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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와 중공군의 제2차 공세
제 1절 작전 개요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와 중공군의 제2차 공세는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제1차 공세 이후 소강상태를 이용하여 전쟁을 종결하기 위해 '50. 11월 24일 총공격을 단행하자, 적유령산맥 남단과 장진호 일대에 잠복하고 있던 중공군이 11월 25일 야간을 기해 반격으로 전환하여 서부전선의 청천강 일대와 동부전선의 장진호-함흥일대에서 12월 3일까지 피아간에 전개된 공방전 및 철수작전을 말한다.
희천
◈중공군 40 원참
온정리 ◈중공군 38 ◈중공군 42
◈중공군 39
운산 묘향산 인처리
◈중공군 66
태천 ♧미 2사
구장동
♧미 25사 ♧국 8사
◈중공군 50 영변 ♧국 7사 영원
♧국 1사 덕천
♧미 24사 박천 군우리 맹산
♧미 9군단 ♧터어키 ♧국 6사
안주 ♧미 제1군단 북창 ♧국 2군단
♧영 27여
이 무렵 중공군은 제1차로 북한에 진입한 제13병단 예하 18개 사단이 적유령산맥 남단에, 제2차로 진입한 제9병단 예하 12개 사단이 장진호 및 개마고원 일대에서서 전투대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국군과 유엔군을 동서로 양분하여 서부에서는 청천강선에서, 동부는 장진호-함흥선에서 포위 격멸한다는 계획에 따라 11월 25일 야간을 기해 대반격을 개시하였다 바로 중공군의 제2차 공세다.
적은 서부전선에서 제13병단이 청천강선을 돌파하고, 동부전선에서는 제9병단이 흥남교두보를 압박하는 한편, 제2전선과 합동으로 원산을 점령함으로서 유엔군의 지상퇴로를 차단하였다.
반면에 국군과 유엔군은 적의 대반격에 밀려 후퇴작전으로 전환, 서부전선에서는 12월 중순에 38도선까지 후퇴하였고, 동부전선ㄴ에서는 흥남에 집결하여 12월 14일부터 24일까지 해상을 통한 철수작전을 실시하였다.
제 2절 작전 계획
1. 유엔군의 작전계획
1950. 11월 6일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현 싯점에서 공산군을 격멸해 한국의 통일과 평화를 회복하려는 유엔의 사명을 달성하는데 있다고 천명함으로써 크리스마스 공세가 힘을 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미 제8군사령관은 미 제9군단을 포함한 3개 군단으로 한.중 국경선까지 진출한다는 작전계획에 따라 미 제9군단장은 후방에서 작전 중이던 미 제2사단을 북상시켜 순천-개천간 도로를 확보토록 하고, 11월 2일 현 작전 임무를 새로 편성된 국군 제3군단에 인계하였다. 한편 평강과 장단에서 임무를 교대한 미 제25사단을 이동시켜 11월 15일까지 차후작전 준비를 완료하였다.
따라서 미 제8군은 좌전방의 미 제1군단이 가산과 장정동에서 신의주-평양 도로를 중심으로 서해안을 따라 수풍호-신의주 축선으로, 중앙의 미 제9군단이 영변과 용산동에서 군우리-희천간 도로를 따라 초산-벽동 축선으로, 우전방 국군 제2군단이 사동과 영원에서 강계-만포진 축선으로 진출하되 군우리-희천간 도로 동쪽의 산악지대에서 우인접 미 제10군단고 긴밀한 협조를 유지하며 진출토록 계획하였다.
한편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은 서부전선과는 달리 적과의 접촉이 없는 상태에서 한.중 국경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군단의 좌전방인 미제7해병연대가 고토리에서 장진호 남단의 하갈우리에서 진지를 구축중에 있었고, 제5해병연대가 고토리로 기동하고 있었다. 군단 중앙의 미 제7사단은 11월 21일 제17연대가 혜산진을 탈환했으며 군단 우익인 국군 제1군단이 우전방 수도사단이 동해안을 다라 11월 25일 청진까지 진격하였고, 좌전방의 제3사단이 같은 날에 백암을 점령하였다.
2. 공산군의 작전계획
제1차 공세를 통해 청천강 북안으로 진출한 중공군과 북한군은 결정적인 반격으로 전환하여 청천강과 장진호 그리고 청진지역에서 유엔군을 각각 섬멸한 후 남으로 전과를 확대하여 제2전선부대와 연계하여 38도선 이북지역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중공군 지휘부는 미군의 재공격기도를 분쇄하기 위해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에서 적을 깊숙히 유인하고, 먼저 한쪽을 섬멸한 후 전과학대하는 제2차 작전계획을 확정하였다.
이에 따라 동부전선의 제9병단은 적을 유인하는 임무를 제42군단 일부에 지시하였고, 또 다른 1개 군단에는 구진리 이남에 저지진지를 편성하고 적이 구진리-장진선에 도착하면 먼저 미 제1해병사단을 섬멸한 후 동남 또는 남쪽으로 전과학대하도록 하였다.
한편 서부전선에는 제38군단과 제42군단이 적을 하행동으로 유인해 덕천-맹산-북창 방향에서 기습공격하고, 제40군단이 영변에서 제38군단과 함께 유엔군을 공격하고, 제39군단은 태천에서 반격 준비를 하고, 제66군단은 구성과 안주에 집결하는 한편 제50군단은 해안경계임무를 수행토록 하였다.
제 3절 유엔군의 공세와 공산군 반격
1. 양측의 상황
가. 적 상황
국군과 유엔군이 1950년 11월 24일을 기해 총공세를 개시하자, 중공군과 북한군은 동부와 서부 지역으로 분할하여 서부는 청천강지역, 동부는 장진호 일대에서 연합집단을 형성하였다. 서부지역은 중공군 제13병단과 북한군 제1군단이, 동부지역은 중공군 제9병단과 북한군 제3.4.5군단이 공격집단을 형성하였다. 예비로 중공군 제12.15.60군단을 그리고 북한군 제6.7.8군단을 두었다.
한편 중공군과 북한군은 작전의 통합과 지휘쳬계의 일원하를 위해 통일된 지휘기구의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통일된 지희체계의 미비는 연합작전은 물론 물자공급과 교통수송 등의 분야에서 혼란을 야기하였다.
이에 따라 김일성과 팽덕희는 회합을 갖고 양군의 통합하기 위해 양국의 장요들로 편성된 연합사령부를 설치하는데 합의하였다. 12월 초순 설치된 연합사령부 사령관은 팽덕희, 부사령관은 북한의 김웅과 박일우를 각각 임명하였다.
연합사령부의 모든 명령은 북한군 사령부와 중공지원군사령부를 경유하여 예하부대에 하달되었다. 그리고 지원군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와 심리전 운용을 위해 전쟁포로를 석방하였다.
