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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趾光의 名判決
肅宗時代 李趾光(讓寧大君 宗孫)은 政事를 잘 處理 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그가 淸州 고을에 員님으로 있을 때 하루는 스님이 抑鬱하다고 訟事를 올렸다.
"小僧은 절에서 부처를 모시는 한便, 종이를 만들어서 겨우 목숨을 이어가는 處地이온데 아뢰옵기 惶悚하오나, 오늘 場날 종이를 팔려고 지고 내려와서 場터 길가에 세워두고 뒷間을 다녀온 사이 그 종이가 없어졌습니다. 도무지 찾을길이 없으니 賢明한 員님께서 그 종이 보따리를 좀 찾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스님은 눈물을 흘리면서 懇切한 呼訴를 하였다. 그 모양을 본 李趾光은 꾸짖어 말하기를
"네가 잘못 지켜 잊어버려 놓고 只今 여기와서 어떻하란 말이냐? 빨리 나가지 못할까?"하고
訟事를 듣지 않으니 스님은 氣絶하다시피 하여 꿇어 엎드리어 다시 말하기를
"종이 잘못하여 잊어버린것은 제 不察을 認定 하오나 그것을 팔아 가야만 그 돈으로 할일을 다하여 小僧의 本分을 다할수 있습니다. "
이런式으로 哀乞伏乞 하는 것이었다. 李趾光은 그 말을 듣고는 惻隱 하기도 하였으나 어쩔 道理가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道理가 없으니 썩 물러가거라" 하고 命令하니 그 스님은 慨歎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官家를 떠났다.
스님을 돌려 보낸 얼마後 李趾光은
"여봐라 오늘 날씨도 좋고 땡중 때문에 寡人의 마음도 便치 못하니 어디 逍風이나 가서 마음이나 풀자" 하고서 官妓들을 데리고 隣近의 亭子로 놀러 갔다. 한참 재미있게 술을 마셔가며 놀다가 집으로 돌아 오는 길이었다. 歸家길에 長丞을 만났는데 員님이 지나가는 데도 절을 하지 않는 長丞을 보고 周圍 官卒들에게
"어찌 저놈은 員님이 지나가는 데도 절을 하지 않는가?"하고 물었다.
官卒들은 員님이 술에 醉해서 그러는줄 알고
"員님 그것은 사람이 아니고, 나무로 만든 長丞입니다"하고 아뢰니
"아무리 長丞이라도 그렇지 員님이 지나가는데 어찌 人事를 하지 않느냐? 저놈을 當場 묶어서 獄에 가두어라. 來日 嚴한 罰을 내리리라"하고 命令을 내렸다.
荒唐한 命令에 官卒들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員님의 命令이라 어쩔 수 없었다. 그리하여 長丞을 묶어서 獄에 가두었다. 그 다음 李趾光이 말하기를
"저 놈이 밤中에 逃走할 虞慮가 있으니 밤에도 잘지켜라" 하고 命을 내렸다. 하지만 官卒들은 醉中에 한소리겠지. 그리고 長丞이 어째 逃亡가노 이렇게들 생각하고는 모두 自己들 處所로 돌아 갔다.
밤中에 李趾光은 側近을 시켜서 長丞을 훔쳐내어 몰래 숨기게 했다. 그 다음날 날이 밝자
"어제 無禮하게 굴다가 잡혀 온 長丞을 끌어 내어 嚴罰에 處하도록 하라" 이렇게 命을 내렸다.
官屬들이 四方八方으로 찾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큰일 났다. 이 놈의 長丞이 어디를 갔지. 찾아야 찾을수 없었다. 李趾光은 더 嚴하게 재촉했다.
"빨리 끌어 내어 嚴罰을 내리지 않고 무엇하느냐?"
그러나 長丞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자 李趾光은,
"어찌 너희들은 員님의 命令을 지키지 못하고 長丞을 逃亡가게 했느냐. 長丞을 빨리 찾아서 罰을 내리던지 아니면, 그 罰로 너희 官卒들이
罰金으로 종이10卷씩을 가져 오던지 하라. 萬若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 棍杖 20대씩이다."
官卒들은 어쩔 수 없이 종이를 求하느라 精神이 없었다. 갑자기 종이 값이 뛰기 始作하고 구석구석의 종이가 다 쏟아져 나왔다.
얼마되지 않아 官家 마당에 종이가 山처럼 쌓였다.
李趾光은 며칠前 찾아 왔던 스님을 불러 오게 하였다.
"네가 잃은 종이를 찾을 수 있느냐?" "예, 찾을 수 있습니다"
스님은 바로 自己가 만든 종이는 찾았다. 結局 종이값이 이를 훔쳐 감추었던 盜賊이 종이를 몰래 팔았다가 잡혀 嚴罰을 받았다.
그리고 남은 종이는 自己 돈주고 사서 上納한 官卒들에게 되 돌려 주었다.
🍎 (奇人) 李土亭 先生
朝鮮 中宗 때. 周易八卦에 能通한 馨仲 李之菡(1517~1578)이 있었다. 李之菡은 그 有名한 花潭 徐敬德 門下에서 學問을 했고, 한때는 牙山縣監의 벼슬에도 있었으나 適性이 맞지 않는다 하여 얼마 되지 않아 그만두고 말았다. 어려서부터 남다르게 聰明하고 남 돕기를 좋아했던, 그는 成長하여 結婚을 해서도 自身보다는 남을 爲하는데 더욱 힘을 썼다.
婦人과 子女들은 남다른 苦生을 함에도 不拘하고 不滿을 吐하거나 그것으로 因해서 싸움하는 法은 絶對 없었다. 나이가 더 할수록 學問과 人格이 높아감에 따라 비록 없이 살긴 해도 그를 따르고 尊敬하는 사람이 날로 늘어 그들은 그들대로 어려운 일이 있으면 李之菡의 助言대로만 實行했다.
醫學이 發達되지 않았던 時期였으므로 몸이 아파도,장사가 잘 안되어도 李之菡 말대로만 하면 모두 이루어졌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門前에 사람들이 줄을 이어갔다.
李之菡은 周易八卦에 能通하였던 터라 그 卦를 應用해서 닥쳐올 厄을 미리 내다보고 避할 수 있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所聞에 所聞을 듣고 全國 坊坊曲曲에서 찾아온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작은 골목길에 位置한 집을 놓아둔 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는 麻浦 나루터에 기둥과 上樑을 使用하지 않고 純全히 흙으로만 쌓아올린 亭子, 一種의 土窟을 만들어 그곳에서 起居했다.
그런 緣由로 世上사람들은 李之菡을 土亭先生이라 부르게 되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自身의 運命을 봐 달라고 찾아 와 順序를 기다리려면 며칠씩 걸리곤 했다.
土亭先生은 그런 弊端을 줄이고자, 周易八卦를 應用하여 未來를 알아볼 수 있는 豫言書로 所謂 土亭秘訣을 만들어 그 內容에 基準하여 豫言을 해 주게 되었다.
그런데, 그 土亭秘訣이란 冊이 너무도 神奇하게 未來를 잘 맞추자 愚昧한 百姓들 中에는 勤勉性과 誠實性을 無視한 채 약은 꾀로 惡用하는 弊端이 일기 始作하여 할 수 없이 折半 程度만 맞고 折半 程度는 맞지 않도록 土亭秘訣을 고쳐버렸다.
土亭先生은 몹시 가난해 밥솥이나 갓(冠),신발 等을 제대로 求할 수가 없어 쇠붙이(鐵)로 두들겨 만든 쇠 갓(鐵冠)을 쓰고 다녔고, 솥에 구멍이 났을 때는 쇠 갓을 뒤집어 놓고 솥으로 代用했고, 신발은 나무를 파서 만든 나막신을 신고 다녔다.
特히 土亭先生은 世上사람들의 생각으로는 到底히 理解할 수 없는 神秘스러운 航海 技術로 濟州道를 往來하여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狂風이 몰아치는 惡天侯에 닻을 단 큰 배 들도 航海를 하지 못하고 있는데 土亭先生은 悠喩하게 조각배를 利用하여 濟州道를 자주 往來하였던 것이다.
어떤 意味에서 그랬는지는 아직도 神秘속에 쌓여있으나, 一葉片舟로 航海를 할 때면 꼭 닭 네 마리를 배의 귀퉁이에 매달아 均衡을 維持하여 沈沒의 危機를 謀免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길을 가다가도 지팡이에 턱을 괸 채 서서 잠을 자기도 했다.
그가 남긴 著書로는 個人의 運命을 每年마다 볼 수 있는 土亭秘訣과 主로 國家의 運을 秘錄 豫言한 土亭家藏訣이 있는데, 그 學術的 根據는 周易八卦에 두었던 것으로 土亭家藏訣에는 우리나라 國運을 이렇게 豫言하고 있다.
원숭이·쥐·龍(申, 子, 辰)해는 兵亂이 있고, 범·뱀·돼지(寅, 巳, 亥)해는 混亂과 獄死 等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는데, 果然 그대로 壬辰倭亂·丙子胡亂·乙巳士禍·乙巳五賊臣들의 賣國奴事件과 1926年 抗日學生 示威運動事件 等은 그가 豫言한 一面을 그대로 實證해 주었다.
土亭先生은 豪傑 奇人 等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어려운
奇問奇答으로도 有名했다.
어느 사람이 先生에게,
"世上에서 가장 富者는 누구요?"하고 質問하자,
"富莫富於不貪이라 하여 이 世上에서 第一가는 富者를 慾心내지 않는 것이라."고 했고,
"이 世上에서 가장 貴人은 누구요?" 라 質問하자 先生은,
"貴莫貴於不爵이라 하여 이 世上에서 第一 가는 貴人은 벼슬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答한 적이 있었다.
