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신> 시의 길 / 임보 (시인)
로메다 님, 보내온 편지를 읽고 나는 지금 상당한 심리적 갈등을 느끼고 있습니다. 로메다 님에게 계속 시를 가르쳐야 할 것인지 아니면, 시의 길을 가지 말라고 말려야 할 것인지 망설이지 않을 수 없군요. 대학입시에 두 번씩이나 고배를 마신, 그러니까 3수생이군요. 시를 쓰기 위해 대학 입시 공부를 포기하고 싶다고요? 실로 조언하기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도 청소년기에 그와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겪었던 일을 말씀드리면 결단하는 데 혹 도움이 될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시골 중학교에 다니면서 멋쟁이 체육 선생님을 만나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얘기를 했었지요? 그 시골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때문이었든지 도의 행정 도시에 자리한 지방의 한 명문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학교에 입학하자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학교의 도서관이었습니다. 시골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수만 권의 책들이 꽂혀 있는 도서관. 나는 매일 방과 후 그 책들에 묻혀 살았습니다. 배고픈 누에가 정신 없이 뽕잎을 갉아먹듯이 닥치는 대로 읽었습니다. 그리고 고2에 접어들면서 내 일생의 진로를 문학으로 결정했습니다. 전에는 세상 사람들이 선호하는 법과대학을 나도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고3이 되자 학교에서는 입시 공부를 철저히 시켰습니다. 매월 모의 고사를 치르고 100등 이내의 학생들의 명단을 학교 본관의 현관 위 벽에 게시했습니다. 마치 과거시험에 합격한 인재들을 세상에 알리는 방문처럼 크게 걸었습니다.
나는 고등학교에 들어와 두 선생님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한 분은 교장 선생님이고 다른 한 분은 국어 선생님이었지요. 교장 선생님을 좋아하다니 잘 이해가 안 갈지 모르지만 나뿐만 아니라 많은 학생들이 그 교장 선생님을 흠모했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매주 월요일 아침 운동장에서 갖는 전체조회 시간에 우리에게 꿈을 심어주는 아름다운 말씀들을 자주 하셨습니다. 만일 비라도 내려 운동장 조회를 못하게 되는 경우에는 그 훈화의 말씀을 못 듣는 것이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릅니다. 방학 때면 교장 선생님께 긴 편지를 보내곤 했습니다.
굵은 뿔테안경을 쓰신 국어 선생님은 항상 위트와 유머가 넘쳤습니다. 교과서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예술과 철학 얘기를 많이 들려주셨습니다. 보들레르를 위시해서 랭보나 말라르메 발레리 같은 상징파 시인들, 고흐나 고갱 같은 인상파 화가들, 사르트르나 까뮈 같은 실존주의 철학자들, 그리고 생의 철학자 린위탕(林語堂)의 『생활의 발견』이라든지 일본의 구라다하쿠조(倉田百三)의 『사랑과 인식의 출발』 같은 사색적인 책들을 소개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내가 당대의 유한한 삶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길을 꿈꾸며 문학을 선택하게 된 것도 아마 국어 선생님의 영향이 컷을 것입니다.
3학년 1학기 6월경이나 되었을 것입니다. 하루는 방과후에 국어 선생님이 나를 부르셨습니다. 몇 개월 동안 모의고사 100등 안에 내가 끼지 못한 것을 보시고 요즈음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궁금해 하셨습니다. 문학의 길로 가겠다고 결심한 후 나는 학교 공부에 별로 마음을 쓰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대학에 갈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글을 쓰는 것은 학벌과는 상관없는 일이 아닌가. 많이 읽고 많이 써 보는 일이 최선이다. 비싼 등록금을 치르고 대학에 들어가느니보다는 차라리 그 돈으로 내가 원하는 책을 사보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등바등 입시공부에 매달린 친구들을 보며 냉소를 지었습니다. 모의고사 답안지에도 장난스레 시 비슷한 잡문을 적어 넣곤 했습니다.
국어 선생님께 사실대로 말씀드렸지요. 그랬더니 선생님께서 빙긋이 웃으시면서 "그래, 네 말이 맞다. 대학에 들어가 봐야 특별히 배울 것도 없지. 교수들의 이론이야 그들이 써놓은 책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알 수 있고…." 하시며 내 말에 맞장구를 치셨습니다. 그러시더니 끝에 가서 "그런데 말이야, 대학에는 대학 생활이라는 것이 있어. 학우와 학우들 사이 혹은 스승과 제자 사이의 낭만적인 삶이 있거든. 그건 대학에 가지 않고는 맛볼 수가 없지. 그 낭만적인 대학 생활까지도 별 흥미를 못 느낀다면 가지 않아도 상관없지." 라고 덧붙이셨습니다.
로메다 님, 나는 그 '낭만적인 대학 생활'을 놓고 며칠 동안 전전반측하며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래 그 낭만적인 생활이 어떤 것인지 후회되지 않도록 한번 맛보기로 하자. 들어가서 재미없으면 그때 그만 둬도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다시 입시공부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서울의 괜찮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고(아마 운도 따랐을 것입니다) 그 덕분에 내가 좋아하는 시 얘기를 하면서 밥벌이도 할 수 있는 대학의 직장도 얻게 될 수 있었습니다.
로메다 님, 나는 늘 그 국어 선생님께 감사합니다. 만일 그 분이 그때 분별력이 없는 건방진 나를 보고 "이놈아, 너는 아직 몰라. 대학 가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문학은 대학에 들어가고 난 뒤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잔말말고 입시 공부나 열심히 해!" 라고 나무라셨다면 나는 오히려 반발심으로 대학에 가지 않겠다는 나의 결심을 더욱 굳혔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나는 아마도 반거들충이가 되어 지금까지 떠돌이 인생을 살고 있을지 누가 압니까?
