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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시(愛國詩) 감상및 해설
정용진 시인
조국은 민족의 텃밭이다.
조국이 없는 민족은 유랑민이나 노예로 살 수 밖에는 없다.
우리민족이 조상들이 물려준 조국을 일본에 빼앗기고 그들 밑에서 36년간이란 오랜 세월을 종노릇을 하면서 살았다. 한일 합방의 치욕. 을사보호 조약의 능욕. 젊은이들의 학도병. 장년들의 징용. 소녀들의 정신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민족적 비극의 시대였다. 여기 우리의 조국 광복을 위하여 사투를 벌리면서 피로써 쓴 애국 시들을 감상해 보자.
조국 정용진
조국은
내 사념((壯紙門) 틈 사이로
스며 오는
고향 하늘.
그는
내게로 다가와서
깃발이 되어
휘날리기도 하고
영원의 강물로
굽이치는
아! 아! 조국은
한의 얼
한의 꿈
한의 혈맥.
백의민족 선열들의
경천애인(警天愛人)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거룩한 애국 혼이
여기
우리들의 모토위에
뿌리 깊이 내려
그 체온이 따사롭다.
우리(韓)의 숨결
꽃으로 피어나
향이 되고
열매로 익어야 하리
뼈를 묻을
조국, 뜨거운 가슴에.
님의 침묵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님은 갔습니다 .
푸른 산 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아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에 날러갔습니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追憶)은 나의운명(運命)의 지침(指針)을 돌려놓고 뒷거름처서 사러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 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希望) 의 정수박이에 드러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갖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沈默)을 휩싸고 돕니다.
나룻배와 행인 한용운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광야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은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그 날이 오면 심훈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
삼각산(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漢江) 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鐘路)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頭蓋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恨)이 남으오리까.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鼓]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논개(論介) 변영로
거룩한 분노는
종교 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情)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娥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石榴)속같은 입술
`죽음'을 입 맞추었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여러분의 행렬(行列)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우리 민족에게는 반드시 이루어야할 소원이 또 하나 있다. 남북으로 분단된 민족
과 국토의 통일이다. 날로 강성해지는 중국과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우리가 살 길
은 오직 통일뿐이다.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의 구출. 중국으로 넘어가고 있는 북한
의 광산 및 어업 채취권, 하나 같이 급하지 않은 것이 없다. 통일만이 우리 민족
의 살길이다. 여기에 통일을 갈망하는 절규의 시들이 실려 있다.
휴전선 언저리에서 고은
北韓女人아 내가 콜레라로
그대의 살 속에 들어가
그대와 함께 죽어서
무덤 하나로 우리나라의 흙을 이루리라.
통일의 꿈 정용진
통일은 꿈입니다.
희망입니다.
만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밤마다 꿈을 꿉니다.
피난길
산모롱이를 돌다
엄마를 놓친 꿈
남포동 거리를 헤매다
누나를 만난 꿈을 꿉니다.
통일은 한(恨)입니다.
남과 북이
꿈속에서 만나
서로 부등켜 안고 울다가
깨어서도
진짜로 부등켜 안고 우는
감격의 꿈입니다.
그것을 못해서
우리 모두는 이렇게 괴롭습니다.
통일은 아픔입니다.
너의 고뇌를 내가 알아주고
나의 고통을 그대가
대신 짊어져주는
통일은
서로를 생각하는 맘입니다.
서로가 희생하는 맘입니다.
진짜 통일은
피나는 아픔을 참아가며
가지를 자르고
줄기를 자르고
마지막 남은 몸통 속의
신장마저 떼어주며
서로가 나아지기를 바라는
참맘입니다.
이것이 없어서 우리는
이제껏
형제가 피투성이로 싸운
억울한 쌈꾼이었습니다.
통일은
너도 텅 비우고 나도 텅 비워
네 속에 내가 들어가고
내 속에 네가 들어옴입니다.
이제껏 우리는
헛살았습니다.
서로를 욕하다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습니다.
잘났다는 사람들의
춤사위에 놀아난
헛삶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마지막 남은 분단의 비극입니다.
참으로 부끄럽고 원통합니다.
어쩌다 이 꼴이 되었습니까.
이제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지배욕, 권력욕, 명예욕,
헐뜯음, 비웃음을 버린다면
통일은 이제라도 곧 옵니다.
그것을 기다리다 간
슬픈 혼들이
우리들의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습니다.
통일은
문을 열어줌입니다.
