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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원불사(源佛寺) 원문보기 글쓴이: 단현
어느 네티즌의 댓글에 대한 답글
필자가 쓴 「사십구재와 천도재에 대한 사견」이라는 글에 ‘염불행자’라는 사람이 다음과 같은 댓글을 올렸다.
마성스님의 글을 잘 읽었습니다. 두 가지 의문이 있어 질문을 올리옵니다.
첫째, 부처님께서 목련존자의 모친을 천도한 것은 무엇인가요!
둘째, 마성스님께서는 “무아설에 의하면 영원불변하는 자아나 영혼과 같은 것은 없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영혼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그것은 이미 붓다의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이다”라 하시는데,
무아설은 이 현상계에 ‘나’라는 실체가 없다는 실체를 부정하셨지, 존재를 부정한 것은 아니라고 사료되며, 밧차고차의 질문(자아가 있습니까? 자아는 없습니까?)에 부처님께서는 침묵으로 대답하십니다.
그리고 한 비구의 “아트만이나 자아가 없다면 누가 업의 결과를 받을 것인가?” 질문에 “모든 사물 어디에서도 연기의 법칙을 보라고 가르치지 않았느냐고” 대답하십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자아나 혹은 영혼이 없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시며, 오직 연기의 법칙을 말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아 혹은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단멸론자의 주장과 무엇이 다르겠느냐가 저의 솔직한 소견입니다.
이에 대한 마성스님의 가르침을 청하옵니다.
위 댓글의 두 가지 질문 중에서 두 번째 질문은 무아윤회에 관한 것이다. 이 무아윤회에 관해 어떤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은 죽어도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무런 편견 없이 순수하게 접근하는 사람은 두 시간 강의를 듣고 곧바로 이해한다. 실례로 필자가 동국대학교 교양필수 과목인 「불교와 인간」시간에 무아윤회에 대해 설명한다. 그리고 기말시험에서 “초기경전에 나타난 무아윤회에 대해 설명하시오.”라는 문제를 내면, 약 80% 이상의 학생들이 교과서(불교교재편찬위원회 편, 『불교사상의 이해』, 불교시대사, 1997)에 기술된 정답을 적어낸다. 그런데 대승불교(정확히 말하면 대승불교사상이 아닌 힌두사상을 공부한 사람)를 20년 30년 공부했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무아윤회의 원리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런 사람을 부처님은 상견론자들이라고 비판했다.
사실 무아와 윤회는 모순된 것이 아니고, 서로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월폴라 라훌라 스님이 쓴 『What the Buddha Taught(붓다의 가르침은 무엇인가)』라는 책에 너무나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그래서 이 주제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한다. 그러면 굳이 더 이상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게 된다. 그래서 전 세계의 불교대학에서 이 책을 교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무아윤회의 원리에 대해 이미 다 설명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견론에 빠져 있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런 사람에게 무아의 이치를 설명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필자는 이미 「사십구재와 천도재에 대한 사견」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역사적으로 붓다의 제자 중에서도 이 무아설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혹은 정확히 이해했다할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 불멸 후 불교사는 한마디로 이 무아설에 대한 논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글에 댓글은 단 ‘염불행자’와 같은 사람이 이에 속한다. 이런 사람은 무아설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이미 똑같은 질문을 약 열 번 이상 되풀이하여 댓글을 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번 답글에서 이후에는 이 주제와 똑같은 질문에는 답변하지 않겠다고 사전에 일러 주었다. 이런 사람은 내 능력으로는 교화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질문을 또 올려놓았다. 그래서 이제는 답글을 달지 않고 이렇게 장문의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 폭염에 잠도 못자고, 아까운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면서 쓸데없는 이런 글을 작성하고 있는 나도 한심스럽다.
앞에서 인용했듯이, ‘염불행자’는 “부처님께서는 자아(나) 혹은 영혼이 없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시며, 오직 연기의 법칙을 말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무슨 해괴망측(駭怪罔測)한 망발인가!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것도 아니고, 허무맹랑한 주장을 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자아 혹은 영혼이 없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니,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다.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명제가 곧 ‘자아가 없다’는 말이라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다. 부처님은 ‘무상 · 고 · 무아’, 즉 자아가 없다고 초기경전에서 수없이 되풀이해서 말씀하셨다. 초기경전에서 ‘무상 · 고 · 무아’라는 정형구가 약 500번 이상 반복되고 있다. 그런데 ‘염불행자’는 “부처님께서는 자아 혹은 영혼이 없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고 말한다. 이 사람은 ‘무아(無我)’, 즉 ‘자아가 없다’는 한글을 해독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사람에게 무아에 대해 논하고 있는 내가 미친놈이다.
