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4.1.사순 제4주간 금요일 지혜2,1ㄱ.12-22 요한7,1-2.10.25-30
성인이 됩시다
- 지혜와 선행에 대한 사랑과 훈련, 습관화 -
선인이, 의인이, 현인이 됩시다. 누구나 될 수 있습니다. 타고난 선인도 의인도 현인도 없습니다. 사랑과 선택, 훈련과 습관에 따라 누구나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런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은, 청정욕은 언제든 좋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무수한 성인들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평생 성인이 되고자 하는 목표보다 더 좋은 목표는 없을 것입니다. 얼마전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 수녀님으로부터 받은 샤를르 드 푸코의 의탁의 기도가 좋았습니다.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바치오니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저를 어떻게 하시든지 감사드릴뿐,
저는 무엇에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저와 모든 피조물 위에 이루진다면
이밖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제 영혼을 당신 손에 도로 드립니다.
당신을 사랑하옵기에
이 마음의 사랑을 다하여
하느님께 바치옵니다.
당신은 제 아버지시기에
끝없이 믿으며
남김없이 이 몸을 드리고
당신 손에 맡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저의 사랑입니다.”
선인이, 의인이, 성인이 되는 길은 비상하지 않습니다. 이런 기도문을 사랑하여 끊임없이 정성껏 바치면 성인이 됩니다. 선행도 성인도 훈련입니다. 어제 언뜻 발견한, 윤 당선자의 사진과 기사에 모처럼 연민의 마음과 더불어 신선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명동밥집에 다녀왔다. ‘매일같이 기적이 일어나는 곳’이라는 대주교님의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다. 기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필요한 곳에 손길이 닿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렵고 힘든 분들께 먼저 손을 내밀고 힘이 되겠다. 명동밥집, 다음에 또 찾아뵙겠습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내용이었습니다. 타고난 악인은 없습니다. 악은 디테일 안에 숨어있다 합니다. 그러니 마음속 선심善心을 잘 보고 키우는 선행의 선택과 습관화가 중요합니다. 세상에 악인이 되고 싶은 사람은, 악인이란 말 들어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참 좋은 사람이다’ 찬사를 들으면 싫어할 사람 또한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어느 문예창작학과 교수의 고백도 잊지 못합니다.
“타인의 칭찬은 아이의 운명을 결정해요. ‘적절한 순간에 필요한 칭찬을 해주기’, 이것이 제 삶의 모토입니다.”
마침 어제 면담고백 성사차 찾았던 불우했던, 그러나 지금은 행복해 보이나 죄책감에 아파하는 자매에게 드린 격려 말씀이 생각납니다.
“오늘부터 감사하며 행복하게 사세요. 전혀 불필요한 죄책감입니다. 자매님은 죄인이 아니라 피해자예요! 약하니까 상처와 피해를 당할 수뿐이 없었어요. 하느님께서 좋은 남편과 좋은 자식들 선물로 주셨으니 이제 오늘부터 사순시기 감사하며 행복하게 사세요!”
더불어 보속으로 써드린 바오로 사도의 ‘말씀 처방전’입니다. 아마 가장 많이 써드리는 말씀 처방전일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이런 말씀의 실행이, 또 규칙적인 고백성사의 수행이 점차 고유의 참나의 성인이 되게 합니다. 오늘 제1독서 지혜서는 악인들의 삶과 생각에 대한 긴 내용의 나열입니다. 지혜서 1장 서두에 앞서 ‘하느님을 찾고 악을 피하여라’라는 소주제가 선명합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하라. 영원히 남으리라.’(시편37,27) 말씀도 생각납니다. 이어지는 지혜서 서두 말씀입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아, 정의를 사랑하여라. 선량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찾아라.”(지혜1,1)
어찌 통치자뿐이겠습니다. 참으로 언제나 정의를 사랑하고 주님을 찾을 때 성인입니다. 오늘 악인에 대한 묘사를 보면 평범함을 느낍니다. 새삼 악은 디테일 안에 숨어 있음을 봅니다. 주님을 잊고 수행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리고 본능대로 살면서 허무주의에 자신을 맡겨버리면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서서히 악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사순시기 깨어 절제, 극기, 자제의 선택과 영성훈련이 참으로 적절한 처방입니다. 다음은 악인의 뇌까림입니다만 이또한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우리의 삶은 짧고 슬프다. 인생의 끝에 다다르면 묘약이 없고 우리가 알기로 저승에서 돌아온 자도 없다. 우리는 우연히 태어난 몸, 뒷날 우리는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될 것이다.”(지혜2,1-2ㄱ)
바로 이것이 악인의 생각이랍니다. 바로 이런 평범한 허무주의가 악의 온상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섭리의 ‘필연’이 아닌 ‘우연’이란 생각이 도덕적 상대주의에 빠지게 하는 원흉입니다.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지혜2,12ㄱ.19-20)
우리 마음 깊이에는 이런 어둠의 요소도 잠재해 있기 마련입니다. 집단적으로 약하고 착한 이를 왕따 소외시키는 행위에서도 이런 악의 발현을 봅니다. 결론 같은 후반부 말씀이 우리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며 중심을 잡아 줍니다.
“그러나 그들이 틀렸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흠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하지도 않는다.”(지혜2,21-22)
이어지는 오늘 독서에서는 생략됐지만 다음 인간의 정의가 고무적입니다.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지혜2,23)
특별히 드러나는 악이 아니라 누구나의 평범한 생각이 바로 악의 토양이라니 놀랍습니다. 이래서 악의 평범성이라 하며 식별이 힘든 겁니다. 악이 눈멀게 한다, 바로 무지의 악에 눈멀 때 비로소 악인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지의 악이 문제입니다. 참으로 동방영성에서 많이도 강조해온 무지의 악, 무지의 병, 무지의 죄입니다. 무지에 눈멀 때 누구나의 가능성이 악인입니다. 그래서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이요, 하느님께 돌아가는 참된 회개뿐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말 그대로 악에 포위된 고립무원의 곤궁한 처지에 있는 예수님처럼 보입니다. 무지에 눈먼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호심탐탐 기회를 노립니다. 초막절 축제를 지내시고자 예루살렘에 갈 때도 남몰래 올라갑니다. 이런 악의 무수한 덫과 함정 속에서도 예수님이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흔들림 없이 자기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확고불변의 자아정체성에, 신원의식에 있음을 봅니다.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무지에 눈먼 유다인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잡으려 합니다만 하느님은 그분의 때가 될 때까지 보호해 주십니다. 그러니 참으로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나를 알아갈수록 비로소 무지의 악에서 해방되어 참 자유인이, 성인이, 의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점차 당신의 사람, 성인이 되게 하십니다. 다음 시편은 흡사 예수님의 고백처럼 느껴집니다.
“주께서 나의 빛 내 구원이시거늘,
내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께서 내 생명의 바위시거늘,
내 누구를 무서워하랴.”(시편27,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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