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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출애굽기 16 : 1~4
1896년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설했던 월남 이상재 선생은 민족 운동가이자 청년 운동가였고, 63살의 나이에 YMCA 총무를 맡기도 했습니다. 유머가 풍부했던 그는 청년들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당시 보수적인 사람들은 노인이 청년들과 함께 지내는 것을 보면서 불만을 갖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내가 청년 되야지, 청년더러 노인 되라고 할 수는 없지 않느냐.” 기독교 민족계몽운동을 펼친 애국자인 그는 3.1 운동 직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을 때 이런 말로 대답했습니다.
심문자 : 이 운동은 누가 먼저 시작했는가?
답변 : 이천만 민족이 다같이 시작했다.
심문자 : 아니 구체적으로 말해라.
답변 : 하나님의 지시로 했다.
심문 : 당신이 한 것이 아닌가?
답변 : 나도 했다.
심문 : 연루자가 누구인가.
답변 : 연루자? 독립운동은 혼자 하는 것이지, 연루자가 있을 리 없다.
심문 : 무슨 흑막이 있지 않은가?
답변 : 흑막, 나는 백막으로 했지 흑막은 없다. 이만명이나 되는 경찰과 형사들이 전국의 거미줄처럼 벌려 있으면서 너희가 그것을 몰랐다는 것이 무슨 소리냐? 거기에 흑막이 있다하니, 이 문제가 커지니까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그 따위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심문자에게 아주 당당하게 대답했던 월남 이상재 선생은 3.1운동을 하늘의 뜻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총칼을 쓰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확신을 가졌고 3.1운동은 이천만 백성들의 마음의 발로요, 독립운동은 각자의 양심의 따라 자의로 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임과 동시에 이 지상의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되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싶다고 하면서 이 땅의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신앙인이란 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늘의 백성이 되면 될수록 이 땅의 백성으로 올바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말끝마다 하나님과 신앙을 거론하면서 자기 삶은 게으르고 거짓과 불의를 행하여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는다면 그것은 올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새벽기도와 철야기도는 열심히 하면서 사랑하는 남편과 자녀들의 아침식사를 챙기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올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이 땅의 삶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좀 더 확대해보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것이고, 축소해보면 가족과 친구와 이웃을 열린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이란 하늘의 계시를 보여주는 계시적 신앙임과 동시에 철저하게 땅의 종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종과 노예로 고생하던 애굽 땅에서 모세의 인도로 탈출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홍해를 건넜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먹을 물이 없을 때에 엘림의 12개의 샘물이 터져 나오게 하셨고, 70그루의 종려나무를 만나며 하시며 쉼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애굽 땅에서 배불리 먹던 음식을 생각하면서 모세와 하나님에게 불평과 불만을 터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자유보다 빵 한 덩어리가 소중했습니다. 비록 애굽에서는 종이였지만 그래도 배불리 먹을 수 있었기에 모세를 뒤따라가면서 말합니다. “자유가 밥 먹여 주는가? 해방이 배를 부르게 하는가?” 그들은 돼지처럼 먹는 것을 자유를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들로 전락했습니다. 풍족한 고기가 없을 때 자유의 꿈은 원망과 분노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미국의 독립 운동가였던 패트릭 헨리가 영국의 식민지 시절에 생명보다 더 갈구했던 것이 자유였기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명한 경구를 말했습니다. “나에게 자유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달라!” 자유란 생명과도 바꿀 수 있는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구호를 거꾸로 외칩니다. “빵 없는 자유는 싫다. 빵을 달라. 그렇지 않으면 노예를 택하겠다.” 자유를 얻으면 빵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이 빵만을 추구하게 되면 자유를 상실합니다. 자유를 상실하게 되면 빵까지도 없어지는 것이 우리의 삶의 역사입니다. 공산주의 혁명은 빵을 추구하는 혁명이었습니다. 인간의 자유와 인권을 제한했을 때 공산주의 혁명은 자유도 누리지 못하고 빵도 누리지 못한 왜곡된 역사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빵을 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청을 외면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 정신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철저하게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존재이면서 매일 밥을 먹어야 하는 육체적인 존재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 된 위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위에 실현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거룩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꺼져가는 등불과 갈대와 같은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육체를 찌르면 아프고, 한 끼라도 굶으면 배가 고파서 신음하고, 유혹이 다가오면 어찌할 줄 몰라서 당혹해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너무 쉽게 무너지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신앙의 인물에게도 먹고 마시는 문제는 소중한 것입니다. 자유도 빼앗기고 먹고 마시는 권리마저 빼앗기면 인간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교회에 다니엘과 같은 인물로 추앙받은 주기철 목사님이 감옥에 있을 때에 이야기입니다.
