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레미야 시대
G. von Rad, 구약성서 신학 발췌
1. 바빌론 시대로 가는 과정 (나훔, 하바국, 스바냐)
앗수르가 신흥 바빌론에 희해 망하는 국제정치 사건 가운데, 이런 앗수르의 몰락이란 상황 을 "피의 성"으로 기록한 예언자가 있으니, 그는 나훔이다(나 3,1). 그는 야웨가 악의 보복자 로 보았다. 그는 거의 유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제사영역에서 유일하게 활동한 예언자이다. 그는 자기 백성에 관해서 심판의 말을 쓰지 않고 있다. 요시야 개혁시대의 희망 적인 상황에서 그의 말이 지작되었기 때문이다.
하박국
주전 609-597년 사이 그는 활동하였다. 요시아 왕이 애굽왕 느고에 의해 전사하고, 605년 애굽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망했다. 그러자 신흥 바빌론인이 팔레스틴을 지배(왕하 24,7), 요시아의 아들 여호야김이 바빌론 군대에 의해서 괴롭힘을 당했다(왕하 24,1 이하). 하바국은 야웨에게 불만을 두 번씩이나 터뜨린다(합 1,2-2,4) :
1. 악인이 의인을 박해하는 것에 대해서(합 1,2-4) 불평하였다. 야웨의 대답은 지금 나는 무서운 민족 갈대아 사람을 일 으킬 것이다9합 1,5-11) ;
2. 야웨가 불의를 방관만하고 있다는 불평, 즉 외국정치 세력에 대 한 불만이다. 야웨의 대답은 : 의인은 신앙으로 살리라(합 2,1-4)고 말했다.
하바국의 특성 : 아모스, 이사야 그리고 미가에 비해서 하바국은 야웨를 괴롭히는 자, 불만 을 터뜨리는 자이다. 야웨는 예언자에게 심문을 받는다.
하바국이 그의 불평에 대해서 받은 확답은 무엇인가? 야웨는 역사를 비밀스럽게 꾸며갈 것이다. 그리고 야웨를 고수하는 자들 은 구출될 것이다(합 3,2). 야웨는 그날에 열방과 우주적인 싸움을 위해 올 것이 임박했다. 동시에 예루살렘은 심판의 위협을 당할 것이다(습 1,10-13과 비교).
예레미야
예레미야는 주전 627/626년에 소명을 받아 예언자가 되었다. 그의 소명은 북방의 적과 연결 되었다(렘 1,13 이하);
1. 처음에는 "북방의 적"이 신흥 바빌론인지 확실치 않았다. 이것이 예레미야 예언의 첫째 요인이었다.
2. 둘째는 전승사적인 종류가 요인이 된다. 예레미야는 아나돗에 거주하는 사제가정의 자손이다(렘 32,6 이하). 그곳은 베냐민 지파에 속한다. 고로 예레미야는 유다전승에서 분리되며, 출애굽과 시내언약 체결에 관한 이스라엘적 전승이 전 제되었다. 예레미야에게는 출애굽, 계약, 땅점유 전승의 여운이 강하게 나타난다. 예레미야는 나중에 왕들과 관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제사적 다윗전통에도 접했던 것같다. 그러나 그는 이사야의 시온전통이 결여되어 있다.
예레미야와 선배 예언자들 : 예레미야는 화법과 문예적 유물에서 호세아와 친숙하다. 그는 근본적으로 이사야, 미가, 아모스와 비슷한 선포를 했다. 그는 개체적인 본문과 함께 그리고 유형연구를 통해서 예언의 특수성에 접근될 수 있다. 그에게는 책망과 위협의 담론이 후퇴 했고, 하나님의 결정을 전하는 일이 드물다. 그는 일인칭 야웨의 담론을 자유롭게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야웨의 불평을 선포하는 반면, 자신의 불평을 더 포괄적으로 내놓았다. 그의 담론은 한마디로 "서사시(Lyrik, lyric)"이다. 이것이 다른 예언자와 다른 "새로운 양식"이다. 이런 것은 다음 6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렘 1-6장은 예레미야의 초기선포이다. 야웨제사를 버리고 바알제사로 넘어간 이스라엘 위에 북방으로부터 재앙이 온다. 그리고 그는 처음 렘 2,1-13에서 사랑의 시대를 회상한다 (2,5-7);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주한 후에 야웨를 배신한다(2,10 이하).
렘 2,14에서 이스라엘 은 자신의 하나님을 버렸다(렘 2,20a절). 이스라엘이 야웨에게서 이탈을 취소할 수 있겠는 가? 제사의 타락 고발; 법질서 침해에 대한 비난 후퇴(렘 2,8b); 이런 이스라엘의 배신행위 에 대한 심판(렘 4,5-6,30)은 종합적인 예언의 시문으로 이루어졌다.
