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8월 15일(목).
삼성산. 용봉. 마성산 : 충북 옥천군.
▣산행코스 : 삼양리철도교-삼성산-용봉-마성산-사목재-4코스-자연휴양림-방문자안내소.
▣산행시작 : 삼양리철교 09시 53분.
▣산행종료 : 휴양림방문자안내소 15시 26분.
▣전체거리 : 약10.8km.
▣전체시간 : 05시간 34분.
▣운동시간 : 05시간 08분.
▣휴식시간 : 00시간 25분.
09 : 53 삼양리철도교.
10 : 21 삼성산.
11 : 22 용봉.
13 : 25 마성산.
14 : 04 사목재.
14 : 26 4코스 탈출.
15 : 09 자연휴양림.
15 : 26 방문자안내소 종료.
▲ 09시 53분 : 삼양리 철도교.
▲ 주민들이 많이들 이용하는 동네산답게 안내판과 신발먼지털이도 잘 설치되어 있다..
▲ 급하지 않은 완만한 경사를 4~5분 가량 오르면..
▲ 삼성산 안부에 올라서고 등로는 주능선으로 이어 진다..
▲ 성터 흔적.
성터 안내문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돌무더기다.
▲ 동국여지승람에 이 산에 3개의 성이 있다고 하여 삼성산이라 하였고.. 백제와 신라간의 전투 중 가장 치열하였다는
관산성전투의 위치가 고리산이라는 설과 삼성산이라는 설이 있어 옥천향토사쪽에서는 어디가 관산성이라고 정하지 않아
이 곳을 삼성산성이라 부르고 있다.
▲ 충북 청원군 부용면 부강리 남성골에서 고구려산성이 발견이 되고.. 대전의 월평산성 발굴에서는 백제성터 밑부분에서
고구려 토기가 발견이 되었는데.. 예산상의 문제로 발굴을 중지했다고 한다.
또한 대전 복용동 당산마을 유적 발굴과정에서 마을이 한꺼번에 화재로 인하여 파괴된 흔적이 발견이 되었는데..
이것은 아마도 고구려 남하정책과 더불어 전쟁으로 인하여 마을이 불 타버렸을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관산성은 바로 코앞까지 내려온 고구려의 남진을 방어하기 위해 약 486년을 전후로 나제동맹을 근거로 백제 땅에 신라가
만든 산성일 것이라고 추측을 한다.
▲ 10시 21분 : 삼성산.
동국여지승람에 이 산에 3개의 성이 있다고 하여 삼성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바위도 세 조각으로 되어 있다.
▲ 삼국사기에 의하면 관산성전투는 백제와 신라 간의 전투 중 가장 유명하며 또 기록상으로 삼국시대 전투 중 가장 자세
하게 기록된 전투다. 흔히 백제 성왕의 죽음으로 잘 알려졌다. 4세기 후반 때처럼 백제, 가야, 왜국 대 신라의 적대 구도가
다시 부활하였고, 6세기 중반에서 7세기 중후반 신라의 삼국통일까지 이어지는 후기 삼국 시대의 판도에 큰 영향을 끼친
매우 중요한 전투다. 554년 7월, 관산성에서 신라와 백제 사이에 건곤일척의 결전이 벌어진다.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아 국가 중흥을 이루려는 백제와 한강 유역 일대를 장악하여 한반도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려는 신라가 국운을
걸고 맞붙은 싸움이었다. 이 전쟁으로 "백제는 좌평 네 사람과 장병 29,600명이 참살되었고 말 한필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라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해진다.
전투는 신라의 승리로 끝났고, 이 전투에서 백제 26대 성왕은 적군에게 목숨을 잃었고 약 3만 명의 백제군도 전사하였으며,
120년간 유지되던 나제 동맹이 깨어지게 되었다. 백제는 관산성 전투 패배의 후유증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멸망의 길로
접어든다. 반면 백제를 패퇴시킨 신라는 사방으로 영토를 넓히며 삼국 통일의 기반을 구축한다.
▲ 신라에 붙잡힌 백제 성왕의 목을 하급병사에게 베라고 한것도 부족하여 신라는 성왕의 목을 신라 왕궁 북청의 계단 밑에
묻고 신라 귀족들이 모두 밟고 지나가는 수모를 당하게 되었고, 나머지 몸은 백제로 반환되었다.
이에 분노한 백제측에서 기병을 이끌고 무리한 공격을 감행하지만.. 성왕이 죽은 구진벼루 위쪽 관산성 아래에서 대패를
당하게 된다. 이후 의자왕때 백제군이 대야성 전투에서 승리한후 김춘추가 가장 사랑했다던 막내딸과 사위의 목을베어
백제의 수도 사비성으로 보내 성왕의 복수를 하게 된다. 결국 김춘추는 그 일로 한을 품고 굴욕을 참아가며 당나라의 협력
을 얻어와 백제를 멸하게 된다.
