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금오산)의 용장사 터는 안녕하신가?
문득 그리운 곳이 있고, 그리운 사람이 있다.
그때부터 어서 가고 싶은 생각에 잠을 설치는 곳,
그곳 중의 한 곳이 경주 남산의 용장사터이다.
매월당 김시습이 살아생전 가장 사랑했던 곳,
삼층석탑과 마애불, 그리고 이형석탑이 남아 있고,
절이 사라진 빈터에 대숲소리만 남아 있는 곳,
그곳이 경주 남산의 용장사터이다.
”조선의 모든 곳을 답사한 김시습이 가장 살 만한 곳으로 여기고 사랑했던 곳은 아마도 경주의 금오산이었을 것이다. 『매월당집』 부록 제2권에 실린 「매월당시사유록후서(梅月堂詩四遊錄後序)」에 실린 그의 글에 “금오에 살게 된 이후 멀리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다만 바닷가에서 한가로이 노닐며 들판과 마을을 말과 행동에 구애받음이 없이 자유로이 다니며 매화를 찾고 대밭을 찾아 언제나 시를 읊고 술에 취함으로써 스스로 즐거워했다”라고 썼다. 그는 금오산을 ‘흘러 다니다가 멎는 산’이라는 의미로 고산(故山)으로 삼고자 했음인지, 여러 번 되풀이해서 ‘고산’이라고 썼다.
그는 태어나서 자란 서울을 객관(客官)이라 불렀고, 서울에 있으면서 꾸는 꿈을 객몽(客夢)이라고 했다. 그런 여러 가지 정황을 보아 김시습이 얼마나 경주의 금오산을 사랑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 때문에 관서, 관동, 호남은 하나의 도로 여겨서 하나의 유록으로 만들면서도, 금오는 작은 지역인데도 하나의 유록으로 만들었다.
그의 호인 매월당 역시 금오산의 금오 매월에서 따왔으며, 그가 머물렀던 금오산실은 바로 용장사이며, 그 집의 당호 역시 매월당이다.
이 금오산에서 서른한 살부터 서른일곱 살에 이르는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를 비롯한 수많은 시편과 『유금어록(遊金語錄)』을 남겼다. 집구시(集句詩)인 「산거백영(山居百詠)」과 「전등신화(剪燈新話)」를 본떠 지은 『금오신화』가 바로 이때(1468년) 지은 작품이다.
그는 저술한 『금오신화』를 석실에다 감추고 말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나를 알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그의 말이 헛되지 않아 『금오신화』가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김시습의 작품 중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김시습은 편벽된 성질을 지녔기 때문에 가난해도 무엇이건 빌리지 않았다. 남이 주어도 받지 않았다. ‘동서명(東西銘)’을 본떠서 ‘남북명(南北銘)을 지어 남쪽과 북쪽 벽에 붙여놓았다. 그해 다시 효령대군의 추천으로 원각사의 낙성회에서 찬시를 바쳤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수양대군이었던 세조 개인에 대해서는 그렇게 노골적인 반감이나 불만을 가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나이 37세가 되던 성종 2년에 서울로 올라오라는 청을 받은 김시습은 6~7년간 정들었던 금오산을 하직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조선 천재 열전>에서
가고 또 가도 가고 싶은 곳,
경주 남산이다. 경애왕릉에서 삼릉을 지나 상선아 마애불을 보고서
금오산 정상에 오르고 다시 발길은 용장사터에 이른다.
경주 남산을 기단으로 삼아 외롭게 서 있는 용장사터 삼층서탑과 용장사지를 보고서
다시 신선암과 칠불암을 거쳐 서출지에 이르는 길,
그 길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곳에 다시 가면 매월당 선생을 만날 수 있을 것인지,
2022년 11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