나. 아군 상황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의 재공격 방침에 부응하여 3개 방면에서 동시 공격을 계획하였다. 이에 따라 미 제8군은 서쪽에 미 제24사단과 국군 제1사단, 영연방 제27여단으로 편성된 미 제1군단을, 중앙에 미 제25사단, 미제 2사단, 그리고 터어키 여단으로 편성된 미 제9군단을, 동쪽에 국군 제6사단과 제7사단 그리고 제8사단으로 편성된 국군 제2군단을 각각 배치하였다. 그리고 미 제1기병사단과 영연방 제29여단은 군 예비로 운용하면서 미 제1기병사단에게는 군우리와 숙천에 위치한 보급소의 경비업무를 부여하고 영연방 제29여단은 개성에 집결시키고 있었다.
한편 동부지역의 공격을 담당한 미 제10군단은 마천령산맥을 중심으로 서쪽은 미 제10군단에, 그리고 동쪽은 국군 제1군단이 공격을 담당하였다. 이에 따라 미 제10군단은 미 제1해병사단과 미 제7사단으로 좌측을, 국군 수도사단과 국군 제3사단으로 편성된 국군 제1군단을 우측으로 병진공격을 부여하였다.
국군 제1군단은 수도사단이 동해안 도로를 따라 한.소 국경으로, 좌측인 제3사단은 백암으로 공격하도록 하였다. 미 제10군단은 우측인 제7사단은 북청-혜산진간, 좌측인 미 제1해병사단은 장진-강계 축선을 통해 압록강으로 진출하도록 하였다.
3. 서부지역 작전
가. 덕천 전투(50. 11.22~ 11.26)
(1) 전투 개요
덕천 전투는 압록강을 도하하여 남하한 중공군과 크리스마스 공세를 시작한 미 제8군이 청천강 일대에서 결전을 전개할 당시 덕천지역 정면을 담당한 국군 제7사단이 중공군 제39군단과 맞서 '50.11.22~26일까지 5일간 실시한 전투이다.
개천-비호산 전투를 수행한 국군 제7사단은 '50. 11월 14일 군단작전 계획에 따라 월봉산을 점령한 후 덕천지역으로 진격하여 차후 작전준비를 하였다.
덕천전투
향로봉
묘향산
◈중공군 7사 강선봉 ◈중공군 38군단
형제봉 ▲1531 ▲1304 ▲백애산 1524
1229m 갈봉 가마봉
성불참 우현
백령천 ♧국7-3연대 ♧국7-5연대 ♧국7-8연대 ♧국7-수색중대 내창천
▲1139m
구장동으로 사항산 ▲하령곡산
탁고개 탁고개 풍전리
추동리
▲풍덕산
♧제18포병대대
덕천
↙
♧국5-3대대 ♧국7사단
↓
군우리 북창으로
서부전선 우익을 담당한 국군 제2군단은 영원-덕천 지역의 전선을 정비하고 있었다. 우전방 제8사단은 영원지역을, 좌전방 제7사단은 덕천지역을 각각 확보하고 있었으며 예비인 제6사단은 군단과 같이 북창에 있었다.
덕천지역을 점령한 제7사단은 전투정면은 영원 좌측의 대동강안-용문산-우측간의 약 35km의 광정면이었다. 이에 따라 사단의 우일선인 제8연대는 풍전리-546거지-신덕리를, 좌전방 제3연대는 안상리-장하리를 각각 점령하고 제5연대는 예비로 서창에 위치하고 제18포병대대와 사단은 덕천에 위치하였다. 이때 사단의 죄인접은 미 제2사단이 구장동에서 이 선까지 협동작전으로 진격할 태세를 깆추었다.
(2) 전투 경과
사단은 11월 24일10:00시에 묘향산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사단은 최초 목표인 가마봉-묘향산 선을 점령한 후 진격을 계속하여 중간목표인 강선봉-향로봉을 돌파하고 군단의 목표인 희천으로 진출하려 하였다. 이에 따라 제7사단은 좌일선의 제3연대가 1531고지 갈봉으로, 우일선 제8연대가 가마봉-백애산 향해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공격개시 3시간이 경과해도 불과 3km 밖에 진출이 안되고 우현고개로 진출한 제8연대 수색중대가 적의 공격으로 사항산 방향으로 철수하였다. 중공군이 갈봉과 가마봉 및 백애산 일대에 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적의 강력한 저항으로 진출이 어려운 가운데 일몰이 오면서 도처에서 중공군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이에 사단은 제5연대를 탁고개에 추진배치하여 제3연대와 제8연대의 공백지대를 방호하고 사단 수색중대는 제8사단과 전투지경선 지대인 하령곡산 북쪽 계곡에 배치되어 동측방을 방호하게 하였다.
11월 25일, 공격 2일째 공격이 개시되었다. 그러나 묘향산의 중공군 제38군단과 제42군단은 완강히 저항하였고 사단의 좌익에서 형제봉을 공격한 미 제38연대도 7부능선에서 사격전을 전개하고, 사단의 우측인 제8사단 제10연대도 하령곡산 위 1139고지 중간에 머물고 있었다.
11월 25일, 공격 2일째 야간이 되면서 중공군이 우현고개 전방과 사항산 전방에서 대규모로 출현하여 격전이 격화되고, 우측 하령곡산 계곡은 공백지대로 변하면서 이를 간파한 중공군 제42군단이 사단의 배후로 침투를 기도하고 사단 수색중대는 숫적 열세로 밀릴 수 밖에 없었다.
이를 막기위해 군단에 건의하여 군단 예비인 제6사단 제2연대를 풍전리로 투입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이 먼저 풍전리로 진출하여 제7사단과 제8사단의 전투지경선을 따라 후방으로 침투하여 덕천 동측방이 위기에 빠졌다. 사단사령부도 적의기습을 받아 예비로 남아있던 제7-3대대로 퇴로를 개척하게 하여 겨우 사령부와 일부 직할부대, 포병 B포대만 빠져 나오고 잔방 부대들은 퇴로가차단 되었다.
바로 묘향산 일대에 위치한 중공군 제38군단과 제42군단이 구장동 방면의 미 제2사단과 덕천지역의 국군 제7사단을 집중공격하였다. 따라서 하령곡산-풍전리로 침투한 적이 제7-8연대의 배후를 차단함으로서 제8연대는 사항산일대에서 일대 혼란에 빠져 각개약진으로 탈출하여 추동리로 철수하였으며 이미 덕천으로의 퇴로가 차단되었으나 전방 연대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덕천으로 재집결하려 철수하다 다시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분산되어 일부는 북창으로 , 일부는 개천방향으로 탈출을 시도하였다.
한편 통신 두절로 우측 연대들의 상황을 알지못하는 제3연대는 백령천 북쪽의 방어진지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11월 26일 상황을 판단한 연대장은 퇴로가 차단된 덕천대신 우군부대 지역인 구장동을 택하여 형제봉 남쪽에서 미 제2-38연대와 합류하여 미 제2사단의 구장동 전투에 참여하게 되었다.
(3) 전투 결과
결국 제7사단은 제8연대와 제5연대(-2)는 전투력을 상실하여 순천으로 철수 명을 받게 되고 제3연대는 미 제2사단에 합동작전을 실시하고, 사단사령부와 제5연대 제3대대, 포병 B포대 등은 중공군의 계속적인 추격을 받으며 분산되어 순천으로 철수를 하게 되었다.
