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4년 8월 25일에 영국군 선발대가 캐피톨 힐(Capitol Hill)로 진격했으나 도시를 장악하기에는 병력이 너무 적었으므로 로버트 로스(Robert Ross)는 가능한 많은 파괴 행위를 저지르려고 했다. 그는 휴전을 상징하는 깃발을 든 소규모 부대를 보냈으나, 메릴랜드 에비뉴와 컨스티튜션 에비뉴 구석에 있던 파르티잔들의 공격을 받았다. 이것이 병사들이 받은 유일한 저항이었다. 습격을 받은 병사들은 분노하여 그 집을 불태웠고 워싱턴 하늘에 유니언 잭이 흩날리게 되었다.
불타는 워싱턴을 배경으로 그려진 조지 콕번(Geogre Cockburn) 제독의 초상화
건설 중이던 상원과 하원 건물은 얼마 못가 불길에 휩싸였다. 비록 두꺼운 벽과 엄청난 폭우로 외관은 무사했지만 의회 도서관을 포함한 내부 시설들이 모두 파괴되었다. (토마스 제퍼슨은 의회 도서관을 다시 재건하기 위해 자신의 도서관을 정부에 팔아야만 했으며 189년이 지난 2003년 7월 17일에 영국 수상인 토니 블레어는 미국 의회 도서관 방화에 대해 사과했다.) 다음날 콕번 제독(Admiral Cockburn) 은 워싱턴 DC의 신문사인 내셔널 인텔리겐서 (National Intelligencer) 건물 안으로 들어가가 불을 놓으려 했으나 신문사에 불이 나면 자신들의 집에 옮겨 붙을까봐 두려워한 이웃집 여인들의 만류로 방화를 하지 않았다 . 이 신문사는 콕번에 대해서 수많은 부정적인 내용의 기사를 써댔고 그를 '깡패' 로 묘사했기 때문에 제독은 신문사를 박살내고 싶었다. 방화를 하는 대신에 그는 부대에게 건물을 벽돌 하나까지도 부숴버리도록 명령했고 "C"가 포함된 인쇄판을 모조리 파괴하도록 하여 더 이상 신문에 자신의 이름이 오르지 못하도록 했다.
4대 대통령 제임스 메디슨(James Madison)
영부인 돌리 메디슨(Dolley Madison)
백악관에 보관된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
그 다음 부대는 대통령의 숙소가 있는 북쪽의 펜실베니아 에비뉴 쪽으로 향했다. 영부인 돌리 메디슨 (Dolley Madison)은 수많은 정부 관료들이 피신하고 그녀의 경호원 조차 이미 도망간 상태에서 귀중품과 문서 및 중요한 물품등을 챙겼으면 특히 길버트 스튜어트가 그린 조지 워싱턴의 전신 초상화를 가져갔다. 그녀는 영국 병사들이 백안관 내부로 들어오기 직전에야 그곳을 떠났다. 건물 내로 들어온 병사들은 연회장에 40인분의 식사가 차려진 걸 보았다. 음식을 모두 먹어치운 병사들은 전리품을 챙긴 후 건물내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타오르는 불에 연료를 퍼부어서 그날 밤의 화재는 다음 날까지도 계속되었고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불길은 멀리 떨어진 볼티모어와 파투켄트 강에서도 보일 정도였다.
1804년경의 미국 재무부
윌리엄 손튼(William Thornton)
또한 영국군은 미합중국 재무부 건물과 다른 공공 기관들을 불태웠다. 토마스 제퍼슨이 설립했으며 미합중국 최초의 연방 시설이기도 했던 역사적인 워싱턴 해군 공창(工廠)은 비축품과 탄약이 적의 수중에 넘어가는 걸 막기위해 미국인들이 스스로 불태웠으면 건조 중이던 44문의 프리깃함 콜롬비아도 마찬가지 이유로 불살러졌다. 미합중국 특허청 건물은 윌리엄 손튼(William Thornton) - 워싱턴 D.C를 설계하고 특허권을 관리하던 - 의 설득끝에 영국군은 이 건물을 그냥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점령 기간 동안 토네이도가 포함된 허리케인이 휩쓸고 지나가서 침략자와 도시 모두에 피해를 입혔으나 재빨리 난동을 멈추게 하고 화재를 꺼주는 역할도 했다. 영국군의 워싱턴 점령은 26시간 정도 이어졌고 얼마 후 영국 군대는 다음 목표물인 볼티모어를 향해 급파되었다. 메디슨 대통령과 나머지 정부 관료들은 도시로 되돌아왔으나 이러한 혼돈속에서 전쟁 지휘를 효과적으로 할 수 없었다.
