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리그 입성 후 11년 만에 FA가 됐던 채태인. 나름 성과를 기대했던 그에게 다가온 건 냉혹한 현실이었다. 결국 고향팀 롯데 유니폼을 입게 된 그는 이걸 운명이라고 말했다.(사진=이영미)>
“데뷔 11년 만에 FA 신청을 했거든요. 처음엔 자신 있었죠. ‘설마 날 데려갈 팀이 없을까’ 싶었어요. FA 시장에 나오면 바로 계약할 줄 알았던 거죠. 와, 그런데 계약하자는 팀이 없더라고요. 노크해온 팀은 있었지만 그뿐이었어요. 여론은 계속 부정적으로 흘렀고요. 솔직히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러다 롯데의 연락을 받았던 것이죠.”
11년 만의 FA 선수, 그 후일담
롯데와 1+1년 총액 10억 원에 FA 계약을 맺은 채태인(36). 대만 가오슝으로 전지훈련을 떠나기 전 부산에서 기자와 만난 채태인은 생애 첫 FA 협상 뒷얘기를 다음과 같이 풀어냈다.
2017시즌 이후 FA를 신청하면서 채태인은 살짝 들뜬 마음을 갖게 됐다고 한다. 어느 팀이 될지는 몰라도 좋은 대우를 받고 계약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5시즌 중 4시즌을 3할 타율을 기록했고, 지난 시즌에는 타율 0.322 12홈런 110안타 62타점을 찍는 등 준수한 성적을 올린 그이다.
그러나 현실은 따뜻한 봄날이 아닌 가장 추운 한파가 몰아쳤다. 외적인 추위보다 마음속으로 느낀 추위가 더 시렸다. 롯데의 연락을 받기 전 9개 팀으로부터 계약하자는 내용의 전화를 받지 못한 것이다.
“시즌 중에는 여러 팀에서 관심을 보였어요. 몸 관리 잘하고 시즌 잘 마치라는 덕담도 들었습니다. 저도 자신 있었어요. 그런데 시즌 끝나니까 분위기가 달라지더라고요. FA 시장에 냉기류가 흘렀어요. FA 대박 꿈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다행히 막판에 롯데가 불러줘서 어렵게 시나리오를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넥센 히어로즈에 잔류하는 걸 고민하진 않았느냐고 물었다. 채태인은 “내가 고민하기 전에 넥센이 날 잡을 수 없었다”라고 말한다. 박병호의 복귀를 의미한 내용이다.
“FA를 경험하면서 자꾸 2011년, 2012년이 떠올랐어요. 그때 방황했던 시간들이 후회됐던 거죠. 힘들어도 끝까지 참고 했더라면 이런 대우를 받았을까 싶어요. 삼성 라이온즈 시절 전 운이 좋은 선수라고 생각했는데 뇌진탕을 당한 이후 모든 게 꼬이기 시작했어요.”
채태인은 2010년 8월 26일 대구 두산전에서 파울 타구를 잡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머리를 땅에 부딪쳤다. 이후 뇌진탕 증세를 호소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상태가 더 심해졌다. 그 영향으로 2011년 53경기에 출전, 타율 0.220을, 2012년에는 54경기에 타율 0.201 1홈런 9타점으로 최악의 부진에 빠졌다.
“타석에 서면 공이 여섯, 일곱 개로 보였어요. 타격 밸런스가 무너지면서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죠. 야구 못한다는 비난에 도망치고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때 야구를 내려 놨어요. 이를 악물고 참고 견뎌냈어야 했는데 자꾸 뒤로 도망쳤습니다. 당시 보다 못한 아내가 제게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당신이 야구를 못하는 건 할 수 없지만 당신이 좋아하는 야구를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돈 많이 못 벌어도 좋으니 즐겁게 야구했으면 좋겠다’라고요.”
강기웅 코치의 조언, ‘야구 천재’의 부활
신기하게도 채태인은 2013년부터 변신을 이뤘다. 허리와 어깨 부상에 시달리는 바람에 규정 타석에 54타석 모자랐지만 타율 0.381 11홈런 53타점을 기록했다. 덕분에 연봉이 5000만 원에서 320% 인상된 2억1000만 원이 된다.
