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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말씀으로 강단을 숨쉬게 하라 ①
강단에 부는 설교의 새바람
기고를 시작하면서
<기독신문>을 통해 목회자님들과 성도님들을 뵙게 되어 참으로 기쁘고 영광스럽습니다. 부족한 사람에게 귀한 지면을 통해 설교에 대한 글을 소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기독신문 관계자님들께 마음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특별기고 연재 부탁을 받고 목회에 전념하는 상황인지라 망설여졌지만 보잘것없는 사람을 세워주고 은혜를 입게 한 우리 교단을 생각하면 부족한 대로 순종함으로 조금이라도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려 합니다.
저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총신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이후 미국 고든콘웰신학교에서 구약과 신약을 공부하고, 서든뱁티스트신학교에서 신약과 설교학을 공부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지난 10년 동안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설교학을 가르쳤습니다. 현재 미국 수도 워싱턴에 있는 와싱톤중앙장로교회에서 6년 가까이 담임목회를 하고 있으며, 보스턴에 위치한 고든콘웰신학교에서 객원교수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칠 때도 참 감사하고 행복했지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성도들을 섬기면서 생애 가장 보람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특별기고를 통해 소개하고자 하는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최근의 설교학 흐름을 소개하고 개혁신학과 성경적 설교 입장에서 평가하면서, 그 대표적인 사람들의 가르침과 설교를 살펴보려 합니다. 최근의 설교학이 많은 신학적 문제를 안고 있지만 배워야 할 부분 역시 적지 않습니다. 최근의 설교학을 잘 살피면 성경적 설교를 강조하는 우리가 보충해야 할 것을 조금 더 선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새로운 설교학의 가르침과 달리 기독교 역사에 오랫동안 등뼈 역할을 해 온 강해설교와 강해설교자를 다루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할 교훈을 찾고자 합니다. 진리의 말씀은 변함이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시대에 맞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우셔서 강단을 새롭게 함으로 영혼구원과 세상변화를 추구해 오셨습니다.
셋째, 최근 설교학과 강해설교의 기본 흐름을 이해한 후에 모든 목회자의 최대 관심인 성경적 설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작성할 것인지를, 설교작성 과정을 실제 사례와 함께 탐구하면서 강단에 적용하려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족한 사람의 본문이해와 설교작성을 구체적으로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으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진실하게 고백한다면 시대와 장소, 민족과 상황을 떠나 하나님이 세우신 주님의 교회입니다. 부족한 사람의 글을 통해 <기독신문>을 애독하시는 목회자님들이 진리의 말씀을 조금이라도 바르게 이해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하여 강단에 신선한 새바람이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조국의 각 교회마다 강단에 진리의 샘이 솟아나 교회마다 거룩한 부흥을 체험하고, 이 불길이 지역교회를 깨우고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길 소망합니다. 나아가 진리의 말씀선포로 인하여 주님께서 그토록 기대하시는 세계선교에 소중하게 쓰임 받은 우리 교단과 한국교회가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글을 시작합니다.
‘최근의 설교학’ 이해
설교학 흐름을 말할 때 주로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전통적으로 본문을 중시해 온 강해설교 혹은 성경적 설교가 있고, 전통적 설교에 반기를 들고 전달을 강조해 온 최근의 설교학 흐름이 있습니다. 최근의 설교학이라고 말할 때, 영어로 ‘New Homiletics’라 부릅니다. 시기적으로 프레드 크레독이 1971년에 <권위 없는 자처럼>(As One without Authority)이라는 책을 출간한 이후 약 35년간의 설교학 흐름을 두고 최근의 설교학이라 부릅니다. 앞으로 최근의 설교학이 전통적인 설교학과 무엇이 다른지, 그 특징들을 소개하고 최근의 설교학을 이루는 주요 학자들을 살피고자 합니다. 그 후에는 강해설교라 불리는 성경적 설교의 가르침은 무엇이며, 그 중심을 지배하는 대표자들을 살피고자 합니다.
새로운 설교학이 전통적 설교와 가장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성경에 대한 이해와 설교전달에 대한 시각에 있습니다. 전통설교가 성경 진리를 그대로 수용하면서 설교했다면, 최근의 설교학은 성경 자체에 대한 강조가 약화되고 전달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점차 성경과 설교에 무관심해 지는 현대인들에게 어떻게 하면 그들의 마음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할 것인가, 즉 전달의 문제가 새로운 설교학의 출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최근의 설교학 흐름 근저에는 전통적 설교기법이 현대인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는 인식에서 시작합니다. 전통적 설교는 전달방식에 대한 고찰보다 주로 성경내용을 충실하게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왔습니다. 기독교 설교 역사에 전달법은 항상 강조되어 왔지만,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위 ‘들려지는 설교’를 향한 관심이 특별하게 일어났습니다. 프레드 크래독, 유진 로우리, 데이빗 버트릭 같은 사람들이 이 운동을 주도했고, 이러한 새로운 설교 흐름을 ‘새 설교학’이라 부릅니다.
