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신> 대우의 시법 / 임보 (시인)
로메다 님, 과제를 아주 썩 잘 하셨습니다. 네 계절에 대한 이미지를 붙잡아 병치구조의 작품을 만들어 보자고 했는데, 그럴듯한 작품을 만들어 냈군요.
따스한 양지밭에 돋은 제비꽃 삼복 염천에 타는 자미화 주렁주렁 매달린 탐스런 과일 천지를 희게 덮은 백설
이른 봄에 피어나는 앙증스런 제비꽃, 한여름의 요염한 목백일홍 그리고 가을의 풍성한 과일과 겨울의 눈을 지적하셨군요. 붙들어낸 이미지들이 특별히 경이로운 것들은 아니지만 크게 문제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욕심을 부린다면 봄(제비꽃)과 여름(자미화)이 둘 다 꽃으로 겹치니까 어느 하나를 꽃이 아닌 다른 사물로 바꾸면 좀더 다양한 느낌이 들겠지요? 여름은 꽃보다는 잎의 계절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자미화' 대신 '포플러'쯤으로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한편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볼까요. 봄과 여름이 꽃이니까 이에 맞추어 가을과 겨울도 꽃으로 통일해 보는 것입니다. 가을은 '국화'가 쉽게 떠오르지요? 제3연을 '주렁주렁 매달린 탐스런 국화'로 하면 어색한가요? 그렇다면 좀 상투적이긴 합니다만 '노랗게 피어나는 탐스런 국화'쯤으로 해 두지요. 그리고 겨울은 '눈' 대신 '눈꽃'이나 '설화(雪花)'로 표기만 바꾸면 되겠군요. 이렇게 고치려는 것은 일관된 통일의 조화를 지향코자 해서입니다. 모든 사물의 아름다움은 조화와 균형에 있으니까요.
그런데 한 가지 더 지적하고 싶은 것은 율격 구조에 관한 것입니다. 제1연과 제3연은 소위 7·5조라고 하는 율격의 틀에 맞는 구조입니다. 제2연은 5·5입니다만 읽기에 큰 불편이 없으므로 7·5조의 변형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제4연의 율격구조는 7·2가 되어 읽기에 좀 어색하지요? 7·5조의 율격구조에 맞추려면 한 어절(음보)쯤 늘려야 합니다. '눈꽃' 앞에 한 어절을 넣어 '삼동의 눈꽃'으로 하면 7·5조에 맞게 떨어집니다. 시의 운율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에 따로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로메다 님, 세계는 사물들의 병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수많은 식물과 동물들을 위시해서 삼라만상의 자연물들이 대등하게 공존하고 있지 않습니까? 시에서의 병치구조는 가장 자연스런 세계 구조의 모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엔 시에서 즐겨 구사되고 있는 대우(對偶)의 구조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대우는 '짝 이룸'입니다. 두 개의 사물이나 정황을 나란히 늘어놓는 기법인데 대구(對句)라고도 합니다.
가) 산은 높고 .....물은 맑다 나)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가)는 산의 높음과 물의 맑음이, 나)는 인생의 짧음과 예술의 긺이 나란한 대우의 관계로 놓여 있습니다. 특히 '짧'고 '긺'의 상반의 관계에 있는 나)와 같은 경우를 대조(對照)라 이르기도 합니다. 대우의 원리에 대해서 기술해 놓은 다음의 글을 우선 읽어보도록 하지요.