결국 국군 제7사단은 순천에서 부대를 정비한 후, 적의 계속적인 압력을 받으며 축차적으로 지연전을 전개하면서 12월 2일 승호리에 집결하였다. 반면 미 제2사단에 합동작전을 실시중인 국군 제7-3연대는 미 제38연대와 구장동에서 전투를 하며 개천-순천-평양-승호리로 철수하였다.
나. 영원- 맹산 전투( '50. 11. 23~ 11. 27)
(1) 전투 개요
영원-맹산 전투는 압록강을 도하하여 남하한 중공군과 크리스마스 공세를 시작한 미 제8군이 청천강 일대에서 결전을 벌일 당시 미 제8군의 우익을 담당한 국군 제8사단이 묘향산 동측방의 영원과 맹산 지역에서 중공군 제42군단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50.11. 23`27일 까지 5일간 실시한 전투이다.
국군과 유엔군이 한.중 국경을 향해 총공격을 단행할 때, 국군 제2군단의 우일선인 제8사단은 전방지휘소를 원리에 두고 만포진을 향해 북진하는 과정에 선두인 제10연대가 희천에 진출하고 주력이 구장동에 도달할 무렵 중공군이 개입으로, 군단 좌일선 제6사단이 온정리와 초산에서 중공군 제40군단의 공격을 받고 철수한 것이다. 사단은 주력을 구장동에 전개하고 제6사단을 지원하기 위해서 제10연대를 급파하였으나 실패하고 11월 1일 원리로 집결하였다.
북진을 재개하기 위해 미 제8군은 국군 제1군단에 배속된 국군 제7사단을 제2군단으로 복귀시켜 제8사단과 함께 영원-덕천을 연하는 선에서 적의 진출을 저지하고 재정비하였다. 그리고 국군 제2군단은 11월초부터 중순까지 비호산-월봉산-덕천일대에서 적의 공세를 꺽고 11월 22일에 제8사단은 영원에서, 제7사단은 덕천에서 각각 공격준비에 착수 하였다
영원전투
백애산 ▲소쾌산1,543m ▲백암산 1,105m
고성산 ◈중공군 제42군단-125-373연대 ◈중공군 제42군단-125사단
▲1139
신기산 횡천령
하령곡산 ●제8-21연대 양감령
덕인봉
풍전리 ●제8-10연대
영원
덕천
두류령
●제8-16-2대대
애장천 ▲소가래봉
상화리 ●제8-16연대-1대대 성재리
맹산 ●제8사단
●제8-16연대
북창 매재령
중공군 제42군단은 11월초 지휘소를 황처령에 두고 예하의 제125사단은 신읍 방면, 제126사단은 영원과 덕천 북쪽의 대동강 상류 일대, 그리고 예비인 제124사단은 구창리부근에 위치하였다 산악기동으로 기도비닉을 유지하며 11월 20일 백암산(1,105m)-소쾌산(1,543m)-백애산(1,524m)을 연하는 주요거점에 주력을 분산전개한느 한편 경계부대는 강을 건너 덕인봉-신기봉-송평리선에 배치하였다
한편 영원 북쪽의 산악지대로 진격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제8사단은 덕천지역을 담당한 제7사단이 비호산 전투로 진출이 지연되자, 제8사단 예비인 제10연대를 맹산으로 진출시키고 맹산-영원간 도로를 따라 영원으로 진출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예하의 제16연대와 21연대는 덕천에서 적의 좌측을 견제하는 한편, 제7사단이 진출하는 즉시 제21연대는 영원으로, 제16연대는 진지 교대 후에 맹산으로 진출하도록 하였다.
(2) 전투 경과
국군 제2군단은 예하 제8사단의 공격축선을 영원 북쪽 5~10km의 덕인봉-신기봉-삼월강거리 선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묘향산맥을 넘어 유원진으로 진격하도록 하였다. 이 축선은 지형이 험준하고 수림이 울창해 적정파악이 어려운 곳으로 미 제10군단과의 전투지경선이다.
이에 따라 제8-21연대는 우일선 부대로 덕인봉-신기산간의 양감령을 점령한 다음 백암산으로 진격하고, 제10연대는 좌일선으로 대동강 연안을 수색한 다음 하령곡산 일대를 점령하고 소쾌산으로 진격하고, 제16연대는 맹산으로 이동해 1개 대대로 맹산을 경비하고 주력(-)은 형제봉과 소가래봉간의 진지를 점령 사단의동측방을 경계하도록 하였다.
11월 24일 제21연대는 양감령을 넘어 동북방 삼거리까지 25일 진출하였으나 더이상 진출하지 못하고 적의 저항에 직면하고 있었고, 좌전방 제10연대는 하령곡산을 넘어 1,139고지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를 했으나 더이상 진출이 저지되고 있었다.
한편 사단과 함께하고 있는 제16연대는 형제봉-초평리-성제리-943고지 선을 점령하도록 하였으나 이미 적이 횡천령을 넘어 성제리가지 진출하고 있었다.
11월 25일, 국군 제8사단은 서쪽에서 소쾌산을 목표로, 동쪽에서 제21연대가 백암산을 목표로 공격했으나 적의 강력한 저항에 공격이 돈좌되고, 한편 적 제42군단은 주력으로 아군의 공격을 저지하면서 제125사단을 우회시켜 맹산 공격과 사단의 퇴로인 매재령을 사전점령하였다.
사단의 좌측방인 제7사단이 무너지면서 전투지경선으로 침투한 적이 전방 연대의 퇴로를 차단함으로서 일대 혼란이 야기되면서 분산 철수를 하게 되었다.
사단 의 퇴로인 매재령 확보를 위해 제16연대가 진출하였으나 이미 중공군이 선점하고 기다리는 형국이 되어 다시 맹산으로 후퇴해야 했다.
(3) 전투 결과
결국 제8사단은 모든 부대의 철수로가 적에게 차단당하여 후방인 가창으로 각개 분산, 산악을 이용하여 철수하는 비운을 맞이하며 제16연대는 11월 27일 재차 매재령 돌파를 시도하여 일부병력은 북창을 경유하여 가창으로 철수하였다.
사단은 계속되는 적의 압력에 가창에서 부대를 수습하고, 북창까지 밀려 내려온 중공군은 국군 제6-7연대와 북창 서남쪽에서 공방전을 전개하면서 평양을 향해 계속 남진하고 있었다.
따라서 제8사단은 11월 30일 지휘소를 강동, 12월 5일은 토산까지 철수하여 부대를 재정비하게 되었다.
다. 구장동 전투('50. 11. 24~ 11. 28)
(1) 전투 개요
구장동 전투는 크리스마스 공세 당시 미 제8군의 중앙을 담당한 미 제9군단의 우익인 미 제2사단이 목표로 부여된 희천을 점령하기 위해 진격을 개시하자, 태평지역 일대에 집결해 있던 중곤군 제40군단이 반격을 가함으로써 '50. 11. 24~28일까지 전개된 전투이다.