직녀에게 문병란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 채로 기다리기엔 은하수가 너무 길다.
단 하나 오작교마저 끊어져 버린
지금은 가슴과 가슴으로 노둣돌을 놓아
면도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
그대 몇 번이고 감고 푼 실을
밤마다 그리움 수놓아 짠 베 다시 풀어야 했는가.
내가 먹인 암소는 몇 번이고 새끼를 쳤는데,
그대 짠 베는 몇 필이나 쌓였는가?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사방이 막혀 버린 죽음의 땅에 서서
그대 손짓하는 연인아.
유방도 빼앗기고 처녀막도 빼앗기고
마지막 머리털까지 빼앗길지라도
우리는 다시 만나야 한다.
우리들은 은하수를 건너야 한다.
오작교가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
가슴을 딛고 건너가 다시 만나야 할 우리,
칼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이별은 이별은 끝나야 한다.
말라붙은 은하수 눈물로 녹이고
가슴과 가슴을 노둣돌 놓아
슬픔은 슬픔은 끝나야 한다, 연인아.
남과 북 정용진
전운(戰雲), 눈먼 휘장에 가려
55년간 분단의 세월을
서로가 서로를
배척하였던
남과 북.
이제는
봄눈 녹는 물소리에
38선 언 땅이 갈라지고
움트는 생명의 숨결.
새천년
새 시대의 노래를
함께 부르기 위하여
너무나 오랜 세월을
우리 모두는 인내하고 아파했다.
민족의 심장에서
동록(銅綠)을 닦아내고
군사분계선을 넘어
두 정상이 포옹할 때
그 두 가슴의 따스한
체온을 통하여
혈맥 속으로 굽이쳐 흐르던
뜨거운 민족애.
남과 북
7천만 겨레
우리 모두는
감격했다
감동했다
눈물을 흘렸다.
못난 과거는 이쯤에서 묻어버리자
서로가 서로의 책임을 물어
무엇하겠느냐
우리 모두는
백의민족의 후예들....
벗어던지자
깨쳐버리자
독선과 아집
고집과 편견을
과감히 부셔버리자.
불덩이 같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민족의 염원 앞에
조국의 영광 앞에
무엇이 감히 버티겠느냐
남과 북이
손과 손을 마주 잡고
가슴과 가슴을 얼싸 안던 그날
비로서
임진강의 핏기가 가시고
한탄강의 물결이 잠들어
참 평화로구나!
이제 우리
서로의 죄를 용서하고
사랑으로 화해하자
전쟁에서 평화로
분단에서 통일로
동면의 시간이 너무 길었다.
반목의 시간이 너무 길었다.
적대의 시간이 너무 길었다.
우리의 항로
우리의 뱃길
우리의 육로로
서로 오가면서
우리끼리 하나 되자
7천만 겨레여
삼천리금수강산이여.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申東曄, 1930.8.18 ~ 1969.4.7]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북소리 정용진
둥 둥 둥
둥 둥 둥
북이 울린다.
마디마디
꺽이는 가락에
목이 메인
슬픈 민중.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으로
둥 둥 둥
둥 둥 둥
북이 울린다.
혼으로 외치는 간구에
하늘이 열리고
한(恨)으로 떠는
애통에
땅이 흐느낀다.
둥 둥 둥
둥 둥 둥
길 없는 천지를
소리 따라 나서는
망국의 설움
이었다 끊기고
끊겼다 이어지며
북이 울린다.
둥 둥 둥
둥 둥 둥
서천이
황혼으로 물드는 고향 벌
앗기고 밟히고
피멍이 들어 텅 비인
민중의 가슴 속에
북소리가 차오른다.
저 소리는
어디서 오는 가
저 광망은 어디서 솟는 가
36년의
아픈 사슬을 끊고
잘린 지맥에서
붉은 피 흐르는 소리
뜨거운 심장이 뛰는
맥박의 소리.
눈이 있어도 빛이 없고
귀가 있어도
입이 막혔던
적막강산
이 푸른 흙 가슴에
말뚝을 박던 놈은 누구냐
그것이 옳다던 역적들은 다
어디 갔느냐.
쌀 뒤지를 잃고
옥수수로 연명하며
한없이 울던 민중
내선일체를 외치던
병든 지성은 어디 있느냐.
성명을 빼앗기고
언어를 빼앗기고
선열들이 심어 준
민족혼마저 약탈당한
암흑의 36년!
비통의 36년!
절망의 36년!
그러나 보라!