붓다는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곧 연기를 본다.”라고 했다. 이때의 법은 사성제, 연기법, 존재의 세 가지 특성, 즉 무상?고?무아를 말한 것임은 말할 나위없다. 다시 말해서 모든 현상계는 덧없고[無常] 괴로운 것[苦]이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알게 되면, 고정 불변하는 자아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터득하게 된다. 위빳사나(vipassan?)를 단 하루만이라도 실행해 보면, ‘나(我)’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게 된다. 우리의 마음은 실체, 즉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에 불과하다. 이른바 『청정도론(淸淨道論)』에서 말하는 “괴로움은 존재하지만, 괴로워하는 자는 발견되지 않는다. 행위는 있지만, 행위자는 발견되지 않는다.”(Vism, p.513)라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찰나생(刹那生) 찰나멸(刹那滅)할 뿐이다. 따라서 그 어디에도 고정 불변하는 실체, 즉 자아(?tman)나 영혼(j?va, 命)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부처님이 설한 무아설의 핵심이다.
영혼(soul)에 해당되는 빨리어는 ‘지와(j?va)’이다. ‘지와’라는 단어가 빨리 니까야에서 사용된 적이 있는지 검색해 보라. 지와(영혼)가 있다고 언급된 문장이 있다면 나에게 가져오라. 니까야에서는 그런 용례를 찾아 볼 수가 없다. 다만 다른 외도들을 비판하면서 그런 영혼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처님은 누누이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한문으로 번역된 대승경전에도 영혼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대정신수대장경에서 ‘영혼’이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면, 중국에서 찬술된 가짜 경전, 즉 위경이나 중국에서 저술된 의례집 등에 영혼이라는 단어가 몇 번 나올 뿐이다. 불교에서는 영혼이라는 단어 자체를 사용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고 하는 실체가 있다고 믿고 싶어 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다. 그런 사람을 상견론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우빠니샤드(Upani?ad, 奧義書)』에서는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있다고 말한다. 이른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서 붓다 시대의 바라문교, 지금의 힌두교에서는 자아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고정 불변하는 자아가 있다고 믿는 사람은 붓다의 제자, 즉 불교도가 아니라, 힌두교의 신자, 즉 힌두교도인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글에 의하면 ‘염불행자’는 힌두교도임이 분명하다. ‘염불행자’는 ‘이 고뇌의 강을 건너’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는 ‘진흙속의연꽃’님의 글에 말도 되지 않는 궤변으로 태클을 거는 Dhamma라는 사람과 매우 유사하다. 아마 동일인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화제를 바꾸어 ‘염불행자’의 첫 번째 질문에 대해 살펴보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부처님께서 목련존자의 모친을 천도한 것은 무엇인가요.
이 질문 속에는 내가 ‘사십구재와 천도재는 원래 불교에는 없다’고 말한 것에 대한 반론으로 제기 한 것 같다. 나의 낚시에 딱 걸렸다. 우리 속담에 “반풍수 집안 망친다.”는 말이 있다. 서투른 재주를 함부로 부리다가 도리어 일을 망친다는 뜻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부처님이 목련존자의 어머니를 천도했다는 것은 후대 중국에서 지어낸 이야기이다. 목련존자의 어머니를 지옥에서 건져냈다는 전설이 언급되고 있는 문헌은 중국에서 만든 가짜 경전, 즉 위경(僞經)에서 처음으로 나온다. 목련존자의 어머니를 천도했다는 설화가 나오는 경전은 『불설우란분경(佛說盂蘭盆經, 이하 우란분경)』이다. 이 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舍衛國)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 계실 때에 대목건련(大目乾連)이 비로소 여섯 가지 신통[六通]을 얻고 나서 부모를 제도하여 젖 먹여 길러 준 은혜를 갚고자 하였다.
