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 깨어 준비하며 주님을 기다리는 삶
2023.11.2.목요일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지혜4,7-15 로마6,3-9 마태25,1-13
천주교 대구대교구청의 묘지 양쪽 입구에는 ‘오늘은 나, 내일은 너(Hodie mihi Cras tibi)’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오늘은 내가 죽지만, 내일은 네가 죽는다’라는 뜻으로 메멘토 모리(Men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와 비슷한 말입니다. 특히 위령의 날 오늘 마음에 담고 지내시기 바랍니다.
어제 11월 위령성월의 첫날은 모든 성인 대축일이었습니다. 하느님의 희망과 위로를 반영하는 성인들이기에 위령성월은 “희망과 위로 성월”로 또 “성인성월”로 불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전례력으로 대림시기를 앞둔 마지막 시기 11월은 성인성월로 생각해 모두가 성인들을 기리며 성인들처럼 한 번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어제 교황님은 수요일 베드로 광장에서 삼종기도후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 짧은 강론에서 “우리는 더불어의 여정에 선물인 거룩함으로 불리었다.” 말씀하시며 새삼 우리의 삶은 성화의 여정임을 강조하셨습니다. “거룩함은 ‘행복한 삶’을 위해 모두에게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믿는 이들의 삶은 날로 행복해지는, 노화의 여정이 아닌 성화의 여정이요, 저물어가는 여정이 아니라 여물어가는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교황님은 또 11월 위령성월의 기도지향으로 교황인 자신을 위해 기도해줄 것을 청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는 나에게 힘을 주고 내가 성령께 경청하며 교회와 동행할 때 분별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말씀하셨습니다. 이어 “교황이 된다는 것은 ‘하나의 과정(a process)’으로, 그는 목자가 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가게 된다. 이런 과정중에 그는 더욱 사랑이 많아지고, 더욱 자비로워지고, 그리고 무엇보다, 매우 인내하시는 하느님 우리 아버지처럼, 더욱 인내하게 되는 것을 배우게 된다.” 말씀하셨습니다. 배움의 여정중에 끝없이 인내하며 끊임없이 내적으로 성장해야 할 우리의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은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며 기도하는 위령의 날이자 우리의 삶을 깊이 성찰해보는 날이기도 합니다. 삶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물음은 어떻게 살 것인가? 물음으로 직결됩니다. 매일 생미사와 더불어 연미사를 봉헌하며 죽음은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묻게 됩니다.
죽음이 있어 삶은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죽음이 없이 끊임없이 연장되는 삶이라면 도저히 삶이 선물임을 모를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수십년전 소스라친 깨달음이었고 지금도 그 체험은 생생합니다. 응접실안 은은한 향기를 발하던 동양란이 향기를 그쳤고 잘 들여다 봤더니 꽃이 떨어 진것입니다. 저는 난향기는 늘 당연한 듯이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알아봤더니 1년 지나야 다시 핀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소스라치게 깨달은 것이 “삶은 선물이다.”라는 자각입니다.
꽃이 지자 꽃향기가 선물임을 깨달았듯이 죽음이 있어 비로소 삶이 귀한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아파봐야 건강이 선물이었음을 깨닫는 이치와 똑같습니다. 이런 자각이 하루하루 찬미와 감사와 기쁨으로 선물인생을 살게 하고. 이렇게 살 때 찬미와 감사로 선종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물같은 삶에 선물같은 선종의 아름다운 죽음일 것입니다.
곱게 물들어가는 단풍처럼 곱게 사랑으로 물들어가다 단풍지듯 홀가분한 떠남의 죽음일 것입니다. 봄꽃도 아름답지만 가을 단풍의 격조는 더 뛰어나고, 일출의 찬란도 좋지만 일몰의 장엄함은 더욱 감동적이듯 이런 죽음도 가능할 것입니다. 아주 예전 25년전 써놨던 두편의 시가 생각납니다. 세상 떠나기 몇 년전 노년의 마인라도 수사님이 가을마당 낙엽을 쓰는 모습을 그린 “노수사老修士님”이란 시입니다.
“깊어가는 가을
낙엽쓰는 노수사님
묵묵히 삶의 뒤안 길에서
낙엽과 함께 집착의 쓰레기들 말끔히
쓸어내는 노수사님
그대로 무념無念, 무욕無慾, 무심無心의 가을이었다, 자연이었다”-1998.11.9.
이어 다음날은 “죽음”이란 시를 썼습니다.
“땅위를 덮고 있는
고운 단풍잎들
두려워하지 말라
죽음은 귀환歸還이다, 해후邂逅다, 화해和解다, 구원救援이다.
‘수고하였다. 내 안에서 편히 쉬어라.’
들려오는 자비로운 하느님 아버지의 음성이다”-1998.11.10.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물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절박한 물음으로 직결됩니다. 삶은 양이 아니라 질입니다. 오래 많이 사는게 아니라 하루하루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제1독서의 지혜서의 가르침이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영예로운 나이는 장수로 결정되지 않고,
살아온 햇수로 셈해지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예지가 백발이고,
티없는 삶이 곧 원숙한 노년이다.
짧은 생애 동안 완성에 다다른 그는 오랜 세월을 채운 셈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께 선택되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거룩한 이들을 돌보신다.”
이런 깨달음이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본질적 깊이의 찬미와 감사의 지혜로운 삶을 살게 합니다. 모든 것이 은총이며 감사임을 깨달아 깨어 준비하며 주님을 기다리며 살게 합니다.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이미 주님과 일치된 존재들이기에 늘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께서 이렇게 깨어 준비하며 살도록 우리를 도우십니다. 제2독서 로마서에서 바오로 사도의 고백은 바로 우리의 고백이 됩니다.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죽음은 더 이상 우리 위에 군림하지 못합니다.”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의 일치의 삶을 살게 되었으니 용기백배 힘이 납니다. 세례성사에 평생 계속되는 성체성사,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깨어 준비하며 주님을 기다리는 종말론적 삶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는 유비무환, 오늘 복음의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전혀 준비되지 않았던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 신랑이 도착했을 때 얼마나 놀랍고 당황스러웠을까요? 전혀 죽음이 준비되지 않았는데 죽음을 맞이한다면 역시 후회되는 일이 한둘이 아닐 것입니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자.”
성녀 젤투르다의 임종어이기도 합니다. 준비하며 기다렸다 신랑을 맞이했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잘 준비했다 죽음을 통해 주님을 맞이한 젤투르다 성녀였습니다. 준비하고 있던 슬기로운 처녀들은 구원의 혼인잔치에 입장했고, 뒤늦게 등잔을 준비하며 돌아 온 다섯의 어리석은 처녀들 앞에 문은 닫혔고 주님의 냉엄한 말씀이 마음을 얼어붇게 합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 후회해도 너무 늦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이 또한 우리에게는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나를 아시는가?’ 에 앞서 ‘나는 주님을 얼마나 아는가?’ 끊임없이 자문하시시 바랍니다. 주님을 사랑할수록 앎도 깊어집니다. 회개하여 즉시 영혼의 기름 등잔에 신망애의 기름을 가득 채우라는 말씀이요, 늘 유비무환의 준비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깨어 준비하며 기다렸다가 주님을 맞이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복음의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늘 깨어 준비하며 기다리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25,13). 아멘.
- 이수철 신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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