“2013년은 무서울 게 없었어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위로만 올라갔던 것 같아요. 제가 그 해에 어떻게 해서 변신을 이룬지 아세요? 강기웅 코치님 때문입니다. 자신감은 흔적조차 없었던 제게 강 코치님은 ‘태인아, 내 말대로 한 번 해볼래? 내 말대로 했다가 3할 못 치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지난 2년 동안 2할을 간신히 넘긴 제게 3할이라뇨. 처음에는 코치님이 제 기를 살려주시려고 일부러 큰소리치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코치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하니까 조금씩 느낌이 오더라고요. 히팅포인트를 좀 뒤로 두고 오른발을 들지 않고 타격하는 법을 연습했고, 그 타격폼이 몸에 익숙해지면서부터 야구 공이 수박보다 더 크게 보이더라고요. 지난 2년 동안에는 야구장으로 출근하는 게 너무 싫었는데 2013년에는 야구장 가는 시간이 정말 즐거웠어요.”
2016 시즌을 앞두고 넥센으로 트레이드되기 전까지만 해도 ‘삼성맨’ 채태인은 라이온즈에서 행복한 시간들을 만끽했다. 야구가 안 돼 방황했던 시간들도 있었지만 자신을 프로 선수로 성장시켜준 삼성에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았다.
보스턴 레드삭스에 진출은 했지만
부산 상고 출신인 채태인은 2001년 두산 베어스의 2차 10순위 지명을 받았으나 보스턴 레드삭스로부터 계약금 80만 달러를 받고 미국 진출에 성공한다. 당시 그의 포지션은 투수. 그러나 채태인이 미국을 선택한 배경에는 말 못할 속사정이 숨어있었다.
“당시 어깨가 좋지 않았어요. 한국에 있으면 어깨 때문에 고생 많이 할 것 같더라고요. 미국에서 야구하다가 어깨 상태가 악화된다면 바로 수술받고 재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결국 어깨 부상으로 단 한 차례도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80만 불의 계약금을 받고 야구를 하지 못하니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죠. ‘먹튀’라고 비난도 받았고, ‘어학연수’ 다녀왔느냐고 조롱하는 소리도 들었어요. 맞아요. 보스턴이 제게 돈을 떼인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건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미국 가서 6개월은 ‘How are you’란 인사만 했다고 말한다. 영어 알파벳을 간신히 외웠던 그로선 의사 소통 자체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How are you’에서 ‘How are you doing?이 6개월 이후 업그레이드 된 버전이었다.
“고등학교 다니면서 수업 한 번 제대로 안 들어갔던 놈이 영어를 할 줄 알았겠어요? 영어 단어로 간신히 대화를 이어갔어요. 저보단 절 상대하는 선수들이 고생했죠. 1년 반 동안 미국에 있으면서 생존 영어를 배웠는데 결국엔 ‘짬뽕 영어’였던 셈이죠.”
이렇게 단어로 의사 소통을 이어가던 채태인은 어깨 수술을 앞두고 단어에 의존하던 영어 실력이 위기에 처하게 된다.
“수술을 보스턴에서 받았어요. 플로리다에 있던 제게 구단에서 비행기 왕복 티켓 두 장을 쥐어주더라고요. 보스턴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탑승했는데 비행기가 보스턴에 안 가고 피츠버그에 착륙하는 거예요. 분명히 가는 비행기 티켓은 하나인데 피츠버그에 왜 내려야 하는지 모르겠더라고요. 승객들이 모두 내리는 바람에 저도 따라 내렸어요. 뭔가를 물어보고 싶어도 영어가 돼야 물어보죠. 구단에 전화하고 난리를 쳤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피츠버그에 잠시 쉬었다 가는 비행기였어요. 청소를 했다고 하는데 아직까지 그 비행기가 왜 피츠버그에서 청소를 하고 다시 보스턴으로 향했는지 모르겠어요. 결국 타고 왔던 비행기에 다시 탑승한 후 보스턴에 무사히 도착했죠. 보스턴 공항에는 구단 직원이 제 이름을 적은 종이를 들고 서 있더라고요. 그 직원의 도움으로 리무진을 타고 곧장 캐나다 토론토 인근의 팀 지정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직원은 병원 인근의 호텔에 절 내려주고 호텔 키를 건넨 후 보스턴으로 돌아갔고요. 호텔 들어갔는데 영어를 못하니까 룸서비스도 시켜먹을 수가 없었어요. 냉장고 미니바에 있던 초콜릿바를 까먹으면서 허기를 달랬습니다.”