새 설교학이란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리처드 에스링거라는 설교학자입니다. 그는 이전의 설교가 명제적이고 교훈적인 설교 위주로 행해졌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실패했다고 진단합니다. 다양한 설교양식과 전달방식을 제시함으로 본문을 보다 역동적으로 살리려는 시도가 활발하게 펼쳐졌습니다. 설교전달에 대한 이러한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기란 어렵지만 주로 귀납적 설교, 현상학적 설교, 내러티브 혹은 이야기식 설교, 그리고 스토리텔링 설교 등으로 불려 왔습니다.
미국에서 일어난 새로운 설교학은 1971년 프레드 크래독이 <권위 없는 자처럼>을 출판한 후 설교학의 큰 맥을 형성해 왔습니다. 크래독이 주장한 귀납적 설교는 지금까지 전통적인 강해설교 신학이 주를 이루었던 미국 신학교와 강단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크래독과 입장을 함께 하는 유진 로우리와 데이비드 버트릭 같은 사람이 뒤를 이었고 우리나라에도 이런 학자들의 책이 소개되어 왔습니다.
새로운 설교학에는 배울 점도 경계할 점도 동시에 존재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청중의 마음을 얻기 위한 그들의 전달법은 잘 수용해서 효과적인 전달에 도움을 얻어야 하지만, 그들의 성경관과 설교신학 자체는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전통적인 설교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설교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핵심은 전통적인 설교의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설교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설교란 설교자가 전하고자 하는 성경 진리를 주로 논증과 설득을 통해 설명하는 것에 치중합니다. 새 설교학자들은 이러한 전통적인 설교기법이 현대인들에게 더이상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설교학자들의 주장은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다음과 같은 점에서 대체로 일치를 보입니다.
첫째, 기존의 명제적이고 교훈적인 설교 대신 비명제적이고 서술적인 설교를 지향합니다. 명제적이고 교훈적이라는 말은 설교자가 이미 답을 지닌 채 설교를 통하여 일방적으로 그 답을 풀어내는 것을 말합니다.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를 주로 3대지로 구성하고, 각 주제를 설명하고 예화를 들면서 결론을 맺는 방식을 가리킵니다.
새 설교학자들이 문제를 삼는 것은 바로 이런 대지로 진리를 전달하는 방법에 있습니다. 설교자가 성경을 통하여 뻔한 답을 제시함으로써 본문의 역동적인 흐름을 무시해 청중의 관심을 저하시킨다고 비판합니다. 명제적인 설교의 대안으로 새 설교학자들은 인간의 체험을 강조하고, 청중의 경험에 호소하는 설교를 추구합니다. 주로 성경 본문으로부터 시작하는 기존 설교와 달리 이들은 인간의 체험으로부터 설교를 시작하고 체험으로 마치기도 합니다. 청중에게 자신들이 지니는 삶의 문제와 경험을 다뤄 설교를 자신의 이야기로 체험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둘째, 새 설교학자들은 한결같이 청중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설교자가 결론을 제시하는 전통적인 설교와 달리 이들은 청중에게 스스로 결론을 내리게 함으로써 설교에 능동적으로 동참하게 합니다. 명제적인 설교의 특징은 주로 설교 마지막에 결론을 제시함으로써 설교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하게 제시합니다. 새 설교학자들은 이러한 기존의 설교 유형이 지나치게 설교자에게만 치중되어 있다고 비판합니다. 설교에서 청중은 무시되거나 일방적으로 설교를 듣는 자세만 보인다는 것입니다. 설교의 중심축을 본문에서 청중으로 옮겼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셋째, 인지적이고 연역적인 설교를 비판하는 새 설교학은 자연스레 설교의 형태에서 긴장과 흐름을 지닌 내러티브 설교를 지향합니다. 성경의 4분의 3이상이 내러티브 형식으로 되어 있음을 강조하며 기존의 설교가 천편일률적으로 본문의 기록 양식을 무시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성경의 기록 양식을 살려내어 설교에서도 동일한 형식으로 적용하자는 것입니다.
