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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 문제는 더 복잡해질 문제로 자리 잡을 것입니다. 바로 발달장애계 일부에서 제기된 ‘그림투표용지’ 문제입니다.
법원에 제출된 발달장애인 그림탄원서.ⓒ한국피플퍼스트
한국피플퍼스트 등이 제기한 그림투표용지 제안 건은 같은 발달장애인으로서 원칙적인 부분에서는 찬성하지만, 사실 자세한 부분에서는 피플퍼스트와 방향이 다른 지점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그 ‘자세한 부분’을 짚어보겠습니다.
먼저 한국인의 투표 스타일이 대체로 ‘줄투표’ 성향이 짙다는 점이 있습니다.
‘줄투표’란, 가장 큰 선출 대상을 중심으로 다른 투표도 같은 정당에 연결되어 투표하는 일종의 ‘자동 계산식’에 가까운 투표 방식입니다. 특히 한국의 정치 풍토가 미국식 양당제 정치로 흐르고 있고 비례대표 제도가 있다 보니 이런 ‘줄투표’ 성향이 더 짙어집니다.
지난 제22대 총선 당시의 ‘지민비조’(지역구는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는 조국혁신당에 투표하자)와 비슷한 방식의 투표 방식도 있었지만, 그나마 이런 경우는 정당 성향은 비슷한데 강경-온건 수준의 차이 정도뿐이니 결국 ‘줄투표’와 비슷할 것입니다. 이런 ‘줄투표’ 성향은 최근에 옅어지기는 하지만,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투표 양식이기에 주의해야 하는 지점입니다.
발달장애인을 위한 그림투표용지에서 이 줄투표 문제는 또 다른 문제가 있는데, 바로 같은 정당이라는 표시를 결국 할 수 없게 된다는 점입니다. 피플퍼스트가 요구하는 그림투표용지는 입후보자의 사진을 싣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될 경우 ‘이 사람들이 같은 당이야?’라는 후보자 정보 파악에 어려움이 있을 지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투표 대상이 많은 지방선거나 국회의원 비례대표 선거 같은 경우에서는 복잡한 문제가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지방선거는 선출 대상이 너무 많아서 투표도 제1조와 제2조 투표로 나뉠 정도로 투표해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광역-기초 자치단체장, 교육감, 광역-기초 지역구의원, 광역-기초 비례대표의원, 이렇게 총 7인을 투표해야 하기에 결국 얼굴 사진을 실으면 “얘가 얘고 쟤가 쟤야?”라는 구분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발달장애인의 인지 특성상 얼굴 하나 외우기도 어려운데, 투표해야 할 7명의 얼굴을 외는 것이 쉬울까요? 어려울 것입니다.
국회의원 비례대표 선거를 이런 방식으로 한다면, 아마 네덜란드 하원의원 선거 투표용지보다 거대해질 것입니다. 지난 제22대 총선에 비례대표 명단을 제출한 정당은 총 38개 정당이고, 실질적으로는 더 많았습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진보당·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기본소득당·사회민주당은 당시 새진보연합으로 일시적 연합을 했던 상황) 이 4개 정당이 더불어민주연합이라는 위성정당 형식으로 일종의 공동명부를 채택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38개 정당의 비례대표 후보자 얼굴을 모두 싣는다면 거의 투표가 더 어려워질 공산이 클 것입니다. 물론 네덜란드 하원의원 선거와 한국 비례대표 국회의원 선거의 후보자 편성 및 투표 방식은 네덜란드는 완전 개방식, 한국은 완전 폐쇄식이기 때문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요.
세 번째로 이러한 방식에서 개표 과정 등의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투표는 편리할 수 있어도 결국 개표로 가면 길어지는 문제도 있고, 현재의 자동개표기는 전혀 사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예 처음부터 새로 만들어야 하는 문제가 있어서입니다. 수개표를 한다고 셈쳐도 이 개표 시간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공산이 큽니다.
네 번째로 그림투표용지를 제작한다고 해도 결국 ‘크기를 얼마큼 해야 하나?’ 같은 투표용지 제작 문제도 있습니다.
일단 컬러 인쇄를 해야 하는지 아닌지 같은 제작 과정의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특히 제작 비용 문제와 후보자들이 사진을 제출하지 않았을 경우 같은 변수도 고려해야 합니다.
