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신> 배경과 대상과 정황의 구조 / 임보 (시인)
로메다 님, 지난번에는 병치와 대우의 시법에 대해서 얘기했었지요? 오늘은'배경과 대상과 정황'의 구조에 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물을 노래한 시는 대개 어디에 무엇이 어찌한다(혹은 어떠하다)의 구조를 지닙니다. 예를 들자면 가)산에 나무가 푸르다든지 나)강물에 물고기가 논다라는 구조입니다. 가)는 상태에 대한 서술인 '어떠하다'이고, 나)는 동작에 대한 진술인 '어찌한다'입니다. 모든 문장은 이러한 골격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여기에 수식어가 붙기도 하고 혹은 자리바꿈을 하면서 변화로운 문장으로 발전합니다. 시적 진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익히 잘 알려져 있는 작품인박목월의 「산도화·1」을 볼까요? 두 개의 <배경과 대상과 정황>이 병치된 아주 단순한 구조의 작품입니다.
산은 九江山 보랏빛 石山 山桃花 두어 송이 송이 버는데 봄눈 녹아 흐르는 옥 같은 물에 사슴은 암사슴 발을 씻는다 ― 박목월 「山桃花(산도화)·1」전문
박목월의 첫 시집 『山桃花(산도화)』(영웅출판사, 1954)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입니다. '산도화'와 '사슴'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즉 산에는 산도화가 벙글고, 물에는 사슴이 발을 씻는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배경+대상+동작'의 두 정황이 나란히 병치되어 있는 구조입니다. 의미 그 자체만으로 따지면 별로 신기할 것도, 감동적일 것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작품을 실제로 읽고 난 뒤의 정감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아주 흥겹고 신선하고 맑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 작품의 어떤 요소들이 그러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지 다음의 글을 읽어가면서 따져보도록 합시다.
―(전략)―우선 이 작품은 조화로운 율격을 지니고 있어서 리드미컬하게 읽힌다. 각 연이 7·5조류의 율격에 담겨 있다. (필자는 7·5조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는 6·5, 5·5 혹은 8·5 등의 율격 형태들을 '7·5조류'라고 명명한다.) 각 연은 3행씩으로 이루어졌는데 행의 음절수를 점점 불려 배치하고 있는 점층 구조로 되어 있다. 다만 제3연만이 정반대인 점강 구조인데, 이는 전(轉)에서 의도적인 파격을 즐겨 시도하는 절구(絶句)적 양식의 구현으로 생각된다. 간결한 점층적 배행의 반복에서 시각적인 리듬을 살리고도 있다. 한편 ㅅ과 ㄴ의 자음들이 많이 반복되는 압운적 장치를 통해서 청신감과 유연감을 느끼게도 한다.
의미 구조를 좀더 자세히 분석해 보면 다음의 도표처럼 정리된다.
1연(기) 배경------------산(구강산)--------------보라색(석산) 2연(승) 대상+정황-------산도화+피어남-----------홍색(산도화) 3연(전) 배경------------물(눈 녹은 물)-----------백색(옥 같은 물) 4연(결) 대상+정황-------사슴+발을 씻음-----------갈색(사슴)
'산'과 '물'의 대조적인 배경에 '식물(산도화)'과 '동물(사슴)'이라는 대립적인 대상의 배치도 조화롭다. 또한 각 연이 다채로운 색채적 이미지를 고루 담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제1연에서 제2연에 이르는 진술은 점강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즉 '산→구강산→석산→산도화→두어 송이→송이'로 대상의 범주를 점점 축소해 가면서 특정한 부분을 선명히 노출시킨다. 이러한 전개 방식은 제3, 4연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즉 '물(개울)→사슴→암사슴→발'로 점점 축소 제시되고 있다. 영상예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원경으로부터 시작하여 근경에 이르는 클로즈업의 기법이다. 대상을 단도직입적으로 일시에 제시하지 않고 주변에서부터 순차적으로 은근히 접근하여 마침내 독자들의 시선을 요처에 집중시키는 기법이다.
한편 이 작품의 내포적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자. 배경으로 제시된 '九江山(구강산)'은 고유명사지만 '九江'이 불러일으키는 이미지가 산을 감돌아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을 연상케 한다. 그러니 그 산은 맑은 강물이 감돌아 싸고 있는 속세로부터 멀리 격리된 자연처럼 느껴진다. 또한 그 산은 보통의 산이 아니라 보랏빛 돌로 이루어진 석산(石山)이다. 보통의 초목들은 범접도 할 수 없는 강직(剛直) 청정(淸淨)의 신성한 산이다. 그 산의 돌 틈에 산도화가 한 그루 초연하게 자라 몇 송이의 꽃을 이제 막 터뜨리고 있다. 봄철에 흔히 볼 수 있는 진달래나 철쭉 같은 그런 꽃이 아니라, 비범하게 붉은 산도화다. 산도화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연상케도 한다. 그러고 보니 앞의 '九江'이나 '보랏빛 석산' 등도 다 은근히 비일상적인 세계―선경(仙境) 곧 이상적 공간을 암시하는 몫으로 설정된 것 같다.
사슴은 동물 가운데서 가장 선량하고 깨끗한 짐승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사슴 가운데서도 암사슴이니 얼마나 유순하고 정갈하겠는가? 그런데 그 암사슴의 발을 차고 맑은 얼음물에 씻기어 정화시키고 있다. 결벽을 지향하는 작자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속인부재(俗人不在)의 정결한 자연만이 제시된 작품이다.
어느 시대이거나 시인에게 있어서의 현실은 불만스럽기만 하다. 인간들의 세속적인 욕망과 질시로 아수라장을 이루고 있는 세태는 증오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시인의 거부 정신이 이상향을 꿈꾸게 한다. 「山桃花·1」은 목월이 꿈꾸는 이상 세계다. 그것은 전통적인 선(仙)의 세계에 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선적인 경향은 「청노루」「모란여정」등 그의 초기 작품들 가운데서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한 두 개의 생명체 '산도화'와 '사슴'은 자연물이면서 한편으론 시적 자아가 전이(轉移)된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산도화나 사슴처럼 초연·정결한 생명체로서 자연과 합일코자 하는 시인의 선망이 두 대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투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목월은 자아의 사물화(산도화·사슴)로 세속적 인간의 욕망을 극복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시가 복잡해야만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비록 단순할지라도 조화롭고 율동적인 구조를 통해서 격조 높은 시정을 아름답게 구축하지 못할 것도 없다. ― 『牛耳詩』 제155호(2001.5.)
로메다 님, 해설이 너무 장황해서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나요? 그러면 이렇게 기억하세요. '어디에 무엇이 어떠하다'라는 단순한 구조도 좋은 시를 만들 수 있다고―. 다만 어떤 이채로운 사물과 배경을 어떻게 선택해서 배치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이 역시 수많은 선택과 배치의 시행착오를 거쳐 터득하는 수밖에 다른 지름길은 없습니다.
로메다 님, 청록파의 초기시들을 즐겨 읽으십시오. 청록파 중에서도 목월의 초기시를 나는 권하고 싶습니다.
- 임보 교수 시창작교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