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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제가 알기로 아라한은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사향사과의 마지막 아라한과를 얻은 분이고, 벽지불은 부처님이 나시지 않은 때 홀로 부처님처럼 12연기를 보고 깨달아 벽지불과를 얻은 분이며, 보살은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등각의 51위 등각까지의 보살의 과위를 얻은 분이고, 불은 마침내 52위 묘각의 깨달음으로 부처가 되신 분입니다. 이 네 성스런 분들의 차별은 대체 어디서 차이가 나는 것인가요?
저는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깨달음에서 차이가 나는 것인가? 그렇다면 같은 것을 깨달을 것인데 그 깨달음이 차이가 나는 이유는 뭘까? 수행방법 때문일까? 스승의 가르침 때문일까? 타고난 근기 때문일까? 행함에서 차이가 나는 것인가? 성문은 팔정도를 닦고 벽지불은 연기를 닦고, 보살은 육바라밀을 닦고, 불은 닦음이 끝난 분이니... 이같은 행함의 차이는 깨달음의 차이 때문인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가? 예를 들어 원력이라든가, 다른 무엇때문이라든가...?
답변입니다.
먼저 아라한이나 벽지불과 부처님의 차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저술 가운데 <화엄경을 머금은 법성게의 보배구슬>에서 인용한 적이 있는데, <마하반야바라밀경>에 대한 용수 스님의 주석서인 <대지도론>에서는 '성문, 연각의 이승(二乘)'과 '부처', 그리고 '천신'의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부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갖추고 있다. 첫째는 대공덕의 신통력이고 둘째는 모든 번뇌가 소멸한 지극히 청정한 마음이다. 천신들의 경우 복덕의 신통력이 있기는 하지만, 모든 번뇌를 소멸하지 못했기에 그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다. 또,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통력도 역시 적다. 그리고 성문과 벽지불은 비록 번뇌를 소멸하여 그 마음이 청정하지만, 복덕이 약하기 때문에 그 세력 역시 적다. 부처는 두 가지를 완전히 갖추었기 때문에, 누구든 이기지만, 다른 자들은 모든 자를 이기지 못한다.
復次 佛有二事 一者大功德神通力 二者第一淨心 諸結使滅 諸天雖有福德神力 諸結使不滅故 心不清淨 心不清淨故 神力亦少 聲聞 辟支佛雖結使滅 心清淨 福德薄故力勢少 佛二法滿足 故稱勝一切人 餘人不勝一切人.”, T25, p.73b.
- <화엄경을 머금은 법성게의 보배구슬>, pp.252-253
부처님은 '복덕'과 함께 '번뇌가 소멸한 청정한 마음'을 모두 갖추고 계시지만, 천신은 '복덕'만 갖추었고, 성문과 벽지불의 이승은 '번뇌가 소멸한 청정한 마음'은 갖추고 있지만, 복덕의 세력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이를 비교하여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질문에서 아라한과 벽지불을 거론하셨는데, 이는 위에 인용한 <대지도론>의 경문에서 말하는 '성문과 연각'에 해당합니다. 복덕은 이타행을 통해 축적되는데, 부처의 경우 3아승기 100대겁에 걸친 보살로서의 이타행을 통해 수많은 중생을 도우면서 복덕을 축적했지만, 성문이나 연각은 전생에 그런 보살행을 하지 않았기에 복덕의 힘이 적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아라한과 벽지불이 부처님과 다른 점은 복덕의 힘이 없거나 적다는 것입니다.
복덕의 힘이 있어야 보다 많은 중생을 교화할 수 있습니다. 보살행의 복덕은 다른 중생을 도움으로써 축적되는 '인연(因緣) 복'입니다. 3아승기 100대겁의 오랜 세월 동안 윤회하면서 수많은 중생을 도왔기에, 내가 나중에 성불하여 가르침을 펼 때, 그렇게 도움을 받았던 중생들이 나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가르침을 들어서 제도되는 것입니다. 속되게 표현하면 '연예인들의 오빠 부대'를 만들기 위한 수행이 3아승기 100대겁의 보살행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아라한이나 벽지불은 그런 복덕의 힘이 적습니다. 부처님은 32상 80종호의 관상(속되게 표현하면, '얼짱 몸짱')을 갖추셨기에 그 모습만 뵙고도 추종하며 가르침을 들으려 하지만(威儀說法,위의설법), 아라한과 벽지불은 오직 지혜만 추구하여 번뇌를 제거한 분들이기에, 얼굴도 못생기고 체구도 초라하여 남에게 무시를 당할 수도 있으며, 남들이 그 가르침을 들으려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화의 힘이 약합니다.