천 지 인의
위대한 결합
우렁찬 합창.
하늘이 열리고
땅이 트이고
빛이 쏟아진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아침
우리 모두는
기뻐했다
용서했다
서로 얼싸안았다.
둥 둥 둥
둥 둥 둥
북이 울린다.
서러웠던
역사의 강물 위에
힘차게 흘러드는
창조의 물결
개혁의 물결
통일의 물결
부정도 버려라
부패도 버려라
사욕도 버려라
경천애인(敬天愛人)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거룩한 민족혼이
한강에서 대동강으로
줄기차게 굽이치는 이아침
둥 둥 둥
둥 둥 둥
인내천(人乃天)
광제창생(匡濟蒼生) 보국안민(輔國安民)의
피 끓는 목소리
북이 울리고 있다
북이 울리고 있다.
둥 둥 둥
둥 둥 둥
위대한 민중이여!
거룩한 백성이여!
조국의 영광이여! (조국광복 60주년 기념 시)
흘러간 역사 속에서도 우리의 조국과 민족을 지키려는 지사와 의인은 수 없이 많았다. 이분들의 목숨을 거는 애국심이 없었다면 우리는 오늘날 이 땅의 주인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들은 정열을 바쳤고, 생명을 바쳤고, 애국심을 바쳤다. 이들의 명시를 여기 올려놓는다.
<역사속의 애국시들>
포은집(圃隱集)>에는 한역(漢譯)되어,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也歟."
라고 실려 전한다.
<해동악부(海東樂府)>와 <포은집(圃隱集)> 원문>
此身死了死了(차신사료사료)
一百番更死了(일백번갱사료)
白骨爲塵土 (백골위진토)
魂魄有也無 (혼백유야무)
向主一片丹心(향주일편단심)
寧有改理與之(영유개리여지)
“이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없고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줄이 이시랴.“ <圃隱. 鄭夢周>
이는 포은의 단호한 신념의 표시요, 천추만세에 길이 남길 불후의 유언이었다. 이후 그는 이방원의 하수인 조영규에 의하여 개성 선죽교에서 피살되었고 그가 흘린 핏자국이 선죽교에 붉게 물들어 있다고 전한다.
신념과 확신은 인간 존재의 의미요 소중한 가치 중에 가치다. 이러한 삶과 죽음의 어려움을 보고 인류의 스승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라고 논어 이인 4편에 기록하고 있다.
충신을 키운 포은의 어머니가 지었다는 시조도 우리에게 큰 의미를 던져준다.
가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낸 가마귀 흰빛을 새올세라
청강에 잇것 시슨 몸을 더러 일가 하노라. <포은. 모친>
삭풍(朔風)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明月)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성(萬里邊城)에 일장검 집고서서
긴 파람 큰 한 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장백산(長白山)에 기를 곳고 두만강에 말을 씻겨
서근 져 선비야 우리 아니 사나희냐
엇덧타 인각화상(麟閣畵像)을 누구 몬져 하리오.
세종조(世宗祖)에 육진을 개척하고 문무를 겸비한 김종서(金宗瑞)의 애국시 호기가(豪氣歌)다.
세종의 총애를 받고 세조가 사륙신을 역살할 때 문무를 겸비한 김종서도 단종 복위 운동 때에 주살 되었다. <출처 : 청구영언>
남이(南怡)장군은(1441-1468)선조 3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28세에 병조판서에 오른 무관으로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유자광(柳子光)등의 반대파들의 모략으로 여진 토벌 시 읊은 시가 발단이 되어 반역죄로 주살 당하였다. 이들이 미평국(未平國)을 미득국(未得國)으로 변조하여 역모로 몰고 간 것이다.
백두산 돌이 다 달토록 칼을 갈아 둘러메고
두만강 물이 마르도록 말을 살찌게 먹여 타고
남아로서 20세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한다면
후세에 어느 누가 일러 대장부라 하리오.
白頭山石 磨刀盡
豆滿江水 飮馬無
男兒二十 未平國
後世誰稱 大丈夫 <南怡>
정암(靜巖)조광조(趙光祖)는 진사시 장원, 알성시 급제 후 성균관전적, 부제학, 대제학을 지내는 동안 급진적인 개혁을 서두르다 훈구파 남곤. 심정 등의 무고로 기묘사화 때 사사(賜死)당했다. 궁중을 혼란케 하던 소격서(昭格署) 혁파로 유명하고 정암집15권 5책이 전해진다. 그의 유시를 대하면 우국충정이 눈물겹다. 사색 당쟁이 얼마나 무모하였는가를 우리 민족은 진심으로 반성해야 할 것이다.