곧 도안(道眼)으로 세간을 관찰하니, 그 죽은 어머니는 아귀에 태어나 음식은 보지도 못하고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목건련이 슬피 울며 발우에 밥을 담아 어머니께 갖다 주니, 어머니는 발우와 밥을 보자 덥석 왼손으로 발우를 잡고 오른손으로 밥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밥이 입에 들어가기도 전에 갑자기 불덩이로 변하여 먹지 못했다. 이것을 보고 목건련이 슬프게 소리쳐 울며 부처님께 달려가 이러한 광경을 자세히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목건련의 말을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너의 어머니는 죄의 뿌리가 깊어서 네가 비록 효순(孝順)하여 이름이 천지를 진동할지라도 너 한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 천신(天神) · 지신(地神) · 사마외도(邪魔外道) · 도사(道士) · 사천왕신(四天王神) 들도 어찌하지 못하니, 반드시 시방의 여러 스님들의 위신력을 얻어야 해탈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제 너에게 구제하는 법을 말해 주어 온갖 어려운 이가 모두 근심과 괴로움을 여의고 죄업(罪業)을 소멸하게 하리라.
시방의 여러 스님들이 7월 15일에 자자(自恣)할 때에 7세(世)의 부모나 현재의 부모가 액난에 있게 될 이를 위하여 밥과 온갖 맛있는 것과 다섯 가지 과일과 물 긷는 그릇과 향유(香油)와 초와 평상과 와구(臥具)를 갖추고, 세상에서 제일 맛난 음식을 그릇에 담아 시방의 여러 대덕 스님들께 공양하여야 할 것이다.
이 날에는 모든 성현들이 산간에서 선정을 닦거나, 네 가지 도과(道果)를 얻거나, 혹은 나무 밑에 경행(經行)하거나, 여섯 가지 신통이 자재하여서 성문 · 연각을 교화하거나, 10지(地) 보살이 방편[權]으로 비구의 모습을 나타내어 대중 가운데 있으면서 모두 한결같은 마음으로 발우와 밥을 받는다.
그리하여 청정한 계와 성현들의 도가 구족하니, 그 덕이 끝이 없다. 누구라도 이 자자하는 승가에게 공양하는 이는 현재의 부모와 7세의 부모와 6종(種) 친속이 3도(途)의 괴로움을 벗어나서 곧 해탈할 것이며, 의식(衣食)이 저절로 이를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부모가 현존한 이는 백 년 동안 복락을 받을 것이며, 만일 이미 돌아가신 7세 부모는 천상에 태어나되 자재하게 화생하여 천화광(天華光)에 들어가 무량한 쾌락을 받을 것이다.”
그때 부처님께서 시방의 여러 스님들에게 말씀하셨다.
“모두 먼저 시주(施主) 집을 위하여 선정(禪定)에 들어 마음을 안정한 뒤에 공양을 받으라. 처음 그릇을 받았을 때에는 먼저 불탑 앞에 높고 여러 스님들이 축원을 마치면 자기 밥을 받으라.”
그때 목건련 비구와 이 모임의 대보살들이 모두 크게 환희하였으며, 목건련의 슬피 우는 소리도 없어졌으며, 목건련의 어머니는 이 날로부터 1겁 동안 마귀의 고통을 벗어났다.
그때 목건련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저를 낳아 준 어머니는 삼보(三寶)의 공덕의 힘과 여러 스님들의 위신력을 입은 때문이지만, 만일 미래 세상의 불제자들이 효순을 행하는 이도 또한 이 우란분(盂蘭盆)을 받들어서 현재의 부모와 7세의 부모를 구제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매우 기특한 물음이다. 내가 바로 말하려는 것을 네가 다시 묻는구나. 선남자야, 만일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優婆塞)ㆍ우바이(優婆夷)ㆍ국왕(國王)ㆍ태자(太子)ㆍ왕자(王子)ㆍ대신(大臣)ㆍ재상(宰相)ㆍ삼공(三公)ㆍ백관(百官)?만민(萬民)들이 효(孝)와 자애[慈]를 행하는 이는 모두 현재의 부모나 과거의 7세 부모를 위하여, 7월 15일 불환희일(佛歡喜日)1)인 승자자일(僧自恣日)2)에 온갖 맛있는 것을 우란분(盂蘭盆) 안에 담아 시방의 자자(自恣)하는 스님에게 베풀고 발원하되, ‘현재의 부모는 수명이 백 년이고 병이 없으며, 모든 고뇌와 근심이 없게 하고, 7세의 부모는 아귀(餓鬼)의 고통을 떠나서 사람과 하늘에 태어나서 복과 즐거움이 다함이 없게 해 주십시오’라고 해야 한다.”