"이 世上에서 第一 强한 사람이 누구요?"라고 質問하자,
"强幕强於不爭이라 하여 이 世上에서 가장 强한 사람은 다투지 않는 것이 가장 强한 사람이라."고 對答했다.
이처럼 土亭先生은 普通사람으로서는 몇날 며칠을 두고도 생각지 못할 名答을 卽席에서 하는 것만 보아도 얼마나 達人 이었던가를 알 수 있다.
한番은 祖上의 祭祀를 모셔야 하는데, 祭需 살 돈이 없어 쩔쩔매자 代代로 내려오는 家寶를 머슴에게 주면서 어느 곳, 어느 時刻에 그곳을 가면 얼마에 산다는 사람이 있을 테니 팔아 오라고 했다.
下人은 시키는 대로 가르쳐 준 場所에 가 보았더니 土亭先生이 豫言한 대로 그 場所에 아니나 다를까 人相着衣 하나 틀리지 않은 한 老婆가 그 家寶를 보더니 두말하지 않고 사갔다. 하도 神奇하여 고개를 갸우뚱갸우뚱 하면서 집으로 돌아 왔다.
下人을 본 先生은 이렇게 말했다.
"來年 이맘때면 반드시 오늘의 그 時間에 그 家寶를 다시 팔려고 그 場所에 나올 테니 그때 다시 사 오라."고 했다. 下人은 理解 할 수 없다는 듯,
"正말입니까? 아니, 正말로 그 사람이 다시 팔러 나온다고요. 그런 境遇가 어디 있어요?" 그러나 先生은
웃음을 띄우며,
"기다려 보라."는 것이었다.
一年이 지나고 다시 昨年처럼 祭祀日이 다가왔다. 下人은 或是나 하면서도 그 場所로 가 보았다. 그랬더니 先生이 豫言한 그대로 그 老婆가 그 家寶를 다시 팔려고 가지고 나온 것이었다. 土亭先生의 많은 豫言에 比하면 그러한 豫言은 極히 一部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土亭先生은 李栗谷 先生과 親分이 있으면서도 서로의 理念이 달라 다툰 적도 많았다.
그렇지만, 한때 黨派싸움으로 나라가 시끄럽게 되자, 栗谷先生이 歸鄕을 하기로 作定했다는 消息을 들은 土亭先生은 栗谷先生을 만나,
"栗谷마저 歸鄕을 하게 되면 黨派싸움은 누가 막고 百姓은 누가 다스리나."하며 說得을 해서 栗谷先生의 歸鄕을 抛棄하게 한 적도 있었다.
先生이 一生을 마치자, 나라에서는 吏曹判書의 벼슬을 除授하고 康文公이란 諡號를 내렸다.
🍎 二惠同塵 說話
(新羅時代의 僧侶 惠宿과 惠空에 關聯된 佛敎 說話)
★ 三國遺事 卷4 二惠同塵條에.
安康縣 惠宿寺의 緣起傳說로, 惠宿은 殺戮을 싫어하여 佛道를 닦아 여러 가지 異蹟을 남겼다.
惠空은 雇傭살이하는 老婆의 아들(兒名은 憂助)이었는데, 어려서 上典(天眞公)의 病을 고치는 여러가지 異蹟으로 上典이 導師로 삼았다.
恒常 삼태기를 지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거리를 다녔다고 하여 負簣和尙이라 하였으며, 그가 살고 있던 절을 夫蓋寺라고 하였다.
이러한 說話는 世俗에서 神異한 行跡을 行한 高僧異蹟說話로서, 佛力의 偉大함을 世間에 傳播시키려는 意圖에서 나온 이야기로 佛敎徒들 사이에서 널리 傳承된 說話類型이다.
🍎 人蔘 說話
(1) 姜處士 傳說
하늘이 내린 膳物, 神秘의 藥草로 불리워 온 人蔘은 그 이름부터 사람과 同化된 또 하나의 사람. 中國, 日本, 北美 等 世界 여러 곳에서 비슷한 人蔘이 나지만 우리의 高麗人蔘만이 人蔘(심)이라고 적는다.
人蔘에 얽힌 說話는 多數 있지만, 人蔘의 歷史性과 神秘感이 녹아있는 代表的 說話는 亦是 姜處士 傳說이다. 人蔘이 이 땅과 因緣을 맺은 것은 1500年 前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흔히 불리우는 天然 人蔘 보다 500年을 앞선다.
現在 忠南 錦山郡 南二面 開眼마을과 개삼터 개삼閣은 이 人蔘 說話를 强하게 뒷받침한다.
가난한 선비 姜處士는 일찍이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마저 原因 모를 病에 걸려 앓아눕게 되는 運命을 맞는다. 이藥저藥 가릴 것 없이 至極 精誠으로 써보았지만 效驗이 없었다.
그래서 姜處士는 老母를 爲해 錦山의 主山 進樂山 觀音窟로 들어가 懇切한 祈禱를 올렸다. 한참을 祈禱하다 暫時 잠이 든 中에 現夢하여 나타난 山神靈이 姜處士의 至極한 孝誠에 神은 膳物을 내려다 주었다.
그러나 神이 내려준 것은 神秘의 藥草도 藥草였지만, 그보다는 큰 깨우침이었다.
神은 進樂山 벼랑에 자라는 풀 한 포기가 神秘한 藥草임을 깨우쳐 주었고, 姜處士는 그것으로 어머니의 病을 고치고 더 나아가 그로부터 얻은 열매로 人蔘을 栽培하여 世上의 數많은 生命을 救하라는 뜻을 實現한 것이다.
이와 같이, 처음 人蔘의 栽培가 始作된 마을의 이름을 姜處士에 依해 큰 뜻을 깨달았다 하여 開眼마을이라고 한다.
또, 人蔘 씨앗을 받아 처음 栽培를 始作한 곳을 개삼터, 祠堂을 지어 기리는 곳을 개삼閣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2) 豊基人蔘의 說話 / 童蔘說話.
兜率峯 頂上에서 내려다보면 同生뻘이 되는 봉우리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봉우리마다 골짜기가 있어 그 속에는 이름도 잘 알 수 없는 數많은 植物이 自生하고 있으며 사람에게 이롭다는 藥草들도 있어 藥草를 캐기 爲해 春夏秋冬 山을 찾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特히 이 넓은 山中에는 山蔘 밭 세마지기, 부추 밭 세마지기, 옷(漆) 밭 세마지기가 있다는 말이 오래 前부터 傳해져 오고 있었는데 山菜나 藥草를 캐러 다니는 사람들에 依하면 옷 나무, 부추는 보았어도 山蔘을 캤다는 얘기를 듣지 못하여 언젠가는 山蔘 밭을 發見할 수 있으리라는 期待를 가지고 山을 찾아 다녔던 모양이다. 그러던 中 어느날 兜率峯으로 들어서는 아랫마을 앞 두들(전구리) 길섶에 살고 있던 農夫 한 사람이 兜率峯에서 가장 큰 山蔘이 豊基 場날이 되면 사람으로 變하여 草笠童子의 모습을 갖추고 내려와 어디를 갔다가 해질 무렵이 되면 올라오는 것을 자주 보았다는 말을 듣고, 옳지! 다음에는 길옆에서 기다리다가 이 草笠童子가 내려오면 뒤따라가서 무엇을 하는가 살펴보고 올라 올 때도 같이 따라와 어디로 가는지 確認해 보리라 굳게 마음을 먹고 있었다.
마침내 豊基 場날이 되어 길목에 있다가 草笠童子를 따라 豊基邑內로 따라 왔는데 點心時間이 되어 어느 작은 飮食店으로 들어가기에 함께 따라가 한자리에서 앉아 食事를 하고 飮食값까지 치루어 주고 나왔다.
그 童子가 農夫 앞으로 다가와서 서로 모르는 處地인데 나의 飮食값을 支拂함을 무슨 까닭인지 물었더니 얼마 되지 않는 飮食값 내가 支拂했다고 얘기하고 同行이 되어 집으로 올라오다가 마을 어귀 느티나무 아래서 쉬면서 童子에게 事實을 吐露했다. 童子는 率直하게 이르기를 내가 兜率峯에 있는 山蔘밭 가운데 가장 큰 童蔘인데 사람으로 變하여 사람의 行勢를 하고 있다고 하면서 當身의 願을 들어줄 터이니 只今 곧 나와 함께 兜率峯으로 올라가 蔘밭에 到着하면 내가 서 있는 밭에서 가장 큰 蔘으로 變하여 들어 갈 터이니 나를 뽑지 말고 그 밭에 있는 山蔘을 캐 가라고 했다. 이윽고 童子蔘이 山蔘으로 變하여 蔘밭으로 들어가자 이 農夫는 깜짝 놀라면서 突然 마음이 變해 그 童子의 懇曲한 付託을 잊고 큰 蔘을 잡아당기니 蔘 頭腦가 떨어지는 데 그 안에서 點心時間에 먹은 飮食物이 쏟아져 나오고 山蔘 밭은 온데간데 없어졌으며 그 옆에는 옷 밭과 부추 밭만이 남아 있었다는 說話이다. 그 以後 이 農夫는 病이 들어 죽었다는 줄거리로 傳說의 이야기는 끝을 맺는데, 사람의 慾心에 比喩해서 만들어 낸 재미있는 人蔘傳說이라 오늘날 다시 한 番 되새겨 볼만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3) 人蔘에 얽힌 說話
1928年에 中國 어느 곳의 韓醫師가 採錄한 說話.
