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적 진실과 허구
오늘은 제목을 아주 좋은 걸 줘서, 또 문제가 너무 크기도 하고, 그래 나로선 아주 좋은 시간을 갖게 됐습니다. 난 본래 일어서서 말하는 편인데, 오늘은 될수록 좀 차분히 말해볼까 해서 일부러 앉았습니다. 또 여러분들한테도 하나 부탁드리고 싶은 거는, 숨김없이 말씀드리면, 이 강연을 주최한분들이 지금 대단한 곤경에 빠져 있는데, 그걸 여러 분들이 좀 생각을 해달라는 겁니다. 그동안 당국에서, 지난번에 새문안 교회 일과 동성고등학교 일도 있고 해서, 여기서도 뭘 꾸미려고 하는 게 아닌가 하고 여러 번 찾아와서 이것저것 캐묻고 그랬는가 봐요. 여기는 본래 ‘강좌’니까 조용히 얘기하는 시간인데, 만약 그런 일이 갑자기 꾸 며진다면 앞으로 지장이 많지 않을까 하고 걱정들을 하시는가 봐요.
공자님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할계(割鶴)에 언용우도(焉用牛刀) 리오, 닭 잡는 데 무슨 소 잡는 칼을 써” 하는 말이야요. 이 말씀은 공자님께서 제자인 자유(子游)를 보고하신말씀인데, 자유가 무성(武城)이라는 조그마한 고을에서 벼슬을 살고 있을 때, 공자님께서 거길 들르셨는데, 자유가 거문고를 탔어요. 옛날 유명한 임금들이 자기가 정치하는 이치를 생각해서 만든 곡조야요. 그래 그걸 들으시고, 제자가 잘 하니까 좋아서 하신 소리야요. 그런데, 좋긴 좋은데 뭐랄까, 장난 비슷하게 하신 말씀으로 “요렇게 조그만 고을에서 그렇게 큰소리 안해도 되잖아” 하는 의미로 그랬어요.
이건 그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큰소리칠 것은 장소도 큰 데서 치고 하지, 요런 작은 데서 했다가 집이라도 찢어지면 어떡해.
역사엔 끝남이란 없어
될수록 힘은 뒀다가 쓰는 게 좋아요. 헤피 헤피 쓰면 그만 안돼요. 이건 농담이 아니야요. 정말이야요. 힘은 둬서 아껴 써야지, 헤프게 쓰는 사람은 정작 써야 할 때 가서는 큰소리 못하고 마는 수도 있으니까. 지금은,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사건’ 이후에 내가 보기에도 정부에서도 조금 생각을 하고 있나 봐. 그러니까 생각을 좀 더 깊이 잘 하라고 좀 참아보세요.
나는 시인이 아니야요. 그러나 전에 노래를 더러 시 형식으로 써보기도 했는데, 집에서 나올 때, 그거나 가서 한 번 외어볼까 하는 생각이 났어요. 제목은「인생은 갈대」라고 하는 건데, 물론 파스칼이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한 것을 두고 내 소감을 읊은 건데, 사람의 일생을 여섯 시기로 갈라서 해봤어. 어린 시절, 청년 시절, 40된 다음, 50된 다음 하는 식으로 나누노라니까 여섯 귀절이 됐어요. 오늘 얘기하는 것과 간접적으로는 관계가 된다고 할 수도 있어요.
인생은 연한 갈대 어린순 날카론 맘
쓴 바다 노한 물결 단숨에 무찌르자
끝끝이 뜻 머금고서 다뤄가며 서는 듯
갈대의 순이 나올 때는 아주 날카롭게 기운있게 나와요. 그걸 천진난만한 어린 마음에 비유한 거야요. 쓴 바다는 이 악한 세상을 가리킨 거고.