희천
◈중공군 40 원참
온정리 ◈중공군 38 ◈중공군 42
◈중공군 39
운산 향산 묘향산 인처리
◈중공군 66 신흥역 형제봉 1229m
태천 ♧미 2사 백령천
구장동
♧미 25사 ♧국 8사
◈중공군 50 영변 ♧국 7사 영원
♧국 1사 덕천
♧미 24사 박천 군우리 맹산
♧미 9군단 ♧터어키 ♧국 6사
안주 ♧미 제1군단 북창 ♧국 2군단
♧영 27여
미 제9군단은 10월 23일 전선으로 북상명령을 받았다. 후방지역 경계임무를 국군 제3군단에 인계하고 사령부를 순천에 개설하는 한편 미 제2사단을 군우리에 진출시켰다. 그러나 미 제25사단이 주보급로인 평강지역에서 데게릴라전이 지연되어 11월 19일 배속된 터어키여단과 함께 장단으로 이동한 후 북상하여 11월 22일 청천강에 도달하였다.
(2) 전투 경과
미 제9군단은 11월 19일 미 제2사단이 우측에서 온정을 목표로 진격하여 소백두산 동측을 거쳐 초산을 점령하고, 미 제25사단은 좌측에서 소백두산을 경유하여 벽동을 점령하도록 하였다.
11월 24일 10:00시에 미 제9군단은 미 제2사단이 희천을 목표로, 미 제25사단이 운산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미 제2사단은 제38연대를 우일선으로, 제23연대를 중앙에, 그리고 제9연대를 좌일선으로 하는 3개 연대 병진으로 공격을 개시하였고 제38연대 의 1개 중대를 사단의 예비로 하여 구장동-온정을 목표로 진격하였다.
11월 25일 09:00시에 작일의 적의 경미한 저항정도를 예상하며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백령천 북쪽 도로변의 감제고지인 일명 '중공군의 모자고지'라 불리는 219고지에서 저지되었다, 미 제9연대의 선두인 B중대가 65번도로를 다라 신흥역을 통과해 219고지로 향하던 중에 적의 기관총 사격을 받았다. 한편 우측방 제38연대도 형제봉 공격도 차질을 빗게 되면서 사단 전체가 중공군의 포위망에 걸려들게 되었다.
결국 219고지에서의 혈투는 실패로 돌아가고 B중대는 완전히 고립되고 전방에 투입된 제9연대 모든 대대들이 포위속에서 사투를 벌이며 청천강 이남 으로 철수를 강요받게 되었으며 제38연대는 덕천지역의 국군 제7사단 좌측연대인 제3연대가 밀려나면서 구장동으로 들어와 함께 동측방을 방어하게 된다.
11월 26일, 미 제9군단장은 덕천이 무너지자 터어키여단을 덕천으로 진출시켜 군단 우측방을 방호하도록 하였으며 터키여단은 16:00시에 군우리를 출발해 차량기동으로 덕천으로 향하던 중에 와원에 이르러 일몰로 급편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자 중공군 제38. 40군단은 구장동을 방어중인 미 제2사단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하였고 우측방 제38연대는 비호산을 점령하고 있었다.
(3) 전투 결과
1950. 12. 1~2일 어간에 유엔군이 양덕-성천-순천-숙천을 연하는 평양방어선을 형성하자 중공군은 일시적으로 공세를 중단하였다. 하지만 12월 3일부터 다시 공세를 감행하였고 평양 점령을 기도하였으며 , 동부전선에서는 중공군 제9병단이 함흥-언산일원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장진호 부근에서 미 제1해병사단에 대한 포위 공격을 시작하였다.
12월 4일 평양 철수명령이 미 제8군사령관으로부터 하달 되었다. 미 제25사단은 이 무렵 상팔리-숙천간에서 방어를 하다 명령에 따라 어중리로, 그리고 다시 12월 5일부터 국군 제1사단 및 영연방 제29여단과 연계하여 평양 북쪽에서 철수부대 엄호 임무를 수행하였다. 유엔군 주력이 철수하자 후위부대로서 적과 접촉을 유지하며 철수하여 38도선을 경유하여 김포반도에서 방어임무를 수행한 후 터키여단과 함께 안성으로 이동하였다.
라. 와원 전투('50. 11. 27~11. 30)
(1) 전투 개요
와원 전투는 터키 여단이 6.25전쟁에 참전한 후 중공군과 교전을 전개한 최초의 전투이며, 미 제9군단이 청천강 계곡에서 결전을 벌일 때 군단의 예비로 있던 터키 여단이 '50. 11. 27~ 11.30일 까지 군우리 동쪽의 와원과 신립리, 봉명리 일대에서 미 제8군의 동측방을 방호하며 지연전을 전개한 전투다
터키여단은 '50. 10. 17일 한국에 도착하여 미군의 무기를 받아 사격술 훈련을 완료하고 미 제9군단에 배속되어 대전-대구간 보급로 경비와 장단지역 게릴라 소탕전에 참가하다 11월 22일 군우리로 북상하여 최초의 전선에 투입되었다.
와원은 개천-덕천간 가장 험준하고 높은 여일령(알일령)의 남쪽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의 월봉산(1,032m)과 남쪽의 백탑산 사이에 위치한 산촌이다. 와원 동쪽의 알일령을 넘으면 동쪽에 덕천 평야를 한 눈에 조망이 가능한 천연적인 지형이다.
와원전투
덕천
월봉산 1,032m
어구참 배덕참
와원 알일령
조양
당죽교천 백탑산
용복참
초마봉 325m
개천(군우리) 맹산
매재령
북청
(2) 전투 경과
(가) 와원 전투
'50. 11. 24일 단행된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가 중공군의 반격으로 11월 26일 국군 제2군단의 전선이 와해되어 혼란상태가 가중되자 동측방을 방호하기 위해 군우리에 도착한 터키여단으로 덕천을 점령 방어하도록 하였다.
이에 터키군 여단장 야치시 준장은 부단장 도라 대령에게 "도라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선발대로 와원에 진출토록하였다.
11월 27일 공격을 개시하여 알일령 정상에 선발대가 올라섰다. 그러나 상부의 지시로 진격을 멈추고 알일령에서 진지를 구축하라는 명령에 바로 알일령 하단부 계곡, 와원일대에서 진지를 구축하는데 중공군이 출현하여 공방전이 벌어져 일단 중공군이 물러났다.
그러나 11월 28일 14:00시를 기해 중공군이 제3차 공격을 가해와 후퇴하게 되며 5km 후방인 신립리로 철수를 하게 된다.
(나) 신립리및 봉명리 전투
신립리로 철수한 터키여단은 11월 28일 용복참 일대와 용복참 북쪽의 760고지능선 하단부에 병력을 배치하고 ,예비를 입석골에 집결시켰다.
그러나 28일 자정을 기해 피난민으로 가장한 북한군과 중공군이 합세하여 터키군을 공격하였고 이미 사면에 침투를 완료하여 포위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때 바로 좌측의 미 제2-38연대 제3대대가 철수하면서 아무런 통보도 없이 철수해 버렸다. 초마봉 계곡으로 밀려드는 중공군에 터키군은 3면이 포위되고 군우리에서 지원되는 미군 포병의 화력지원과 유엔군 전폭기의 공중 폭격에 힘입어 계곡을 바져나와 군우리 외곾에 집결하였다.