먼 옛날 어느 兄弟가 山으로 사냥을 나가려고 했을 때 한 老人이,
"곧 겨울이 닥치면 山中의 날씨는 자주 變하고, 눈이라도 내리게 되면 下山을 못할 것이니 사냥을 抛棄함이 좋겠다"라고 衝告했다.
그러나 兄弟는 老人의 衝告를 無視하고 활과 화살과 携帶品을 챙긴 後 털가죽 옷을 입고 山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며칠이나 山 속을 누비며 많은 짐승을 사냥하고 다녔다. 그런데 어느날 午後, 갑자기 날씨가 險惡해지더니 눈보라가 몰아치기 始作했다. 그 눈은 이틀 밤 이틀 낮을 繼續 내려 山길을 完全히 덮고 말아서 兄弟는 山속에서 꼼짝없이 갇혔다.
兄弟는 高木 숲에서 움푹 팬 구덩이를 發見하고 避身하여 불을 피워 保溫을 하고, 토끼나 사슴고기를 구워 먹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날씨가 좋을 때는 사냥을 나가 짐승을 잡기도 하고 周邊에 있는 食用이 될 만한 풀뿌리도 캐어 먹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느 곳에서 줄기 하나를 파헤쳐 보았더니 그속에서 마치 사람처럼 팔과 다리가 달려 있는 듯한 플뿌리 하나를 캐내게 되었다. 입에 넣어 씹어보자, 단맛이 있었다. 兄이 "단 맛 나는 것은 몸에 좋은 풀이라더라."라고 하여, 둘은 周圍에서 같은 뿌리를 많이 캐어 썩은 古木의 나무 구멍 속에다 貯藏도 했다.
그리고 이 뿌리를 먹으면 온 몸에 힘이 솟는다는 것을 느껴, 어느날 조금 많이 먹었더니 코피가 났다. 그래서 그 以後는 많이 먹지 않고 每日 조금씩 먹도록 했다. 이렇게 하면서 낮에는 사냥을 나가고 밤에는 돌아와 쉬면서 한 겨울을 지냈다.
드디어 봄이되어 날씨도 풀리게 되고 눈도 녹자, 兄弟는 艱辛히 山에서 내려올 수가 있었다. 그들을 어깨에 많은 사냥물을 짊어지고 있었다. 마을 사람은 그들이 얼어죽지도 않고 굶어죽지도 않고, 게다가 元氣旺盛하게 오히려 살이 쪄서 돌아온 것을 보고 몹시 놀랐다.
"너희들 살아 있었구나! 반갑다, 正말 반갑다!"
"그런데 山에서 뭘 먹었기에 이렇게 통통하게 살이 쪄서 돌아왔느냐?"
兄弟는 팔과 다리가 달려 있는 꼭 사람 모습을 한 풀뿌리를 꺼내 모두에게 보였으나, 누구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고 말했다.
"거, 正말 사람하고 恰似하구먼!"
그 以後 이 植物을 '人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人蔘 說話와 人蔘 歷史
(1) 困辱當한 王世子
朝鮮 仁祖때 淸과의 戰爭에서 敗한 우리나라는 그들의 强壓에 못이기어 王世子를 沈陽에 人質로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萬里他域에 人質로 잡혀간 王世子의 心情이야 오직하였겠는가.
그런데 雪上加霜으로 우리나라 百盛들의 越境採參 때문에 王世子는 더욱 苦衝을 받았던 것이다.
仁祖 18年 10月 沈陽에 있는 王世子 앞에 淸의 使臣 龍骨大 等이 朝鮮의 越犯者 두 사람을 捕縛하여 끌고와서 그들은 말하기를 採蔘하는 일은 前부터 嚴禁하여 오는 터인데 只今에 이르러서는 아직 끊어지지 않고 採蔘者는 百如名이나 떼를 지어 드나들고 있으나 잡힌 者는 두 사람 뿐이다. 너희 나라에서는 어떻게 되어 이렇게 放置만 하고 있느냐고 따지고 들었다.
王世子가 仔細히 質問하여 보니 淸人들은 朝鮮사람들이 江을 건너기도 前에 越江하여 와서 붙들어다 가죽배에 태워 拉致하였다고 한다.
世子는 恨嘆하여 말하기를,
"미욱한 百姓들이 法 무서운 줄 모르고 採蔘하기에만 熱中하여 邊民으로서 죽엄을 當한 者도 많다. 그리하고도 또한 이러한 狀態이니 참으로 悲痛하도다."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이 犯人은 本國으로 押送하여 依法處理토록 하였다 한다.
또한 仁祖 21年 9月에는 龍骨大가 世子에게 와서 말하기를 江界 사람들이 上土, 外怪, 梨洞의 세곳으로부터 越境採蔘하다가 淸人들에게 붙잡힌 者가 40如名에 이른다.
이들은 銃과 활을 쏘아 淸人 2名을 殺傷하고 36名은 逮捕되었다.
그中 한 名은 江界副使의 傳令牌를 차고 있는 者도 있다.
그들은 畢竟 獨者的인 行爲가 아니고 반드시 背後가 있는 것이 틀림없으나 어떻게 할참이냐며 그 牌까지 提示하면서 詰問하였다.
世子는 하는 수 없이 謙遜한 말로 對答하기를 이들은 모두 보잘 것 없는 無知한 者들이고 또한 제나름대로 主張하는 바도 있으니 罪를 減하여 죽엄만은 免케하고 館所에 보내어서 農事짓는 勞役에 從事시키겠다 하고 그들 36名을 引受하였다.
또 仁祖 23年 4月에는 王世子가 앞서 淸으로부터 級與받았던 밭과 牛馬를 採蔘인 50如名의 贖罪를 充當키로 하고 備邊局으로부터 上啓하여 後日 丁若鏞의 牧民心書, 工典山林條에는 當時의 모습과 情景을 다음과 같이 記錄하고 있다.
"...案컨대 閭廷 茂昌 盧芮 慈城을 只今은 이를 廢四郡이라 말한다.
그 곳 사람 採蔘者는 千百의 무리를 이루고 갈대를 서로 엮어 草幕을 짓고 子息과 孫子를 기르며 四時 오래 머물러 住民이 된다.
이 땅을 지키는 守令들이 활을 쏘고 銃砲로 그들을 쫓아내려고 하면 그들 또한 활과 銃으로 決死的으로 對抗하여 接戰을 하기도 하며 退去를 假裝하기도 하여 自由自在다.
그리하여 守令들은 이 일을 감추어 보고하지 않고 觀察使 또한 上問시키지 않는다.
千里有指의 疆土를 팔장만끼고 不法한 百姓을 내버려둔 지 百年에 이르렀다.
世宗, 世祖 때 6陣을 經營하고 宣祖代에 새롭게 莖山을 두다.
옛날에는 강한 隣邦에 接한 땅일지라도 오히려 이를 開拓한 바 있다.
只今에 이르러서는 祖宗의 땅을 하는 일 없이 抛棄하고 있으니 무슨 일이냐?
....(中略).... 一朝에 큰 일이 생긴다면 卽 西北의 二路는 아직 우리의 完全한 所有가 아니니 어찌 悲痛하지 않으랴... 하였다.
또한 著書 經世遺表에도 廢四郡의 地域이 國防相 要地임을 論하는 中에... 鴨綠의 防備야말로 重大하다.
只今 아무런 理由없이 이 地方을 헐어 없애어 無知莫知하고 奸細한 무리들로 하여금 山林 中에 숨어 살게 하며 그 妻子를 이끌어 들여 巢窟로 만들고 날로 金, 銀, 銅, 鐵을 採取하고 孩兒蔘(人形의 最上品 人蔘)과 담비로 스스로 살지게 하고 弓矢와 猛火의 器物을 감추어 自衛하여도 守土의 臣은 이를 감추고 報告하지 않고 廟堂의 神들도 알고도 말하지 않으나 亂은 이미 이 이루워진 것 防備는 只今 어데있는가?..." 하고 痛駁하였다.
이 2書는 丁若鏞이 康津에 謫居 18年間의 著作으로서 위의 事實은 正祖 後期로부터 純祖 初年에 이르는 實情이었다. 空然히 千里幅員에 가까운 땅을 버려두는 것은 哀惜하지 않을랴! 山林과 川沼의 利益은 星羅와 같이 蒼蒼하다.
山에 蔘茸이있고 貂鼠 또한 豊饒하다 그리하여 彼我의 蔘캐는 것과 비슷하다는 徒輩들의 盜賊巢窟로 만들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이와같이 이 地方은 山蔘의 寶庫였던 것이다.
(2) 인삼의 지나친 공물과 유랑민
貢蔘(공삼)의 過重(과중) 징수로 유망(流亡)하는 강계부민(江界府民)들이 많았다.
평안북도 강계는 원래 산삼이 많이 나는 고장이었다.
이 산삼의 多量産出(다량산출)로 인하여 조선조 중기 강계부민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물산이 풍부하면 지방민이 그 만큼 부유하여져야 할 터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 것이 화단(禍端)이 되어 그 고장에 살수가 없어 男負女戴(남부여대)하여 다른 곳으로 流亡(유망)할 수 밖에 없었으니 인삼 징수의 가혹이 도를 넘은 때문이었다.
조선조에 소위 貢蔘(공삼)으로서 그 종류로는 우선 戶蔘(호삼)이라 하여 평상적으로 부과하는 것이 있었고 稅蔘(세삼) 또는 常平蔘(상평삼)이라 칭하여 삼군(蔘軍)을 人山시켜 채취케한 것과 貿蔘(무삼)이라 하여 종친부 등에 상납하는 것, 단삼(單蔘)이라 하여 대마(對馬 쓰시마)에 급여용, 신삼(信蔘)은 일본 덕천(德川 도쿠가와) 정부에 사신을 파견할 때 필요한 것, 기타 강변의 파숫군으로부터 징수하는 것 등등, 실로 각종 명목으로 인삼을 긁어 내었던 것이다.