부처님께서 선남자와 선여인에게 말씀하셨다.
“이는 불제자로서 효순을 닦는 이가 생각마다 항상 부모를 생각하고 공양하되 7세의 부모에 이르기까지 하라. 7월 15일은 항상 효순한 마음으로 낳아 주신 부모와 나아가 7세의 부모를 위하여 우란분을 만들어 부처님과 스님에게 이바지하여, 부모가 길러주고 사랑하여 준 은혜를 갚으라. 너희들 일체의 불자는 마땅히 이 법을 받들어 지녀야 한다.”
그때 목건련 비구와 4배(輩)3) 제자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환희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 동국역경원 간, 한글대장경에서 -
주(註) 1) 승가의 안거가 끝나는 7월 15일을 말한다. 2) 승가가 안거를 마치고 마지막 날에 서로 자기의 죄과를 참회하고 고백하며 서로 훈계하는 일을 행하는 날로서, 7월 15일을 말한다. 3) 출가와 재가의 남녀로서, 비구 · 비구니 · 우바새 · 우바이의 넷을 말한다.
위에 인용한 『우란분경(盂蘭盆經)』에 의하면, 목련존자의 부탁에 의해 부처님이 그의 어머니를 구제하기 위해 음력 7월 15일 자자일(自恣日)에 중승(衆僧)에게 공양을 올리면 7세의 부모가 아귀도현(餓鬼倒懸)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설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근본 취지는 목련존자의 어머니를 천도한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음력 7월 15일 자자일에 승려에게 공양을 올리면 그 공덕이 크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아무튼 이 경은 중국에서 만든 대표적인 가짜 경전이다. 중국에서 만든 위경(僞經) 가운데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과 『우란분경(盂蘭盆經)』은 불교와 유교도덕과의 조화를 꾀할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 진 것으로 예로부터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이를테면 중국 전통사상과의 조화(調和)와 우열(優劣)을 고려하여 중국에서 찬술된 것이다. (道端良秀, 『唐代佛敎史の硏究』, 佛敎孝經典의 流布 참조.)
일본의 불교학자 목전체량(牧田諦亮)은 그의 저서 『의경연구(疑經硏究)』에서 『우란분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란분경은 다른 번역(異譯)이 전해지고 있는데, 진경(眞經)으로 대장경에 편입되었으나 , 불설효자경(佛說孝子經)과 같은 문맥으로 판단할 때, 중국에서 찬술(撰述)된 의경(疑經)임이 거의 확실하다. 계속하여 죽은 뒤에 악처에 떨어진다는 발상의 경전의 내용으로 볼 때, 역으로 효를 권하는 입장으로 나아간 것이며, 부모은중경은 보다 적극적으로 부모의 은혜에 대해 탁태(托胎)에서부터 탄생 · 성장 · 성인의 사이에 부모의 고난이 얼마나 깊은 것인가를 사유하도록 하여 보은(報恩)을 강조한 것이다. (牧田諦亮, 『疑經硏究』, 京都: 京都大學人文科學硏究所, 1976), pp.49-50)
또한 그는 “우란분경, 부모은중경, 염라왕경(閻羅王經)은 일상의 생활윤리와 직결되어 있는 의경(疑經)인데, 중국인의 불교수용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법화경 · 유마경과 같은 진경과 비교했을 때, 이러한 경전은 민간 신앙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牧田諦亮, 『疑經硏究』, p.85.)고 했다.
이 『우란분경』은 대정신수대장경 제16권(p.779)에 수록되어 있다. 대정장(大正藏)에는 서진(西晉) 월씨삼장(月氏三藏)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후대에 누가 가탁한 것으로 보인다. 이 경은 총 792자로 된 매우 짧은 경전이다. 이처럼 짧은 경전임에도 불구하고 송본(宋本), 원본(元本), 명본(明本)은 물론 궁본(宮本, 舊 宋本) 사이에 글자가 서로 다른 것이 55군데나 나타난다. 계속해서 누군가가 고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경의 서두에 나오는 대목부터 가짜임이 드러난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舍衛國)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 계실 때에 대목건련(大目乾連)이 비로소 여섯 가지 신통[六通]을 얻고 나서 부모를 제도하여 젖 먹여 길러 준 은혜를 갚고자 하였다.