데이비드 버트릭은 성경의 문학적인 특색을 설명하면서 “우리는 성경이 역사라기보다 줄거리를 가진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기 시작한다. 심지어 내러티브 양식의 본문이 아닌 것조차 성경 언어는 움직이는 사고의 그림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며 성경의 내러티브 형식을 강조합니다. 버트릭의 이 주장은 성경의 내러티브 성격에 새로운 관심을 지닌 새 설교학자들의 분위기를 집약하는 말입니다. 이야기를 살려내자고 주장하기에, 성경본문을 다룰 때도 교리적 내용을 담은 바울서신보다 구약의 내러티브나 예수님의 비유 같이 이야기를 선호합니다.
이번 글에는 새로운 설교학의 출현과 그들의 주장을 간단히 살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새로운 설교학 주장의 장단점을 살피면서 우리가 수용할 점과 경계할 점을 다루고 그 중심인물과 설교를 다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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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말씀으로 강단을 숨쉬게 하라 ③ 새로운 설교학을 주도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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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말씀으로 강단을 숨쉬게 하라 ⑭ 영성 있는 삶으로 청중 앞에 나아가라
진리의 말씀으로 강단을 숨쉬게 하라 ⑮ 하나의 주제가 있는 본문을 선택하라 - ㉮본문 선택, 이렇게 하라
진리의 말씀으로 강단을 숨쉬게 하라 ⑯ 다양한 방법으로 본문을 선택하라 - ㉯본문 선택, 이렇게 하라
진리의 말씀으로 강단을 숨쉬게 하라 ⑰먼저 경건한 본문 읽기로 거룩한 묵상의 바다에 빠져라-㉮본문 묵상, 이렇게 하라
[특별기고] 진리의 말씀으로 강단을 숨쉬게 하라 ⑱ 본문이 구름 없는 달처럼 선명해질 때까지 읽어라 - ㉯본문 묵상, 이렇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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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진리의 말씀으로 강단을 숨쉬게 하라 ㉕ 설교 적용, 어떻게 할 것인가
[특별기고] 진리의 말씀으로 강단을 숨쉬게 하라 ㉖ 효과적 설교, 시작과 마침
[특별기고] 진리의 말씀으로 강단을 숨쉬게 하라 ㉗ 설교 실제와 해설 - ㉮삭개오 이야기(눅 19:1~10)
(최종회) 설교 실제와 해설 28
㉯ 믿으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요 11:38~44)
'나사로 이야기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부활의 감격을 누리고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도록 도와야
성경적 설교는 본문에 근거, 삶의 변화 끌어내야 한다
“오빠의 죽음을 앞에 놓고 아픔을 겪는 마리아와 마르다가 있습니다. 오빠 나사로가 병이 들어 죽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부모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을 것입니다. 가정의 경제를 책임졌을 오빠가 죽는다는 것은 한 가정이 무너지는 일이나 마찬가집니다. 두 누이는 급하게 예수님께 사람을 보냅니다. “주님, 사랑하는 자가 병이 들었습니다, 도와주세요.” 예수님은 평소에 나사로를 참 사랑하셨고, 두 누이와 나사로도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병이 들면 의사를 불러야지, 예수님을 부르는 것을 보면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설교를 시작할 때 가장 무난한 것은 본문으로 인도하는 예화입니다. 성도들의 흐트러진 마음을 말씀으로 인도하는 노력과 배려가 필요합니다. 예화는 대부분 성도들의 마음을 얻습니다. 예화로 시작하지 않을 경우에 좋은 방법은 본문을 이야기식으로 구성하는 것입니다. 주제나 교리를 설교할 때는 서론에서 분명하게 주제를 밝히는 것도 좋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일어나는 두 가지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신분, 둘째,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생활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평소 이 정도 되면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면서 병을 고쳐주곤 하셨습니다. 그러나 간곡한 부탁에도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이틀을 더 계시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4절) 인생 문제는 현실입니다. 피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문제는 걸림돌이고 아픔이지만, 예수님은 다르게 해석합니다. 그 문제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다고 하십니다. 순간마다 다가오는 인생 문제 앞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가 이겁니다. 살고 죽는 문제보다 더 시급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죽음의 문제를 통해서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도착했을 때 나사로는 죽은 지 4일이 지났습니다. 무덤 앞에 왔을 때 울음소리가 들려옵니다. 나사로의 누이들과 조문을 위해 찾아온 유대인들이 곡하는 소리였습니다. 울음소리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특별합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35절)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 고통하는 인간의 죽음을 보시고 비통히 여기신 예수님. 본래 사람이 이런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고귀한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버렸기 때문입니다.