자폐성장애를 가지고 있으며 영국 총선에 출마하기도 한 영국 발달장애인 활동가 Nariese Whyte 씨. ⓒNariese Whyte 제공
스코틀랜드에서 실제로 사용되고 있는 투표용지 양식. 후보자 얼굴 사진 대신 소속 정당의 로고를 새겼다. ⓒ영국 정부(legislation.gov.uk)
특히 지난 영국 총선에 스코틀랜드 녹색당 지역구 후보로 출마하기도 한 영국 발달장애인 활동가 나리에세 와이트 씨(Nariese Whyte, 일전에 클로이 와이트 -Chloe Whyte- 라고 소개한 인물인데, 그 인물이 자신의 이름을 ‘나리에세 -Nariese-’로 바꿨다고 알려왔습니다.)에게 이 사안에 대해 필자가 물어보니, “영국 스코틀랜드 지역에서는 그림투표용지 제도를 시행 중이지만, 정당의 로고를 새긴다”라고 답을 들었습니다.
이유를 물어보니, “편향된 투표의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인데, 예를 들어 누군가가 자신의 사진으로 후보자가 흑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우려가 있어서라고 합니다. 실제로 얼마 전까지 영국 총리를 지낸 리시 수낵 전 총리는 인도계였을 정도로 영국 정치에서는 백인 이외의 인종 출신들의 약진이 두드러진 상황이니 더 그렇습니다.
다섯 번째로 국민투표와 같이 입후보자가 아닌 결정 사항을 묻는 투표에서는 그림투표용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발달장애계는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현재 국민투표는 관련 법령 개정 문제로 시행될 수 없지만, 주민투표는 가끔 시행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에서 찬성-반대 또는 결정 내용에 따라 그림투표용지를 어떻게 제작해야 하는지 가이드라인을 발달장애계가 제시하지 않아서, 이 문제에 대한 발달장애계의 답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끝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발달장애인의 투표도 결국은 ‘정책선거 기반’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현재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투표는 가급적 정책선거 기반으로 해주길 바란다는 공식 견해가 있습니다. 투표는 인물보다 정책이 중요한 판단 잣대가 돼주길 바란다는 점을 짚은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서 인물이 좋아도 정책이 형편없다면, 그림투표용지로 후보자 사진만 잘 나왔지만, 부실한 정책이면 과연 이것이 효능감이 있을까요? 연예인 인기투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발달장애인의 투표도 정책을 기반으로 투표할 수 있는 대안이 필요한 것이지, 후보자 얼굴 사진으로 판단하는 투표는 실제로 선거 관계자들이 그림투표용지 반대 사유로 거론한 근거 중 하나였습니다.
물론 정책선거를 향한 발달장애인을 위한 쉬운 정보 제공이 아예 시도된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소소한소통에서 시도한 발달장애인을 위한 주요공약 설명자료 등은 이러한 전달 방식이 가능함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단지 선거법상 특정 페이지에 공개하는 방식으로만 가능했었을 뿐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발달장애인에게 그림투표용지만 필요한 것이 아닌, 쉬운 정책자료 등 뒷받침되는 ‘발달장애인도 정책선거를 할 수 있게’ 하는 인프라 조성이 더 필요할 것입니다. 특히 국가의 최대 선거인 대통령 선거 정도에서는 발달장애인을 위한 텔레비전 토론회 해설 등도 함께 진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나리에세 씨는 텔레비전 토론회를 두고선 “(토론회가 복잡하며 토론 중 중요한 부분을 자신마저 놓치기 쉬워서) 자폐인으로서 때때로 화가 난다”라고 아쉬움을 토로했지만 말입니다.
이러한 ‘쉬운 정책 정보’는 원칙적으로 후보자들이 제공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필요할 경우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등에서 일괄 수집 후 발달장애인을 위한 요약집 같은 것을 별도 제작 및 배송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시행 중인 점자 공보물 같은 방식을 준용하는 것도 가능할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피플퍼스트 등 발달장애계 일부가 제기한 그림투표용지가 짚어야 할 ‘어려운 지점’들은 이렇습니다. 일단 결과적으로 그림투표용지 도입은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신중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의외로 준비해야 할 요소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것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인 후보자 얼굴 대신 정당 로고만을 새기는 스코틀랜드 방식으로의 도입, 발달장애인을 위한 쉬운 정책 정보 제공이 먼저임을 기본 원칙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이미 단 1표 때문에 투표의 결과가 뒤바뀐 사례도 엄연히 존재하니, 발달장애인이 투표를 안 해서 투표 결과가 아예 바뀔지도 모르는 것이 세상일일 것입니다. 결국은 발달장애인도 투표는 해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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