모든 경전은 육하원칙으로 되어 있다. 언제 누가 어디서 누구를 위해 왜 이 경을 설하게 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 경은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실 때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 누구를 위해 이 경을 설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없다. 느닷없이 대목건련 존자가 여섯 신통을 얻고 부모를 제도하여 은혜를 갚고자 했다고만 되어 있다. 이런 것으로 미루어보아도 이 경이 중국에서 만든 가짜 경전임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부분적으로 문제가 되는 대목들이 한둘이 아니다. 이를테면 맨 마지막에 “목건련 비구와 4배(輩) 제자”라는 대목이 나온다. 주지하다시피 불교교단의 구성원인 비구 · 비구니 · 우바새 · 우바이를 사부대중이라고 하지, ‘사배(四輩)’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한편 불후의 명저로 알려져 있는 『망월불교대사전(望月佛敎大辭典)』의 편찬자 모치즈키 신코(望月信亨)가 지은 『佛敎經典成立史論』(法藏館, 1977)의 부록에 수록된 ‘이경(異經)과 의위경(疑僞經)의 표’에 나타난 목련존자 및 사십구재와 천도재에 관련된 중국에서 찬술된 위경의 목록은 대략 다음과 같다.
No. 149 정토우란분경(淨土盂蘭盆經) No. 175 목련문경(目連問經) No. 180 지옥경(地獄經) No. 239 염라왕경(閻羅王經) No. 243 염라왕설면지옥경(閻羅王說免地獄經) No. 358 예수십왕생칠경(預修十王生七經) No. 370 지장보살경(地藏菩薩經) 등
다시 말하지만, 『우란분경』은 천도재를 권장한 경전이 아니다. 우란분재의 참뜻은 영가 천도를 지내는 것이 아니다. 우란분재의 참뜻은 승공(僧供)의 공덕을 강조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가 예전에 발표했던 글(<부처님마을> 제114호, 1997년 8월 18일)을 참조하기 바란다.
우란분재의 참뜻
한국불교에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명절은 다섯 가지가 있다. 이 가운데 네 가지는 부처님의 생애와 관련된 것이다. 이를테면 불탄일(음4월 8일), 성도일(음12월 8일), 출가일(음2월 8일), 열반일(음2월 15일)이다. 여기에 우란분절(음7월 15일)을 추가하여 5대 명절로 삼고 있다.
앞의 4대 명절은 부처님의 생애에 있어서 중요한 날을 기린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우란분절의 의미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더욱이 불교입문서에서 조차 우란분재의 본래 의미를 잘못 해석한 곳이 있다. 이처럼 우란분재의 본뜻이 왜곡된 가장 큰 원인은 ‘우란분(盂蘭盆)’이란 말이 인도 고전어인 산스크리트(梵語)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란분’의 원어는 범어 ‘울람바나(Ullambana)’이다. 이것을 중국에서 ‘우란분(盂蘭盆)’ 혹은 ‘오람바나(烏藍婆拏)’라고 소리나는 대로 번역하기도 하고, 구도현(救倒懸)이라고 뜻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구도현이란 ‘거꾸로 매달린 것을 구제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울람바나(Ullambana)’라는 단어는 범어사전에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울람바나는 형용사 람바나(lambana) 혹은 아와람바나(avalambana)가 변형된 말이기 때문이다. 울람바나(Ullambana)는 형용사 람바나에 다시 접두사 U(…위에)가 첨가된 단어다. ‘람바나’는 ‘아래쪽으로 매달린’ 혹은 ‘거꾸로 매달리게 하는 것’이란 뜻이며, ‘아와람바나’는 ‘매달린’, ‘기댄’의 뜻이다. 따라서 울람바나는 ‘거꾸로 매달린 것을 구제한다’는 의미의 구도현(救倒懸)으로 번역하였는데, 이것은 원어의 의미를 정확히 번역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우란분이란 단어가 갖고 있는 뜻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이 어의(語義)만으로는 우란분절의 참뜻을 알기 어렵다. 이제 우란분재의 본래 의미를 살펴보자.