이 시는 내용적으로 경고, 전쟁에 대한 묘사, 고발, 회개의 촉구 그리고 범죄의 큼에 대한 반성이 희곡적으로 서술되고 있다. 이런 재앙 앞에 예레미야는 폐허화된 참상에 대해 마음 의 병을 앓고있다(렘 4,19.23-26);
그래서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을 향해 악으로부터 마음을 씻으라! 그러면 구원이 있으리라(렘 4,14);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4,3 이하); 그의 특별한 소 망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돌아옴"이었다(렘 3,6 이하).
2. 요시야의 신명기 개혁과 여호야김의 악정
예레미야의 본격적인 활동은 여호야김의 악정 아래서 였다. 그는 십계명을 경시하는 백성에 대해, 특히 성전담론(렘 7,1-15)에서 "십계명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백성은 성전도 수호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이와같이 만족할줄 모르는 경건한 안전을 노력하는 행동에 일침을 가하는 엄격주의 예언자 계열에 속한다.
그와 동시에 예레미야는 계열이 다른 적대자들의 감정에 맡겨져 있었다. 렘 19,1-20,6에서 그 는 "오지병"을 깨뜨리는 상징행동을 취해, 야웨의 파괴를 알린다. 그 후 예레미야는 유사장 과 스홀에게 매를 맞는다.
렘 7,29에서 "버림받은 세대"가 예언된다. 고로 백성은 죽기를 원 한다(8,3). 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다(렘 13,16). 이스라엘이 돌아올 여지가 있다. 렘 18,1 이하 :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예레미야는 유다와 같이 이방민족에 대한 재난도 심판문으로 선포한다. 그것은 렘 25,15-38; 46-51(렘 50장은 후기의 것임)이다.
이방예언 신탁
애굽인, 블레셋인, 모압인, 암몬인, 에돔인, 아람인, 엘람인, 바빌론인에게 내 린 재앙선포이다. 렘 47, 2에 의하면 "북방으로부터의 적"이 표현된다. 49,30에서만 느부갓네 살이 지칭될 정도이다. 이런 신탁은 "성전(Heiliger Krieg)" 주문양식이 들어 있다. 이런 양식은 예언의 원래의 출발지는 아니다. 이스라엘의 전쟁예언자들이 야웨가 그의 적을 향해 출전할 때 이런 주문을 굴절된 방식으로 말할 수 있었다고 본다.
제의-호전적인 계획과 관 련된 예언들이 나온다: 싸움을 준비하라는 촉구들은 왕상 20,13 이하; 호 5,8; 사13,2; 렘 46,3 이하등이다. 둘째는 적대적 의도 없이 군사작전 지역 안의 거주하는 집단에게 피난-피 신을 촉구하는 요구들이다(삼상 15,6 이하; 렘 4,6 이하; 15,6 이하).
그러나 여기서는 고대 이스라엘이 전쟁을 했던 경험이 없는 민족들에게 이런 양식이 전용된 것이다. 고로 예레미 야의 이방예언 신탁은 하나님의 세계심판을 묘사한다.
불손과 반신적인 자기신뢰에 대한 비난(렘 46, 7 이하; 48,1 이하. 7.14.42; 49,4 등)은 야웨자신이 싸우리라는 예언이다. 예레미야 는 세계정치 차원의 움직임을 주목한다. 예언의 시제들("미래와 현재")이 주목된다.
아모스 나 이사야는 "미래에 관한 진술"을 한다면, 예레미야는 "현재적 진술"을 한다(렘 8,18-22). 처절한 현재적인 상황, 도망도 치유도 불가능한 진퇴양난에서 예레미야는 눈물로 기도, 눈물 로 고백한다. 시의 유형은 "자유 서정시"이다.
마음의 종교를 고백한 예언자 예레미야, "던져진 절망의 예언자"
3. 렘 8,18-22; 15, 16-17. 19-21 양 본문에서 예언자는 자신 및 신과의 마음의 대화를 기록
고발적 질문과 야웨의 대답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는 예언자직을 거절했지만, 다시 돌아 오면, 신 앞에 서서 그를 신의 입으로서 섬길 수 있다(15,19). 렘 12,1-5-6 본문에도 예언자 와 신 사이의 문답에 서서 그를 신의 입으로서 섬길 수 있다. 렘 12,1-5,6 본문에도 예언자 와 신 사이의 문답 대화가 깃들어 있다.