<채태인의 야구는 항상 어려웠다. 하나의 숙제를 해결하면 또 다른 숙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성격이 그를 여기까지 이끌었는지도 모른다.(사진=이영미)>
불행했지만 행운도 뒤따랐던 야구 인생
수술하고 이틀 동안 식사를 못한 채태인은 우연히 한국인을 만난 덕분에 한식으로 첫 끼를 해결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수술 후 보스턴으로 돌아와 처음으로 펜웨이파크를 구경했다는 그.
“멋있더라고요. 오랜 역사가 담긴 구장이라 그 느낌이 사뭇 달랐어요. 야구장의 한가운데 있는 마운드를 보며 나도 저 곳에 서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어깨 수술을 받았으니 재활만 잘하면 곧 공을 던질 수 있을 거란 자신도 있었어요. 그러나 플로리다로 다시 돌아가서 재활 훈련을 소화하는데 생각처럼 팔 상태가 좋아지지 않더라고요. 날씨는 덥지, 몸 상태는 제자리걸음이지, 점점 의기소침해지고 자신감이 떨어졌어요. 수술 후 투구폼도 변했고요.”
결국 채태인은 한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2002년 7월 귀국해선 2003년 사회복무요원으로 군복무를 대신했다. 보스턴에서 방출된 것으로 믿고 프로 입단을 알아보다가 서류상으로 여전히 보스턴 소속 선수라는 걸 알고 자신을 데려온 스카우트를 만나기 위해 호주를 찾아갔다는 대목에선 연민이 느껴졌다.
“통역이 없어 벌어진 해프닝이나 마찬가지였어요. 구단과 맺은 계약 내용을 제가 다르게 해석하고 있었으니까요. 구단은 병역 의무를 마쳤으니 팀에 합류하라고 했고, 전 더 이상 미국에서 야구할 자신이 없었어요. 존 디블이란 스카우트가 호주 야구대표팀 감독을 겸했는데 이 분을 만나야지만 제 신분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서 호주까지 찾아갔습니다. 그분은 절 미국으로 다시 돌려보내려 하셨고, 전 어떻게 해서든 한국에서 야구를 하고 싶다며 매달렸습니다. 제발 좀 풀어 달라고요.”
그렇게 해서 자유 신분이 된 채태인. 그는 프로야구 인기 부흥을 위해 고민하던 한국야구위원회(KBO)가 1999년 1월 1일 이후 해외에 진출해 5년 이상 경과된 선수가 국내 복귀할 경우 2년의 유예기간을 거쳐야 한다는 규약을 한시적으로 없애는 특별규정을 만든 덕분에 KBO리그에서 뛸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당시 송승준, 최희섭, 김병현, 추신수, 채태인, 이승학, 류제국이 그 대상이었다. 꼬이기만 했던 채태인의 야구 인생이 조금씩 풀려가는 순간이었다.
김응용 회장을 아버지처럼 따랐던 채태인
채태인은 김응용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과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부산상고 2학년 때 해태(KIA) 타이거즈 감독을 맡고 계시던 회장님을 처음 만났어요. 당시 회장님은 모교 후배들 중에 재능이 있는 선수들을 데려다 겨울방학 동안 광주에서 훈련을 시키셨는데 제가 뽑힌 거예요. 회장님의 광주 아파트에서 숙식하며 야구장에 나가 해태 타이거즈 형들이랑 같이 훈련했어요. TV로만 보던 이호준 선배가 제 옆에서 훈련했으니 얼마나 신기했겠어요. 회장님이 매일 고기를 사주셨어요. 한참 먹을 나이라 그 고기가 꿀맛 같더라고요. 전 회장님이 하나도 안 무서웠어요. 회장님한테 용돈 달라고 손을 내밀면 주저 없이 용돈을 쥐어주셨거든요. 한 번은 회장님이 물어보시더라고요. ‘넌 내가 안 무섭니?’라고요. ‘다른 애들은 내가 무서워서 말도 못 붙이는데 넌 내가 편하냐?’라고 물어 보셔서 ‘네. 저는 감독님이 할아버지처럼 편하고 좋습니다’라고 말씀드렸었죠. 회장님은 ‘희한한 놈 다 본다’라며 껄껄 웃으셨고요.”
그 인연이 삼성에서 구단 사장과 선수로 다시 이어졌고, 채태인은 10년 동안 푸른색 유니폼을 입고 ‘삼성맨’으로 희로애락을 반복했다.