인생은 푸른 갈대 비바람 치는 날에
자라고 자라잔 뜻 하늘에 달듯 컨만
떠는 잎 한데 얽히어 부르짖어 우는 듯
이건 청년시대를 비유한 건데, 젊어서는 고민이 많아요. 내적으로 고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고, 기운은 막 치솟는데 사회의 여러 가지 어려움도 많아요. 그 많은 고민들은, 인생은 썩어지는 것이 아니니까, 영원히 정신계를 향해서 오르고 오르자는 거야요. 그래 폭풍이 갈밭을 스치고 지나가면 우수수 흔들리는 소리가 나요. 그것은 마치 인생의 젊은 날에 많은 고민을 하는 것과 같다는 거야요. ‘떠는 잎 한데 얽히어’ 하는 건 기운은 왕성한데 아직 생각이 갈피가 안 잡혀, 이 속에 여러 가지 좋지 못한 감정도 있고, 욕심도 있고 그런 것이 한데 뒤엉켜서 고민하는 거야요. 그러다가 이런 고민이 조금 숙어지면
인생은 누런 갈대 바람에 휘적휘적
거친들 저문 날에 외로운 길손보고
풀어진 머리 혼들어 가지 마소 하는 듯
이제 결혼도 하고, 세상살이에 시달리다 보면 젊은 기운이 다지나가서 맥이 좀 빠진 거야요. 인생의 길을 좀 걸어가다 보니까 “인생에 뜻이 있냐, 없냐” 번민도 하고 그래요. 그리고 누가 인생에 무슨 뜻이 있느냐고 물으면 “아이구 나도 무슨 뜻, 그저 그런 거지” 하고 살아가게 되는 양이 꼭 거친 들 저문 날의 외로운 나그네 같은 꼴이야. 아들 딸 낳고 살다보면 이젠 이것저것 생각을 하고 말고 할 것도 없어져. 이건 머리 속이 풀어진 거야. 현실주의자가 된 거란 말이야요. 그래, 이런 모양으로 살다가 보면 마침내 세상에 구부러져요.
인생은 굽은 갈대 망망한 바닷가에
물소리 들어보다 쓴 거품 마셔보다
다시금 하늘 우러러 생각하고 서는 듯
‘굽은 갈대’는 굽은 갈대인데, 세상이란 또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아서, 영원 무한을 지향해 나가는 거야요. 마치 망망한 바닷가를 항해하는 듯도 해. ‘물소리’ 란 영원한 무슨 소리 같은 온갖 게 다 들어 있는 거야요. ‘쓴 거품’이란 세상살이가 일으키는 온갖 거, 뭐랄까, 온갖 쓴 맛을 말하는 거야요. 그러면서도 아주 영원히 타락하지 않고 다시금 돌아서서 생각해보는 거야요. 아주 중요한 고비야요. 고민을 하다가 욕심을 아주 다 내다버리고 “그래도 사는 게 이럴 수야 없지”하고 돌아보는 거야요. 그래서 ‘생각하는 갈대’인 거야요.
그러다가 이제 늘그막에 조금 들어서게 되면 욕심이 없어져요. 그래,
인생은 마른 갈대 꽃 지고 잎 내리어
파린 몸 빈 마음에 찬 물결 밟고 서서
한 세상 쓰고 단 맛이 다 좋고나 하는 둣
이제 늙어서 꽃도 지고, 잎도 떨어져 바짝 마른 갈대, ‘빈 마음’이란 이제 비교적 욕심이 없어지고, 세상 다 겪어보니까 쓴 맛도 좋다, 그건 그것대로 의미가 있구나. 좋구나, 그래서 이제 정신적인 데로 나가는 거야요. 그러다가 마지막이 오면,
인생은 꺾인 갈대 한 토막 뚫린 피리
높은 봉 구름 위에 거룩한 숨을 마셔
처량한 곡조 한 소리 하늘가에 부는 듯
마지막에 오면 바짝 마르고 파리해져서 속고갱이만 남았지만 그걸 그대로 두는가 하면, 아니야, 마지막엔 꺾어버리는 거야. 그러니 ‘꺾인 갈대’지. 그건 죽는다는 건데, 그럼 꺾인 갈대는 뭘하지? 그걸로 피리나 하나 만들잔 거야. 뚫렸다는 건 도가 통했다는 거야. 진리를 환히 아는 거야. 그러니 육신을 초월한 거야. 그게 바로 ‘높은 봉 구름 위에’ 오르는 거지. ‘거룩한 숨’을 마셨다는 건 기독교식으로는 하나님의 영을 받아서 맑은 소리-맑으면서도 어쩐지 조금 슬픈 기운이 있는 소리를 내요. 뭐 불행해서 슬픈 게 아니라, 참을 보니까 그래요.