임금을 어버이처럼 섬겼고 (愛君如愛父)
나라를 내 집 처럼 근심하였네 (憂國如優家)
밝은 해가 세상을 굽어보니 (白日臨下土)
붉은 충정을 밝게 밝게 비추리라.(昭昭照丹衷) <靜巖. 趙光祖>
사약 사발을 들고 온 의금부도사 앞에서 이런 유시를 쓸 수 있는 올곧은 선비가 있었다니 참으로 우리의 선조들은 위대한 민족혼의 표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은 1570년에 태어나 병자호란 때 최명길 등 주화론자에 앞서 척화론을 주장하며 청에 볼모로 잡혀가는 두 왕자와 홍익한 오달제 윤집 삼학사의 극한상황을 보며 최명길이 작성한 항복서를 찢으며 청나라로 잡혀가면서
"임금의 욕됨이 극한에 이르렀는데
신하의 죽음이 어찌 더딘 가 목숨을 버리고
의(義)를 취한다 하더니 바로 지금이 그때인가 하노라.“
임금을 모시고 투항하는 건 내 진실로 부끄럽네
한칼로 인(仁)을 얻으리니 죽음은 집에 돌아가는 듯 여겨지네.“
라는 각오로 청나라에 잡혀 가면서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애국시를 남기고 고국을 떠났다.
그는 뒤에 풀려 노구를 이끌고 고국으로 돌아와 학가산(鶴駕山)골짜기에 목석헌(木石軒)이라는 초옥을 엮고 은거하였는데 많은 신하들이 상소하여 숭록대부(崇錄)대부를 하사하려 하였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끝까지 항복을 아니 한 삼학사 홍익한 오달제 윤집은 한 관속에 넣고 톱으로 켜서 죽였다하는데 그들이 유서로 남긴 시한수가 전해오지 아니하여 어기에 옮길 수 없으니 필자도 마음이 아프다.
충무공(忠武公)이순신(李舜臣)장군은 무인인 동시에 탁월한 전술가요 문장가였다. 그는 이조 인종 원년에 한양에서 태어나 갖은 저항과 모략을 받으면서도 우국충정의 애국 혼을 천추만세에 빛내신 분이다.
그는 충신이요, 효자요, 애국자였다. 가지가 많은 나무가 바람 잘 날 있었겠는가?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애를 끊나니.
화살을 맞아 세상을 떠날 때에도 진중의 혼란을 생각하여 나의 죽음을 밖에 알리지 말라고 당부한 우국충정이 지금도 귀에 들려오는 듯 쟁쟁하다.
안중근(安重根)의사는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안태훈(安泰勳)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도산 안창호를 만나 그의 영향을 받았고 1909년 10월 22일 하르빈 역두에서 조선총독 이등박문을 사살하고 체포되어 1910년 3월26일 오전10시 여순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그는 조국을 위하여 명문과 명필을 많이 남겨 후세에 귀감이 되었다. 이를 여기 옮겨 놓는다.
장부는 비록 죽을지라도 마음이 쇠와 같고
의사는 위태로움에 임할지라도 기운이 구름 같도다.
동양 대세 생각하매 아득코 어둡거니
뜻있는 사나이 편한 잠을 어이 들리.
평화시국 못 이룸이 이리도 슬픈지고.
침략정책 안 고침은 참으로 가엽도다.
눈보라 친 연후 예야 송백의 이울어지지 않음을 아느니라.
사람이 멀리 생각지 못하면 큰 일을 이루기 어려우니라.
이로움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주라.
(見利思義 見危授命)
임 생각 천리 길에 바라보는 눈이 뚫어질 듯하오이다.
이로써 작은 정성 바치노니 행여 이 정을 버리지 마소서.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사업을 진흥하여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이 없겠노라. <안중근>
그의 최후의 소식을 듣고 청국의 대 정치가 원세게는
이런 조시를 보냈다. 그 또한 얼마나 그릇이 큰 인물인가?
