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이 이뤄지는 과정
마가복음 8:22~26
22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23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6.25 전쟁 때 종군 여성 기자로 활약하였던 미국의 마거릿 하긴스가 그녀의 옆에 극도로 지쳐 보이는 병사에게 조용히 물었다고 합니다. “만일 제가 당신에게 무엇이든지 해줄 수 있는 존재라면 가장 먼저 무엇을 요구하겠습니까?” 이 질문에 병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 있다 “저에게 내일을 주십시오!”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사람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최고 40일은 살 수 있고, 물을 마시지 않고는 3일을 살 수 있으며 숨을 쉬지 않고는 3~4분은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희망이 없으면 단 1초도 살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런 모습을 잘 알고 계십니다. 빌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성도에게 예수님의 모습을 지닌 성령으로 하나님의 소원을 두신다고 하였습니다. 구약성경의 시 107:30에서는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소원을 심어 주시고 그것을 반드시 이뤄주시는 분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17살 되던 해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갔다가 성령의 뜨거운 세례를 받고 목회자가 되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그 후로는 앉으나 서나 목회자가 되는 소원을 두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환경은 제 꿈을 성취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습니다. 가정이 기울어져 경제적 여유도 없었고, 제 실력으로는 목사가 된다는 것이 불가능하게만 모였습니다. 저는 중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검정고시를 치렀고, 부천에 있는 중앙직업훈련원에서 1년 동안 국비로 지내면서 선반 자격 3급을 취득하였습니다. 낮에는 성수동에 있는 오리엔트 시계회사에서 조립공으로, 밤에는 성동기계공고에서 국비 장학생으로 3년 동안 다닐 수 있었습니다.
늦은 나이에 고등학교를 다녀야 했기에 고등학교 3학년 10월 군에 입대하게 되었고, 군에서 제대하고야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졸업 후 제 앞길이 막막해졌습니다. 어려서부터 목회자가 되는 꿈을 가졌는데 이것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제가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마음을 먹었지만 제 실력은 아주 형편이 없었습니다. 영어의 기본인 5형식도, 수학의 인수분해도, 국어의 고어도 몰랐습니다. 그 외에 물리, 화학, 생물 등은 말할 것도 없이 더 깜깜했습니다.
그런 제가 경희대학교 경제학과를 입학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였을까요? 하나님은 성령으로 내 안에서 소원을 주셨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한 걸음씩 인도하셔서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는 맹인이 예수님을 만나 고침을 받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햇빛이 강렬합니다. 5월부터 11월까지는 비 한 방울도 오지 않는 건기입니다. 강렬한 햇빛과 불어오는 먼지로 인해 눈에 염증이 일어나기 쉬웠고 이 염증이 여러 번 계속되면 시각장애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벳새다의 맹인도 그렇게 실명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두 눈이 실명하여 볼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삶이 예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맹인은 이런 불행의 환경에서 간절한 소원의 끈을 놓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의 불일 듯 일어나는 소원을 예수님께서는 어떤 과정으로 이뤄주셨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소원이 응답받는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뿐 아니라 오늘에도 수많은 시각장애인이 있었고, 그들은 대다수가 보기를 간절히 원했을 것입니다.
생후 19개월 때 앓은 뇌척수염으로 시력을 잃고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었던 헬렌 켈러는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란 책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3일간 눈을 떠서 세상에서 자신을 가르쳐준 선생님과 산과 들에 핀 꽃들을 감상하고 아침의 해와 저녁노을을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또한, 우리가 겪는 활기찬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사람들을 보고 싶다는 소원을 말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이 땅에서 이뤄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영원한 천국에서 성취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이 내게 허락한 소원은 반드시 이뤄진다는 말입니다. 약 4: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자기 유익을 취하는 소원은 이뤄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맹인은 그의 소원을 이뤘습니다. 그 배경이 무엇이었을까요?
