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전부 외 1편
정한용
원룸 빌라에서 한 청년이 죽은 지 달포 만에 발견되었다. 오래 소식 끊긴 걸 고시 공부 때문에 바쁜지 알았다고 친구가 말한다. 고향에 노모 홀로 살고 있다는데 어찌 소식을 전하면 좋겠냐고 울먹인다. 그래도 알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옆 친구가 하나 마나 한 답을 붙인다. 그들은 모두 늙은 청년, 막장에 함께 서서 죽음의 연대를 느낀 듯, 소주잔을 다시 채운다. 선술집 창밖으로 밤빗소리가 더 거세어진다. 이런 건 신문・방송에 나오지 않는다.
지난 삼 년간 헬조선이라는 나라에서 거의 4만 명이 자살했다는 통계가 있다. ⟪코리아 헤럴드⟫가 제시하는 ‘데이터’는 ‘그들이 자기 자신을 죽였다’고 적고 있다. 어쩌면 이 데이터에 한 늙은 청년의 죽음은 살짝 빠졌을 수도 있다. 살짝 죽음의 데이터에서 빠져나와 다시 친구들이 앉아 있는 술집으로, 밤비를 맞으며, 옷깃에 빗물을 뚝뚝 흘리며 들어설 수도 있다. “나 드디어 취직했다, 임마, 오늘은 내가 쏜다!” 이럴 수도 있다. 물론 이런 건 언론에 나오지 않는다.
겨우의 틈을 피해 우크라이나에선 수만 명이 죽고, 팔레스타인에서도 수십만 명이 죽었다. ‘겨우’가 ‘전부’인 나라에서의 죽음은 영웅담이나 잔혹동화로 각색되어 신문・방송에 거듭 중계된다. 그곳엔 밤비가 내리지 않는 걸까. 선술집이 없는 걸까. 함께 마셔줄 늙은 친구들이 없는 걸까. 그러니 안타깝게도 언론에 단골손님으로 등장하는 거겠지. 대포와 장갑차 없이도 하루 3~4십 명이 전사하는 나라, 이 나라의 신문과 방송은 입에 지퍼를 채우고 있다.
어쩌면 신이 있는 거 같기도 하다
멕시코 타라우마라 계곡 산 중턱. 초로의 사내가 혼자 중얼거리며 길바닥 오 미터쯤 두 지점을 오가고 있다. 한쪽 옆에 허술하게 생긴 허수아비를 세워 놓았고, 손에도 그 비슷한 제웅을 들고 있다. 수없이 오간 바닥은 돌과 흙이 벗겨져 하얗게 패였다. 타이어를 잘라 만든 슬리퍼가 닳고 슬어 꺾이고 접혔다. 마른 대지의 흰 먼지가 발등에서 무릎까지 달라붙었다. 마치 속살을 훑듯 한 줄기 흘러내린 흔적이 있지만, 무엇이 그랬는지는 불분명했다. 이마에 굵게 팬 주름 사이로 땀방울이 흐르다, 고지의 쌀쌀한 산바람에 잠시 멈칫했다. 걷는 것도 아니고 뛰는 것도 아닌, 잰걸음 비슷한 사내의 엉거주춤을 오로지 바람만이 바라보고 있다. 횟수를 세고 있을까, 세다세다 잊었을까, 아마 까마득해지지 않았을까. 아침 해 뜰 때부터 저녁 해 가라앉을 때까지 사내는 열 시간을 그렇게 춤추고 있다. 아니, 사내의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기도인지 푸념인지 원망인지 축복인지는, 오로지 죽은 염소만이 알아듣는다. 울림이 흰 안개가 되어 산등성이를 미끄러져 내려가 천 길 아래 골짜기를 차곡차곡 채운다. 아랫마을에선 축제가 한창이다. 낮에는 붉은 깃발을 올리고, 밤에는 죽은 자들을 위해 국을 끓인다. 산 사람들도 한 해에 한 번 고깃국을 나눠 먹는다. 숲에서 죽은 염소가 밤새 운다.
정한용
1985년 <시운동>에 시 발표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유령들, 거짓말의 탄생, 천 년 동안 내리는 비 외,
천상병시문학상, 시와시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