이 과중한 부담으로 인한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지역민 중 流散(유산)하는 자가 속출하여 주민 2만여호 중 모두 도망가고 겨우 4천여호밖에 남지 않을 때도 있었다.
영조 44년 4월 평안관찰사 鄭常(정상)이 강계 蔘弊(삼폐)에 대하여 상소한 내용을 보면 그가 강계지방에 순시차 들어가자 남녀노소는 관찰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도로변에 도열하여 혹은 말고삐를 붙잡고 울며 호소하기를 "우리들을 살려주십시요 이제 우리는 蔘 때문에 살 수가 없읍니다" 하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삼을 캐러 10명이 입산한다 하여도 그 동안 남획한 결과 그 중 8-9명은 빈손으로 돌아오는 것이 상례이며 그 상납시기가 되면 납부하여 할 수량은 태반이 부족하므로 백성들은 사방으로 동분서주 혹은 도내의 산읍(山邑)에서 구하기도 하고 혹은 함경도까지 이르러 간신히 납부액을 충당하려 하여도 또한 부족함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전전긍긍하는 상태이다.
그들은 관찰사에게 말하기를 임금임께서는 구중궁궐(九重宮闕) 깊은 곳에 계시니 어찌 우리들의 참상을 아시겠는가, 道臣守令(도신수령)들께서는 어찌하여 이러한 상황을 上聞(상문)케 하여 우리들 같은 성상(聖上)의 백성을 동일시하여 홍은을 베풀게 하지 않는가.
만약 이 삼폐를 營門(영문)에서 변경하지 않는 한 우리들은 오직 죽을 뿐이라고 눈물로 호소하니 실로 목불인견(目不忍見)이라, 본부(本府)에 이르러 그 사정을 詳密(상밀)히 조사하니 인호(人戶)는 점점 줄어가는데 전체 부담액은 그대로 두어 이를 감당할 수 없어 모두 도산(逃散)하는 수 밖에 없다 하였다.
(3) 王室用 人蔘 購入
古來로 우리나라 王室에서 自然生 人蔘 卽 山蔘을 흔히 服用한 것은 推測하기 어렵지 않으나 近世 山蔘이 매우 稀貴하게 되었을 때에도 千金을 不辭하고 이를 李王職에서 購入하여 御用에 供하였다고 한다.
1901 ~1925年 까지 많을 때는 1年에 2千如원 적을 때는 5百원어치 假量을 買上하였다.
그 中 李王職에 確實히 記帳되어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데, 그 밖에 民間이나 臣下들의 獻上品도 있었다.
1920年 2月 2斤 量目不明, 代 550원. 同年 11月 1 量目不明, 代 750원. 1921年 11月 3斤 量目不明, 代 9百원. 1925年 10月 1斤 5돈 5분 代 120원. 1926年 4月 1斤 4돈4분 代 430원. 同年同月 1斤 5돈2분 代 260원. 御用은 임금님께서 使用한 것이고 退位한 高宗用도 또한 購入하였는데 當時 서울에는 山蔘 專門商이 있어서 仲介人 또는 採取者가 直接 持參하여 이 商人에게 팔거나 委託하였던 것이다.
李王職에서는 이 商人으로부터 購入하였는데 典醫에 徐某氏가 있어 山蔘의 鑑定에 能하였다고 한다.
그는 한番 보아 卽席에서 眞假를 알뿐만 아니라 어느 山에서 난 것까지 識別할 수 있었다.
이 徐某氏의 鑑定에서 可하다 하면 高價라 할지라도 李王職 會計課에서는 購入하지 않을 수 없었다.
服用의 目的은 治療用이 아니면 保健用이었다.
그 使用法은 金 또는 銀甁에 山蔘을 손으로 쪼개넣고 1홉의 물을 부은 後 3~4 時間동안 徐徐히 달여서 6勺쯤 된 때 1回 또는 2回에 服用하였는데 이야말로 眞짜 獨蔘湯이다.
이를 달일 때 金甁 또는 銀甁은 세가다리型으로 나무를 組立하고 이에 매달은 後 숯불을 피워 略 1尺의 거리에서 熱을 加하는 方式이었다.
山蔘 以外에 豊基産 人蔘도 醫療用 또는 保健用으로 使容하였는데 이 때는 生薑이나 대추 等을 添加하였다.
(4) 動物 治療에 人蔘 使用.
朝鮮時代 動物의 病을 고치기 爲해 人蔘을 먹였다.
말은 育畜中에서도 가장 貴한 動物로서 軍國의 必要不可缺한 家畜이며 그 밖에 運送 農業等 사람의 經濟生活과도 깊은 關係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 健康에 對하여는 옛날부터 日常 注意를 하였고 그 疾病이나 傷處에 對하여는 相當한 醫療方法을 行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三國時代로부터 朝鮮朝 中期에 이르기까지 陸軍은 騎兵을 主軸으로 하였다.
한便 道路가 매우 不便하였기 때문에 驛遞制를 두어 많은 驛馬를 飼育하였던 것이다.
또한 一般 私人들도 旅行에는 흔히 말에 依存하였으므로 말의 疾病에 對하여서는 相堂한 注意를 하였다.
朝鮮 太宗代에는 惠民國助敎에 命하여 司僕寺의 所屬으로 말의 醫方을 習得케 하였으며 世祖實錄 12年 閏3月에는 徐居世가 馬醫書를 編纂하였다는 記事가 있으나 이 書籍은 只今 傳하여지지 않고 있다.
이밖에 馬醫書로서 傳하여진 것은 權仲和, 韓尙敬에 依하여 編纂된 新編集成馬醫方과 正祖代에 馬療諺解가 있다.
이 馬療諺解에 그 處方中 人蔘을 配合한 것은 20如 處方이나 있으며 新編集成馬醫方에는 人蔘을 配合한 것이 일곱가지 處方 程度가 있다.
그 處方名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卽 人蔘散, 黃不散治內外黃方, 人蔘當歸散, 蔘笭散 等이다.
그 다음에 소에 對한 治療인데 소도 또한 말 다음으로 人間에게 有用한 家畜 이지만 말에 比하면 主로 下級勞動에 使役되었고 말과 같은 待遇는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소의 疾病에도 人蔘이 配合된 處方들이 있으나 貴重한 人蔘을 實地로 소에까지 使用하였는지는 매우 疑問이라 하겠다.
其他 動物로서 매(鷹)의 訓練과 飼育에 人蔘을 먹였다든가 작은 飼鳥들에게 人蔘을 施與하여 病을 고쳤다는 이야기들도 있다.
日本에서 傳하는 이야기로 某人이 三光이라 이름지은 잘 우는 꾀꼬리를 길렀는데 이미 老衰하여 날개털도 빠지고 그 목소리도 매우 稀微하게 되어 사람들은 哀惜하다고 恨嘆하였다. 그 때 이를 기르던 者가 朝鮮人蔘을 求하여다 若干量을 飼料에 섞어 먹였더니 이 꾀꼬리는 元氣를 되찾고 목소리도 커져서 다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한다.
(5) 採蔘꾼 公式的으로 登場하다.
只今은 一般的으로 人蔘이라 하면 모두 栽培한 人蔘을 뜻하고 山에서 自然生으로 자란 人蔘은 山蔘이라 하여 區別하고 있지만 옛날 栽培가 發達하지 않았던 時代에는 人蔘이라 하면 全部 山蔘을 말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山蔘을 採取하는 特別한 職業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文獻에 依하면 萬歷年代 (1600年代) 蔚山의 戶籍帳에서 戶主名 아래 採蔘軍이라고 記入된 것이 發見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當時 官에서 夫役으로 採蔘꾼을 指定하였던 記錄일 것이다.
全國의 山野에서 人蔘이 豊富하게 産出되었을 時代에 있어서는 地方民에게 이를 貢納시켰던 것이므로 따로 職業的으로 採取하러 다니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後 濫獲으로 因하여 그 産出量이 激減되자 차츰 이를 採取하는 일은 特殊한 見識이 必要하게 되어 農民들의 特殊한 副業으로 發生하게 되었다.
採蔘軍은 심마니 또는 심메꾼 等으로 呼稱되고 朝鮮朝 高宗 中期 以後 山蔘의 私採는 默認 또는 公認되었던 것이다.
이 심마니들은 그 組織, 從業狀態, 風習, 禁忌 等이 滿州의 同一 業者와 類似한 點이 많은데 이는 相互 國境을 接하고 主로 國境線 兩側에서 서로 侵犯하면서 人蔘을 採取하던 歷史的인 傳統에 起因한 것 같다.
그들이 山蔘을 採取하려고 入山할 때는 數人이 團體를 組織하고 嚴格한 規律과 깊은 信仰 및 相互信賴를 基礎로 團結하여 行動하는 바 그 團體의 長을 御人이라 稱한다.
이 御人은 一團의 統率者로서 絶對權力을 가진다.
副統率者가 있을 때에는 中御人 또는 次御人이라 부른다.
途中 炊事를 擔當하는 者를 精才라고 부르는데 이 語源은 "平北 江界" 地方의 方言으로서 '廚房'과 同一하며 "精才"의 權限은 御人에 버금한다. 그 외에 燃料를 採取하는 者, 山中祭祀를 擔當하는 者 等 擔當業務가 正確히 分擔되어 있는데 그 權限은 相互 不可侵으로 되어있다.
