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26년 7월 21일 화요일
백비 (白碑-김광진)
말이 없다.
할 말이 없거나
할 말이 너무 많거나
밀치는 게 부질없어서
갈림길에서 망설이다가
길을 잃고 헤매다가
그러다 그러다가
날은 저물고
조선 명종 때의 청백리 아곡(娥谷) 박수량(朴守良, 1491~1554) 선생의 묘 앞에 세워진 글자 없는 비석, **'백비(白碑)'**에 담긴 사연입니다.
39년 관직 생활 끝에 남긴 비워진 재산
박수량 선생은 중종 8년(1513년) 진사시에 합격한 후, 중추부지사, 한성부판윤(지금의 서울시장), 중추부판사 등 높은 벼슬을 두루 거치며 39년 동안 관직에 몸담았습니다. 그러나 중책을 맡으면서도 청빈함과 청렴함을 목숨처럼 지켰습니다.
벼슬길에서 물러날 때나 세상에 떠날 때까지도 그의 집안에는 청렴함 외에 남은 재산이 없었습니다. 1554년 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 상을 치를 유족들의 돈조차 없어 상여를 고향인 전남 장성으로 가져갈 경비마저 마련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명종 임금의 감동과 백비의 하사
이 소식을 들은 명종 임금은 크게 감동하며 조정의 지원을 통해 장례를 치르도록 돕고, '청백리'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또한, 박수량 선생의 청렴함을 기리기 위해 암석을 내려 묘비를 세우도록 지시했습니다. 이때 명종 임금은 다음과 같은 뜻을 전했습니다.
"박수량의 청렴함은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그의 행적과 덕을 묘비에 붓으로 다 적으려 한들 도리어 그 청덕에 흠이 될까 두렵다. 그러니 비석에 아무 글자도 새기지 말고 그대로 세우라."
이로 인해 아무런 글귀도 새겨지지 않은 하얀 돌비석, 즉 **'백비(白碑)'**가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에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백비가 갖는 역사적 의미
오늘날 장성군에 위치한 박수량 선생의 백비는 한국 공직자 청렴 교육의 대표적인 현장이자, 한 사람의 깨끗했던 삶을 응축해서 보여주는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