▲ 관산성전투 참고도.
백제 성왕을 붙잡아 죽인 전공을 세운 장군 김무력은 이후 초고속 승진을 한 기록을 여럿 확인할 수 있다.
551년 단양 신라 적성비나 553년 7월 《삼국사기》의 신주 군주로 김무력을 임명할 때 김무력은 신라 17관등 가운데 여섯째
등급인 아찬이었는데, 555년 세워진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나 561년 창녕 척경비에서는 3번째 등급인 잡찬으로 관등이
3등급 승진했다. 거의 약 2년 만에 3관등 승진인데 신라의 다른 기록을 봐도 이렇게 짧은 기간에 3단계 승진은 거의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초고속 승진이다. 관산성 전투에서 활약한 전공을 인정받은 듯하다.
▲ 용봉을 넘어 마성산으로 가는 능선길.
이 능선이 관산성 전투가 벌어지던 백제 성왕시절의 신라군 최전방 라인 이다.
▲ 국사봉..
삼국시대라면 백제땅이다.
▲ 식장산..
건너편 능선은 백제의 최전방 라인인.. 식장산이 코 앞에 있고 그 너머가 바로 대전이고 보면 대전 옆의 백제의 구도인
공주(웅진)과 새로운 도읍인 부여(사비)에서 멀지 않은곳 이니 만큼 백제로써는 한치도 더 이상 물러나서는 안되는 절대
사수의 지역인 셈이다..
▲ 용봉 오름길에 바라본 옥천읍 전경..
옥천의 신라시대 지명은 고시산군 이다. 이후 통일신라시대에는 상주의 관성군으로 바뀌었다가 고려시대에 옥주(沃州)를
거쳐 조선시대에 옥천으로 변했다고 한다. 옥천(沃川) 이라는 이름은 강물이 풍부하고 토양이 기름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옥주가 옥천으로 변한것은 조선 태종때의 일인데, 계수관 제도로 인하여 각 지역의 주요 거점 도시만 주(州)를
사용하도록 하고 기타 고을 주(州) 자가 들어가는 다른 도시는 모두 산(山) 이나 (川) 으로 변경 하도록 했다고 한다.
당시 경상도에 속하던 옥주는 태종의 명으로 보은, 황간, 영동, 청산과 함께 충청도로 소속 변경을 하게 되었는데 이미
충청도에는 주요 거점도시로 충주, 청주, 홍주, 공주가 있어 그 이름을 유지했고, 옥주는 옥천이 되었다고 한다.
▲ 멀리 도덕봉이 보인다.
예전에는 도둑들이 극성을 부려 도둑봉 이라 불리다가 도덕봉 으로 고쳤다고 한다.
대전 수통골에 있는 도덕봉과 이름의 유래가 똑 같은걸 보면 전국의 도덕봉이란 그 고상한 이름과 달리
대부분 도둑들의 소굴이 이쁜 이름으로 포장 되었을 듯 싶다...
▲ 11시 22분 : 용봉.
▲ 용봉까지는 선명하던 길이었는데... 마성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은 흔적이 희미하다.
▲ 11시 45분 : 동평성터.
▲ 11시 22분 : 성재.
옥천읍 마암리로 내려가는 탈출로다.
▲ 조여사님의 작품...
밑에서 찍어 드렸다고 한컷 해주시네요.. Give and Take...기브 앤 테이크.. 조여사님 감사합니다.ㅎㅎ~
▲ 바위지대를 넘어서면 오른쪽으로 옥천군 군서면 평야지대가 보이는데.. 바로 그 평야지대 끝에 현재 지도상에 "말동산"
이라고 되어 있는 성티산성이 있다. 당시 백제의 기마병이 주둔을 했던곳으로 백제의 성왕이 고위 관료들과 함께 그곳에서
전장을 지휘했던 곳이다. 이곳의 백제 기병을 상대하려고 삼년산성에서 김유신의 조부 김무력 장군의 기병이 내려와
구진벼루(충북 옥천군 군서면 월천리)에 숨어있던것인데, 그걸 알리없는 성왕은 늘 다니던대로 고리산에서 백제의 주력을
이끌고 있는 태자 "부여창"을 만나러 가다가 잡혀서 황당한 참살을 당하게 된다.
▲ 마성산성 흔적..
▲ 마성산 정상.
컨디션 난조로 마성산 정상을 패쓰 했는데.. 김더덕님이 보내주셨다.
▲ 마성산 정상의 돌탑... 김더덕님의 작품..
▲ 마성산성 안내문... 김더덕님의 작품이다..
▲ 마성산 하산길에 바라본 장령산..
장령산(壯靈山 : 656m)은 장룡산(壯龍山)이라고도 부른다.