(3) 전투 결과
'평양방어선'을 고수하려던 유엔군의 계획은 전 전선에 걸쳐 부대간의 연계가 어려운 상황일 뿐만 아니라 오랜 전투로 피로감이 겹쳐 재정비가 요구되었었다.
이 무렵 미 제2사단은 부대정비를 위해 터키여단 및 미 제1기병사단과 자산을 경유하여 일단 평양으로 철수한 후 다시 12월 중순에 미 제2사단 주력은 영등포에, 그리고 터키여단은 소사에 각각 집결하여 부대정비를 하고 터키여단은 미 제25사단에 배속되어 김포반도를 방어하였다.
마. 군우리 전투('50. 11. 29~12. 1)
(1) 전투 개요
군우리 전투는 크리스마스 공세를 개시한 미 제8군이 중공군에 밀려 철수작전을 전개할 당시에 군우리에 남아 철수병력을 엄호하던 미 제2사단이 최종적으로 철수하던 중 군우리-순천간 협곡지대, "태형의 계곡"에서 중공군 제42군단의 공격을 받고 이를 돌파하기 위해 1950. 11월 29일부터 12월 1일까지 실시한 전투이다.
군우리 전투
비호산
알일령
와원
용복참
군우리(개천) 미2사 오릿골
정통산
입암
천동역
미2사
청룡리
봉장동 태현참
사현참 노전참
갈고개
용원리
이에 따라 미 제8군은 1950년 11월 28일을 기해 철수작전을 개시하였고, 미 제8군의 우익을 담당한 제9군단 예하의 미 제2사단은 터키여단 및 국군 제7사단 제3연대와 함께 군우리지역에서 지연전을 전개하여 청천강 북쪽의 철수병력에 대한 엄호를 실시하였다.
이때 미 제8군은 서부전선의 철수부대를 엄호하기 위해 예비인 미 제1기병사단과 미 제1군단의 예비인 영연방 제27여단을 순천과 성천의 동쪽에 투입해 국군 제2군단 지역에서의 남하하는 중공군을 저지하도록 조치하였다.
(2) 전투 경과
미 제2사단은 원리에서 저지진지를 점령하고 있던 제23연대가 중공군의 압력으로 군우리 북쪽 2km 지점까지 물러나 있었고, 와원에서 동측방 엄호하던 터키여단도 신립리-봉명리로 축차 물러나 격렬한 지연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사단이 순천으로 철수하는데 최단 기동로인 군우리-순천간 남행통로를 중공군이 차단하고 있었다.
미 제9군단장은 11월 29일, 우익의 미 제2사단을 일단 군우리로 이동시켜 순천으로 후퇴토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미 제25사단을 비롯한 터키여단 본부와 비전투차량 및 부상병을 안주로 후송토록 하는 한편 제2사단 제9연대와 터키보병부대는 군단 주력의 철수를 엄호한 후에 제2사단의 후위로서 순천으로 후퇴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미 대대별 병력은 200~250명 수준이었고 정찰대를 후퇴로에 본내 확인결과 중공군이 이미 도로를 차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군단으로부터도 군우리-순천간 도로 대신 본도를 이용하라는 지시가 있었으나 도로의 혼잡을 이유로 거부하고 퇴로를 개척하여 철수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군단은 철수로 엄호를 위해 영연방 제29여단의 1개 대대를 순천으로 북상시킨다는 계획에 의거 진출한 영29여단은 갈현 남쪽의 3차로를 우회하는 순간 잠복해 있던 중공군 제113사단 제337연대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아 진출이 저지되었다.
결국 미 제2사단장은 제9연대와 전차 1개소대를 청룡참으로 보내 군우리-순천간 도로에 위력수색을 하도록 하였는데 아무런 징후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이는 바로 중공군의 계략으로 중공군은 청령참을 중심으로 1km내외의 구릉지대에 대대규모의병력을 배치해 놓고 미군의 진입을 노리고 있었다.
긴박한 상황에 직면한 사단장은 제38연대를 선두로 국군 제3연대, 터키여단, 포병부대, 공병부대, 전차대대, 의무대 순으로 철수를 단행하고 제23연대가 후위로서 최종적으로 철수토록 하여, 미 제9연대(이미 500명 수준으로 절대병력 부족)가 11월 30일 도로 패쇄지점으로 진출을 개시하였으나 중공군의 기관총 공격이 시작되면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 국군 제3연대와 터키여단 잔류부대를 급파했으나 미 제72전차대대 소속의 선두 전차가 국군 제3연대를 중공군으로 오인하여 전차포와 중기관총으로 공격하여 그만 철수하고 말았다.
이 무렵 미 제2사단장이 현지에 도착하여, 미 제38연대 제2대대가 선두로 도로를 돌파할 것을 명령하여 터키군 2개 중대와 동시에 선두전차에 일부 분승하여 "태형의 계곡"으로 접어들었고 무려 10km에 이르는 죽음의 계곡을 벗어나는 사투가 진행되어야했다.
유엔공군의 전폭기가 폭격을 가하면 2~3km 전진하고, 다시 중공군의 매를 맞고, 다시 전폭기가 뜨면 2~3km 전진하는 악순환의 반복속에 결국 사단장도 차를 버리고 산길을 따라 갈고개 서쪽으로 우회하여 갈현리로 철수하였다. 부대가 순천 남쪽 도로에 도달했을 때에 생존 장병은 겨우 20%에 불과하였다.
한편 제23연대는 사단 후위를 담당하고 있던 중에 보유하고 있던 3,206발의 포탄을 모두 발사하여 중공군의 공격부대를 고착시키고, 양동작전에 성공하여 11월 30일 군우리에서 본도를 이용하여 아무런 피해를 받지않고 철수에 성공하였다.
(3) 전투 결과
이 무렵 미 제2사단은 부대정비를 위해 터키여단 및 미 제1기병사단과 자산을 경유하여 일단 평양으로 철수한 후 다시 12월 중순에 미 제2사단 주력은 영등포에, 그리고 터키여단은 소사에 각각 집결하여 부대정비를 하고 터키여단은 미 제25사단에 배속되어 김포반도를 방어하였다.
미 제2공병대대는 300명의 장병이 6대의 차량으로 탈출하였으나 모든 영관장교가 손실, 사단 포병부대는 155밀리 곡사포 모두를 , 105밀리곡사포는 8문을 제외하고 모두 손실되었으며, 미 제38야포대대 생존자가 사병 65명에 불과하였다. 미 제9연대는 1,400명이 생존하고, 제23연대는 2,200명이 생존하고 , 제38연대는 1,801명이 생존하였다. 결국 미 제2사단은 총 전사 및 부상, 실종자 수를 4,037명으로 확인 하였다.