물론 이 노래는 인생의 한 개인을 두고 한 말이지만, 민족이라든지, 인류 전체에게도 적용할 수 있어요. 인류 역사에도,사람에게 유년기, 소년기, 노년기가 있는 것처럼 고대의 원시시대, 그 다음 문명시대, 그리고 문명을 회의하는 시대, 그러다가 거기서 싸워 이겨서 탈출하고 나오는 시대, 마지막으로 끝나는 시대가 있어요. 그런데 역사란 사실은 끝은 안 나요. 끝은 날 수가 없어요. 이렇게 말하면 기독교인들은 조금은 의심나는 데가 있을 거야요. ‘최후의 심판’은 어떻게 됩니까 할는지 몰라요.
그러나 최후의 심판은 현실 역사에서 어느 해, 어느 달 가서 될 것이다 하는 건 소용없는 말이야요. 그건 몰라요. 우리가 그걸 말할 나위가 없어요. 우리가 그걸 해석해보려고 하는 건 쓸데없는 생각이야요. 묵시록을 그런 식으로 해석해버리면 미신에 빠지고 말아요.
역사-삶의 뜻을 찾는 일
‘심판’이란 순간에서 오는 거야요. 왜 그런고 하니, 사람이란 나기는 현실에 나는데, 지향하는 건 영원무궁한 것을 지향해요. ‘영원’이란 건 부피가 있다든지, 시간적으로 뭐 이렇게 됐다든지 하는 게 아니야요. 우리가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을 공간으로 바꿔놓고, 그걸 보는 거야요. 한 시간, 두 시간 하는 것은 말할 수도 없는 걸 공간으로 환산해 놓고 말하는 거야요.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시간을 아는 거는, 내 체험으로는, 어느 순간에 영원을 정말 보는 걸 말한다 할 수 있어요.
역사란 그럼 뭐냐? 이걸 글자부터 살펴봅시다. ‘역사’라고 할 때 쓰는 역(歴)자의 ‘厤’은 발음을, ‘止’는 뜻을 각각 나타내는 거야요. 역사란 ‘지나갔다, 시간이 지나갔다’는 뜻인데, 시간이 간 것을 표시하려니까 ‘멎을 지(止)’자를 쓴 것이지요. ‘지’는 사람의 발을 그린 거야. ‘발을 거쳐서 지나갔다’는 뜻이야. 그리고 ‘사’(史)는 ‘기록한다’는 뜻인데, 본래는 로 썼어. ‘口’는 입이고, ‘ㅣ’는 가운데를 나타낸 거야요. 가운데서, 이쪽에도 저쪽에도 치우치지 않았다는 뜻이야. 그리고 ‘’는 손을 그린 거야. 그러므로 ‘史’는 손에 그 가운데를 잡았다는 뜻이야. 그러니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은 이쪽이나 저쪽, 정부나 국민, 또는 이 나라나 저 나라에 치우쳐도 못쓰고, 될수록 공정하게 써야 돼요. 그래 역사란 대단히 쓰기 어려운 거야요. 옛날에는 역사를 쓰는 자격은 굉장히 어렵다고 그랬어. 재주도 있고, 학식도 많고, 식견도 있어야 하고. 그래 재·학·식(才·學·識)의 삼장(三長)이 있어야 한다고 했어.
그런데 오늘 우리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기록으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기록을 하려고 할 때는 이미 마음에 무슨 생각이 있기 때문인데, 그 마음의 ‘무슨 생각’에 대해서 말하잔 겁니다. 사람이란 뜻을 찾는 거다 그래요. 그런 점이 다른 짐승과 달라요. 동물들도 자기 뜻을 찾기야 찾겠지요. 그렇지만 스스로 자기 반성을 해서 아는 것이 아니고, 그저 모르고 찾지요.
그러나 사람이란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생각하는 사람인 담에는 그저 자연히 생각에 따른 행동이 나오게 돼요. 그래 왕양명(王陽明) 같은 사람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했지요. 그러나 사실은 생각과 행동이 일치 안되는 점이 많이 있어요. 안되기 때문에 또 사람다운 점이 있어요. 만일 생각이 곧 행동으로 나온다 그런다면 짐승이나 새나 곤충이 됐지, 별거 없어요. 생각은 언제나 행동보다 넘치는 거야요. 그래 그 가운데 무슨 뜻을 골라서 행동하게 되어요. 그러니까 그런걸 따지고 들어가면, 그럼 개인의 사는 목적이 뭐냐 그러면, 무슨 뜻을 찾아가는 것이 그럴 수가 있어요. 그러니 우리나라 역사가 길다 자랑하지만, 이 우주 역사의 가는 길에 뭘로 공헌할 수가 있느냐, 무슨 의미로 그럴 수 있느냐 물을 때 내놓을 것이 없다면, 그깟 역사가 길어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오늘저녁 얘기의 제목을 ‘역사적 진실과 허구’라고 주었는데, 이것은 곧 역사에 있어서 참과 거짓이란 무엇이냐 하는 문제지요. 이 말의 뜻을 글자로 풀어본다면 좀 알기 쉬울 겁니다. ‘진’이란 ‘참’이란 말이고, ‘실’은 ‘알속이 있다’는 말이며, ‘허’란 ‘비었다’는 말이고, ‘구’ 는 ‘얼거리’를 말하는 거야요. 그러니 참과 거짓에 대한 거야요. 그럼 ‘참’이란 무엇이냐?
