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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30-35
에발 산의 영적 대 각성집회 / 한대근 목사
지난 주 저는 당진교회 청년회 집회를 마치고 산 속에 들어가 말씀과 씨름하다가 돌아왔습니다. 오늘 저녁부터 진행될 2002년 영적 대 각성 집회에 전할 말씀을 준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가를 새삼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너무나 많은데 그것들을 모두 원고로 작성할 수 없는 이 미련함이 얼마나 큰지, 매일매일 말씀을 주시며 양들을 먹이라고 하시는데, 얼마나 내가 게을렀었는지를 회개하고 반성하며,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늘 듣던 말씀인데도 저에게는 새로운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금번 성회가 저 개인만의 집회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 입술을 통해 주시는 말씀들이 송악교회 가족모두에게 하나님의 음성으로 강하게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음성에 아멘으로 응답함으로 축복의 문이 열려지는 시간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제가 여호수아서를 강해하면서 선포했던 말씀 중에서 아이성 정복에 성공한 후에 에발 산에 올라가 성회를 여는 장면입니다. 아이 성의 규모만 보고, 가볍게 여기다가 위기를 자초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교만을 회개하고 죄를 제거하자 하나님은 진노를 거두시고 그들에게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받은 여호수아는 치밀한 작전(매복 작전, 유인작전, 기습작전)을 수립하고 아이 성을 공격하여 완벽한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승리한 후에 샴페인을 터트리지 않았습니다, 잔치를 벌이거나 축제를 열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이 성을 정복한 후에 승리의 축제를 갖기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세를 분명히 하는 의식을 가졌습니다.
다같이 30절의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단을 쌓았으니”
그렇습니다. 여호수아는 아이 성 정복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백성들을 에발 산으로 이끌고 가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에발 산은 아이 성으로부터 북쪽으로 약 50Km나 떨어진 가나안 땅의 심장부에 있었습니다. 가까운 곳이 아닙니다. 절대로 짧은 거리가 아닙니다. 더욱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으며, 가나안 땅에는 이스라엘이 정복하고 물리쳐야 할 대적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아마도 가나안 땅의 사람들은 여리고와 아이 성이 무너졌다는 소문을 듣고, 이스라엘과 싸우기 위해 군사적인 준비를 더욱 강하게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겠다고 싸움에 지치고, 여행에 지친 백성들을 이끌고 에발 산으로 갔던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행동은 우리의 이성으로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교훈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승리의 기쁨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세워져야 하는가가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여리고 성 전투 후에 교만하게 행동하다가 작은 아이 성 앞에서 무너진 기억이 있는 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그들을 이끌고 에발 산에 올라가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들이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해야 할 가장 가치 있는 행위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들의 예배를 통해서 어떤 자세로 성회에 참여 할 것인지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참된 예배는 승리의 기쁨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아이 성 정복의 기쁨과 감격, 그들은 충분히 그 기쁨과 감격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승리 기쁨 뒤에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손에 아이 성의 왕과 그 백성과 그 성읍과 그 땅을 붙여주셨기 때문에(8:1,7)이스라엘 백성들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승리의 기쁨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승리케 하신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권세와 감사의 찬양을 드리는 것이 참된 예배인 것입니다. 기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2. 참된 예배는 어려운 환경을 뛰어 넘어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단을 쌓은 에발 산은 아주 먼 거리를 여행해야 하는 곳입니다. 더욱이 많은 대적들이 아직 가나안 땅에 있어서 언제든지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입니다. 바로 그런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모든 백성들이 에발 산에 올라가 하나님께 드리는 이 예배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즐거울 때에는 찬송할 수 있습니다. 승리했을 때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찬송하고 감사로 예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진정한 예배자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예배자를 찾고 계시고 그러한 예배에 응답하시며 축복하시고 기적을 일으켜 주시는 것입니다. 여호사밧 왕과 그 백성들이 전쟁 중에 모여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송할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의 문을 찬송과 기도로 열었습니다. 금번 집회에 시간 시간마다 어려운 환경을 이기고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3. 참된 예배는 꾸밈이 없는 순수한 예배입니다
에발 산에 쌓은 제단은 철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인공적으로 가공하지 아니한 자연 그대로의 돌로 제단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꾸몄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인위적으로 무엇인가를 더했거나 뺐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냄새가 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사람의 생각이 앞서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사야 1장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신앙의 형식에만 관심이 많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나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고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하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제사와 절기를 정하시고 정한 때에 따라 영광을 받기를 원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수하지 못한 예배, 사람 냄새만 나는 예배, 마당만 밟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미워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스라엘의 승리 뒤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들은 그 승리의 기쁨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으로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변함없는 신실함으로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의 이름을 높이는 귀한 종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생각해 볼 두 번째 주제는 성회를 통해 주시는 말씀을 받는 태도에 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발 산에다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후에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돌에 새긴 다음 모든 백성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한 그룹은 에발 산에 서게 하고 또 다른 그룹은 그리심 산에 서게 한 후에 그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낭독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상황은 여호수아가 자의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행한 것이었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첫 번째 자세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27장 1-8절의 말씀을 한번 찾아보시겠습니다.