충청북도 옥천군의 군서면, 이원면, 옥천읍 경계에 있는 산이다.
『한국지명총람』에 '장룡산(壯龍山)'이 기록되어 있으며, 산에 '용바우'라는 바위와 '용암사(龍岩寺)'라는 사찰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지명의 유래가 소개되어 있다. 현재는 장령산 자연 휴양림 지역으로 유명하다.
▲ 어느새 식장산도 멀어져 간다.
▲ 14시 04분 : 사목재.
사목재는 옛날 군서 사람들과 금산 사람들이 옥천읍을 오가는 주요 이동로 였다.
사목재란 이름의 유래는 옛날 이곳에 도둑이 많아 이 고개를 넘으려면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넘어라.. 라는 의미와..
용암사 스님들이 세상의 이치를 생각하며 넘었던 고개 라는 두 가지 의미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 사목재 장령산 들머리.
오늘따라 컨디션 난조로.. 더 이상 장령산으로 진행 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또한.. 장령산은... 천태산. 대성산. 장령산. 마성산을 잇는 일명 "천.성.장.마"라 하여 약25.6km를 이어가는 종주능선이다..
이중에 천태산. 대성산은 올랐는데 삼성산.. 용봉.. 마성산이 미답산으로 남았었는데.. 오늘 그 마무리가 되었으니..
여기서 임도를 따라 하산 하기로 결정 한다..
▲ 이길은 장령산 등산로중에 "4코스"에 해당하는 길로.. 오늘로써 세번째 내려 가는 길이다..
▲ 3코스 접속지점..
▲ 장령산 자연휴양림을 지나서 주차장에 왔는데 산이좋아의 애마가 보이지 않는다.
회장님께 전화로 문의 하였더니 휴양림측에서 대형버스 진입금지로 한곳에 모여 있다가 차를 부르기로 했다고 한다.
▲ 15시 26분 : 휴양림 방문자 안내소에서 산행 종료.
▲ 버스가 올때까지 대기하는 동안 트랭글을 정리..
▲ 산이좋아산악회 회장님의 건배.
▲ 이어서 김고문님의 건배.
▲ 화랑산악회 회장님까지 건배의 잔을 들고~.. 일배일배부일배~..
▲ 옥천표,, "장군녹두삼계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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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탈출로 빼먹은 장령산 코스를 과거의 사진으로 이어 간다.
▲ 용암사 가는길..
▲ 용암사 대웅전. 속리산 법주사의 말사이다.
용암사는 서기 552년 신라 진흥왕 13년에 의신조사가 속리산에 법주사를 창건하기 저에 이곳의 산세를 보고 감탄을하여
절을 세웠다고 한다. 사찰의 규모가 원래는 상당하였는데, 임진왜란때 불타고 간신히 명맥만 유지 해오다가 근래 대웅전과
요사채 등이 중건 되었다고 한다. 용암사라는 이름은 경내에 용처럼 생긴 바위에서 유래가 되었는데, 일제시대에 일본인들
이 파괴 하였다고 하며 신라 마의태자가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려는 아버지를 떠나 금강산으로 가다가 용암사에 들려
한동안 머물면서 용바위에 올라 서라벌이 있는 남쪽 하늘을 보며 통곡하곤 했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대웅전에는 본존불인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있고, 그 좌우에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1880년 복장을 열었을 때 '순치 8년 신묘년'에 만들어진 다라니경이 발견됨으로써 이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조선 효종 2년(1651)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 보물 제 1338호 용암사 쌍석탑.
▲ 마애불은 바위의 중간, 마치 공중에 뜬 것같은 형태로 연화대좌 위에 서 있다.
언제 칠했는지 모르지만, 마애불에는 붉은 채색을 칠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 운무전망대..
운무대는 구름이 춤추는곳이고.. 운해가 아름다운곳이다.
특히..운해와 어우러진 일출이 아름답다고 소문난곳이며.. CNN이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50곳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곳은 낮과 밤 기온차가 큰.. 봄철과 가을철이면 운무가 짙게 내려앉아 아름다운 운무해돋이 장면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고 한다.
▲ 일명 "틈새바위".
▲ 정면에서 바라본 거북바위.
▲ 잘생긴 거북바위.
▲ 왕관바위 틈새를 빠져나와..
▲ 마주선 왕관바위..
▲ 장령산 정상.
장령산은 장용산으로 불리다가 옥천군에서는 옛날부터 주민들이 부르던 장령산으로 바꾸어 달라는 군민의 희망에 따라
국립지리원 중앙지명위원회에 개명을 신청하여 1995년 5월 1일에 장령산으로 변경되었다.
▲ 5코스 데크길의 2전망대.
▲ 전망대에서 바라본 금산의 진산 "서대산".
▲ 중간의 사목재에서 탈출하는 바람에 못갔던 장령산 길을 과거의 사진으로 이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