야웨의 반문이 나온다. 예언자가 시련 초기에 좌초 하려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반문이다. 예레미야는 그의 예언직에 있어서 일생동안 야웨가 다투었다. 그는 야웨의 해결책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어떤 일에 성공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 고 있다. 그는 "던져진 존재" 자체였다. 한 마디로 그는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는 내동데이 쳐진 인간, 평범한 인간이다. 렘 20,7.9에 보면 그는 하나님이 "나의 순진함"을 이용했다고 불평한다. 그의 임무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자신의 생을 저주한다(20,14 이하);
예언자는 그가 고소한 신에게서부터 아무런 대답을 얻지 못한다. "암흑 속으로 던져진 예레미야"는 사 적인 인간생활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암흑에 의해 위협받는다. 이런 고백들은 예언자의 상 황에서 생긴 것이다. 그는 신과 너무 친했다. 너무 순진하게 확언에 매달렸다. 신의 책망에 대해서 자주 좌절했다.
예언자는 그의 예언직책과 실천을 일치시키 못했다. 그에게서는 인간 과 예언임무가 서로 분리되었다. 야웨의 뜻에 자신을 맞추지 못했다. 그는 영적으로 아모스 또는 미가와도 비교될 수 없을 만큼 분렬되어 있었다.
그런 현상은 :
1. 그는 야웨와 동행하 며 하나님께 복종했다;
2. 다른 한편 그는 자유로운 사적인 여유를 가졌다. 그럼에도 그에게 는 자신에 대한 엄격성은 8세기 예언자와 가깝다(예 렘 7,25; 26,5;28,8).
그는 자기이전 누구 도 행하지 못한 넓이와 깊이에서 예언자직을 도맡았다는 것을 의식했지만, 역사적 서열에 들도록 노력한 것이 설명되지 않고 있다. 자기 예언자직을 그를 파멸로 이끌어 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초인간적인 순종을 보였다. 그래도 신은 그를 버렸다. 그는 자신의 중재적인 수난이 신 앞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사상을 가지지 않았다. 하나님이 그토록 충 성스러운 사자를 무서운 암흑으로 유인하여 그곳에서 좌초하게한 것 역시 하나님 비밀에 속 한다.
4. 예언자의 수난의 생애와 바룩설화
일련의 예언자 선포에 나오는 바룩설화(렘 37-45)가 있다. 앞에서 언급한 "고백"이 예언자의 내적인 현상들의 것이라면, 바룩설화는 이런 수난의 길의 "외적인 상황"을 서술한다. 여기서는 예언자가 대처한, 그를 차츰 적대적으로 위협한 극적인 사건자체가 서술대상이다. 궁정 시위대장 뜰의 감옥에 투옥된 -예언자는 느부갓네살 의 군대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까지 이곳에 감금되어 있었다- 사건에서부터 사건들이 추 적된다. 그리고 마지막 예언자가 애굽으로 끌려가는 것으로 끝난다. 예레미야는 바룩설화가 끝나기 전에 죽는다. 렘 37,16; 37,21; 38,13.28; 40,6 등에 그의 수난의 사건들이 집약적으로 기록되었다.
설화자는 모든 수난의 원인을 알려주고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다음과 같다 :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이 시대에 느부갓네살을 통해 세계정치 사정을 크게 개혁하리라는 것과 유다까지 도 바빌론 대제국의 지배아래 두리라는 것이다(렘 27,5 이하).
1.예언은 바빌론의 예루살렘 침공(렘 38,8.17; 38,3; 34,2).
2.유다는 바빌론에게 항복해야한다. 항복촉구(렘 38,7). 예레미야가 바빌론에게 항복하라는 공적인선언이 바로 그의 수난의 이유였다. 민족주의자들과 구원 예언자들은 이런 신념의 사람을 그대로 두려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호세아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한 것이 이루어졌을 때, 북왕국 민족주의자들이 호세아에게 자해하려고 했던 것과 그가 남유다로 피신해야했던 일과 비슷하다.
수난의 예레미야
예언자의 수난 속에 하나님의 설리와 도움은 없었다. 그는 무력하게 적들 에게 맡겨졌다. 그에게는 희망적인 탈출구가 없었다. 그의 수난은 영웅적인 가치를 갖지못했 다. 그는 겨우 죽음만 모면한 초취한 인간에 불과했다. 국가적인 파국에서 예레미야는 신의 수난에 동참할 따름이다.
5.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 문제
주전 598년 이차 포로후 예언자는 아직도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살기 등등한 주전파들의 발 악적인 대치상황에서 고립되어 있었다. 그보다 더 위협적인 것은 종교지도자와 동료들과 대 결하는 것이었다(렘 23,9 이하; 28);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계시"를 꿈에 근거해서 말했 고, 야웨의 말에 두지 않았다. 그들은 야비했다. 예레미야도 어떤 척도를 내세울 수 없었다. 야웨는 가까운데서 오는 신이 아니라, "먼데서 오는 신" 이었기 때문이다(렘 23,23).