평생을 벼르던 일 이제야 끝났구료
죽을 땅에서 살려는 건 장부가 아니고 말고
몸은 한국에 있어도 만방에 이름 떨쳤소
살아선 백 살이 없는 건데 죽어서 천년을 가오리다.<원세개>
安重根義士 輓章
袁世凱
平生營事 只今畢
死地圖生 非丈夫
身在三韓 名萬國
生無百歲 死千秋
*袁世凱:1910년 당시 중국의 국가주석
이렇게 우리 조국과 민족을 진지하고 가슴 뛰게 한 참 지도자가 과연 우리 역사 속에 몇 분이나 계셨는지 우리 스스로에게 묻고 싶다. 이 못난 민족 앞에 그 귀한,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목숨을 바치신 의사 앞에 우리 모두는 가슴을 기우려야한다.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1861-1905)은 한말의 문신이요 순국지사다. 그는 문과에 급제한 후 예조, 병조, 형조 판서를 역임 하였고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망국의 설움을 달랠 길 없어 5통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여 고국과 국민을 향한 애국 충정을 보였다.
“아! 국치와 민욕이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 민족은 장차 생존경쟁 가운데서 진멸하리라. 대저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사람은 도리어 삶을 얻나니
제공은 어찌 이것을 알지 못하는고? 영환은 한번 죽음으로 황은에 보답하고 2천만 동포형제에게 사죄하려 하노라. 그러나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고 저승에서라도 제공을 기어이 도우리니 동포형제들은 천만 배 더욱 학문에 힘쓰며 한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우리의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은 몸도 마땅히 저 세상에서 기뻐 웃으리라. 아!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우리 대한제국 2천만 동포에게 삼가 이별을 고하노라.“ <민영환>
그가 자결한 뒤에 남기고간 피 묻은 옷과 칼을 마루방에다 봉안했는데 이듬해 1906년 7월비로서 그곳을 열고 보았을 때 마루 틈에서 4줄기 9가지 48잎사귀가 돋은 푸른 대나무가 솟아올라 있었다 한다. 그의 애끓는 우국충정이 고려 말 포은 정몽주의 선죽교 고사와 함께 우리 민족사의 애국 충절의 표본으로 길이길이 칭송 될 것이다.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선생은 1878년 평양에서 안흥국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미국으로 공부를 하려고 왔다가 민족이 어려움을 받고 천시를 당하는 모습을 보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인격완성과 경제적 자립임을 깨닫고 해외동포들을 훈련시켜 국력을 기르고 힘이 없어서 잃은 조국을 되찾으려는 일념으로 흥사단과 국민회를 조직하고 해외동포들을 훈련 시켜다. 흥사는 흥단을 위하여 흥단은 흥국을 위하여 초지일관한 것이 그의 애국관이요 민족혼이었다.
“나라가 없고서 한 집안과 한 몸이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받을 때 혼자만이 영광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이 그이 신념이었다.
그가 독립 운동을 하다 왜경에 체포되어 검사가 또 독립운동을 하겠느냐? 는 질문에 “나는 밥을 먹는 것도 민족 운동이요, 잠을 자는 것 도 민족운동이다. 나더러 민족운동을 하지마라 하는 것은 죽으라 하는 것과 같다. 죽어도 혼이 있으면 나는 여전히 민족 운동을 계속 할 것이다.”라고 진술하였다.
도산이 단장의 슬픔을 안고 조국을 떠나 미국으로 올 때 그가 남긴 거국가(去國歌)는 오늘도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거국가(去國歌)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잠시 뜻을 얻었노라
까불대는 이 시운이
나의 등을 내밀어서
너를 떠나가게 하니
일로부터 여러 해를
너를 보지 못할지니
그 동안에 나는 오직
너를 위해 일할지니
나 간다고 설워마라
나의 사랑 한반도야.“
윤동주(尹東柱)시인은 1917년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나 숭실, 동명 중학을 졸업 한 후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하였다. 구주 동경 입교대학을 거쳐 경도 동지사대학 영문과에 재학 중 사상범으로 체포되어1944년 2년 형을 선고받고 복강형무소에 수감 중 1945년 2월16일 형무소에서 별세 하였다 .그는 우리 민족이면 누구나 읽어 감동을 받는 “서시”를 유시처럼 남기고 조금만 있으면 맞이할 조국 해방을 못 본채 세상을 떠났다.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 하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운명의 길을 인간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가 없다는 아픔을 우리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나 시인 윤동주에게서 절실히 보고 아프게 깨닫는다. 아주 짧은 세월만 더 살았더라면 그들은 꿈속에서 그리던 조국 해방을 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젊은 나이에 얼마나 학문의 깊이가 있었으면 그의 싯귀에 맹자집주 13장3락에 ‘부모가 생존해 계시고 형제가 무고하면 “첫 번째 기쁨이요, 하늘을 우러러 한 덩이 부끄러움이 없고, 고개 숙여 사람을 대하여 부끄러움이 없다면 두 번째 기쁨이라(仰塊於天 俯不作於人)의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부끄러움”을 논한 것을 보면 한문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5.18 광주민중항쟁 기념>
광주의 십자가와 부활을 노래함 -
김준태의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
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
우리들의 아들은
어디에서 죽어 어디에 파묻혔나.