용어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아라한, 성문, 벽지불(연각, 독각), 부처에 대한 호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티벳불교에서의 정리)
성문 아라한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워서 아라한이 된 분
연각 아라한 - 벽지불 : 불교를 모르지만 홀로 세상을 관찰하여 아라한이 된 분
대승 아라한 - 부처님
즉, 벽지불(연각, 독각)이나 부처님 모두 아라한이십니다. 초기불전의 부처님 역시 당신을 아라한이라고 부르십니다. 따라서 위와 같이 정리할 경우 용어의 혼동을 피할 수 있습니다.
또 질문에서 "보살은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등각의 51위 등각까지의 보살의 과위를 얻은 분이고, 불은 마침내 52위 묘각의 깨달음으로 부처가 되신 분"이라고 쓰시면서 보살과 부처의 차이, 등각과 묘각의 차이에 대해 물으셨는데, 보살행의 인(因)을 닦아야 부처의 과(果)에 이른다는 점에서 화엄 52위 가운데,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등각의 51위'는 인위(因位)에 해당하고, 마지막의 제52위인 '묘각'은 과위(果位)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등각이라고 하더라도 아직은 보살의 단계이고, 묘각의 단계가 되어야 부처인 것입니다. 이러한 52위의 구분은 <보살영락본업경>의 42위(位) 이론과 <화엄경>의 경문을 종합하여 정리한 것인데, <보살영락본업경>에서는 10신(十信)을 제외한 42위를 "十住 十行 十向 十地 無垢地 妙覺地"라고 기술합니다. 즉, 등각지(等覺地)를 무구지(無垢地)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살영락본업경>에서는 이들 42위에 대해 설명하는데 이 가운데 십지의 마지막 단계인 법운지와 무구지로 표현된 등각지에 대한 설명을 모두 인용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법운지
불자여, 보살이 이때 중도제일의제와 대적인하품(大寂忍下品) 속에 들어가서 부처님의 행처(行處)를 행하고 천보상(千寶相)의 연꽃 위에 앉아 부처님의 수기를 받고 부처님께서 행하신 교화의 공덕을 배우고, 두 가지 습기를 끊고 조복하여 큰 믿음을 성취하느니라.
佛子!菩薩爾時入中道第一義諦,大寂忍下品中行,行佛行處、坐千寶相蓮花、受佛記位、學佛化功,二習伏斷大信成就。
진제(眞際)와 한가지로 법계에 평등하고 이제(二諦) 일상(一相)의 일체 공덕을 갖추고 중생의 근(根)에 들어가 무량한 영락의 공덕을 일시에 평등하게 일체 형상을 나투기 때문에 법운지(法雲地)라고 이름 하느니라.
同眞際、等法界,二諦一相,具一切功德入衆生根,無量瓔珞功德一時等現一切形相,故名法雲地。
무구지
불자여, 보살이 그때 대적문중품인관(大寂門中品忍觀)에 머물러 공행(功行)이 만족하고, 큰 산의 누대[大山臺]에 올라 백천 삼매에 들어가 부처님의 의용(儀用)을 모으지만, 다만 누적된 과[累果]의 무상한 생멸만은 있느니라.
佛子!菩薩爾時住大寂門中品忍觀,功行滿足登大山臺,入百千三昧,集佛儀用唯有累果,無常生滅。
온갖 마음의 무위행이 십지를 지나고, 요해(了解)하는 것이 부처님과 마찬가지라 부처의 자리에 앉느니라. 그 지혜는 두 가지의 상(常)ㆍ무상(無常)과 일체의 법의 경계를 보나니,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부처님과 같이 됨을 이름 하여 부처님을 배운다고 하느니라.
心心無爲行過十地解與佛同,坐佛坐處。其智見二常無常一切法境,當知如佛,名爲學佛。
하지(下地)의 일체의 보살은 이 보살에 대해 따로 알 수가 없나니, 부처에 있어서는 보살이라고 이름하고, 하지의 보살에게 있어서는 부처라고 이름 하느니라.
