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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부인의 성공반전, 척씨부인의 처참한 운명
초이스경제 장경순기자
2014.01.15
박씨 부인의 무난한 성품, 훗날 성공 드라마 만드는 비결 역할
박씨와 척씨부인.
한 사람은 남편의 사랑을 못 받다가 아들이 귀하게 돼서
자신도 지극히 고귀한 신분으로 상승한 성공반전의 주인공이다.
또 한 사람은 젊어서 남편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지만
중국 역사상 가장 처참한 질투의 희생자가 됐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직접 시앗싸움을 벌인 건 아니다.
이 두 여인의 인생은 또 하나의 여인 여치를 중심으로 희비가 엇갈렸다.
여치와 박씨, 척씨 부인은 모두 한고조 유방의 아내다.
여치는 한고조의 정궁(正宮) 여태후다.
박씨 부인은 유방 생전에는 별로 총애받지 못한 후궁이지만,
훗날 그녀의 아들 유항이 3대 황제가 되면서 태후의 지위에 올랐다.
척씨 부인은 유방이 생전에 가장 사랑했지만
이로 인해 유방 사후 태후가 된 여치로부터 끔찍한 보복을 당했다.
유방은 한-초 5년 전쟁의 초기 56만 대군을 이끌고
항우의 도읍인 팽성을 일시 점령한 적이 있다.
개전하자마자 전쟁을 끝내는 듯 했지만 항우의 최정예 3만대군의 급습을 받고
필마단기로 간신히 포위를 뚫고 달아나 패망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그만 그의 정부인 여치와 아버지인 태공이 항우의 인질이 되고 말았다.
태공과 여치가 인질에서 풀려난 건 초한 대전의 끝 무렵인 광무산 대전 때이니
거의 3~4년을 붙잡혀 있었던 것이다.
척씨 부인이 유방의 후궁이 된 시기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팽성에서 패해 간신히 탈출하던 무렵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여치에게는 생애 최대 고난이 시작되려는 시기에 척씨는 인생의 황금기가 열렸던 것이다.
인질이 된 여치를 좌절시킬 참담한 소식은 또 하나 있었다.
항우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가던 유방이 수레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어린 아들과 딸을 수레 밖으로 집어던졌다는 것이다.
이때 내던져진 아들 유영과 노원공주는 모두 여치의 소생이다.
마누라는 적국에 인질로 내주고 그 소생인 남매를 저 살겠다고 내던졌다니
아마 이 때부터 여치의 마음 속에는 남편 유방과 자신의 인생은
갈라선 것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다행히 유방을 호종하던 하후영이 필사적으로 어린 두 남매를 구출했다.
유방과 고향에서 절친한 친구였던 하후영은 제 자식 집어던지는 유방에게
“하늘이 무섭지도 않느냐”며 군신지간에 한바탕 몸싸움까지 벌였던 모양이다.
이때 구출한 유영이 2대 효혜황제가 됐으니
이로 인해 하후영은 대대로 충성의 상징으로 추앙받았다.
(그런 사람의 후손이 삼국지 조조, 하후돈, 하후연이라는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러고 본부로 돌아간 유방은 척씨 부인으로부터 여의를 얻었고
여의가 성장할수록 이들 모자에 대한 사랑이 깊어져
태자 유영을 여의로 갈아치려는 시도까지 하게 됐다.
그러나 장량, 주창, 그리고 여치 여동생의 남편인 번쾌 등
공신들의 완강한 반대로 뜻을 접게 되자
이제는 오히려 척씨 모자의 안위를 걱정하는 처지가 됐다.
유방은 자신이 죽기 전, 여의를 북쪽의 조나라 왕으로 보냈다.
또 강직함의 상징인 주창이 여의를 보필토록 했다.
주창은 강직한 성격으로 태자 반대를 제일 앞서 반대한 사람이지만,
유방 사후에는 오히려 사력을 다해 여태후가 여의를 헤치지 못하도록 반대했다.
그의 형 주가 또한 초한대전 도중
항우에게 투항하라는 권유를 거부해 처형당했을 정도로
형제 모두 강직한 인물로 알려졌다.
유방이 죽고 여치의 아들 유영(효혜황제)이 뒤를 잇자
여태후(여치)는 먼저 주창을 장안으로 소환해 여의와 떼어낸 후 곧이어 여의도 불러들였다.
무모할 정도로 인자한 성품인 효혜황제가 모후의 뜻을 알아채고
하루 종일 이복동생 여의와 붙어있을 정도로 극력 보호했지만
여치는 마침내 빈틈을 찾아내 여의를 독살했다.
여의의 모친 척씨 부인에게는 눈 코 귀를 도려내 측간에 던져
사람돼지라는 끔찍한 보복을 저질렀다.
패전 길의 내던진 자식, 3년의 인질 생활, 끝없는 태자 교체 시도
이런 모든 악업의 결말은 중국사 최대의 씨앗 참극이었다.