그런데, 여기, 말이 좀 곁가지로 나가지만, 우리말 사전을 보면, 당최 어원 설명이 없어요. 말이란 그 뜻이 뭔지, 그게 어디서 나왔는지 하는 게 반드시 있게 마련이야요. 그래 영어나 한자를 봐도 그 어원 설명이 다나와 있는데 우린 그렇지 못해요. 내가 한 가지 실례를 든다면 ‘물구나무 서기’ 같은 걸 들 수가 있어요. 나는 해방될 때까지 거꾸로 서는 걸 물구나무 서기라고 하는 걸 못 들었어. 그래 그게 어떻게 돼서 그렇게 말하게 됐는가 여러 군데 물어봤지만, 심지어는 한글을 전공하는 이들조차 모르고 있었어요. 그래 참이란 뭐냐 그러면 다 아는 것 같지만, 왜 그렇게 썼을까 하면 그것도 참 재미가 있어요. ‘참’이라 그러면 ‘가득 차다’는 뜻도 그 속에 있는지 모르고, 또 ‘참는다’는 뜻도 들어 있는 것 같고. 또 옛날엔 길을 가노라면 가다가 주막에서 쉬어가는 걸 ‘참’이라 그래요. 요즘 말로 하면 역(驛)이란 뜻으로, 설립 변에 쓴 참(站)인데.
물론 이렇게 여러 가지로 생각하다 보면 그 뜻에 직접 관계되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겠지만, 이렇게 하는 가운데 우리 생각이 깊어가요. 아무튼 ‘참’이라고 하는 것의 하나는 ‘망령되다’고 하는 것의 반대의 뜻이야요. 허투로 마구하는 것이 아니란 뜻이지요. 또 둘째는 ‘동질적’인 거야요. 이것 저것 섞이지 않고 순일(純ᅳ)하다는 것, 영어로 한다면 ‘pure’ 라 하는 거, 변하지 않는 거, 아무리 오래 가도 까딱이 없는 거란 뜻이야요. 세째로,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는 걸 들 수가 있어요. 네째로, 또 앞에서도 ‘가득 차다’고 했지만 ‘물이 가득 차다’ 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로, 열매가 달리고 가을까지 가서 ‘속알이 아주 단단하게 든다’는 뜻도 있어요. 다섯째, 제가 주인이라는 생각, 주체의식이 있어요. 남에 의존한 거라면 ‘참’이라 그럴 수가 없지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만으로는 만족 안해요. 사람이란, 그러므로 다른 것 다 두고, “나는 나다” 하는 나로서의 자각, 확신이 있어야 됩니다.
역사의 참은 公·明·正·大
이런 것들을 유교의 말을 빌어서 몇 글자로만 생각해본다면 이걸 ‘공명정대’(公明正大)라 그래요. 우리말로 ‘공’ (公)이란 뜻을 말하기는 참 어려워요. 원래 우리말에도 한자로 ‘공회당’ (公會堂)하는 단어가 있긴 있었었는데, 한자인 ‘공’자를 써오는 동안에 거기 눌려서 없어진 것인지, 아니면 우리말보다 이것이 뜻이 더 분명해서 그랬는지 그냥 ‘공, 공’하고 써왔지요. 알잖아요? 그저 ‘공공하다’ 그러면 무슨 뜻인지, 한자의 ‘공’(公)자가 되길, 위의 ‘八’자인데, 쪼갠다는 뜻이야요. 여덟을 쪼개면 넷, 또 넷을 쪼개면 둘, 또 쪼개면 하나. 그래 여덟은 쪼개고 쪼개고 쪼갤 수가 있어서 좋다는 거야요. 그리고 아래에 있는 ‘厶’ 는 가장 처음으로 되는 ‘집’을 말해요. 둘을 가지고는, 가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