下地一切菩薩,於此菩薩不能別知。於佛名菩薩,於下菩薩名佛。
왜냐 하면 이 보살이 대변력(大變力)으로써 목숨이 백 겁, 만 겁을 머무는 동안에 부처님의 교화를 지어 나타내되, 한 번 태어나고, 도를 얻고, 법륜을 전하고, 무여멸도(無餘滅度)에 들어가고, 팔법륜(八法輪)을 설하는 것이 부처를 닮았으되 부처가 아니며, 모든 것이 부처와 같기 때문에 나아가고 멈추는 위의가 일체법과 같으니라.
所以者何?是菩薩以大變力,住壽百劫萬劫現作佛化,初生、得道、轉法輪、入無餘滅度。說八法輪,似佛非佛,一切佛等故。威儀進止一切法同。
이 백천 삼매 중에 머물러 이와 같이 부처의 행을 하기 때문에 금강삼매에 들어가며, 일상무상(一相無相)하고 적멸무위(寂滅無爲)가 되기 때문에 무구지(無垢地)라고 이름 하느니라.
住是百千三昧中,如是佛行,故入金剛三昧,一相無相寂滅無爲,故名無垢地。
불자여, 묘관상인(妙觀上忍)은 매우 적정하고 무상(無相)인데 다만 일체 중생의 연으로 선법(善法)을 생하기 때문에 또한 스스로 일체 공덕을 가지기 때문에 불장(佛藏)이라고 이름 하느니라. 또한 일체법을 고요히 비추되[寂照] 부처로부터 이하의 일체 보살은 조적(照寂)하느니라.
佛子!妙觀上忍大寂無相,唯以一切衆生緣生善法,亦自持一切功德,故名佛藏,而寂照一切法,自佛以下一切菩薩照寂。
이런 까닭에 불자여, 내가 옛날에 제사선(第四禪) 중에서 팔억의 범천왕을 위하여 여래는 무심무색(無心無色)으로서 또한 일체법을 적조(寂照)한다고 설하였느니라.
是故佛子!吾昔第四禪中爲八億梵天王,說寂照如來無心無色而寂照一切法。
위의 밑줄 친 경문에서 보듯이 부처(묘각)가 볼 때는 무구지(등각지)의 수행자가 보살이지만, 아래 단계의 보살들은 무구지(등각지)의 보살을 부처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또, 등각지를 포함한 일체의 보살은 일체법을 '조적(照寂)'하지만, [묘각위에 오른] 여래(부처)는 일체법을 '적조(寂照)'한다는 점에서 보살과 다르다고 합니다. 조적은 '비추어 고요하게 만든다.'는 의미일 것 같고, '적조'는 '고요히 비춘다'는 의미일 것 같습니다.
<선문정로>에 실린 성철 스님의 다음과 같은 설명은 위에 인용한 <보살영락본업경>의 경문에 근거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영락경』에서 말씀하되, 등각 보살等覺菩薩은 조적照寂이요 묘각세존妙覺世尊은 적조寂照라 하였다. 즉금卽今 8지의 무생도 또한 조적照寂이니, 그런 고로 만약에 적조寂照를 증득하면 불타와 동일한 연고이니라. ①瓔珞에 云 等覺은 照寂이요 妙覺은 寂照라 하니 今八地無生도 亦照寂이니라 故로 若得寂照하면 卽同佛故니라. (①『華嚴鈔』 69, 『大正藏』 36, p.551b)
* ①『영락경』에 “등각 보살은 고요함을 비추는 조적照寂이고, 부처님은 비춤을 고요하게 하는 적조寂照다.”고 나온다. 지금 제8지 보살의 무생도 역시 고요함을 비추는 조적照寂이다. 만약 적조寂照을 증득하면 부처님의 경지와 같게 된다.
또 마조 스님의 제자인 대주 혜해(大株慧海)스님의 <돈오입도요문론>에 실린 등각과 묘각의 차이에 대한 설명과 이에 대한 성철 스님의 강설을 모두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원문]
問 : 經云 等覺妙覺이라 하니 云何是等覺이며 云何是妙覺고
答 : 卽色卽空이 名爲等覺이요 二性空故로 名爲妙覺이며 又云 無覺無無覺이 名爲妙覺이니라.