박씨 부인은 초한 대결시기에 위나라왕 위표의 여인이었다.
유방은 위표를 토벌한 후 미모를 보고 후궁에 들였지만
1년동안 잠자리를 하지 않을 정도로 무관심했다.
어느날 박씨가 불쌍하고 착하다는 느낌이 들어 가까이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박씨도 유방의 아들을 낳았지만, 그 이상 특별한 총애를 받지 못했다.
바로 이점이 박씨가 여태후의 무시무시한 증오를 사지 않은 반전의 기반이 됐다.
척씨 부인은 아들이 조왕이 됐어도 장안에 붙잡혀 있었지만
박씨는 아들 유항을 따라 임지인 대나라로 가서 살 수 있었다.
그녀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는 여태후가 이를 묵인했던 것이다.
유방 사후 15년 동안 태후 통치를 하던 여치가 죽자
진평을 비롯한 공신들은 여씨 잔당들을 소탕하고 후계 황제를 물색했다.
박씨 소생인 대나라왕 유항의 인품이 무난하고
박씨 일가도 여씨들과는 전혀 다르다는 데 동의한 공신들은 유항을 3대 황제(효문황제)로 옹립했다.
한번 장안을 떠났던 박씨는 이제 세상 최고의 고귀한 신분인 태후가 돼서 장안으로 돌아왔다.
전한 후한 400년 역사의 모든 황제와 삼국지 주인공 유비는 박씨 부인의 후손이 된다.
(유비 스스로 밝히기를 효경황제로부터 갈라져 나왔다고 하는데,
효경황제는 효문황제 유항의 아들이다.)
박씨 부인의 무난한 성품은 특히 서릿발같이 혹독한 여태후의 시대 속에서 더욱 뚜렷하게 대비됐다.
만년에 이르러 엄청난 성공 스토리를 쓰게 된 기반이기도 하다.
출처 : 초이스경제(http://www.choicenews.co.kr)
사생녀 박희(薄姬)의 일보등천(一步登天)
유방의 후궁 박희(薄姬)는 사생아가 아니라 사생녀다.
박태후(薄太后)의 부친은 오(吳)나라 사람으로 성은 박씨(薄氏)다.
진(秦)나라 때 그는 위(魏)나라 왕가의 종녀인 위온(魏媼)과 간통하여 박희(薄姬)를 낳았다.
박희의 부친은 산음(山陰)에서 죽었는데, 그로 인해 산음에 매장되었다.
제후들이 진(秦)나라에 반기를 들자 위표(魏豹)가 자립해서 위왕(魏王)이 되었다.
이 때 위온은 그녀의 딸을 궁에 들여보냈다.
그 전에 위온의 부탁으로 박희의 관상을 본 허부(許負)는 그녀가 천자를 낳는다고 예언했다.
이때 항우(項羽)는 마침 한왕(漢王) 유방(劉邦)과 형양(滎陽)에서 대치하고 있었으므로
천하는 아직 형세가 정해지기 전이었다.
그 전에 한(漢)나라와 연합하여 초(楚)나라를 공격했었던 위표는
허부의 말을 듣고는 마음속으로 매우 기뻐했다.
이에 위표는 한왕을 배반하고 중립을 지켰으며 나아가 초나라와 강화한 후에 연합했다.
이에 한나라는 한신에게 명을 내려 위나라를 공격하여 위표를 사로잡은 후에
위나라를 멸하고 그 땅을 한나라의 군으로 삼았다.
이윽고 포로로 잡혀와 한왕의 부하가 된 위표가 죽자
박희는 군복을 짜는 직실(織室)로 보내져 노역에 종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직녀들이 일하는 곳을 방문한 고조가 미색이 매우 뛰어난 박희를 보고
조칙을 내려 자기의 후궁으로 삼았으나 일 년이 넘도록 찾지는 않았다.
박희가 젊었을 때에 유방의 다른 후궁인 관부인(管夫人), 조자아(趙子兒) 등과 친하게 지냈다.
그때 세 사람은 약속했다.
“ 누가 먼저 부귀하게 되든지 간에 서로를 잊지 말자! ”
그리고 얼마 후에 관부인과 조자아가 먼저 한왕의 총애를 받았다.
어느 날 하남궁(河南宮)의 성고대(成皐臺)에서 한왕을 모시던 두 미인이
서로 박희와 옛날 했던 약속을 조롱하며 웃었다. 한왕이 듣고 그 까닭을 물었다.
두 미인은 세 사람이 어렸을 때 한 약속을 고했다.
한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박희를 매우 불쌍히 여겨 그 날로 그녀를 불러 잠자리를 같이 했다.
박희가 한왕에게 말했다.
“어제 밤 저는 푸른 용이 저의 배 위에 누워있는 꿈을 꾸었습니다.”
한왕이 말했다.
“그 꿈은 네가 매우 귀하게 될 징조이다. 내가 너를 도와 그 일을 이루도록 하겠다.”