바. 태천 전투
희천
◈중공군 40 원참
온정리 ◈중공군 38 ◈중공군 42
◈중공군 39
운산 향산 묘향산 인처리
◈중공군 66 신흥역 형제봉 1229m
태천 ♧미 2사 백령천
구장동
♧미 25사 용문산,180m ♧국 8사
◈중공군 50 영변 ♧국 7사 영원
♧국 1사 덕천
♧미 24사 박천 군우리 맹산
♧미 9군단 ♧터어키 ♧국 6사
안주 ♧미 제1군단 북창 ♧국 2군단
♧영 27여
월포리
청천강 남쪽의 신안주 부근에서 재정비를 완료한 국군 제1사단은 11월 20일 미 제1군단의 공격계획에 의거 미 제24사단의 대령강-용산동의 작전지역을 인수하고 군단의 우전방 사단이 되어 태천-구성-삭주-신의주로 진추하게 되었다. 이때 좌인접의 미 제24사단은 서해안을 다라 정주로, 우인접의 제9군단 미 제25사단은 운산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11월 24일, 국군 제1사단은 10:00시에 제12연대를 좌전방, 제11연대를 우전방, 제15연대를 예비로 태천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바로 중공군의 공격으로 공격이 돈좌되고, 우측의 미 제25사단도 공격이 돈좌되면서 중공군의 압도적인 병력에 밀리어 27일에는 태천-용산동 도로까지 진출하였다.
따라서 국군 제1사단은 미 제2사단의 구장동 지역과 국군 제2군단의 개천, 영원 지역의 상황 악화로 인한 미 제8군의 철수계획에 따라 28일부터 청천강 남쪽으로 철수를 준비학 되었다.
사. 북창전투
국군 제2군단은 11월 25일 제2차 공세를 시작한 중공군 주력부대의 공격을 받아 덕천-영원 선에서 방어로 전환하였다. 이때 중공군 제38군단이 좌전방 국군 제7사단과 우전방 제8사단의 전투지경선 부근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였고, 제42군의 일부는 미 제8군과 미 제10군단의 배치공간으로 침투하여 군단의 노출된 우측방을 엄호하기 위하여 맹산에 위치한 제8-16연대를 공격하였다.
이에 제2군단장 유재흥 소장은 전방사단을 증원하여 돌파구확장을 저지할 목적으로 군단예비로 가창에 대기중인 국군 제6-2연대를 긴급히 덕천 북동쪽 풍전리로 이동시켜 하령곡산에서 남하하는 중공군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당시 국군 제6사단은 지난 10월 하순 압록강으로 진출중 초산.온정리 일대에서 중공군의 기습으로 철수하여 개천에 집결하여 제2군단의 예비가 되었다. 사단은 큰피해를 입고 재편성을 서둘러 병력보충과 교육훈련을 실시하였으며, 11월 24일 군단 후방지역을 엄호하기 위해서 덕천-신창 도로변의 가창으로 이동하였다.
국군 제2연대는 11월 25일 덕천에서 제7사단과 제8사단의 전투지경선인 북쪽의 신하리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대한 두려움과 계속적인 철수작전으로 사기마저 저하되어 있는 상황이라 중공군 1개 사단과 대적하기란 역부족이었다.
11월 26일 새벽 연대지휘소가 기습을 당하면서 제대로 전투한면 못하고 순천으로 분산철수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용덕리 동쪽에 배치된 제8-16연대마저 무너지면서 전방연대들이 퇴로차단이 우려워 철수를 개시하므로서 군단의 주저항선은 붕괴 되었다. 이에 군단장은 제6사단(-)을 북창으로 진출시켜 철수하는 제7. 8사단을 엄호토록 하였으나 이미전방연대들은 지휘계통이 무너지고 혼란에 빠져 주변 산악지대로 분산되어 무질서하게 철수하게 되었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은 국군 제6사단을 미 제9군단에 배속시키고 제6사단을 보강하기 위해 순천-성천 도로변에 배치된 미 제1기병사단의 제7기병연대를 북창으로 이동하도록 명령하였다.
29일, 해가 뜨기 전에 실시된 공중정찰에서 적 1개사단이 국군 제6사단 정면으로 접근하는 것을 발견하였으나 미 제7기병연대가 도착하기 전에 국군 제6사단은 적을 맞아 결전을 치렀지만 역부족이었으며 월포리로 철수하였다. 이후에도 적의 추격은 계속되었으나 적의 공격이 주춤한 사이 신창리로 철수하여 미제7기병연대와 연결하여 미 제8군의 우측방을 엄호하기 위해 순천-신창리 도로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아. 참전용사 증언 및 유해발굴 관련 위패 . 묘비현황
(1) 참전용사 증언
"자라보고 놀란 사람은 솥뚜껑보고도 놀란다"
참전용사 황대형(제1-15-1대대) : 우리는 맹중리에서 거의 2주간을 놀았다. 병력도 받고 일부 훈련도 했다. 민가 몇 채를 구해 그곳에서 먹고 자고 했다. 얼마를 지나 크리스마스 공세를 한다고 한다. 그동안 우리 15연대가 앞장을 서왔기 때문에 이번에는 제11. 12연대가 앞에 나섰다.
"꽹과리치고 피리 불고~"
실제 전쟁중에 밤은 어두운데 은은하게 피리소리가 들리고 하면 측은해진다. 어딘지는 모르지만 중공놈들은 꼭 그런 짓을 하고 침투를 한다. 그런데 태천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전방 연대병력이 도망쳐 내려왔다. 벌써 포위되었다는 악몽이 살아난 병력이 각자 분산해 내려오는 것이다.
그러니 중공군 1개 소대만 들어와 휘젖고 다니면 연대병력이 온 것처럼 난리가 나고 우리는 살겠다고 나살려라 산속으로 도망쳐야 했다.
결국 우리 제1사단은 전투다운 전투 한 번 못하고 다시 청천강을 건너 신안주로 그리고 다시 평양으로, 황주로 내려와야 했다.
"멀어지는 모란봉, 그리고 무서운 폭발음이 우리를 움추리게 했다"
철수하는 과정에도 피난민들이 도로에 가득하고, 그 속에는 적의 오열들이 들어와 우리를 추적하며 간간히 괴롭혀 정말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천명이다. 우리가 최초로 동평양에 들어가 점령했던 모란봉이 피를 토하며 우리를 부르는데 지금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소위 패잔병의 신세다. 북진하면서 보은에서 고랑포에서 길가에 멍청하게 걸어가는 북한군 포로를 주워담던 생각이 어제인데 다시 우리가 그 꼴로 38선으로 가고 있다.
그런데 평양을 벗어나는데 왜관에 떨어지는 융단폭격보다 더 우렁찬 폭발음이 들린다. 평양역과 항구에 보관중이던 포탄 등을 적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폭파하는 것이란다. 그런데도 한번 놀란 우리는 뻥 소리가 나면 나살려라하고 인근 민가나 야산에 엎드려 벌벌 떨어야 했다.
"그래도 황반장의 어깨에는 기관총이 메어있었다. 운산지구 전투에서도 태천지구에서도 지금 철수하는 이 순간에도 그리고 '51. 3월 서을탈환 작전간 부상으로 후송을 떠나던 그 순간까지 기관총을 놓지않았다."