入山經歷이 적은 者는 '소댕이'이라고 부르고 全然 無經驗者는 '날소댕이'이라 한다.
이들의 入山期는 年中 大體로 3期로 나누는데 苗節, 丹節, 黃節이 그 것이다.
苗節은 봄철 人蔘이 發芽하기 始作하고 다른 草木들이 너무 茂盛하지 않아 比較的 區別하기가 容易한 때이다.
丹節은 여름철 人蔘의 果實이 익어서 빨갛게 되어 가장 發見하기가 쉬운 時節이다.
黃節은 가을에 접어들어 人蔘의 잎이 노랗게 黃變할 때다.
山蔘의 採取라는 일은 가장 射倖적인 것으로서 運이 좋으면 一擧에 巨額을 얻을 수 있으나 몇달 동안이나 深山幽谷을 헤매이며 갖은 苦生을 하여도 한 뿌리의 蔘을 구경도 못한 채 헛탕을 치고 돌아오는 事例도 많다. 그러나 그들은 조금도 失望하지 않고 다음 機會의 幸運을 기다린다.
(6) 심마니의 行動과 禁忌.
심마니들이 山蔘을 採取하려고 團體를 組織하고 各 業務分擔을 定한 後 入山을 하기 前에 略 1週日間이나 적어도 3日前부터는 每日 여러 番 깨끗한 물로 몸을 淨潔하게 沐浴하고 女性과 同寢을 避하며 不淨한 飮食을 입에 대지 않는다.
그리고 喪家나 解産한 집에 出入하지 않으며 喪者나 棺, 動物의 屍體를 보는 것들도 不淨탄다고 이를 忌避한다. 萬若 不淨한 몸으로 山에 들어가면 山神의 怒여움을 사서 人蔘을 얻을 수 없다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入山한다는 말과 그 時日을 絶對 秘密에 부쳐 他人에게 漏泄하지 않음은 勿論 妻子에게도 알리지 않고 집안 사람이 이를 물어보는 것 조차 禁忌이다. 그러므로 行先이 어디인지는 御人 外에는 다른 團員들도 알지 못한다고 한다.
떠나기 전날 밤 祭祀를 지내는데 그 祭祀를 드리는 相對神體는 마을의 城隍堂이나 큰 巖石 또는 鬼神나무 等이다.
卽 이들 部落의 守護神에게 精誠을 드려 祭祀를 지냄으로써 途中의 加護와 多收穫을 祈願하는 것이다.
江界 地方에서는 옛날 收穫이 많았던 時節에는 이 祭祀를 이틀間이나 醒大히 行하고 마을사람들은 招待하였는데 돼지를 여러 마리 잡아 酒宴을 베풀고 出發直前에는 온洞里 사람들이 모여 "豊穫이다" "豊穫이다" 소리치면서 그 一行의 前道를 祝福하여 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祭祀床에 바치는 祭需로는 燒酒, 닭, 쌀밥, 물고기 等인데 禿魯江에서 나는 農魚를 가장 貴한 것으로 쳤다고 한다. 이 農魚를 求하지 못했을 境遇에는 쏘가리, 잉어, 붕어 等을 썼다.
祭物을 다 차려놓은 後 團員들은 平伏하고 御人은 起立하여 祭文을 朗讀한다. 祭文은 元來 종이에 써야할 것이지만 御人 等은 文筆에 어두운 字가 많아서 大體로 그 祭文을 다만 暗誦한다.
그 祭文의 一例는 다음과 같다. "江界府 江界邑 某里 御人 朴某 精才 趙某, 소대인 金某, 李某, 鄭某, 文某 네 멀거니가 五大 모래미를 가지고 들어왔아오니 明雅하신 山神님 歆饗하시옵소서, 夜실에 虛夢 마시옵고 眞夢을 주시옵소서"
이때 一同은 三拜한다. 이날밤은 徹夜로 촛불을 밝히고 祭蛇를 지낸 後 一同은 이미 入山準備를 하였다가 집에 돌아가지 않고 이튿날 곧바로 이곳에서 出發한다.
(7) 심마니의 入山風習.
採蔘꾼 一行이 人山을 하기 爲하여 길을 떠나게 되면 一行은 中에 서로 아무말도 하지 않고 無言의 行動을 한다. 途中에 女人을 만나는 것을 싫어하며 더욱이 여자가 길을 가로지르는 것은 窒塞이다.
그러므로 萬若 앞에서 女人이 오는 것을 보면 이쪽에서 먼저 蔘캐러가는 入山者임을 알린다.
그러면 오던 女人은 이를 알아차리고 길옆으로 避하여 등을 뒤로하고 멈추어선다.
이때 御人이 女人에 對하여 치마자락을 要求하면 이에 應하여 치마끝을 두세치 찢어 준다.
一行은 이것을 持參하고 入山한다.
이러한 風習은 古代 어느 나라에도 있는 風俗으로서 女體에 魔力이 있다고 崇拜하던 遺風의 一種이다.
그 女體에 接觸하였던 衣服에도 魔力이 있다고 信仰하였으며 이를 몸에 지니고 있으면 入山中에 사나운 猛獸나 惡鬼를 물리친다고 하는 뜻을 傳習한 것이다.
또 山神은 女人의 月經帶를 좋아한다 하여 남의 집 物件을 몰래 훔쳐서 가지고 가기도 한다. 萬若 途中에서 偶然히 이것을 버린 것이 發見된다면 기꺼이 주워 가지고 간다.
이런 것들은 山中에서 祭祀를 지낼 때 神堂이나 樹木에 걸어놓고 供獻物로 쓴다. 그러나 絶對로 自己 家族의 것은 使用하지 않는 法이다.
入山을 하게 되면 大體로 첫날밤 目的地에 到着한다.
그 目的地는 御人 外에는 누구도 알지 못하며 다만 先頭에서 引導하는 御人을 따라 默默히 걸어갈 뿐이다.
그 目的地는 大槪 人蔘이 産出되는 곳으로서 어떤 山꼭대기 地點인데 前年에도 宿泊한 일이 있는 同連이라 불리우는 草幕이다.
이 同連 附近에는 여러가지 貌樣의 新堂들이 있는데 높이가 3자 內外 세로, 가로 各 2자쯤 되는 초라한 것들로 粗雜하게 木板 等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堂內에는 木板에다가 神明을 써놓은 것도 있고 또는 어떤 貌樣을 한 돌을 넣어 놓은 것도 있으며 아무것도 없는 것도 있다.
萬若 이 조그만 神堂이 크게 破損되어 있으면 다른 일을 제쳐놓고 于先 이것부터 新造하거나 補修를 한다.
이렇게 神堂을 補修 또는 新造한 後 當日 저녁 多收穫을 祈願하기 爲하여 祭祀準備를 하게 된다.
(8) 人蔘 裁判
人蔘을 둘러싼 裁判으로 世人의 關心을 모았던 例는 朴興植氏가 냈던 紅蔘 7千 5百斤 引渡 請求訴訟이었다. 原故人 朴氏가 朝鮮總督府 財務局 專賣總務課長 岩城弼太郞이라는 日人을 相對로 냈었다.
解放이 되고도 몇年이 지난 釜山避亂 時節인 1953年의 일이었다.
朴氏는 臨時首都 釜山에 내려가 있던 서울地方法院에 訴訟을 提起했다. 原故人 朴氏의 主張은 1945年 解放되기 直前 朝鮮總督府時節 買收貸金 5百44萬원으로 紅蔘 9千6百斤을 專賣當局으로부터 買入, 貸金을 支拂했으나 이 中 7千 50斤을 引導받은 일이 없다고 主張하며 解放 後 몇年이 지나서 倭政 때 專賣當局 責任者를 相對로 訴訟을 提起한 것이다.
朴氏는 倭政 때 朝鮮 飛行機工業株式會社 社長으로 中國에 輸出하기 爲해 紅蔘을 專賣當局으로부터 사들인 것이 틀림없었다.
當時 紅蔘은 三井物産이 一手販賣라는 單獨販賣權을 政府에서 얻어 唯一하게 紅蔘을 販賣할 수 있었으나 朴氏는 解放直前 特殊한 케이스로 紅蔘을 買入할 수 있었다.
그러나 朴氏가 買入한 紅蔘의 大部分은 戰爭末期에 海上航路가 危險하여 中國에 搬出을 못하고 開城人蔘 出張所 倉庫에 保管되어 있었으나 그後 찾지 못했었다.
開城出張所 倉庫에는 專賣局, 三井物産, 朴氏 所有 紅蔘이 함께 保管되어 있었다.
理由야 어쨌든 朴氏는 專賣當局과 紅蔘販賣契約을 맺고 貸金을 支拂했으나 物件을 引收받지 못했으며 倭政 때 責任者는 紅蔘을 引渡해야 한다는 主張이었다.
이같은 訴訟이 提起되자 難堪한 入場에 부닥친 것이 專賣廳이었다.
解放前 日人責任者를 相對로 訴訟이 提起되었으나 專賣事業인 紅蔘에 關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專賣廳長 金致榮氏는 企劃係長 趙龍鳳에게 이 일을 맡아서 處理하라고 指示하기에 이르렀다.
當時는 法務制度가 없어 企劃係長 趙氏는 專賣廳의 訴訟關係도 管掌事務였기 때문에 이 일이 맞겨진 것이다. 서울地方法院에서 이 事件을 맡은 것은 金致傑 判事였다.
朴氏는 辯護士도 대면서 이 事件에 積極的이었다. 企劃係長 趙氏는 開城人蔘出張所 職員들의 證言을 土臺로 應訴에 必要한 準備書面을 作成했다.