눈물을 흘리신 다른 이유는 사랑하는 나사로였기 때문입니다. 나사로도 마리아, 마르다도 예수님을 참 사랑했고 예수님도 그들을 참 사랑했습니다. 이 분이 우리 예수님입니다. 우리 아픔을 아시고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고 눈물을 흘리는 예수님. 우리가 때로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흘리는 눈물을 주님이 아십니다. 우리가 간직해야 할 마음이 이겁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교회, 아파하는 형제와 함께 아파하는 성도가 되는 겁니다.”
이야기 진행이 있는 본문은 그 이야기를 따라 본문의 흐름을 소개하면서 예화를 들고 적용하는 것이 가장 적절합니다. 강해설교의 일반적인 구성은 한 본문에 들어 있는 한 가지 주요 주제를 찾은 후에 그 주제를 본문의 흐름을 따라 설교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주제 없이 본문을 주석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주제를 본문을 통해 전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토리가 있는 본문이든 교리적인 본문이든 마찬가집니다. 성경저자가 특정한 상황 속에 언어로 기록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설교의 주제는 본문에 나타난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 의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아픔의 눈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무덤가에 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예수님의 말씀은 짧고도 분명합니다. 내가 다시 살리겠다는 말씀입니다. 마르다의 반응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39절) 마르다의 고백이 조금도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은 우리도 이 상황이 되면 똑같이 고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할렐루야 아멘’하면 좋겠지만 어찌 그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마르다라고 믿음이 전혀 없는 여인이 아닙니다.”
설교전달에서 가능하면 직접화법이 좋습니다. 설교는 본문의 생생한 현장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돌을 옮겨 놓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표현하면 간접적 보도 같은 효과를 얻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예수님의 생생한 목소리를 그대로 전달할 때 성도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상황이 아니라, 상황을 넘어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40절)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권세, 능력, 위엄이 나타나는 것, 하나님이 누군지 나타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전에 한 가지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상식과 이성으로 볼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믿음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에 사로잡히고, 내 가치관에 갇혀 있는 한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일이기에 믿음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그대로 신뢰하는 믿음, 이게 쉽지만 않습니다. 평소에 믿음으로 살고자 고백하고 노력해도,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상식과 이성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예수님이 말씀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상황을 보지 말고 말씀하는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것은 단순합니다. 믿으라,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왜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실까요? 하나님이 역사를 행하실 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고, 우리가 할 일이 있다는 겁니다. 죽은 나사로 살리는 일은 하나님 하실 일입니다. 돌을 옮기는 일은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내려라!” 물고기를 보내는 사람은 예수님이지만, 그물을 내려야 할 사람은 우립니다. “내가 너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세우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베드로가 할 일은 주님 말씀 믿고 순종하는 겁니다.
신앙생활에 중요한 원리가 이겁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내가 할 일은 최선을 다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내가 하려 할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낙심하고, 실망하고, 불평하고, 인생 참 힘들게 살게 됩니다. 물어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해 옮겨놓아야 할 돌은 어떤 것입니까? 내 생각과 맞지 않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믿음으로 옮겨야 할 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 내가 여전히 주인으로 살아가는 자아, 내 확신, 전통, 익숙한 습관, 말씀보다 나를 지배하는 규율.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옮겨 놓으라! 하나님이 역사할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상황에도 내 생각으로 인생을 결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성도의 삶으로 적용했습니다. 적용하는 시기는 중요한 내용이 나올 때마다 삶으로 연결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삼대지 설교를 하게 될 때는 대지마다 예화를 들고 적용하면 설교에 균형을 얻기 쉽습니다. 한 가지 포인트에 집중해서 설교할 때는 마지막에 적용하는 경우도 좋습니다. 성경적 설교의 요체는 본문해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본문에 근거하여 삶으로 연결하여 삶의 변화를 끌어내는 적용에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적용이 시작될 때 설교가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일하실 때가 되었습니다. 죽은 자를 깨우는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된 나사로가 살아서 걸어 나왔습니다. 죽음의 어둠이라는 장막을 뚫고 생명의 세계로 걸어 나온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7가지 기적이 나옵니다. 첫 기적은 물이 포도주가 된 기적입니다. 메시아로 인해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을 보여주는 기적입니다. 마지막 기적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입니다.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죄와 사망의 역사가 끝이 나고 새 생명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시 살아난 나사로, 오늘 예수님이 정말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절)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 예수님을 믿게 되는 순간 영적인 부활이 일어나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언젠가 육신이 죽음에 이른다 해도 영혼은 죽음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그렇습니다. 이미 중생한 사람, 영적인 부활을 체험한 사람은 영원한 생명의 소유자가 된 것입니다.