<중학교 시절 포수 이대호, 투수 채태인이 롯데에서 같은 1루수로 만났다.>
대동중학교 포수 이대호와 투수 채태인
부산 출신인 채태인은 추신수, 이대호와 함께 성장했다. 특히 대동중학교 동창인 이대호하고는 배터리를 이뤘다고 한다. 포수 이대호, 투수 채태인으로 말이다. 그랬던 친구와 롯데에서 다시 만난 심정은 묘한 기분을 갖게 할 수밖에 없다.
“진짜 색다른 것 같아요. 대호랑은 중학교 때 같이 야구하고 20여 년 만에 다시 한 팀에서 만났는데 저보다 가진 게 많은 선수라 배우면서 공존해 가고 싶어요. 대호뿐만 아니라 롯데 선수라면 누구나 우리 팀 우승을 염원하잖아요. 친구와 함께 그 우승에 보탬이 되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삼성의 채태인이었을 때는 삼성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할 줄 알았다. 넥센 선수로 뛰었을 때는 넥센 이후의 팀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고 있다. 그는 이걸 운명이라고 말한다.
“인생이 정말 재미있어요. 제가 넥센에 있는 동안 가족들이 처가가 있는 부산에서 살았거든요. 이젠 더 이상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지 않아도 되잖아요. 제가 롯데에서 뛸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는데 운명이 이렇게 흘러가네요. 전 충분히 잘할 자신이 있어요. 이젠 야구를 어떻게 해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요. 사람은 다 가질 수 없잖아요. FA 선수로 대박은 못 쳤지만 야구로 대박을 쳐야죠. 그래야 한이 풀릴 것 같아요.”
베테랑 선수에 대한 인정과 공존
채태인은 FA 계약이 진행되는 동안 30대 중반 야구선수의 애환을 온몸으로 느꼈다. 각 팀마다 세대교체를 내세우며 30대 중반 FA 선수들과의 협상에 소극적인 행보를 나타내는 걸 보고 KBO리그에서 베테랑 선수가 서 있어야 할 자리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세대교체도 베테랑이 있어야 가능한 것 아닌가요? 누군가 이끌어줘야 젊은 선수들도 성장해갈 수 있는 거잖아요. 지금의 분위기는 파도 같아요. 파도처럼 한순간에 확 뒤집어 지는 듯한 변화가 찾아왔어요. 넥센 시절, 어느 날 이지풍 트레이너님이 기사를 프린트해서 나눠주시더라고요. 한 번 읽어보라면서요. 시카고 컵스 조 매든 감독이 베테랑 선수를 보는 시각이었습니다. 저 그 기사 읽고 감동했어요. 야구도 결국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누구나 나이는 먹는 삶이라면 같이 어울려 가는 방식도 고민해봤으면 합니다. 신구조화라는 말이 그냥 있는 말이 아니잖아요.”
채태인이 거론한 조 매든 감독 관련 기사는 2016년 10월, 기자가 시카고 컵스 경기를 보고 현장에서 작성한 글이었다(기사 참조). 그 내용 중 이지풍 트레이너가 채태인에게 건넨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시 포스트시즌을 치르고 있는 조 매든 감독이 현장을 찾은 기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단기전에서 베테랑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명한 부분이었다.
“사람들은 우리 팀의 신인들이 잘해주고 있다고 말하지만 고참들이 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역할들에 대해서도 주목해주길 바란다. 클럽하우스 안에서, 팀 안에서 중요한 모멘텀을 만들어내고, 서로 소통 가능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 경험이 전수되는 부분들은 고참들의 노력으로 원활하게 이뤄진다. 그들은(고참들은) 수치로 환산하기 어려운 기여와 헌신, 후배들을 다독이며 리더십을 생산해내고 있다. 이런 부분에 대해 책임감을 갖고 솔선수범하는 건 감독인 내가 아니다. 언제나 고참들이 먼저 나서고, 카메라와 팬들의 시선 밖에서 팀 전체를 책임감 있게 살피고 서로 돕는 분위기를 만든다. 그렇게 해서 ‘원 팀’이 되는 것이다. 안타 몇 개, 홈런 몇 개의 수치로만 고참들을 평가하지 말아 달라. 그들의 역할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다.” -시카고 컵스 감독 조 매든.
<올시즌 무조건 잘 할 수밖에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채태인. 롯데에서 베테랑의 진가를 제대로 발휘해주길 기대한다.(사진=이영미)>
<부산=이영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