비록 연기에 의해 흠이 나고 그을린 자국은 있지만 두꺼운 사암으로 만든 백악관의 벽은 무사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서는 "백악관(White House)"이라는 오늘날의 이름이 저택을 다시 지으면서 연기로 인한 손상을 감추기 위해 흰색 도료를 칠한 데서 비롯?榮募? 전설도 있지만, 백악관이라는 명칭은 전쟁 이전부터 사용?瑛만? 대통령이 거주하기 전인 1798년에도 처음부터 흰색으로 칠해졌다. 워싱턴 D.C의 복원은 1815년까지도 시작하지 못했고, 1830년이 되서야 복구가 마무리된다.
영국이 미합중국을 보복 침공하면서 정했던 4가지 공격 목표 - 챔플레인 호수(Lake Champlain), 뉴 올리안스(New Orleans), 볼티모어(Baltimore), 워싱턴 D.C - 중에서 워싱턴에 대한 공격만이 성공을 거두었다 .비록 영국이 전쟁 도중 적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려 워싱턴을 성공적으로 공격하고 미국이 캐나다를 더 이상 침공 해들어가는 걸 저지하기는 했지만, 미국의 야전 사령관들은 남은 전쟁 기간 내내 영국군의 모든 공격을 대부분 격퇴했다. 게다가 워싱턴 D.C에 대한 공세는 콕번이 의도했던대로 적의 사기를 꺽지 못했다. 오히려 워싱턴 방화 이후 수천명의 지원자들이 볼티모어를 방어하기 위해 지원하고 나섰다.
정확한 내용까진 아닙니다만... 독립 후에도 여전히 미국을 식민지 취급하며 깔보고 심심하면 지나가는 미국 선박 붙잡아서 영국 해군으로 징발해가니(해군에 대한 처우가 좋지 않아 이런 식으로 병력을 보충했다더군여) 불끈한 양키분들께서 캐나다를 냉큼하기 위해 발발한 전쟁이라고 기억되네여 맞겠져??^^;;
첫댓글 임마누엘 칸트가 이야기한 영구평화론의 전제-민주주의 국가끼리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에 대한 유일한 예외로 언급되는 전쟁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근데 영미 전쟁의 원인에 대해 좀 알려주셨으면 합니다만...
정확한 내용까진 아닙니다만... 독립 후에도 여전히 미국을 식민지 취급하며 깔보고 심심하면 지나가는 미국 선박 붙잡아서 영국 해군으로 징발해가니(해군에 대한 처우가 좋지 않아 이런 식으로 병력을 보충했다더군여) 불끈한 양키분들께서 캐나다를 냉큼하기 위해 발발한 전쟁이라고 기억되네여 맞겠져??^^;;
왕마귀님 제목이 맘에들어유~ -ㅂ-)乃
영부인 메리는 국부의 초상화가 영국군의 손에 유린되는것을 막고자 홀로남아 초상화를 들고 탈출했다는...우리나라의 정치인들중에 저런 정신을 가진사람들은 몇이나될까싶습니다
저거야 독립초기라서 그렇겠지요 우리나라도 독립전이나 직후에는 저럴분 많았을 겁니다 그리고 625때 애국지사가 많이 돌아가신 대다가 광복후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독립운동가보다는 친일파의 자손들이 다 차지해서 지금 이모양인 걸지도 모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