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가치
곽 흥 렬
고려청자 한 점이 고미술품 경매를 통해 엄청난 고가高價에 낙찰되었다는 보도를 본다, 자그마치 십억 하고도 몇억의 우수까지 붙어서. 도자기가 그 정도로까지 값나가는 골동품인 줄은 미처 몰랐다. 아무리 희귀한 물건이라고 한다지만, 우리 같은 서민의 입장으로선 입이 딱 벌어지는 거금이 아닐 수 없다.
언뜻, 현재 유통되고 있는 돈의 액면가로 최고 단위인 오만 원짜리 지폐 묶음 십억 원과 그 도자기를, 나란히 저울 위에다 올려놓는 장면을 그려 본다. 과연 어느 쪽으로 무게 중심이 기울까. 비록 호사가가 아니라 할지라도 충분히 상상이 가능한 일이다.
그만한 거액이면 숫자 뒤에 0이 몇 개나 따라붙는지 금방 감이 오지 않는다. 만날 소소한 일상을 꾸리기에 허기가 지는 알량한 봉급으로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고 평생을 벌어 모은대도 청자 한 점 못 살 인생이라 생각하니 한없이 허망스러운 마음이 든다. 그 돈을 굶주림에 시달리는 극빈 계층에게 골고루 풀어먹인다면 얼마만 한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갈 것인가.
문득 어느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일까 하는 물음과 맞닥뜨린다. 물론 세상만사가 다 나름의 값어치를 지니고 있고 또한 사람마다 판단의 기준이 다를 수 있는 까닭에, 바른 답을 찾는다는 것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일제 식민치하에서 간송 전형필 선생이 바다 건너 섬나라로 반출될 위기에 처해 있던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들에 관심을 갖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상황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한다. 그런 혜안을 지닌 선각자들의, 사욕을 버린 노력 덕분에 그나마 지금 이 정도라도 지켜질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요는 개인적인 치부를 위함이냐 역사와 민족과 공익을 위함이냐에 따라 그 가치의 경중이 매겨진다고 하겠다.
어느 철학자는 인간의 가치로운 삶의 조건으로 세 가지를 들고 있다. 그 가운데 첫 번째가 가치의 지속성 또는 수명이라고 했다. 무릇 세상에는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여러 가지 사물 혹은 대상이 존재한다. 그것들 가운데 어떤 것은 수명이 길고 어떤 것은 수명이 짧다. 예컨대, 예술은 오랜 수명을 누리는 반면 권세는 수명이 짧다. 위대한 인물의 학덕이나 사상은 그 수명이 길고 억만장자의 사치와 향락은 그 수명이 짧다. 여기서 수명이 긴 가치를 행하는 것이, 그렇지 않은 가치를 행하는 것보다 가치 평가에서 더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돈에 돈 섞이면 그 돈이 그 돈이지 별 게 있느냐고들 하지만, 호스트바이니 러브호텔이니 사창가니 하는 데다 투자하여 벌어들이는 돈은 결코 깨끗한 재물이 못 된다. 그런 방면에다 눈을 돌리는 것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손쉽게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에서 나온다. 쉽게 번 돈은 쉽게 없어진다고 했다. 백번 천번 지당한 말씀이다.
한 오십 대 미국인 남자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절실히 체감한다. 그는 연전에 물경 일천이백억 원이라는 사상 최대 액수의 복권에 당첨된 인물이다. 자신에게 안겨진 행운이 결국 자신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고 말 줄이야 그인들 어찌 짐작이나 했겠는가. 허랑방탕한 생활을 일삼다 채 이태도 못돼 그 거금을 몽땅 탕진하고, 심지어 마약 복용과 폭력 혐의로 감방 신세까지 져야 할 딱한 처지가 되었다니 참으로 기가 막힌다.
이런 사례는 비단 외국의 경우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J 아무개 여인, 그녀는 몇 차례에 걸친 거액의 어음 사기 사건으로 거의 한평생을 차가운 감옥소 안에서 보내고 있는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이다. 재물에 대한 불타는 욕망이 꽃 같은 한 아낙의 삶을 송두리째 짓밟아 놓고 만 것이다.
그렇다고 구겨진 체면과 맞바꾼 그 재물인들 온전히 지켜낼 수 있었겠는가. 사취한 전액을 몽땅 추징금으로 몰수당하고, 결국 빈털터리 신세가 되었음은 구구한 설명이 필요치 않으리라. 그녀에게 있어 돈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저 맹목적으로 수중手中에 넣고 싶어 했던 탐욕의 덩어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 같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허황된 욕망의 말로를 보는 듯하여 입맛이 씁쓸하다.
물론 이와는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삶도 있다. 평생에 걸쳐 한 푼 두 푼 모은 거금을,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는 신신당부와 함께 조건 없이 쾌척한 어느 노부부의 이야기가 우리의 메마른 가슴을 봄비처럼 촉촉이 적셔 준다. 그분들이 짜장면 한 그릇에도, 양말 한 켤레에도 자신을 위한 씀씀이에는 더없이 인색했음은 여기서 세세히 풀어놓지 않아도 저절로 답이 나오리라.
옛말에 있는 자랑 말고 쓰는 자랑 하라고 했다. 돈이란 액수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고, 어떻게 모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그 값어치가 매겨지는 것이 아닐까. 한 끼 먹을거리에 목을 매는 천수답 같은 인생이 부지기수인 세상에, 하룻저녁 술값으로 기백만 원을 껌값인 양 흥청망청 허공에다 날려 버리는 쓸개 빠진 무리들의 행태가 우리를 정말 화나게 만든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극명한 대비, 여기서 오늘날 우리 사회의 이면에 드리워져 있는 짙은 우울의 그림자를 본다.
가졌다고 분별없이 써대는 것도 어쩌면 하나의 죄악인지 모른다. 누구는 구차스런 변명을 늘어놓기도 한다. “내가 이렇게 돈을 써 주어야 벌어서 먹고사는 사람도 있을 것 아닌가.”라고. 일견 그럴듯해 보이지만, 근본을 따지고 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합리화의 언어도단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 돈이면 허기진 배를 채워 줄 따뜻한 공깃밥이 몇 그릇이며, 시린 속을 데워 줄 라면이 몇 봉지나 될까. 이 점에 대해 예의 그 철학자는 이렇게 단언한다. “가치로운 삶의 두 번째 조건은, 보다 많은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는 것이 그렇지 못한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이다.”
상류사회의 도덕성 문제를 거론할 때 사람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을 자주 입에 올린다. 가진 자들에게 물질적 풍요가 주어졌다고 해서 반드시 정신적 풍요까지 동시에 주어지지는 아니하는 모양이다. 그들로부터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기대하기 힘든 세상을 우리는 지금 살고 있다. 그들의 도덕 불감증이 바른길을 찾지 못한다면 이 땅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솔선수범’이란 참 좋은 말을 우리는 가졌음에도, 대다수가 그 미덕을 발휘하는 데는 지극히 인색한 것 같다.
돈이란 가치 있게 쓰일 때 그 빛을 발하는 법이다. 우리 사회를 부패로부터 지켜주는 소금과 같은 사람은, 그래도 밤하늘의 이름 없는 별들처럼 많다. 이런 사람들이 침목이 되어 받치고 있기에, 세상이라는 열차는 그나마 크게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굴러가는 것이 아닐까.
요사이 들어 새삼 돈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자주 생각해 보곤 한다. 그럴 때면 참 귀하고도 무서운 존재인 이 돈 앞에서 옷깃이 여며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