육체가 죽는 것을 성경은 잠자는 것이라 말씀합니다. 영적부활은 예수님을 믿을 때, 중생할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육체 부활은 언제 일어날까요? 예수님 재림할 때 그날 육체는 썩지 아니할 몸으로 다시 부활할 것입니다.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52~53) 예수님이 묻습니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이겁니다. 교회를 얼마나 다녔는지, 직분이 무엇인지, 성경을 얼마나 아는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진짜 신자가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의 기적을 전체적으로 살피는 일과 부활의 참 의미를 소개하는 것은 본문의 해설을 넘어 성경신학적으로 본문을 해석하는 일입니다. 어떤 본문이든 그 본문은 성경전체의 한 부분이며 성경전체의 눈으로 볼 때 바람직한 성경적 해석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떠나면 영혼이 잠들어 있다가 예수님이 부활할 때 다시 살아난다고 가르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경적 부활은 주님을 믿을 때 중생의 역사가 일어나고 이때 영적부활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 재림하실 때는 육신이 썩지 아니할 몸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지만 아직 부활신앙이 없다면 오늘 주님이 물으십니다.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 오늘 처음 나온 분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똑같이 묻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살리라. 네가 이것을 믿느냐?” 신앙의 연륜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 말씀 그대로 믿고 영생을 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활의 위대한 능력은 이 부활신앙이 오늘 내 삶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영원한 생명을 노래합니다. 지금 눈을 감아도 주님 앞에 설 것을 알기에 평강과 기쁨이 넘칩니다. 이 부활신앙이 있어야 진정한 헌신도 가능합니다.
히틀러 치하에 감옥에 잡혀간 본회퍼 목사는 1945년 4월 8일 아침에 사형을 당했습니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본회퍼 목사에게 영국장교가 말했습니다. “목사님, 마지막이군요. 안녕히 가세요.” 그를 향해 본회퍼는 평화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마지막이 아닙니다. 지금이 시작입니다.”
제 어머니는 제가 유학을 시작할 때 갑자가 병을 얻으시어 주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목사가 무슨 특별한 욕심이 있겠습니까? 유학을 잘 마치고 결혼해서 가난한 시골 농부의 아내로 평생 고생하신 어머니 편안히 잘 모셨으면 하는 소박한 기도를 하나님은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유학하던 것을 중단했습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평온한 모습으로 다니곤 했지만 속 깊은 눈물을 쏟곤 했습니다. 주님께 늘 물었던 질문이 있습니다. “때가 되면 모두 주님 앞에 가야하지만 왜 이렇게 갑자기, 빨리 어머니를 데려 가셔야 합니까?”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야속하게 보이든지. 나에게는 모든 것이 달라졌는데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돌아가는 세상이 참 야속하게 보였습니다. 늘 아픈 가슴으로 기도하는 저에게 하나님이 마침내 보여주신 것은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를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그 예수님이 어머니의 영혼을 더 좋은 천국으로 옮기셨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신 지도 4년이 되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모두 용인 공원묘지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부모님을 떠올릴 때마다 자주 묘지를 떠올리곤 합니다. 한번은 주님이 깊이 찾아오셔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찌하여 살아있는 자를 땅 아래서 찾으려 하는가? 그날 이후로 부모님이 묻혀있는 땅 아래를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품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계실 부모님을 떠올리며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성경 전체에서 가장 위대한 말씀, 십자가를 넘어 부활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나사로, 그가 어떻게 살았을지 상상이 갑니다. 절대로 이전과 똑같이 살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복음을 외쳤고,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님을 증거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 그분이 우리의 영혼을 십자가의 피로 살리셨습니다. 언젠가 우리 육체도 한줌 흙으로 돌아갈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육신의 장막을 벗을 때 곧바로 주님 품에서 눈을 뜰 것입니다. 사모했던 주님을 만나 천국의 감격을 누릴 날이 올 것입니다. 주님 재림하실 때는 우리 육체도 다시는 썩지 아니할 육체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이 감격을 누리는 사람이라면 생명 주신 하나님께 순간마다 감사가 터져 나올 것입니다. 이 감사가 넘치는 사람이라면 죽은 내 영혼에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 그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나사로의 부활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부활입니다. 부활을 체험한 나사로가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주님을 위해 살았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설교를 듣는 회중이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루어진 부활의 감격을 누리게 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도 기독교 역사에 많은 증인처럼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끝>
류응렬 목사(와싱톤중앙장로교회 담임)/고든콘웰신학교 객원교수. 전 총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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