『우란분경(盂蘭盆經)』에 의하면, 매년 승려들의 안거(安居)가 끝나는 음력 7월 15일에 여러 스님들에게 공양을 베풀면, 그 공덕으로 현재의 부모는 물론 과거 7대의 부모까지도 구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란분재는 부처님의 십대제자 가운데 신통제일이었던 목련(目連)존자가 비록 육신통(六神通)을 얻었지만 자신의 능력으로는 아귀도(餓鬼道)에 빠진 그의 어머니를 구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부처님께 자문을 구하였는데, 부처님께서는 목련존자에게 스님들의 안거가 끝나는 음력 7월 15일에 승재(僧齋, 승려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의식)를 베풀면 그 공덕으로 선망부모를 구제할 수 있다고 일러주었다. 목련존자는 부처님이 일러주신 대로 이 날 승려들에게 공양한 결과 그의 어머니를 구제할 수 있었다. 이것이 우란분재의 시초이다.
다시 말해서 우란분이란 생전에 지은 무거운 죄업으로 지옥에서 거꾸로 매달려 심한 고통을 받을지라도, 이 날 시방의 스님들을 청해 모시고 맛있는 음식으로써 공양을 올리면 그 공덕으로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우란분재의 본뜻인 ‘승재(僧齋)’ 혹은 ‘승공(僧供)’의 의미는 퇴색되고, 영가 천도의식(薦度儀式)이 주로 행해지고 있는데, 이러한 오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 같다.
운서(雲棲)스님이 지은 『정와집(正訛集)』에 의하면, “세상 사람들이 7월 15일에 귀신에게 음식을 올리는 것을 우란분대재(盂蘭盆大齋)의 모임이라고 생각하나 이는 와전(訛傳)된 것이며, 이 날 선조(先祖)의 혼령(魂靈)과 아귀에게 공양 올리는 것은 본래의 의미가 아니다. 우란분재란 목련존자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7월 15일이란 많은 승려들이 해재를 하여 마음대로 규약을 받지 않는 날이니 90일을 참선하여 득도(得道)한 사람이 많기 때문에 이 날에 공양을 하면 그 복이 백배나 된다는 것이며, 귀신에게 시식(施食)하는 것은 아니다. 시식이란 아란(阿難)에게서 비롯된 것이니 7월 15일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우란분재에 대한 또 다른 오해는 범어 울람바나(Ullambana)의 음역인 우란분(盂蘭盆)을 다시 한자로 풀이함으로써 빚어진 해프닝을 들 수 있다. 이를테면 우란분의 분(盆)을 그릇의 이름으로 이해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분(盆)은 bana의 음역이기 때문에 그릇과 전혀 관계가 없다. 이러한 잘못을 『현응음의(玄應音義)』 제13에서 이미 지적하고 있다.
한편 우란분절은 민족의 고유 풍습인 백종날과 혼동되었다. 백종일(白踵日, 음력 7월 15일)은 우리 민족의 축제일로 모든 농민이 일손을 놓고 한바탕 잔치를 벌이는 날이었다. 절기상으로 농한기(農閑期)인 이때 우리 조상들은 백 가지 과실과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풍류를 즐겼다. 현재 경남 밀양지방에 전승되고 있는 백중놀이가 그 대표적인 풍습이다. 이러한 민족 고유의 풍습이었던 민중의 축제, 즉 백종과 불교의 우란분재가 결합함으로써 백종(百種 · 白踵), 혹은 백중(百衆 · 白衆 · 百中) 등으로 불리어졌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 날을 효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명절로 부각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우란분재의 본뜻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와 같이 우란분재의 의미가 여러 가지로 변질될 경우, 불가 고유의 행사였던 안거(安居)와 자자(自恣), 그리고 승공(僧供)의 의미가 점차 퇴색되어 버리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한편 우리는 음력 7월 15일 이 날을 백종 혹은 백중으로 부르기보다는 원어에서 유래한 우란분절 혹은 우란분재로 부르는 것이 바람직하고, 우란분절보다는 우란분재로 부르는 것이 보다 불교적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란분절은 단순히 절기[날짜]에 초점을 맞춘 것인데 반해 우란분재라는 말은 본래의 의미인 승재(僧齋) 및 재계(齋戒)의 뜻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2012. 7. 30. 마성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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