참전용사 윤정식(제7사 8연대) : 우리는 묘향산을 공격한다고 진격하다 무슨 강을 건너서 계속 산으로 올라가다 중공군의 기습으로 후퇴했다. 중공군이 사방에서 따발총을 쏘아대 정신줄이 나가버렸다. 우리를 통제하는 소대장도 죽었는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살기위해 무조건 남으로 내려오니 덕천이란 곳이다.
여기 저기서 모여든 병력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다시 철수해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하는지도 모랐다. 그래서 길을 따라 간다는 것이 구장동으로 가는 길이였다.
"골짜기 마다 시체로 가득했다"
그런데 무슨 용문산인지 산을 넘고 넘고 가는데 골짜기 마다 시체가 수북한데 국군인지 미군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모두가 씨꺼멓게 타버린 모습으로 널려 있는데 옷도 누가 다 벗겨가 발가벗고 꽁꽁 얼어있는데 우리는 그냥 지나쳐 가야했다. 나중에 들었는데 무슨 터키군이 왕창 죽었다(터키군은 알일령에서 전사)?는 이야기도 있고, 우리는 그 고불꼬불한 산길(탁고개로 판단됨)을 넘어 개천에 와서 무슨 비호산인가 하는 곳에서 다시 재편성하여 전투를 했다. 어떻게 살아있는지 내가 봐도 참 용하다
참전용사 한영근 (제7-5연대) : 우리는 덕천지역에서 전투를 했다. 덕천 시내 149고지일대와 덕천 서쪽에 시루산(628m)이 있는데 1개분대가 다 죽었다. 시신은 수습할 엄두도 못내고 철수하기에 바빴다. 중공군이 얼마나 몰려드는지 그들은 그냥 우리가 총을 쏘건말건 달려드는데 우린 총알도 다 떨어지고 대적할 방법이 없다.
"시루산에 1개 분대가 그대로 방치되었다"
중공군은 정말 귀신같은 존재다. 언제 기어들어왔는지 우리가 좀 쉴려고 하면 달려들고 가는 것마다 골짜기기슭에는 그놈들이 움크리고 있다가 달려드는데 나중에는 공포에 질려 모두가 피리소리 같은 소리만 들려도 정신이 나갔다.
시루산은 우리 아군이 철수하게 확보해야 한다고 해서 올라가는데 벌써 중공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숫자는 모르겠고 우리는 설마하고 올라서는데 갑작스레 총질을 하여 1개분대가 다 죽었다.
세터민 박미혜 : 우리는 용문산 아래 장상노동지구에서 살았다. 용문산 뒤가 용문노동지구이고 구장동에서 덕천에 이르는 길이 나오는데 탁고개가 있다. 우리가 어려서 가보니 야산에 사람뼈가 많았다. 동네에 내려오는 이야기가 전쟁때 남한군이 이 일대에서 중공군에 포위되어 많이 죽었다고 들었다.
참전용사 김창환( 제8사단 대전차포 중대) : 제10연대의 1개 대대가 묘향산 위쪽에서 거의 전멸하여 32명만 살아왔습니다?
용사님의 증언은 사실 영원이나 덕천지구 관련 증언이 아니고 아마도 '50.10월 말에 있었던 운산-온정지구 전투와 관련이 있다고 봐야 한다. 당시에 제8사단 10연대가 묘향산 북서쪽 희천에 위치하여 있다가 온정구에서 제6사단 제2연대가 벽동으로 진출중 중공군 제39군단에 포위되어 있을 때에 희천에 있던 제6-19연대와 제8-10연대를 투입하여 퇴로를 개척하여 했으나 이미 중공군이 사면을 포위하고 있어 구출작전에 실패하고 각개 분산하여 남으로 산악을 이용하여 철수한 사례가 있다.
반면에 '50. 11월 24일부터 진행된 크리스마스 전투에서는 제8사단이 제2군단의 우익으로, 제8-21연대는 우일선 부대로 덕인봉-신기산간의 양감령을 점령한 다음 백암산으로 진격하고, 제10연대는 좌일선으로 대동강 연안을 수색한 다음 하령곡산 일대를 점령하고 소쾌산으로 진격하고, 제16연대는 맹산으로 이동해 1개 대대로 맹산을 경비하고 주력(-)은 형제봉과 소가래봉간의 진지를 점령 사단의 동측방을 경계하도록 하였다.
11월 24일 제21연대는 양감령을 넘어 동북방 삼거리까지 25일 진출하였으나 더이상 진출하지 못하고 적의 저항에 직면하고 있었고, 좌전방 제10연대는 하령곡산을 넘어 1,139고지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를 했으나 더이상 진출이 저지되고 있었다.
한편 사단과 함게하고 있는 제16연대는 형제봉-초평리-성제리-943고지 선을 점령하도록 하였으나 이미 적이 횡천령을 넘어 성제리가지 진출하고 있었다.
"3개 사단, 제6사단, 제7사단과 제8사단이 와해 되어버린 개천 북방과 덕천과 영원 지역"
11월 25일, 국군 제8사단은 서쪽에서 소캐산을 목표로, 동쪽에서 제21연대가 백암산을 목표로 공격했으나 적의 강력한 저항에 공격이 돈좌되고, 한편 적 제42군단은 주력으로 아군의 공격을 저지하면서 제125사단을 제7사단과 제8사단의 전투지경선의 틈을 이용하여 우회시켜 맹산 공격과 사단의 퇴로인 매재령을 사전점령함으로써 양개 사단 자체가 와해되어 버렸다.
제7사단은 백령천 넘어 형제봉 1229고지, 가롱 1531고지, 가마봉, 사항산일원과 그 남쪽인 용문산 1180고기, 탁고개에서 덕천으로 밀려나고, 제8사단은 백애산1524고지와 소쾌산1543고지,신기봉1485고지선에서 하령곡산 풍산리와 영원일대, 영원에서 두류령에서 맹산, 맹산에서 매재령을넘어 북창으로 이르는 구간의 산악지대에서 중공군의 매복기습으로 부대의 건재가 무너지고 각자 살길을 찾아 흩어져야했던 전투였다.
또한 덕천에서 개천에 이르는 알일령고개와 이 고개의 남과 북에 있는 월봉산과 백탑산 사이에서는 터키군과 미군이, 개천에서 덕천에 이르는 구간에서는 11월 말 투입된 국군 제6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 일부가 중공군의 기습 매복공격으로 피해를 입게 되는데 주로 도로주변 산골짜기에 많은 유해가 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참전용사 최영달(제7-8연대 대전차중대) : 나는 '50. 7월 4일 피난길에 대구에서 입대하였다. 영천지구 전투를 끝내고 북진작전에 참가하여 영원지역으로 들어가 묘향산을 공격하게 되는데 우리는 우측에 있었다. 그러나 중공군에 포위되어 많은 전우들이 죽어갔으나 시신을 처리하지 못하고 현지에 방치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덕천에서 알일령 고개를 넘어 개천방향으로 빠지는데 고개 골자기에 시신들이 많았고 미군 장비들도 많았다.
"터어키군은 10월 들어와 미군 장비를 보급받아 훈련을 마치고 전장에 투입되었다."