양 그룹의 예언자들은 혼란을 가져왔다(렘 27,4 이하; 28,2). 구원 예언자의 예언은 의심을 샀다(왕 상 22,11 이하; 미 3,5 이하; 렘 6,14; 14,13; 23,9 이하; 28,5-9; 겔 13,16 등). 이런 양 부류의 긴장에서 생긴 증서는 598년 바빌론으로 추방된 자들에게 보내진 편지인데, 그는 경건한 열 광주의에게 주는 반격문이기도 하다(렘 29,5-7).
바빌론은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고 있다. 그래서 바빌론을 위한 기도는 신의 백성을 위한 기도이다(렘 29,11 참조). 이 때 예언자는 "미래와 소망"을 말한다. 포위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해 올 때, 토지 매입증서를 준비, "집들 과 전답들, 포도밭을 사리라"는 내용을 써서 매매증서를 인봉하게 한다(렘 32,15). 이런 난리 통에도 예언자는 태연히 미래를 준비한다. "팔레스틴의 생활의 정상화를 담담하게 예기하고 있다.
그는 주전 598/587년 바빌론으로 포로되어 간 자들과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을 함께 생 각해 주고 있다. 그러나 두 무화과 광주리중 좋은 무화과는 외국에 추방된 자들이다. 그들에 게 더 많은 약속을 선포하였다(렘 24,5-7). 동시에 721년 이스라엘의 포로민과 587년 포로된 남왕국 백성이 다시 돌아와 예루살렘이 다시 세워질 것이다(렘 33,4 이하).
예레미야는 자연적인 변화나 낙원적인 풍요를 말하지 않고, 황폐해진 땅의 생활조건이 "정상화"되리라는 것 만 소망했다(렘 31,6). 순례가 계속되고, 가정마다 웃음소리가 다시 들린다(렘 30,18 이하; 33,10 이하).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하나님이 백성에게 한가지 맘을 주어 그를 알게 할 때이다(렘 24,7).
"새 언약" : 이미 예언자는 북왕국 추방자에게 새 언약을 확언했다(렘 30,1-3). 일찍이 시내 의 언약내용은 "토라의 계시"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선택"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에게 압류된 백성이다. 개인에게 재능과 명예 그리고 특권을 주는 것이 아니다.
"선택"은 책임과 의무부과이며, 그런 수행 여하에 따라 그의 "실존"이 형성된다. 고로 옛 시내의 계시는 무효화 되거나 취소될 수 없다. 그의 갱신이나 확대가 아니다. 불완전한 것의 보충이 아니다.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가 깨어진 것, 감당치 못한 옛 계약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인간의 부그심과 들음의 과정"이 없어지고, 하나님이 그의 뜻을 "직접 이 스라엘 마음에 두는 것"이다. 이것이 옛 계약과 새 계약의 차이이다. 외적인 순종실천과 마 음의 수종의 구별없이 인간 스스로 마음에 신의 뜻을 두고, 신의 뜻을 스스로 원하는 것이 다. 이런 "기적"을 통해서 완전한 순종을 가능케하는 새 인간상이다. 렘 3,31-34 ; 32,37-41 그리고 렘 24,7을 연결해서 해석.
6. 예레미야와 전통 그리고 전승들 : 전통사적인 관점에서 출애굽-시내전승에서 살았던 예언자.
그의 회고(렘 2); 전망(렘 31,31 이하); 그외에 그는 다윗전통도 수용(렘 23,5-6). 그는 23,5-6 에서 다윗 후손의 기름부음을 말하고, 렘 30,9에서 돌아온 다윗에 관해서 말한다. 그러나 망한 북왕조의 예언에서(렘 30,31) "올 미래적인 기름부음 받은 자"에 관해 말하고 있다. 기름 부음 받은 메시아의 기능은 단 한가지 "그를 자신에게 가까이하게 한다"이다.
여기서 "가까이"는 "사제적인 기능을 말한다"(S. Mowinckel, He that Comth, S.176f,238). 그에 대해 폰 라트는 궁중 특권자, 야웨의 지상 대리자, 야웨의 왕의 동참자(시 110,1)로 본다. "qajeb"? 삼하 15,5에서 인자가 하늘 왕측근에 있는 것(단 7,13). 여기서는 왕이 아니라 "모셀" 지배자 이다. 야웨가 왕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사야, 미가에게도 나온다. 메시아 사상은 왕 야웨의 신하된 통치자이다.
3. 예언자에게서 일치된 견해이다. 다만 모빙켈은 제사장적인 지배권에 역점을 둔 메시아라면, 폰 라트는 정치권의 기능을 말하는 것에 차이가 있다. 그러나 포로 후기 이스라엘의 제사공동체가 정치기능을 감당했다면 모빙켈의 해석이 좀 더 적절하다고 본다. 예레미야는 메시야 예언에서 기름부음 받은 자는 "자신의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극 히 인격적으로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을 연다"고 한다.
출처: 대한 에스라 성서 연구원 글쓴이: 장기용(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