韓國政府는 日本政府의 責任을 引受할 法的責任이 없다고 强調하고 蘇聯軍이 紅蔘을 모두 가져간데 對한 責任은 더욱 질 수 없다고 主張했다. 釜山에 避亂中이던 開城出張所 職員들의 證言에 따르면 朴氏 所有의 紅蔘이 꼬리票까지 붙어 開城倉庫에 있었으나 解放直後 蘇聯軍이 掠奪해간 것이 틀림없었다.
이에 對한 公判이 열려 專賣廳側에서는 證人으로 企劃係長, 庶務課 職員 5∼6名이 出頭했고 原告人 朴氏側에서는 重役들이 出廷했다.
異色 訴訟事件은 釜山의 日刊新聞에 大大的으로 報道 되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1回 公判이 열린 後 原故側은 訴를 取下하고 말았다.
(9) 景武臺에 假짜 山蔘 上納.
심심찮게 江原道 山골에서 山蔘을 캤다고 新聞에 나기도 하지만 1953年 景武臺에 上納됐던 1百年 묵었다는 山蔘이 蔘이 아닌것이 鑑定되어 쉬쉬한 일이 있었다.
江原道 寧越郡 上東面 九來里 무당 朴某氏(當時 나이 45歲)는 現夢으로 太白山 中峰에서 길이 6자 무게 1관 되는 山蔘을 캤다며 上納했었다.
이같은 事實이 專賣廳에 連絡되어 人蔘係場이던 현종천氏가 鑑定을 했으나 人蔘과 비슷하게 쓴맛 단맛은 있는데도 蔘이 아닌 것이 밝혀졌다.
秘書들은 받은 사람의 體面을 생각하고 바친 사람을 생각해서 秘密을 지켜줄 것을 付託했다는 것이다.
以外에도 山蔘을 캤다는 사람은 많았는데 假짜 山蔘이 많다는 것을 注意할 必要가 있다.
眞짜 山蔘도 있겠지만 普通 人蔘을 山蔘으로 栽培하는 수도 있는 것이다. 山蔘은 머리部分이 삐쭉하고 긴 것이 特徵인데 詐欺꾼들은 普通 人蔘을 人跡이 드문 깊은 山中에 많이 심었다. 大槪 땅속에 머리部分을 一定期間 거꾸로 묻어 栽培하다가 바로잡아 키우면 머리部分이 길게(이것을 長腦라고 한다.) 굵어서 山蔘의 形態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詐欺꾼들은 이같이 人工栽培한 假짜 山蔘을 바위옷으로 싸고 木箱子에 넣은 다음 다시 흰 보자기에 싸서 大都市에 나와 꿈 云云하며 파는 境遇가 많았다.
때로는 假짜 山蔘을 만든 사람과 結託한 藥房에서는 몇百年 묵은 山蔘 云云하며 엄청나게 값을 불러 富豪들에게 勸했다.
(10) 醫術의 賤視와 人蔘.
우리나라 歷代王朝의 醫藥術은 徐徐히 進步되기는 하였으나 그 速度는 매우 느렸다. 이것은 經濟生活의 貧困에 起因한 것이었지만 또한 社會制度에서 오는 弊端도 그 原因의 하나로 볼 수 있다.
醫査의 職分을 賤視하고 醫官같은 職責은 兩班階級이 管掌하고 所謂 中人階級이 代代 世襲으로 그 職을 맡아 낮은 地位에 놓여 있었다.
內醫院提調와 같은 벼슬자리는 醫員이 아닌 文官으로 補하고 典醫를 그 指揮下에 歸屬시켰던 것이다.
王, 王族, 大官 等이 病患이면 診察한 結果를 報告하고 處方을 指示하여 同意를 求하여야만 하였다고 한다. 王이나 王族이 病으로 逝去하면 主治醫官의 責任을 받는 例도 많았다.
그 實例로는 東醫寶鑑의 著述로 有名한 許浚같은 이도 宣祖가 몸이 便치 않을 때 寒中龍書 凉劑를 使用하여 그 病이 重하여졌다 하여 失脚하고 光海君代에 와서는 또다른 理由로 南大門밖으로 追放當하는 悲運을 當하였던 것이다.
이와같은 狀況아래서 醫權이 伸張되지 못하고 醫道가 不振할 것은 뻔한 노릇이다.
그러나 鄭道傳, 柳成龍, 柳之蕃, 丁若鏞 等 儒學者들이 醫學著述을 한 사람들도 있었다.
또한 括目할만한 事實은 宣祖때 全有亨이 醫書를 著述하였는데 그는 壬辰亂 때 길가에 쓰러진 죽은 屍體를 解剖한 後 그 技術이 能하게 되었다고 傳한다.
이는 日本이 解剖를 始作한 때부터 2百80如年前 일로서 醫學史上 特奇할 事實이며 日本人들도 놀라고 있다. 이러한 情況속에서도 人蔘의 效能은 確固한 信念의 對象이 되어 그 服用은 여러가지 處方中에 活用되어 왔다.
그러나 人蔘의 栽培가 盛行되기 前까지는 庶民들의 利用物이 될 수 없었다. 人蔘은 傳統的으로 寶貨로 取扱되어 中國과의 貿易品으로서 國家財園이었으며 朝鮮朝 中期 以後부터는 다시 日本과의 主要 貿易品이 되어 銀貨와 바꾸게 되고 光海, 仁祖 兩代에는 明淸의 滿州로부터 中國全土에 供給되던 人蔘의 去來가 杜絶되어 우리나라 人蔘價格이 暴騰되는 等 여러가지 일로 庶民들의 服用이 더욱 어렵게 되었던 것이다.
🍎 人身供犧 說話
(神에게 사람을 祭物로 바친다는 內容의 說話)
*國文學通論(張德順, 新丘文化社, 1961). 韓國民間傳說集(崔常壽, 通文館, 1958)에.
이 說話의 例로는 開城의 지네山傳說, 淸州의 지네場터傳說, 濟州道의 金寧蛇窟傳說 等이 있다. 지네山傳說과 지네場터傳說은 같은 類型으로서이다. 마을에 살고 있는 큰 지네에게 每年 處女를 祭物로 바쳐야 住民이 無事하다고 하여 處女犧牲祭를 지냈는데, 어느 해 祭物로 選定된 處女가 두꺼비에게 밥을 주어 키웠더니 그 두꺼비가 지네와 싸워 지네를 죽이고 處女를 救出하였다는 內容이다. 이 傳說은 恩惠갚은 두꺼비, 處女와 두꺼비 等의 이름으로 特定 證據物이 없이 民譚으로도 널리 口傳된다. 濟州道의 金寧蛇窟傳說은 巫俗神話 兎山堂本풀이와 같은 內容으로, 金寧蛇窟의 큰 뱀에게 處女를 祭物로 바치는 習俗이 있었는데, 서린이라는 判官이 赴任하여 이 뱀을 잡아죽이고 自己도 죽었다는 內容이다. 그 뒤로 蛇神에 對한 祭享도 없어졌고 避害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이처럼 우리 나라의 人身供犧 說話는 大體로 人身을 祭物로 바치는 惡習이 없어지게 된 由來譚이며, 祭物을 받는 神이 지네나 구렁이로 나타난다는 特徵이 있다. 또한, 惡神을 除去하는 英雄的 行爲를 한 存在가 人間 以外에 두꺼비와 같은 動物이라는 點도 特異하다.
이런 點에서 英雄인 男子가 惡神을 退治하고 祭物로 바쳐진 女性을 救出하여 婚姻한다는 英雄說話와는 性格이 다르다.
그러나 이 說話는 人身供犧 習俗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이러한 習俗이 人間의 智慧가 發達함에 따라 否定되고 消滅하여간 자취를 反映하고 있다. 이 說話는 沈淸傳과 같은 古小說에도 屈折되어 收容된 바 있다.
🍎 人柱 說話
(사람을 祭祀의 犧牲物로 쓴 人身供犧 또는 人身供養을 素材로 한 說話)
*全北民譚(崔來沃, 螢雪出版寺, 1979) 韓國地名總攬 15-全南篇 Ⅲ (한글學會, 1983)에.
巨大한 土木工事인 城쌓기·둑쌓기·다리놓기 等을 할 때에 한 사람을 물 속이나 흙 속에 파묻는 것을 人柱라 한다. 산 사람의 靈魂이 이 建築物에 들어갔으므로 堅固하고 安全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行해진 風習이다. 우리 나라의 여러 곳에서 傳說로 傳해오고 있다.
全羅南道 靈巖郡 始終面 新鶴里의 소바우 마을에는 옛날에 마을 앞 둑이 잘 터져서 被害가 많았는데, 道士의 말을 듣고 산 아이를 祭物로 삼아 파묻고 둑을 쌓았더니 그 뒤로는 安全했다고 한다. 그 때 犧牲된 人柱아이의 이름이 소바우여서 마을이름을 소바우로 부르게 되었다는 傳說이 있다. 또한, 全羅南道 長興郡 夫山面 龍盤里 御印洑에는 洑의 둑이 잘 터지므로 道士에게 물으니 산 사람을 祭物로 바쳐야 한다고 하므로, 사람을 찾던 中 마침 지나가던 거지 父子가 있어 그 아들을 돈으로 사서 祭物로 파묻었더니 둑이 터지는 일이 없었다. 그 거지는 子息을 판 돈을 가지고 가다가 유양리의 벼락바위에서 벼락을 맞아 죽었다는 傳說이다. 또다른 類型으로 人柱를 넣어야 堅固한 둑이 된다고 가르쳐 주는 道僧에게, “사람을 求할 수 없으니 當身이 人駐가 되어라.” 하고 일꾼들이 道僧을 밀어뜨려 물 속에 넣어 人柱를 삼았다는 傳說도 있다.