로메다 님. 인생의 어느 시절이 가장 아름다웠던가 회고해 보면 역시 학창 시절입니다. 곤궁과 시대적인 고통으로 어려움을 적지 않게 겪었지만 인생의 황금시대는 역시 젊음의 학창시절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습니다. 로메다 님,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다시 그 학창시절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이것이 로메다 님의 물음에 대한 나의 대답입니다.
졸문 「시의 길」을 덧붙입니다. 한번 읽어보시고 시의 길이 얼마나 고된 길인가를 다시 생각하면서 마음의 결단을 내리기 바랍니다.
- 임보 교수 시창작교실 -
[첨부자료]
[ 시의 길 ] 시는 한 톨의 쌀도 생산해 내지 못한다. 말하자면 우리가 일상생활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시는 하등의 물질적 도움을 주지 못한다. 아니, 도움을 주기는 커녕 시를 열심히 읽으면 읽을수록 오히려 그만큼 더 생산의 효율성은 줄어들는지 모른다. 시를 쓰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경우에 따라서는 인세(印稅)나 고료(稿料)의 수입을 기대할 수 없는 바는 아니지만 그것은 다른 소득행위를 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수입은 시작(詩作) 행위의 목적과는 상관없는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시인의 시 쓰기의 의도는 경제적인 효용성과는 무관하다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물질적인 척도에 따라 평가되고 있는 사회에서 시에 매달려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딱하기 이를 데 없다. 그것도 일시적으로가 아니라 한평생을 시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시인들을 보면 측은한 생각마저 든다. 도대체 그 시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시인들은 시의 고삐에 코가 꿰인 채 소처럼 끌려가고 있단 말인가.
시도 하나의 발언(發言)이다. 하고 싶은 말을 세상을 향해 내쏟는 일종의 발언이다. 다만 일상적인 언술(言述)과는 달리 기술적으로 압축 미화(美化)된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기술적'이라고 하는 것이 시의 특성을 형성하는 시적 장치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기술적으로 표현된 그 발언 곧 시라고 하는 글이 경우에 따라서는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기도 한다. 아니 몇 세기를 두고 두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세상을 울리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훌륭한 시는 긴 생명을 지닌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들은 생명이 긴 발언 곧 훌륭한 시를 만들어 보겠다는 욕망 속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몽상인(夢想人)들이라 해도 무방하리라.
세상을 움직이는 막강한 힘을 가진 사람들로 우리는 흔히 권력을 잡고 있는 정치가나 막대한 금력을 쥐고 있는 실업가들을 든다. 그들은 산을 헐어 길을 만들 수도 있고 바다를 막아 평야를 일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지니고 있는 것은 물리적인 힘이다. 물리적인 힘은 물리적인 세계를 움직일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물리적인 충족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리적인 면 못지 않게 정서적인 충족을 또한 요구하고 있다. 그 정서적 욕구는 정치가나 실업가들이 지닌 물리적 힘만으로는 성취되기 어렵다. 정서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 더 나아가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예술가들의 몫이다.
한 사람의 위대한 소월(素月)이 열 사람의 위대한 재상들보다 세상을 더욱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유구한 역사를 다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이 단 몇 십 년의 과거만 돌이켜보기로 하자. 이 땅에 얼마나 많은 기라성 같은 명재상들이 명멸(明滅)하며 지나갔던가. 그러나 몇 십 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들의 흔적은 거의 찾을 길이 없다. 천지를 흔들던 그들의 사자후는 어디로 갔는가. 아니 그들의 이름조차 이제 우리에겐 생소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시인의 경우는 어떠한가. 소월(素月)이나 만해(萬海) 그리고 육사(陸史)나 백석(白石) 들을 보라. 그들이 살아있던 당대에는 세상의 주목을 별로 받지 못한 하찮은 인물들이었지만 이들은 날이 갈수록 세상 사람들의 가슴속에 더욱 형형히 빛나고 있다. 무엇이 그들에게 구원의 생명을 부여했는가. 그들이 남긴 몇 편의 시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림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모든 시인들의 시가 긴 생명을 지닌 것은 아니다. 수천 명 아니 수만 명의 시인들 가운데 후세의 사람들이 기억해 줄 사람은 몇 십 명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만큼 세상을 울리는 작품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시인들은 기적과도 같은 한 편의 명품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한평생을 내걸고 있는 무모하고 외로운 도박자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세상의 평판을 기다리기 조급한 시인들 가운데는 비평가들을 동원해서 자신의 작품을 선전하기도 하고, 향리(鄕里)에 손수 시비(詩碑)를 세워 자신의 작품을 돌 속에 담아 오래 남기고자 하는 사람도 있다. 소중한 내 작품이 눈먼 세상 사람들이 잘 알아보지 못하고 어둠 속에 그냥 묻혀 버리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안타까운 마음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솔한 시인이라면 보통의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세속적인 욕망에 초연할 수 있어야 하리라. 시업(詩業)이란 애초부터 세상의 보상을 기대하고 출발한 것이 아니니까, 자신의 작품에 대한 세상의 평가에 너무 연연해하는 것은 시인의 체통에 걸맞지 않아 보인다.
세상에 드러나 반짝이는 보석들은 몇 개 되지 않는다. 9할이 넘는 대다수의 보석들은 땅 속에 아직 묻혀 있다. 그중 혹 어떤 것들은 광부의 손에 닿아 운 좋게 세상에 드러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머지 것들은 영원한 어둠 속에 갇혀 있으면서도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는다. 진정한 시인은 세상이 그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땅속에 깊이 묻혀 있는 보석들처럼 불평하지 않고 의연히 살아가는 그런 초연한 사람인 지도 모른다.
― 졸저 『엄살의 시학』 pp.188∼1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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