“경에 이르되 등각ㆍ묘각이라 하니 무엇이 등각이며 무엇이 묘각입니까?”
“색에 즉하고 공에 즉함이 등각이요 두 가지 성품이 공한 까닭에 묘각이라 하며, 또 이르되 깨달음이 없음과 깨달음이 없음도 없음을 일컬어 묘각이라 하느니라.”
[강설]
‘색에 즉하고 공에 즉한다‘ 함은 공이 곧 색이고 색이 곧 공으로서 서로서로 무애자재한 것을 등각이라 하니 이것은 쌍조를 말하는 것이며, 두 가지 성품이 공하다 함은 쌍차를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는 색에 즉하고 공에 즉함이라는 말이 색즉시공 공즉시색으로서 쌍차하고 쌍조한 차조동시한 뜻으로 말하였는데, 여기서는 왜 이것을 등각이라 하고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을 묘각이라고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서 표현하는 등각ㆍ묘각이라는 것은 우리가 불법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십지ㆍ등각이라고 말하는 그 등각이 아니고 공부를 완전히 성취해서 중도를 정등각한 등각을 말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혼동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중도를 정등각한 등각을 말하는 것이므로 양변을 완전히 여의어서 색에 즉하고 공에 즉하지 않을 수 없고, 색에 즉하고 공에 즉하면 이것이 두 가지 성품이 공한 것입니다. 색에 즉하고 공에 즉한 면을 등각이라 하고 두 가지 성품이 공한 면을 묘각이라고 표현하였지만 등각이 즉 묘각이고 묘각이 즉 등각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하는 차제향상에서 말하는 십지ㆍ등각의 등각이 아닌 줄 바로 알아 혼동해서는 안 되며, 그 뜻이 중도를 등각했다, 중도를 묘각했다는 뜻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다음에는 누구든지 색에 즉하고 공에 즉함이 되고, 두 가지 성품이 공할 것 같으면 깨달음이 없음과 깨달음이 없음이 없음도 자연히 되는 것이지, 깨달음이 없음이 되어서 깨달음이 없음이 없다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무슨 깨친 것이 있다고 하니까 깨친 것이 있는 것으로 집착하는 사람이 생기게 되면 곤란합니다. 그렇게 되면 두 가지 성품이 공한 사람도 아니고 색에 즉하고 공에 즉한 사람도 아니며 깨친 사람도 아닙니다. 실제로 깨친다 함은 깨침도 없고 깨침이 없다는 그것까지도 없다는 말이니 그것을 자성청정심이라 하고 구경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원문]
問 : 等覺與妙覺이 爲別가 爲不別가
答 : 爲隨事方便으로 假立二名이라 本體是一이요 無二無別이니 乃至 一切法이 皆然니라.
“등각과 묘각이 다릅니까? 다르지 않습니까?”
“일에 따라 방편으로 거짓 두 가지 이름을 세운 것이니 본체는 하나요, 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으니, 내지 일체법이 모두 그러하느니라.”
[강설]
‘본체는 하나’란 진여자성 중도를 말하는 것이니 이것 내놓고 따로 등각이 따로 없고 묘각이 따로 없습니다. ‘일체법이 그렇다’고 한 것은 깨친 데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진여를 확철히 깨쳐서 진공을 얻으면 항사묘용이 벌어지는데, 이것을 팔만사천뿐만 아니라 여러 천만의 차별로써 표현한다 하여도 본체는 진여자성 하나뿐으로서 딴 것이 없습니다. 등각ㆍ묘각만 가지고 하는 말이 아니라 일체법이 다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 성철스님 법어집, <돈오입도요문론 강설>에서
등각과 묘각의 차이에 대해서는 위에 소개한 <보살영락본업경>의 경문이나, 성철 스님의 <선문정로> 또는 <돈오입도요문론강설>을 참조하여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말씀 드리면, 화엄의 보살 52위 수행은 '이념적인 수행론'이기에, 대승 불교도로서 보살행을 지향할 때 좌표로 삼을 수는 있어도, 현실적 수행에 적용할 수도 없고, 적용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상 답변을 마칩니다.
첫댓글 귀하고 고마우신 말씀 감사합니다.
말씀에 입각하여 깊이 숙고하여 보겠습니다.
심우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