이것은 殺生을 禁하는 佛弟子인 道僧이 달리 堅固한 土木工事의 方法을 提示하지 못하고 殺生 方法을 일꾼에게 가르쳐준 데 對한 因果應報의 뜻이 담겨 있다. 元來 巨大한 土木工事를 하다 보면 事故로 死傷者가 發生하는 일이 있고, 이러한 犧牲을 거쳐 後世 사람이 惠澤을 입게 된다는 敎訓을 人柱說話로 置換한 것이라 생각된다.
人柱說話와 比較되는 說話가 에밀레鍾(聖德大王神鐘)傳說이다. 여기에는 鍾을 만드는 匠人의 딸이 自進해서 끓는 쇠가마에 投身한 境遇가 있다. 또한, 동냥온 중에게 아이의 어머니가 장난 삼아 “施主는 할 것이 없으니 내 子息이라도 鍾 만드는 施主로 줄까?”하고 말한 것이 씨가 되어 마침내 아이를 施主할 수 밖에 없었다. 結局 그 아이는 쇠가마에 던져지게 되었다는 悲劇的인 傳說도 있다.
慶尙北道 尙州市 恭儉面의 '공갈못傳說'에는 人柱가 될 공갈이라는 이름의 아이가 장난 삼아 한 말로 因해 아이 人柱事件이 發生한 境遇도 있다. 人柱說話는 大를 爲해 小가 犧牲되고 先人의 犧牲에서 後世사람이 惠澤을 입는다는 敎訓을 담고 있다. 큰 土木工事는 危險하여 人命 損傷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現實과, 人身을 犧牲해야 神이 기뻐한다는 犧牲意識 위에 沈淸이 印塘水에 빠지고 지네에게 處女가 犧牲되는 等, 人間犧牲에 關한 다른 이야기의 影響으로 形成된 것이다. 結局, 이와 같은 人柱를 바치는 工力이 없으면 큰 土木工事를 이룰 수 없다는 危險과 그로 因한 事故를 背景으로 發生한 이 說話는 國內外의 비슷한 人身犧牲說話와 比較, 檢討할 만한 價値를 지니고 있다.
🍎 日月山黃氏婦人堂 說話
(慶尙北道 英陽郡 靑杞面 堂里 日月山 日字峯 頂上에 있는 神堂)
*내고장 傳統가꾸기(英陽郡, 1982)
英陽郡誌(英陽文化院, 1970)에.
媤어머니의 虐待로 因해 自殺한 黃氏婦人을 守護神으로 모시고 있다.
이 곳에서는 ‘婦人堂’이라 부르며, 神은 本貫이 平海인 黃氏婦人이다. 堂집이 세워진 由來는 다음과 같다.
純祖 때에 堂里에 살던 禹氏의 婦人 黃氏가 媤어머니의 虐待를 못이겨 日月山에 올라가 山蔘캐는 사람들의 움幕에서 自決하였다. 家族들은 四方으로 搜所聞하였으나 찾을 수가 없었고, 며칠 뒤 같은 마을에 사는 李命存이라는 사람에게 現夢하여 男便에게 일러 屍體를 거두게 하였다.
그 뒤 다시 現夢하여 自己를 爲하여 堂祠를 세워 주기를 付託하므로, 李氏는 곧 現位置에 넋을 慰勞하는 堂집을 세웠다는 傳說이 傳한다.
堂집은 元來 板子로 엮어 지은 南向집이었는데, 그 뒤 退落하여 가로와 세로 2.8m의 甓돌집으로 改築되고 슬레이트지붕으로 바뀌었다.
內部에는 시렁을 놓고 그 위에 黃氏婦人의 位牌가 모셔져 있다. 堂里에 神心이 깊은 女子管理人이 있어서 每月 朔望에 堂에 올라가서 촛불을 켜고 빈다고 한다. 一定한 祭祀日이 없고 때때로 婦人들이 찾아와 촛불을 켜고 쌀과 과일들을 놓고 致誠을 드리기도 한다.
이들은 다 집안에 優患이 있거나 몸이 아프거나 財數가 없으면 찾아와 빈다고 한다. 그러나 堂里 사람들은 이 神을 그 地方의 守護神이요 安土神으로 믿으며, 安寧과 豊饒는 이 女神의 造化라고 믿고 있다. 1976年 堂 옆에 山靈閣을 지었다.
(傳說의 主要 內容은 新郞의 어리석은 誤解로 因해 첫날밤도 치르지 못하고 버림받은 女人이 平生 貞節을 지키며 살다가 恨을 품고 죽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 民族의 情恨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여러 文學作品의 素材로 多樣하게 援用되었는데,
代表的인 作品에 趙芝薰의 詩 石門과 徐廷柱의 詩 新婦가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옛날 日月山 아랫마을에 黃氏 姓을 가진 處女가 살고 있었는데, 워낙 人物이 고와 마을의 두 젊은이가 서로 貪내어 結婚하고 싶어했다. 黃氏 處女는 두 總角 中 한 總角에게 媤집을 가게 되었다. 新婚 첫날밤 뒷間에 다녀오던 新郞은 新房 門앞에서 氣怯을 하고 물러섰다. 新房門에 칼날 그림자가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新郞은 앞마당의 대나무 그림자를 칼 그림자로 잘못 알고 處女를 빼앗긴 戀敵이 怏心을 품고 自身을 죽이려고 숨어든 것이라고 생각했다. 新郞은 그 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리 달아나버렸다.
이런 事實을 모르는 新婦는 簇頭里와 圓衫도 벗지 못한 채 조바심을 내며 新郞을 기다리다가 恨을 품고 世上을 떠났다.
그러나 怪異하게도 處女의 屍身은 첫날밤 모습 그대로 삭을 줄을 몰랐다. 살아 있었을 때처럼 앉음새가 흐트러지지 않았고 돌부처처럼 앉아 언제나 新房을 지키는 듯 했다.
한便 멀리 逃亡간 新郞은 外地에서 다른 處女를 만나 丈家를 들었다.
그런데 이들 夫婦 사이에는 아이가 생겨도 낳기만 하면 이내 죽곤 했다.
沓沓한 마음에 占쟁이에게 물어보니 바로 黃氏 閨秀의 抑鬱한 怨魂 때문이라고 했다. 뒤늦게나마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친 新郞은 只今의 日月山 婦人堂 자리에 新婦의 屍身을 옮기고 祠堂을 지어 魂靈을 慰勞했고, 그때서야 新婦의 屍身이 忽然히 삭아 없어졌다고 한다.)
(趙芝薰의 詩 石門)
當身의 손끝만 스쳐도 소리 없이 열릴 돌門이 있습니다. 뭇 사람이 조바심치나 굳이 닫힌 이 돌門 안에는, 石壁欄干 열두 層階 위에 이제 검푸른 이끼가 앉았습니다.
當身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지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하였습니다. 이는 當身의 그리운 얼굴이 이 稀微한 불 앞에 어리울 때까지는, 千年이 지나도 눈감지 않을 저희 슬픔 靈魂의 모습입니다.
길숨한 속눈썹에 恒時 어리운 이 두어 방울 이슬은 무엇입니까? 當身의 남긴 푸른 道袍 자락으로 이 눈썹을 씻으랍니까? 두 볼은 옛날 그대로 복사꽃 빛이지만, 한숨에 절로 입술이 푸르러 감을 어찌합니까?
몇 萬里 굽이치는 江물을 건너와 當身의 따슨 손길이 저의 목덜미를 어루만질 때, 그 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 줄 티끌로 사라지겠습니다. 어두운 밤 하늘 虛空 中天에 바람처럼 사라지는 저의 옷자락은, 눈물 어린 눈이 아니고는 보이지 못하오리다.
여기 돌門이 있습니다.
怨恨도 사무칠 양이면 至極한 精誠에 열리지 않는 돌門이 있습니다.
當身이 오셔서 다시 千 年토록 앉아 기다리라고, 슬픈 비바람에 낡아 가는 돌門이 있습니다.
(徐廷柱의 詩 新婦)
新婦는 草綠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新郞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新郞이 그만 오줌이 急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門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新郞은 생각이 또 急해서 제 新婦가 淫蕩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알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알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門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年인가 50年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新婦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暫時 궁금해서 新婦房 門을 열고 들여다보니 新婦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草綠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 앉아 버렸습니다. 草綠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 日月 說話
해와 달에 關한 우리나라의 宇宙 起源 說話. 어머니와 막냇同生을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男妹가 호랑이를 피하여 하늘에서 내려 준 동아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 가 해와 달이 되었다는 內容이다. 動物譚 中 由來譚에 屬하며, ‘日月傳說’ㆍ‘수숫대가 빨간 理由’ㆍ‘해와 달이 된 오누이’라고도 한다. 全國的으로 널리 口傳된다.
여러 地方에 널리 퍼진 해와 달에 關한 說話로서, 地方에 따라 多少의 差異는 있으나 大槪의 줄거리는 비슷하다. 이와 비슷한 說話가 日本의 규슈(九州) 地方에 原形대로 傳하며, 또 東蒙古 地方에도 變型된 說話로 傳하고 있는데, 이는 高麗 때 元나라에 歸化한 女性들을 通하여 口傳된 것으로 斟酌된다.
