알아주는 신앙은 시련이 오면 불안 근심으로 넘어지지만~ 하느님께서 알아주시는 신앙은 오히려 그 시련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사람들이 칭찬하며 알아주는, 그래서 자신도 뿌듯해 하는 그 좋아하는 길, 그 길을 사람들은 버리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런 자신을 버리고 따라야 한다 (마태16,24)하신 것입니다.
(요한5,44)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 하셧듯이 오늘. 그들의 헛된 신앙, 헛된 그 속마음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 그들의 헛된 그 속마음, 그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부수시고 가십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을 부수십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이끄시기 위한 부수심입니다.
땅의 것을 바라는 사람은 부서짐이 어렵지만, 하늘의 것을 희망하는 사람은 땅의 것에 허망함을 알기에 어렵지 않습니다. 땅, 그 세상의 것을 부수기 위해 하느님의 계명과 말씀 속에 숨겨진 안식을 위한 한가지 일, 곧 대속의 예수님을 진리로 깨닫기 위한 공부,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진리와 짝하여 하늘의 안식(쉼)을 삽니다.
♡ 아멘
사순 제3주간 월요일 복음(루카4,24ㄴ~30)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5~26)
예수님께서는 당신 고향 사람들이 당신을 환영하지 않고 배척하는 것과 유사한 일이 구약 시대에도 있었다는 것을, 엘리야와 엘리사 예언자의 예를 들어 말씀하신다.
'하늘이 닫혀'에 해당하는 '에클레이스테 호 우라노스'(ekleisthe ho ouranos; the heaven was shut)라는 표현은 하느님께서 비 한 방울도 내리지 않으셨음을 나타내는 유대인의 관용적 표현이다.
열왕기 1권 17장과 18장에 의하면, 엘리야 시대의 가뭄은 3년이었다 (1열왕17,1; 18,1.2.45).
하지만 그 사건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시는 예수님께서는 그때의 가뭄이 3년 6개월이었다고 말씀하고 계시고, 야고보 사도 역시 같은 견해를 취하고 있다(야고 5,17).
이같은 차이는 열왕기 저자가 비가 내리지 않는 건기 기간을 빼고, 만 3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던 것으로 계산한 반면에, 예수님과 야고보 사도는 늦은 비가 내리는 4월과 이른 비가 내리는 10월 사이의 건기 기간도 비가 내리지 않았던 기간에 포함시켜 보다 정확하게 계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비가 온 때가 4월이었고(1열왕17,1), 3년 후에 비가 내린 때가 10월 이었다면(1열왕18,1.2.45), 엘리야 시대의 가뭄이 계속된 기간은 정확히 3년 6개월이 되는 셈이다.
한편, 이러한 3년 6개월이라는 기간은 신구약 중간 시대의 시리아의 통치자였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nchus Epiphanes) 박해 이래로 상당히 중요한 개념이 되었다.
말하자면, 3년 6개월이라는 기간은 큰 재앙과 시련의 기간으로 유대인들에게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재앙과 시련의 기간은 엘리야 시대의 가뭄의 기간과 일치하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는 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아합 임금은 그 심각한 가뭄을 염두에 두고 엘리야를 '이스라엘을 불행에 빠뜨리는 자'라고 비난했으며(1열왕18,17), 엘리야는 그 심각한 가뭄이 아합 임금의 우상 숭배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정확히 지적하며, '임금님과 임금님 조상의 집안이 이스라엘을 불행에 빠뜨리게 한 것이다'라고 반박했다(1열왕18,18).
한편, 이 구절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받고 있다는 사실을 엘리야가 그 혹심한 가뭄의 시기에 이방의 한 가나안 과부에게만 대접받았다는 사실을 들어 지적하고 있다.
즉 예수님께서는 엘리야 시대에도 그의 고향 사람들이 예언자를 대접할 줄 몰랐듯이, 예수님 시대에도 당신의 고향 사람들은 메시야를 제대로 대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배척하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가뭄 때에 엘리야 예언자는 크릿 시내에 머물다가 그곳 물마저 마르자 (1열왕17,3~7) 시돈에 있는 사렙타로 간다(1열왕17,9~10). 시돈은 팔레스티나 북부 이방 지역 중의 하나이므로, 엘리야는 이방 땅으로 보내진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섭리와 명령에 근거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에는 그 혹심한 가뭄의 시간에 엘리야를 대접할 만한 인물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러한 사실은 위대한 예언자들 중의 예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향 나자렛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고 다른 지역으로 발걸음을 돌리게 되는 상황과 비슷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과거 엘리야의 예를 들어 당신의 처지를 설명한 것이다.
한편, 구약에서는 '차레팟트'(tsarephath)로 불린 지명이 예수님에 의해서 '사렙타'로 불리웠는데, 이것은 히브리어와 아람어(예수님의 모국어)의 발음상의 차이에 기인한 것이다.
'사렙타'는 티로와 시돈 사이에 위치한 한 성읍으로서 '제련소'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Surafend'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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