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에....” 이렇게 시작된 말씀에 “큰돌을 세우고 석회를 바른 후에 그곳에 율법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에발 산에 세우고 또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철연장으로 다듬지 않은 돌로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하고 있습니다. 또 11절부터 봅시다.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로 시작한 이 말씀에 보면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요셉 베냐민 지파는 그리심 산에 세우고 르우벤 갓 아셀 스불론 단 납달리 지파는 에발 산에 세운 다음, 그리심 산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축복의 말씀을 낭독하고 에발 산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저주의 말씀을 낭독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름을 받을 당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케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고 아주 간곡하게 당부하셨습니다. 여호수아는 처음 부름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을 잊지 않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철저하게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삶을 살았음을 우리는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참으로 많이 읽고 듣고 있습니다. 말씀의 홍수 속에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말씀을 가까이 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홍수가 지면 마실 물이 없다는 말처럼, 말씀의 홍수 속에 살고 있지만 진정으로 가슴을 울리고 영혼을 때리는 말씀을 찾아보기 어렵고, 설사 생명력 있게 말씀이 선포되어도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을 기대하기 어려운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푯대를 잃어버린 시대, 가치관이 혼돈 된 이 시대,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하며, 그 말씀대로 살아감으로 시대의 표상이 되며, 가치관이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 있는 주의 종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이 말씀을 대하는 두 번째 자세는 가슴에 새기는 것입니다(32절)
여호수아는 에발 산에서 예배를 드린 다음 모세의 율법을 큰돌에 새겼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늘 보여지도록 큰돌에 새겨서 지워지지 않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가슴으로 듣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찬양은 입술로가 아니라 가슴으로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가인 ‘아이작 스톤’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중국에는 전국에서 뽑은 어린이들을 모아 만든 국립관현악단이 있는데 13억 인구 중에서 10살 안팎의 인재들만을 모은데다가 중국 특유의 스파르타식 교육으로 훈련을 시킨 아이들이라서 연주 실력이 상당히 뛰어났습니다. 그래서 차이코프스키의 어려운 곡들도 굉장히 잘 연주했습니다. 연주가 끝난 뒤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책임자가 ‘아이작 스톤’에게 어떻게 생각하는가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작 스톤’이 자기는 두 가지로 평가할 수 있다고 답했습니다. “하나는 어린 나이에 기교 있는 음악을 아이들이 연주하는 것에 놀랐고, 그리고 둘째, 그러면서도 이토록 영혼이 없는 음악은 처음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기교는 익힐 수 있었지만, 삶의 철학과 경험에서 나오는 감동은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는 가슴이 없습니다. 감동이 없는 시대입니다. 여러분의 가슴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감동이 있습니까? 말씀을 들어도 감동이 없고 가슴에 새겨진 말씀이 없어서 영적인 기갈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가슴에 새겨 늘 잊지 않고 주야로 묵상하는 복 있는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세 번째 자세는 절대로 가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34절)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 나누어 세우고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습니다. 신명기 27장으로 다시 돌아가 보면 그 말씀을 낭독할 때, 모든 백성들은 “아멘 할지니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듣기 좋은 말, 축복의 말,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하는 말씀만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축복의 내용뿐만이 아니라 저주의 내용도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여호수아는 모든 백성들에게 힘있게 낭독하였습니다. 그때, 백성들은 모두 “아멘” 한 줄로 믿습니다. 목사가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가 있다면 바로 듣기에 힘들고 어려운 설교를 해야 할 때입니다. 난들 위로의 말씀, 격려의 말씀, 희망의 말씀, 축복의 말씀만 전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에는 회개하라, 돌아서라, 순종하라, 헌신하라, 십자가를 지라는 등, 우리가 듣기에 부담스러운 말씀도 있는 것입니다. 또한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하나님의 저주가 있다는 사실도 말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목사는 혹시 시험 당하는 사람은 없는지 염려되고 걱정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요즘 시대는 자기에게 유리한 것은 진리고 불리한 것은 거짓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진리의 말씀일지라도 자기의 기분과 상황에 맞지 않으면 No하는 세상 아닙니까?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리는 영원한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1:10에서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한 것입니다. 강단에서 목사가 선포하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 시간을 통해 전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것을 전하지 않으면 목사는 존재할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가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들은 강단에서 들려지는 축복의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며, 저주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서 그 저주받을 상황에 거하지 않도록 다짐하며, 혹시 그 가운데 처하였다면 그곳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기울임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주신 약속들을 저와 여러분의 삶에 풍성히 허락하여 주시리라 확신합니다
4.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세 번째 자세는 절대로 가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34절)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들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들어야 할 말씀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은 저 사람이 들어야 하는데” 이런 마음으로 설교 시간 내내 고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닙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이 시간 들려지는 말씀은 바로 나와 우리 모두가 듣고 은혜 받아야 할 말씀인줄로 믿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오늘 말씀은 저 사람이 들으면 안 되는데, 상처받을텐데” 마음 졸이면서 고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나와 우리 모두가 듣고 가슴을 치며 회개하라고 주시는 말씀이라는 사실 또한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