옛날에 세 男妹를 둔 어머니가 하루는 山 너머로 품팔이를 갔다가(或은 딸의 집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만 호랑이에게 속아서 잡아먹히고 말았다. 호랑이는 어머니의 옷을 입고 집에 나타나서 아이들을 속여 막내인 젖먹이를 잡아먹었다. 이를 본 두 男妹는 우물가의 나무 위로 逃亡쳐 올라갔으나, 호랑이도 기어이 따라 올라오므로, 男妹는 하느님께 빌어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호랑이도 두 아이들과 같이 하늘에 빌자 썩은 동아줄이 내려와서 이에 매달려 하늘로 올라가다가 떨어져 수숫대에 肛門이 찔려서 죽고 그 피가 수숫대에 번져 只今도 붉은 點들이 남아 있다고 한다. 하늘에 올라간 두 男妹는 各各 해와 달이 되었으며, 해가 된 누이는 낮에 다니는 것이 부끄러워 强한 햇살을 쏘아 사람들이 쳐다보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옛날에 한 어머니가 三 男妹를 집에 두고 품팔이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호랑이를 만났다. 호랑이는 어머니의 떡과 팔·발·몸을 차례로 먹어 버리고는 어머니로 假裝하여 三 男妹가 사는 집으로 찾아갔다.
아이들은 호랑이의 목소리와 손바닥이 어머니와 다르다고 門을 열어 주지 않았으나, 호랑이는 갖은 꾀를 써서 마침내 房 안으로 들어가 막내를 잡아먹었다. 이를 본 두 男妹는 겨우 逃亡하여 우물가 큰 나무 위로 避身하였다.
이들을 쫓아온 호랑이는 처음에는 오라비 말대로 참기름을 바르고 나무에 오르려다 失敗하고, 그다음에는 누이가 일러 준 대로 도끼로 나무를 찍으며 올라갔다. 男妹는 하늘에 동아줄을 내려 달라고 祈願하여 드디어 하늘로 올라갔는데, 호랑이에게는 썩은 줄이 내려와 그것을 잡고 오르던 호랑이는 떨어져 죽고, 호랑이의 피가 수숫대에 튀어서 붉게 되었다.
하늘에 오른 男妹는 해와 달이 되었는데, 누이가 밤이 무섭다 하여 오라비와 바꾸어 해가 되었다. 해가 된 누이는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이 부끄러워 빛을 發하여 自己를 바로 쳐다보지 못하게 하였다.)
이 說話는 凡世界的인 分布를 보이는데, 유럽의 것은 이리와 염소 사이에 葛藤이 일어나는 純粹한 動物譚으로 되어 있다.
日本의 것은 加害者가 惡魔로 나타나고, 아이들은 하늘에 올라가 별이 되었다고 한다.
中國의 것은 大槪 늑대가 하늘로 오르다 떨어진 곳에서 배추가 나왔다 하고, 아이들은 그 배추를 팔아 富者가 되었다고 한다.
各 編에 따라 三 男妹가 다 하늘로 올라가 各其 해·달·별이 되었다고 하는 境遇도 있다. 또한, 오빠가 누이와 싸우다 누이의 눈을 찔러서 結局 누이가 해가 되었다는 變異型도 있다.
그리고 해와 달에 關한 起源譚은 省略되고, 수숫대가 붉게 된 由來만 內容으로 삼는 이야기도 흔히 나타난다. 이 說話는 妙味가 있는 反復과 속고 속이는 智慧 겨룸 等으로 興味롭게 構成되어 있으며, 또한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上向式 神話여서 우리 民族의 人間 中心的 思考方式을 엿볼 수 있는 資料이다.
🍎 林慶業 說話
東野彙輯에.
林慶業은 丙子胡亂을 前後로 活躍하였던 人物인데, 그에 關한 이야기는 小說 林慶業傳에 集約되어 있다. 그러나 小說이나 傳記에 없는 林慶業의 說話가 文獻이나 口碑로 傳하여지고 있다.
東野彙輯에는 對綠林論劍結義라는 題目으로 林慶業의 이야기가 收錄되어 있다.
林慶業이 어느날 사냥을 나가서 太白山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한 나무꾼을 만났는데, 그 나무꾼은 劍術이 神通하여 自己 女子와 姦通한 세 男子를 죽이는 場面을 林慶業에게 보여준 뒤 뒷날에 쓸 일이 있을 것이라면서 劍術을 가르쳐주었다는 것이다.
이 說話는 靑丘野談 等 다른 文獻說話集에도 收錄되어 있다. 口碑로 傳承되는 林慶業의 이야기는 西海 延坪島의 林慶業將軍 祠堂과 關聯된 것이다. 林慶業은 胡國의 要請으로 한나라의 水軍大長이 되어 明나라를 치기 爲하여 西海를 건넜고, 다시 淸나라로 잡혀가다가 逃亡하여 西海를 건너 明나라로 亡命하였다.
이런 過程에서 延坪島 附近에 머물게 되었는데, 바다 가운데 食水가 없어 軍士들이 動搖하자 한군데 닻을 내리고 바닷물을 퍼서 마시게 하였는데 이 물이 바로 淡水였다는 것이다. 또한, 飯饌이 떨어지자 近處의 가시나무를 베어다가 바다에 꽂아 놓았는데 조기떼가 가시에 많이 걸려 飯饌으로 먹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傳한다.
그 밖에 林慶業將軍 祠堂에 倭兵들이 들어갔다가 모두 죽음을 當하였다는 이야기와 林慶業이 胡國公主에게 觀相을 보인 이야기, 丙子胡亂 때 胡國의 降伏을 받으려 하였으나 國王의 降書 때문에 참았다는 이야기들이 傳하고 있다.
🍎잉어의 報恩說話(放鯉得寶說話)
(龍王의 아들인 잉어를 救해주어 報恩을 받았다는 內容의 說話)
韓國口碑文學大系(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0∼1988)
韓日民譚의 比較硏究(成耆說, 一潮閣, 1979)
韓國民族說話의 硏驅(孫晉泰, 乙酉文化寺, 1947)에.
神異譚 中 應報譚에 屬한다. ‘放鯉得寶說話’라고도 하며, 內容의 變異에 따라 ‘자라의 報恩’, ‘海印寺의 由來’라고도 한다. 全國에 걸쳐 널리 口傳되고 있으며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漁夫가 잉어를 잡았다가 哀願하는 듯한 잉어의 눈을 보고는 도로 놓아주었다. 얼마 뒤 꿈속에 사람이 나타나, 自身은 며칠 前에 살려 준 잉어인데 元來는 龍王의 아들로, 아버지인 龍王이 龍宮에 모셔 오기를 願하니 함께 가기를 請하였다.
그리하여 龍窮에 가서 歡待를 받고 돌아오려 할 때, 龍王의 아들이 “가지고 싶은 物件을 請하라 하면 무엇이든 願하는 대로 이루어주는 구슬을 달라고 하십시오.”라고 귀띔을 하였다. 漁夫는 구슬을 얻어 가지고 집에 돌아와서 큰 富者가 되어 잘살았다.
이 說話는 凡世界的으로 分布되어 있는데, 特히 아시아 一帶에 많은 資料가 報告되어 있다.
中國 이야기에는 거북 또는 자라가 많이 登場하며, 報恩으로 生命을 救해 주는 境遇가 많다.
蒙古나 日本 이야기는 잉어 代身 뱀이 登場한다. 우리나라에서는 龍宮이 登場하는 것이 普遍的이며, 자라를 救하였다는 境遇에 報恩으로 主人公이 벼슬을 얻게 된다는 것이 흔하다.
各 編에 따라, 漁夫가 아닌 나그네가 잉어를 가지고 놀던 사람들로부터 사서 놓아준다고 設定한 境遇도 있다. 報答으로 받는 物件도 箱子·硯滴·加絡指 等으로 多樣하지만 모두 富貴를 가져다주는 寶物이라는 點은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救해 준 잉어가 龍女여서, 報答으로 龍王의 딸과 婚姻하게 되었다는 變異型도 있다.
또한, 主人公이 報恩을 받은 뒤 그 後孫들은 잉어를 먹지 않게 되었다는 特定 家門의 傳說이 되는 境遇도 있고, 報答으로 둑이나 江이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地名由來傳說로 變한 境遇도 있다. 한便, 龍王의 아들이 變한 개에게 먹이를 주고 잘 보살펴 그 報答으로 龍宮에서 海印을 받아와 海印寺를 짓게 되었다는 海印寺緣起說話도 많이 나타난다.
그런데 이 說話에는 龍宮에서 얻어온 구슬을 잃어버려 개와 고양이가 다시 찾아온다는 內容이 있으며, 後半部에 結合된 ‘犬猫爭珠說話’도 널리 알려져 있다. 龍을 도와주어 그 報答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新羅時代 居陁知說話 以來로 多樣하게 傳承되어 왔다. 居陁知는 報答으로 龍女와 婚姻할 수 있게 되었다 하였으니, 이 說話와 相通되는 點이 있다. 그러나 居陁知는 활을 잘 쏘는 非凡한 能力을 갖춘 反面에, 이 說話의 主人公은 例事로운 사람에 不過하다. 居陁知의 能力을 받아들이면서 이루어진 高麗 國祖인 作帝建의 神話에서는 龍女와 婚姻하여 結局 나라를 세울 偉大한 子息을 낳을 수 있었던 反面에, 이 說話에서의 報答은 日常的인 幸福을 이루는 데 그친다. 이 說話는 神話로부터 下層의 說話로 移動하는 段階를 살필 수 있는 좋은 資料이다. 한便, 자라를 救해 주어 報恩을 받는 內容은 作者·年代 未詳의 古典小說인 淑香傳에서도 볼 수 있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