터키군은 미 제8군의 동측방인 국군 제2군단이 무너짐으로서 이곳을 방호하기 위해 개천에서 덕천으로 투입중 이곳 알일령고개에서 중공군의 매복작전에 걸려 많은 피해를 보게 되었으며 터어키군의 모든 편제장비가 미군이 보급한 것이다
참전용사 최광성(제7-5-2-6중대) : 나는 '50. 8. 2일 입대하여 제7사단으로 가서 영천지구 전투에 처음 참여하였다. 아마 이곳에서 처음 함께 입대한 전우는 반 이상이 영천-신령지구에서 전사했으나 시신을 거둿다는 이야기는 못들었다.
북진작전시 평양을 거쳐 11월 초에 청천강변으로 올라가 개천에서 비호산 동쪽 산에 올라갔다. 우리 우측에는 미군 기병부대(제5기병연대로 판단)가 있었다. 묘향산을 공격하라고하여 우리는 덕천 북방 청천강(?, 백령강으로 판단)을 넘어 완전히 산악지대로 된 곳으로 들어갔다.
"덕천 북방 산악지대에 많은 시신이 있다"
◑ 청천강 교두보 확보 작전간 부대 배치
유엔군과 국군은 유엔군의 추수감사절 작전시 중공군의 기습공격으로 동측방 국군 제2군단이 무너지고 미 제1군단의 운산지역도 전황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리하여 서측을 따라 진출한 미 제24사단과 영연방 제27여단을 청천강으로 철수시켜 청천강 교두보를 확보토록 하고 예비인 미 제1기병사단과 국군 제1사단은 청천강 남쪽으로 철수하도록 하였다. 또한 후방에 있는 미 제9군단을 작전지역의 중앙으로 들어오게 하면서 미 제24사단에 배속된 제5연대 전투단과 국군 제7사단을 군우리 지역에 배치하여 군단의 동측방을 방어토록 하였다.
청천강 교두보 확보 전투('50. 11.3~11.6)
↖
태천 온정리 희천
↑
구장동
◈중40-120사
용산동 영변 청천강 ◈중38-113사
◈중39-116사 ▲천불산 고사동
대령강 봉천리 ↗
천등산 구룡강 풍동 원리 ▲998 덕천
국7-5연대
반송천 미-1-7기병 비호산 ▲760
박천 검각산 미-24-19연 연당 국7-3연대 신림
영- 27여 봉명리
옥녀봉
↓
추도리 용연리 국-7-8연대
순천
맹중리 ↙
영- 27여
안주 국- 1사, 미- 24사(-)
신안주 ↘순천 미- 기1사(-)
한편 군우리 북쪽을 맡은 국군 제2군단은 온정리 전투에서 실패한 국군 제6사단과 제8사단 제10연대가 재편성 주에 있고 국군 제7사단은 비호산 일대에서 군단의 동측방을 엄호하고 있어 가용한 부대는 제8사단 제16연대와 제21연대 뿐이였다.
◑ 크리스마스 작전간 부대 배치('50. 11. 24)
희천
◈중공군 40 원참
온정리 ◈중공군 38 ◈중공군 42
◈중공군 39
운산 향산 묘향산 인처리
◈중공군 66 신흥역 형제봉 1229m
태천 ♧미 2사 백령천
구장동
♧미 25사 용문산1,180m ♧국 8사
◈중공군 50 영변 ♧국 7사 영원
♧국 1사 덕천
♧미 24사 박천 군우리 맹산
♧미 9군단 ♧터어키 ♧국 6사
안주 ♧미 제1군단 북창 ♧국 2군단
♧영 27여
월포리
전사 내용을 바탕으로 어디가 가장 많은 피해가 발생했는가를 알아보면 사실 제7사단이나, 제8사단, 그리고 지원나온 제6사단(-), 터어키 여단등 지대내 웬만한 골짜기나 고개에서 대부분 중공군의 성동격서에 놀라 각자 흩어져 탈출을 기도했기 때문에 '여기다'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전사내용을 소개하며 사실 세터민이 증언이 있지만 북한은 고난의 행군시절에 웬만한 산등성까지 다 파헤쳐버려 지금 유ㅐ가 남아있는 곳은 찾기가 어렵고 다만 포로수용소나 광산 입구 근처에 집단 가매장지를 찾는 것이 가장 유력한 유해발굴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한다.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의 재공격 방침에 부응하여 3개 방면에서 동시 공격을 계획하였다. 이에 따라 미 제8군은 서쪽에 미 제24사단과 국군 제1사단, 영연방 제27여단으로 편성된 미 제1군단을, 중앙에 미 제25사단, 미제 2사단, 그리고 터어키 여단으로 편성된 미 제9군단을, 동쪽에 국군 제6사단과 제7사단 그리고 제8사단으로 편성된 국군 제2군단을 각각 배치하였다. 그리고 미 제1기병사단과 영연방 제29여단은 군 예비로 운용하면서 미 제1기병사단에게는 군우리와 숙천에 위치한 보급소의 경비업무를 부여하고 영연방 제29여단은 개성에 집결시키고 있었다.
서부전선 우익을 담당한 국군 제2군단은 영원-덕천 지역의 전선을 정비하고 있엇다. 우전방 제8사단은 영원지역을, 좌전방 제7사단은 덕천지역을 각각 확보하고 있었으며 예비인 제6사단은 군단과 같이 북창에 있었다.
덕천지역을 점령한 제7사단은 전투정면은 영원 좌측의 대동강안-용문산-우측간의 약 35km의 광정면이었다. 이에 따라 사단의 우일선인 제8연대는 풍전리-546거지-신덕리를, 좌전방 제3연대는 안상리-장하리를 각각 점령하고 제5연대는 에비로 서창에 위치하고 제18포병대대와 사단은 덕천에 위치하였다. 이때 사단의 죄인접은 미 제2사단이 구장동에서 이 선까지 협동작전으로 진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바로 묘향산 일대에 위치한 중공군 제38군단과 제42군단이 구장동 방면의 미 제2사단과 덕천지역의 국군 제7사단을 집중공격하였다. 따라서 하령곡산-풍전리로 침투한 적이 제7-8연대의 배후를 차단함으로서 제8연대는 사항산일대에서 일대 혼란에 빠져 각개약진으로 탈출하여 추동리로 철수하였으며 이미 덕천으로의 퇴로가 차단되었으나 전방 연대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덕천으로 재집결하려 철수하다 다시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분산되어 일부는 북창으로 , 일부는 개천방향으로 탈출을 시도하였다.
한편 통신 두절로 우측 연대들의 상황을 알지못하는 제3연대는 백령천 북쪽의 방어진지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11월 26일 상황을 판단한 연대장은 퇴로가 차단된 덕천대신 우군부대 지역인 구장동을 택하여 형제봉 남쪽에서 미 제2-38연대와 합류하여 미 제2사단의 구장동 전투에 참여하게 되었다.
전투 결과 결국 제7사단은 제8연대와 제5연대(-2)는 전투력을 상실하여 순천으로 철수명을 받게 되고 제3연대는 미 제2사단에 합동작전을 실시하고, 사단사령부와 제5연대 제3대대, 포병 B포대 등은 중공군의 계속적인 추격을 받으며 분산되어 순천으로 철수를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