1944년 4월, 주 목사님의 사모님께서 마지막으로 면회를 가셨습니다. 주 목사님은 이미 차디찬 감옥 속에 5년 이상 갇혀 있었기에 자유가 없는 몸이었습니다. 그는 신앙적 자유뿐만 아니라 먹고 마실 육체적인 권리도 다 빼앗긴 상태였습니다. 이런 그의 마지막 유언은 우리의 가슴을 매우 아프게 합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내 대신 어머님을 잘 모셔 주시오. 따스한 숭늉이 한 그릇 먹고 싶소. 나는 하나님 앞에 가서 주님의 조선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겠소. 교회에 이 말을 전해주시오.”
주기철 목사님의 첫 번째 부탁은 마치 예수님께서 사도요한에게 내 어머니를 잘 모셔달라고 부탁한 모습과 같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부탁은 5년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따스한 숭늉을 먹지 못했기에 아내에게 숭늉 한 그릇을 먹고 싶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부탁은 교회가 다시 흥황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했던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부탁 중 따스한 숭늉을 먹고 싶다는 말씀은 무엇이든지 풍성하게 먹을 수 있는 우리의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합니다. 얼마나 따스한 숭늉, 따뜻한 국 한 그릇, 밥 한 끼를 먹고 싶으셨겠습니까?
애국자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민족을 향한 사랑 때문에 인간의 가장 큰 기본권인 먹고 마실 권리마저 포기하고, 한 끼의 숭늉까지 내려놓고 모든 것을 유보당한 사람들이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이런 민족의 역사 속에 순교자와 애국자의 헌신이 우리의 민족을 이만큼까지 자유와 민주와 인권을 존중하는 평화의 나라로 세웠기에 다시 한 번 마음속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봅니다.
예수님의 주기도문의 네 번째 간구문은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아주 분명하셔서 인간은 자유와 해방의 역사를 하나님으로부터 선물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육체적으로 먹고 마시는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말씀하실 때 거룩한 천상의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겨지십시오. 하나님 나라가 임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시면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인간을 위한 첫 번째 기도로 가르쳐 주시는 것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간구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이 인간의 먹는 문제에 얼마나 관심이 많은가를 알려줍니다. 인간의 먹거리에 하나님도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와 거룩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가 만나는 사람들과 먹는 것에 얼마나 큰 즐거움을 누리셨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친구인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밥상을 나누셨습니다. 이를 보면서 적대자들조차 “저 예수는 먹고 마시는 자다. 먹고 마시는 것만을 즐거워하는 자다.”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향해서 별명까지 붙여주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지상의 삶에 대한 관심과 생존권인 먹고 마시는 문제에 대한 깊은 관심을 표명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다가 5천명이나 되는 많은 군중들이 배가 고프니 그들을 다 앉히고 나서 오병이어의 기억을 통해 배불리 먹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실 때 ‘일용할’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뜻은 필요한 만큼의 양식, 적절한 만큼의 양식, 육체적인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양식을 하나님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일주일의 양식, 한 달의 양식을 한꺼번에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양식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필요한 양식을 하나님께 구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먹고 있는 양식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이요, 하나님의 축복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양식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양식을 차고 넘치게 매점매석해서 나만 배불리 먹기 위해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먹을 만큼의 일용할 양식만 구하라고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양식을 인생의 초점으로 삼고, 물질을 인생의 목표로 삼으면 인간은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고 교만한 자가 됩니다. 마치 어리석은 부자가 “내가 곡식이 많고, 먹을 것이 많으니 더 창고를 늘여서 쌓고 또 쌓자. 내가 평생 먹을 것이 있도다.”라고 자랑할 때처럼 말입니다. 