그에게는 믿음의 동역자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막 8:22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에 대부분의 맹인은 스스로 생활할 능력이 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맹인과 한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맹인의 눈을 뜰 수 있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하나로 엮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맹인의 평상시 모습을 추적하여 알 수 있습니다. 이웃에게 선을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자신의 것을 드렸고, 그들이 힘들다고 할 때 한마음을 품었을 것입니다.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고 하였습니다. 이웃에게 베풀고 때가 되면 거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할 수만 있으면 이웃에게 필요를 채워주고 함께 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마 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한마음을 품는 이웃이 중요합니다. 함께 마음을 다하여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또 하나는 시각 장애를 갖게 되면 다른 기능이 유별나게 발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맹인은 볼 수는 없지만, 청력은 뛰어났으리라 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소식을 귀담아들었고, 그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씀에 귀가 번쩍 띄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와 함께 한 사람의 도움을 받아 예수님께 나올 수 있었습니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부지런히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믿음으로 키워나가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믿음이 성장하고 간절한 마음이 있을 때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소원을 이루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주님과 일대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막 8:23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맹인을 데리고 온 사람들의 손에서 예수님이 손을 붙잡고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무리를 떠나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맹인과 일대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일대일의 친밀한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이 관계가 유지되면 나의 소원이 언제라도 쉬지 않고 하나님께 아뢸 수 있습니다. 소원이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간절하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저 역시 목회자가 되고 싶은 열망이 안에서부터 들끓어 올라 길을 걸어갈 때도 앉으나 서나 제 소원을 고백했었습니다. 이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더욱 믿음이 생기고 하나씩 장애물이 벗겨지는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본문의 말씀에서 보편적인 사고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 나옵니다.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라는 말씀입니다. 침을 사용하는 것은 그 당시 유행하던 일반적 치유 방법으로 특히 맹인을 치유하는 데 효험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침을 바르지 않고도 얼마든지 고치실 수 있었지만, 수단을 쓰신 것은 맹인에게 예수님이 치유를 일으키고 있음을 깨닫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사람들의 수준에 맞춰 일하셨습니다.
마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하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읽고 그 마음을 받아들이는 일대일의 은밀한 기도가 소원을 이루는 데 중요한 요소를 이루게 됩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하고 누릴 때 소원은 이뤄집니다.
예수님은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하고 묻습니다. 이에 맹인은 막 8:24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쳐다보며’라는 단어는 ‘아나블레파스 ἀναβλέψας’ ‘시력을 회복하다, 다시보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 맹인의 시력이 밝아지면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주목하는 순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흐르는 사랑의 에너지가 충만하게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에는 무한한 에너지가 담겨 있습니다.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에너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에너지가 사랑이라는 놀라운 능력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반응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신안이란 사랑을 누리고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맹인과 함께 마음을 나누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맹인에게 안수하셨다는 것은 병자의 아픔을 함께 느끼시고자 하는 주님의 긍휼하심의 표현인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모습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여기서 ‘동정’ 의 의미는 ‘suffer with’, 즉 함께 고통받는다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시는 주님의 사랑 표현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당신 자녀들의 고통을 외면하시지 않고 함께 아파하시며 마침내 치유하여 주시는 것이다.
막 8: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단번에 치유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점차 시력을 회복하는 과정을 함께 하고 계십니다.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과정이 중요합니다. 부부간의 불화가 생기는 이유도 과정을 소홀하게 여기고 결과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일하면서 결과에 초점을 맞춥니다.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하게 해줄 수 있고, 그간 소홀했던 모든 것을 해소하여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결과를 향하여 좌우를 살피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 왔습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사랑의 과정이 빠져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결과를 바라는대로 얻었다고 행복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고 함께 하는 모습이 빠지고 결과에 치우쳐 있으므로 삶이 허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그 사랑에 깊은 반응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 마음의 소원이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면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소원이 비록 성취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절대 실망하지 않습니다.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성령으로 소원을 주십니다. 그 소원을 일대일의 친밀한 관계를 통하여 이뤄가시며 사랑의 마음으로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의 소원을 더 넘치도록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믿음에 굳건하게 세움 받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