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남지 둑길을 걸어
하지로부터 닷새가 지난 유월 하순 수요일이다. 지난 주말 비를 내렸던 장마전선은 제주 바깥으로 물러가 소강상태다. 새벽 다섯 시 날이 밝아오는 베란다 창밖으로 비친 내정병봉엔 아침놀이 붉게 끼었다 금세 사라졌다. 놀이 낀 아침은 날은 저물기 전에 비가 온다는 속담이 전하는데 기압이 낮은 상태임을 의미하기도 했다. 순간 포착 아침놀 사진은 시조 글감으로 삼을 요량이다.
아침밥을 일찍 해결하고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자연학교 등굣길에 올랐다. 창원역 앞을 지나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소답동에서 내려 1번 마을버스를 탔다. 아침 6시 첫차로 근교 강가 들녘으로 향하는 마을버스에는 비닐하우스 일을 나가는 몇몇 부녀들이 타고 왔다. 내가 합류한 이후 도계동 만남의 광장에서 탄 승객은 서서 가야 해 먼저 자리를 차지해 앉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용강고개를 넘어간 용잠삼거리에서 두세 승객을 태워 주남삼거리를 지날 때 내렸다. 가월마을 앞 동판저수지 수면을 가득 덮은 연잎 사이로 피어난 연꽃을 사진에 담았다. 가월마을에서 주남저수지 들머리 둑길을 따라 걸으니 물억새가 어른 키보다 높이 자라 무성했다. 땅내를 맡아가는 벼들이 자라는 들녘을 지난 가술과 진영에는 엷게 낀 안개 사이로 아파트단지가 아스라이 보였다.
탐조 전망대가 있는 둑길을 따라 걷다가 둑 아래 연지로 내려가 커다란 카메라를 들이대고 피사체를 겨눈 전문 작가들을 만났다. 연꽃 단지 데크 산책로도 무거운 카메라를 장착해 뭔가를 찍으려고 했다. 그들은 연꽃 개화를 고속 촬영 기법으로 찍는 건지, 여름 철새 움직임을 찍는 건지 분간되질 않았다. 길섶 심어둔 해바라기는 꽃을 피웠는데 무게감을 이기지 못해 고개를 숙였다.
다시 둑으로 올라와 저수지 수면을 살피니 아까 동판저수지처럼 피어난 연꽃이 가득 펼쳐졌다. 넓디넓은 수면에는 연잎 말고 마름을 비롯한 다른 수초들도 빼곡했는데 여름 철새 왜가리와 중대백로 녀석이 간간이 보였다. 둑길을 걸으며 지기들에게 안부로 아침 안부로 전하는 시조는 일전에 준비해둔 ‘능소화’를 보냈다. 싱싱한 능소화가 송이째 떨어짐은 한겨울 핀 동백꽃과 같았다.
인적이 드문 둑길 맞은편에서 메모지와 카메라를 든 두 여성이 다가와 인사를 나누었다. 산책을 나온 이는 아닐 듯해 아침 이른 시각 무슨 용무인지 여쭤봤다. 환경단체 소속으로 한 달 한 차례 주남저수지 생태 환경을 모니터링하는 임무를 수행 중이라 했다. 지역민과 대립각을 세워 척을 진 환경단체 지킴이들이다. 그들은 그들대로 탐방로를 따라가며 뭔가 하는 일이 있는 듯했다.
주천강이 시작되는 배수문을 지난 쉼터에 앉아 얼음 생수와 함께 가루 죽염을 먹었다. 앞으로도 1시간 더 걸어야 할 들녘 들길이 남았더랬다. 쉼터에서 주남저수지 탐방로를 따라오면서 남긴 사진들을 몇몇 지기들에게 보냈다. 잠을 깨 카톡을 열며 하루를 시작하는 지기들이 오늘은 내가 어디로 행차했는지 동선이 알려졌다. 한 지인은 벌써 주남지까지 나감을 놀라워한 회신이 왔다.
쉼터에서 둑을 따라 걷다가 들녘으로 내려섰다. 수로 곁 농로를 걸으니 사방은 벼가 자라는 들판으로 에워싸 펼쳐졌다. 신등초등학교에서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로 뻗은 백양마을을 지났다. 들녘 한복판 높이 자란 굴참나무가 당산나무로 버틴 신동에서 장등을 지나자 가술이 나왔다. 아까 버스에서 내려 2시간 반을 걸어 닿은 가술 거리에서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도서관을 찾았다.
어제 서가에서 뽑아 못다 읽고 수레에 두었던 책을 들고 열람석에 앉았다. 문학과 심리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가 쓴 책에 이어 꽤 알려진 중년 강연가의 책을 펼쳤다. 대중성 있는 연사를 강연장이나 편집된 영상이 아닌 서책으로 만났다. 연단 위에서 숱한 사람을 웃기고 울린 그도, 청중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조명 끄진 객석 텅 빈 의자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평범한 한 사내였다. 24.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