이런 부자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네 인생을 오늘 데려간다면, 네가 그렇게 쌓아놓은 그 창고에 곡식들이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대통령도 하루에 세끼를 먹고, 재벌도 세끼를 먹고, 평민들도 세끼를 먹으면 풍족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오해하고 양식을 우리 삶의 목표로 삼으면 더 이상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양식이 너무나 부족하면 물질에 대한 염려와 근심으로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잠언 30장 8-9절을 보면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 함니이다”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하는 이유도 내게 주신 것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며 감사할 줄 알면 참으로 축복된 삶이 되기 때문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달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현실적인 요청이기도 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지금이 중요합니다. 어제 잘 먹은 것, 일주일 뒤에 잘 먹을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먹고 마실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 ‘나에게’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에게’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만 홀로 잘 먹는 것이 아니라 함께 먹는 것입니다. 나는 잘 먹는데 다른 사람은 배고프고 굶주리면 그것은 올바른 삶의 축복이 아니라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서 한때 저항시인이었던 김지하 씨는 이런 시를 쓰고 있습니다.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나누어 먹는 것입니다.”
밥의 소중함을 함께 나누고 먹고 마실 때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합니다. 주기도문을 쓴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는 사람이 주기도문을 드릴 때 이런 마음으로 하라고 가르쳐줍니다.
“기독교는 당신의 돈에 대해, 당신에 재정생활에 대해 관심이 있다. 구원은 물질적인 것이다. 확실히 영성은 물질적인 것에 관계되며 우리는 돈보다 더 영적인 것은 없다고 믿는다. 이 기도로 기도하기를 배움으로써 우리는 나에 돈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운다.”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 어떻게 먹을 것인가에 그 사람의 영성이 반영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영성에 의해서 무엇을 추구하고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가 다릅니다. 돈에 취해 있는가, 아니면 돈을 사용할 줄 아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영성에 의해서 규정됩니다. 성 바실리우스(St. Basil the Great)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러분의 집에서 썩고 있는 그 빵은 굶주린 이들의 것입니다. 여러분의 침대 아래 곰팡내를 풍기고 있는 그 신발은 신발 없는 이들의 것입니다. 여러분에 옷장에 쌓여 있는 그 옷은 헐벗은 이들의 것입니다. 여러분의 금고에서 값이 떨어지고 있는 그 돈은 가난한 이들의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 세끼를 먹으면 만족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밥을 먹으면서 투정하면 주지 말고 굶기세요. 밥 먹으면서 투정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세끼 먹으면 감사할 줄 아는 자녀들로 키워야 됩니다. 양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 돌리면서 먹을 때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임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먹도록 해야 합니다. 하루에 세끼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내가 남을 위해서 살 수 있는 넉넉한 삶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남을 섬길 수 있고 함께 나눌 수 있는 축복이 내게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릴 때 우리를 통해 우리 주위의 고통 받는 사람들의 사랑의 역사, 나눔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밥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먹을 것이 없는 북녘의 백성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어린아이들이 못 먹어서 마르고, 고통 받는 우리의 백성들이 아직도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눌 수 있을지 3.1절 88주년을 앞두고 생각해 봅시다. 앞으로의 세대가 나라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에게 주신 축복을 감사하면서 살 때 우리를 통해서 놀라운 하나님 나라가 이 땅 위에서 이루어 질 것입니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해 주시고 우리에게 영적인 하나님 나라의 자유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일용한 양식을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 주위에 먹고 마시는 문제에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다면 사랑으로 나눌 수 있는 넉넉한 예수님의 마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저 북녘에 지금도 헐벗고 굶주림에 고통 받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주님의 사랑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축복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