삼라만상의 형상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다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물의 얼굴이나 식물의 잎을 보라. 얼마나 균형이 잘 잡힌 대칭을 이루고 있는가. 조류와 어류들은 말할 것도 없고 곤충과 같은 하찮은 미물들 역시 경이로운 대칭의 몸매를 지니고 있다. 생명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원자나 분자의 구조도 그렇고 천체의 형상도 또한 그렇다. 가장 완전한 대칭의 구조는 구(球)인데, 원자나 별들은 바로 그 균형의 이상적인 형상인 구형으로 되어 있다. 대개의 과일들 역시 구형을 지향하는데, 이는 가장 조화로운 상태를 추구하려는 생명의 자연스런 욕구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물건들 거의가 균형과 조화를 지향하는 대칭의 구조를 지닌 것들이다. 모든 그릇이며 도구들이 다 그렇지 않던가. 그러니 시에 있어서도 그것이 안정과 조화를 추구하려면 대우의 구조를 거부할 수 없으리라. 아니 대우는 만상의 존재 원리이기도 하다. 만상은 다 상대적으로 존재한다. 천지, 상하, 좌우, 주야, 남녀 등 다 짝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서로 같이 있음으로 서로를 함께 드러낸다. 어느 하나만으로는 존재 의미가 없다. 대우는 그러한 세계의 구조적 원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대우는 만상의 구조 원리를 단순히 답습하는 것으로 끝나는 기법만은 아니다. 시인은 대우의 구조를 통해서 창조적인 세계를 창출해 낸다. 대우, 곧 짝을 짓게 하는 일은 세계를 정돈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잡다한 사상(事象)들이 혼재해 있는 부조리한 세계를 정리 정돈한다. 불필요한 것들은 삭제해 버리고 시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만 선택하여 나란히 배열함으로 해서 새로운 질서의 세계를 창조해 낸다. ― 『엄살의 시학』(태학사,2000) p.63-64
로메다 님, 인용한 글의 요지는 사물이 대칭의 구조를 지향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도 대우의 구조를 지녔을 때 우리의 정서적 안정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이 지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물들 가운데서 어떤 특정한 대상들만 선택해서 나란히 늘어놓는 대우의 작업이야말로 시인의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 세계를 개편하는 창조의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한시의 절구(絶句)에서는 압운(押韻)과 함께 이 대우가 시를 엮는 중요한 기법으로 요구됩니다.
江碧鳥逾白 (강물이 퍼러니 물새는 더욱 희고) 山靑花欲然 (산빛이 푸르니 봄꽃은 불붙듯 붉네) 今春看又過 (어느 덧 이 봄도 또한 지나가나니) 何日是歸年 (어느 제나 고향에 돌아갈 수 있으리)
두보(杜甫,712∼770)의 유명한 절구입니다. 앞의 두 행이 절묘한 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강(江)과 산(山)의 자연, 새[鳥]와 꽃[花]의 사물, 그리고 퍼러다[碧]와 푸르다[靑], 흰 색[白]과 붉은 색[然=燃]의 색채적 대조가 놀랍습니다. 생동감이 넘치는 화사한 봄의 정경을 조화롭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뒤의 두 행에서는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안타까운 심회를 읊습니다. 앞의 화사한 정경과는 사뭇 다릅니다. 흔히 말하는 한시의 전경(前景)[1,2행]과 후정(後情)[3,4행]의 정황이 또한 대조적으로 엮어지면서 서로를 두드러지게 드러내 보입니다.
하늘에는 달이 없고 따에는 바람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소리도 없고 나는 마음이 없습니다. 宇宙(우주)는 죽음인가요 人生(인생)은 잠인가요 한 가닥은 눈썹에 걸치고 한 가닥은 작은 별에 걸쳤던 님 생각의 金(금)실은 살살살 걷힙니다. 한 손에는 黃金(황금)의 칼을 들고 한 손으로 天國(천국)의 꽃을 꺾던 幻想(환상)의 女王(여왕)도 그림자를 감추었습니다. 아아 님 생각의 金(금)실과 幻想(환상)의 女王(여왕)이 두 손을 마주 잡고 눈물의 속에서 情死(정사)한 줄이야 누가 알아요. 宇宙(우주)는 죽음인가요 人生(인생)은 눈물인가요 인생이 눈물이면 죽음은 사랑인가요 ― 한용운 「고적한 밤」 전문
전체가 빈틈없는 대우의 구조로 엮어진 작품입니다. 첫 두 행만 보더라고 각 행내(行內)에 대칭[하늘과 땅, 남과 나]을 이루고 있고, 다시 행간(行間)의 대칭[자연과 인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복합대칭의 구조가 작품 전편을 지배하며 전개됩니다. 이와 같은 대칭구조의 반복은 의미의 리듬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나는 이러한 의미율을 내재율의 한 유형으로 다룬 바도 있습니다.(졸저『현대시운율구조론』(태학사, 1999.)pp.92∼114)
로메다 님, 시뿐만이 아니라 산문에서도 대우의 기법을 즐겨 씁니다. 좋은 산문치고 대우의 기법을 구사하지 않은 글은 없습니다. 훌륭한 문필가는 대우의 기법을 잘 부릴 줄 아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로메다 님, 대우의 기법을 익히는 데 게을리 하지 말기 바랍니다. 정진을 기대합니다.
- 임보 교수 시창작교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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