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37]
정대화 (鄭大和) - 내조자로서의 한평생
3. 지방 전도 활동과 숙명여대 졸업
1 제1차로 1957년 하계 40일 전도를 선생님께서 직접 주관하셨다. 나는 신원균 할머니와 함께 제비뽑기로 배정받은 임지인 충남 당진으로 개척을 나갔다. 당진은 감리교가 성한 곳이었다. 다행히 같이 나간 할머니의 친척을 만나 그 집에 거처를 정하고 전도를 시작하였다.
2 일본어도 가르치고, 주일학교 하계 수양회도 함께 지도하며 전도를 하였다. 그 주인 집이 다 호응을 하였다. 그 개척 기간에 「원리해설」이 출판되어 우리에게도 보내 주셨는데,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3 그 뒤 우리 퇴학 당한 학생들을 위해 하늘이 예비한 곳이 있었으니 숙명여대였다. 우리가 편입학을 신청했을 때 숙명여대 교수 회의에서 ‘신앙 문제 때문에 퇴학 당한 모범생들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교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주장한 장교목 때문에 편입이 결정되어 우리를 받아주었던 것이다.
4 그래서 5명이 숙대에 편입하여 졸업하게 되었다. 다른 학생들은 각각 경희대, 외대, 세종대 등에 편입하여 공부를 계속했다. 참부모님께서는 나중에 이대에서 퇴학 당한 14명에게 ‘명원회(明圓會)’라 이름 지어 주시며, 통일교회가 땅 끝까지 전파될 때 너희들 이름이 통일교회 역사와 더불어 영원히 빛날 것이라고 하셨다.
5 내가 숙명여대를 졸업하자 우리 아버지는 나를 강원도 삼척여자고등학교 가사 선생으로 취직을 시켜주셨다. 나는 가기가 싫었고 마음은 청파동교회에 가 있었다. 삼척 학교에서 1학기를 보내면서 ‘내가 누구를 위해 가정학과를 공부했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청파동에 가서 교회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6 1학기가 끝나고 방학 때 나는 서울 집에 와 있었다. 우리 집 부모님께는 삼척에 안 가겠다며 떼를 쓰고 있던 참이었는데 마침 삼척여자고등학교 교장선생이 다음 학기를 위해 격려차 우리 집을 방문했다.
7 그때 나는 잘 되었다 생각하고 밤새도록 엎드려 울어서 눈과 얼굴이 퉁퉁 부은 모습으로 교장선생님을 만나 “나는 신장병이 있어 못 나갈 것 같아요.”라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집안 망신시킨다.”라며 야단이셨지만 나는 끝내 학교에는 다시 가지 않겠다고 말씀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