우리들의 귀여운 딸은
또 어디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있나.
우리들의 혼백은 또 어디에서
찢어져 산산이 조각나 버렸나.
하느님도 새떼들도
떠나가버린 광주여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들만이
아침저녁으로 살아남아
쓰러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
아아 통곡뿐인 남도의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해와 달이 곤두박질 치고
이 시대의 모든 산맥들이
엉터리로 우뚝 솟아있을 때
그러나 그 누구도 찢을 수 없고
빼앗을 수 없는
아아, 자유의 깃발이여
살과 뼈로 응어리진 깃발이여.
아아, 우리들의 도시
우리들의 노래와 꿈과 사랑이
때로는 파도처럼 밀리고
때로는 무덤을 뒤집어쓸지언정
아아, 광주여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무등산을 넘어
골고다 언덕을 넘어가는
아아, 온몸에 상처뿐인
죽음뿐인 하느님의 아들이여.
정말 우리는 죽어버렸나.
더 이상 이 나라를 사랑할 수 없이
더 이상 우리들의 아이들을
사랑할 수 없이 죽어버렸나.
정말 우리들은 아주 죽어버렸나.
충장로에서 금남로에서
화정동에서 산수동에서 용봉동에서
지원동에서 양동에서 계림동에서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아아, 우리들의 피와 살덩이를
삼키고 불어오는 바람이여.
속절없는 세월의 흐름이여.
아아,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구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넋을 잃고 밥그릇조차 대하기
어렵구나 무섭구나.
무서워 어쩌지도 못하는구나.
(여보 당신을 기다리다가
문밖에 나가 당신을 기다리다가 나는 죽었어요…
왜 나의 목숨을 빼앗아 갔을까요.
아니 당신의 전부를 빼앗아 갔을까요.
셋방살이 신세였지만
얼마나 우린 행복했어요.
난 당신에게 잘해주고 싶었어요.
아아, 여보!
그런데 나는 아이를 밴 몸으로
이렇게 죽은 거예요 여보!
미안해요, 여보!
나에게서 나의 목숨을 빼앗아 가고
나는 또 당신의 전부를
당신의 젊은 당신의 사랑
당신의 아들 당신의
아아, 여보! 내가 결국 당신을 죽인 것인가요!)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을 뚫고 나가
백의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다시 넘어오는
이 나라의 하느님 아들이여.
예수는 한번 죽고
한번 부활하여
오늘까지 아니 언제까지 산다던가
그러나 우리들은 몇 백번을 죽고도
몇 백번을 부활할 우리들의 참사랑이여
우리들의 빛이여, 영광이여, 아픔이여
지금 우리들은 더욱 살아나는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튼튼하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아아, 지금 우리들은
어깨와 어깨 뼈와 뼈를 맞대고
이 나라의 무등산을 오르는구나.
아아. 미치도록 푸르른 하늘을 올라
해와 달을 입맞추는구나.
광주여 무등산이여
아아, 우리들의 영원한 깃발이여.
꿈이여 십자가여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젊어져갈 청춘의 도시여.
지금 우리들은 확실히
굳게 뭉쳐 있다 확실히
굳게 손잡고 일어선다.
(김준태·시인)家
*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비화 공개
80년 광주의 오월을 생생하게 표현한 김준태시인의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시의 탄생 비화가 공개됐다. 이 시는, 당시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현장을 취재한 전남매일신문 편집국 기자들에 의해 극적으로 세상에 얼굴을 알렸다.
옛 시인 도연명은 인생 칠십 고래희(人生七十 古來希)라고 하였다.
나도 70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느낀 점은 젊은 시절이 너무 고생스러웠거나 가정이 불행했던 사람은 고향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가 태어난 고향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껴왔다.
위에 올려 진 시들은 하나 같이 절절하게 자신의 고국을 사랑했고, 심지어는 목숨을 바치면서 까지 조국을 노래하였다.
애가(愛家)와 애향(愛鄕)과 애국(愛國)은 우리가 평생을 기울여야 할 역사적 사명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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