이윽고 유방과 동침한 박희는 회임한 후에 기한이 차자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가 바로 뒤에 대왕(代王)이 되었다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한문제 유항(劉恒)이다.
그러나 잠자리를 한 후로는 박희는 고조를 자주 만날 수 없었다.
유방이 죽자 정권을 잡은 여치가 유방의 총애를 받았던
척부인,(戚夫人)、관부인(管夫人)、조자아(趙子兒) 등의 비빈들을 연달아 죽였지만
박희만은 고조의 총애를 받지 않았음으로 여치의 마수에서 벗어나
대왕에 봉해진 유항을 따라 대국에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여치가 죽자 군신들은 란을 일으킨 여씨들을 주살하고
대왕 유항을 영접하여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한문제다.
사생녀 출신 박희(薄姬)는 고조의 후비가 되었다가 태후가 되었으니
두 여인으로 인해 일보등천(一步登天)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박씨는 황태후가 된 이후에도 여씨처럼 함부로 권력을 휘두르지 않았고,
평화를 중시하며 현명하게 처신해 주위의 존경을 받았다.
일례로 기원전 176년 지방으로 부임하게 된 주발에게 모반의 조짐이 있다는 말이 전해지자,
문제는 주발을 압송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를 들은 박태후는 곧장 아들인 문제를 불러서는 두건을 집어던지며
"주발 장군은 여씨를 타도할 때에 황제의 새수를 보관하고,
북군을 통솔했음에도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는데,
어찌 작은 현에 있는 지금에서야 모반을 일으키겠는가?"라고 질타하였고,
결국 주발은 옥에서 나와 복직될 수 있었다.
여후의 경우 자신이 나서서 공신들을 잡아 족치며
토사구팽을 해댔던 것과 비교되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외척 세력에 관해서도
여후는 자신의 일족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나라를 통째로 삼키려고 했지만,
박씨는 동생인 박소가 칙사를 살해하는 일을 저지르자 그를 자결시키기도 하는 등,
자신의 일족인 외척의 준동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아
아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정치적 감각도 보여주었다.
여러모로 여후의 안티테제격인 포지션.
이런 언행 덕분인지 박씨가 죽고 시간이 흘러 후한이 건국된 뒤,
광무제는 여씨에게서 고황후의 지위를 박탈하고 박태후를 그 자리로 추존하였다.
하지만 고제의 장릉(長陵)에는 합장되지 못했다.
척희와 반대로 현명한 여자라는 것이 부각되었다.
유방이 부상을 입었을 때 척희가 갖은 실책을 저지르는 동안
박희는 묵묵하게 유방의 치료와 간호에 힘을 썼다.
실제 역사에서 척부인은 결국 정치적인 감각과 처세술 부족에 의한 그릇된 처신으로
여후의 원한을 사 아들을 포함해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지만
박희는 여후의 숙청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황태후가 되고
외척들을 등용하기는 커녕 제지를 하며 관리를 했으며
사후에도 그녀의 후손들이 황제가 되어
후한 대에는 고황후로 추촌된 것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박희 (훗날 효문태후)
위나라 왕 위표의 후궁으로 위표가 한신에게 패하여 포로가 되면서
한의 직조실(옷감 짜는곳)에 들어가 일했다.
어느날 직조실에 들어간 유방이 박희를 보고 후궁으로 들였지만
해가 지나도록 관계를 맺지 않았다.
훗날 한번 잠자리를 함께 해 유항을 낳았으나 이후 남편 유방을 거의 보지 못 했다고 한다.
유방이 죽자 여태후는 유방의 총애를 받은 후궁들을 다 유폐하고 나오지 못하게 했으나
박희는 유방의 총애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유폐하지 않고
대나라 왕으로 있던 박희의 아들 유항에게 보내 대나라의 왕태후로 삼았다.
기원전 180년, 여씨 일족이 주발등의 쿠데타로 몰락하자
아들 유항이 한나라 5대 황제로 옹립되 황태후가 되어 장안으로 돌아간다.
황태후가 된 이후에도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아 주위에 존경을 받았고
아들 유항(한문제) 재위중 세금 대폭 감면,직접 농업을 장려했으며
화려한 건물을 신축하지 않는 등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며
가혹한 형벌 폐지, 흉노와 화친을 해 민생 안정을 이루었고
한문제 유항의 아들 한경제도 선왕의 정책을 잘 이어 나가
문제와 경제의 치세를 '문경의 치'라 부르며
풍요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말로 사용했다
그리고 경제의 아들로 7대 한무제는 영토,국력에서 전성기를 맞는데
동쪽으로 왕검성을 함락하고 고조선을 멸망시킨 사람이 바로 이 한무제다.
첫댓글
드라마를 보면서 가끔 이해가 안될 때가 있었는데
해설문을 읽으니 드라마를 더욱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네요
감사합니다
네 저도 박희의 행동이 참 차분해서
한번 검색을 해 보았습니다
대단한 여인입니다
한왕조 400년의 황제들이
모두 박희의 후손들이라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