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천지
불교는 난해하다. 입문은 문이 8만4천 개라 아주 쉽지만, 사자좌에 오르기는 지극히 어렵다. 평등도 8만4천 문호 중에 하나이다. 평등은 궁극의 경계 곧 구경이지만, 귀익지도 않고 낯설기만 하다. 평등의 대어는 차별이다. 차별은 둘 이상의 대상이 있어야 한다. 둘이 없는 경계 곧 불이가 평등이니, 불이법문이 바로 평등법문이다.
함평천지는 귀익지만 천지함평天地咸平은 낯설다. 그 뜻은 크게 보면 동일하지만, 엄격하게 분별하면 다른 면이 없지 않다. 하늘과 땅이 다 평등하다. 천자문에 천지현황이 있고, 신심명에 호리유차이면 천지현격이란 말도 있으며, 천고지저 천존지비 또는 천양지차 천연지차 운니지차 소양지차 소양지간 등등의 말도 있다. 이 모든 말들은 천지의 차별상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는 천지에 대한 절대불변의 공의이다. 그런데 호남가는 어째서 초두에 함평천지라 말했을까? 천지함평은 역천이 아닌가?
함평천지咸平天地 늘근몸이 광주고향光州故鄕을 보려하고
제주어선濟州漁船을 빌어타고 해남海南으로 도라들제際
흥양興陽에 도든해넌 보성寶城에 비쳐잇고
고산高山의 아츰안개 영암靈岩에 둘러잇다
해설한다. 함평천지를 직해하면 “다 모두 또는 일체가 하늘과 땅을 평등하게 한다.”라고 할 것이고, 천지함평은 “하늘과 땅이 모두 평등하다.”라고 할 것이다. 전자를 취하면 늙은 몸은 일체 중에 하나이다. 제불보살도 일체에 포함된다. 도학자는 첫째가 발원이다. 그 원이 크면 클수록 좋다. 하늘은 완벽한 이상향이고, 땅은 불평등이 만연한 이 언덕이다. 누가 차안을 피안처럼 완전무결하게 만들 수 있을까? 늙은 몸의 대원이 그러하다.
천리 길을 가고자 함에 첫걸음을 올바르게 옮겨야 한다. 요즈음 광주를 빛고을이라 말한다. 빛 또는 광명은 불교의 구경이다. 법신불과 법성토는 모두 광명뿐이다. 원각경의 초두 서문이 그러하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노라. 한때 바가바께서 신통대광명장삼매정정에 드시니, 일체 여래께서 광명으로 장엄하여 주지하시고, 모든 중생의 청정한 근본각지이며, 신심과 적멸이 평등한 본제이다. 시방세계를 원만하게 하고 불이를 수순하시며, 불이의 경계에서 일체 정토를 나투시니라.”(如是我聞 一時婆伽婆 入於神通 大光明藏 三昧正受 一切如來 光嚴住持 是諸衆生 清淨覺地 身心寂滅 平等本際 圓滿十方 不二隨順 於不二境 現諸淨土)
바가바는 법신불이다. 법신불의 일체삼매 중에 근본삼매가 바로 신통대광명장삼매정정이니 곧 광명삼매이다. 함허스님과 감산스님은 들어가는 대상을 신통대광명장으로 한정하고 삼매정수를 따로 해석했다. 그런데 나는 붙여서 해석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첫째 신통대광명장은 삼매의 이름이고 정수가 바로 삼매이기 때문이며, 둘째 들어가는 당체도 삼매이기 때문이다. 곧 신통대광명장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신통대광명장삼매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수는 어떻게 해석하야 옳은가? 이도 또한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법신불은 체용이 모두 광명이다. 그러므로 광명삼매는 체용을 겸유한 삼매 중에 삼매이기 때문에 삼매정수라 한 것이다. 둘은 사언으로 맞추기 위하여 중복한 것이다.
원각경은 능엄경처럼 철저하지는 않다. 가령 능엄경은 선남자를 시선남자是善男子 피선남자彼善男子 제선남자諸善男子 등으로 표기한다. 그러나 원각경은 여선남자汝善男子가 한번 나올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선남자 세 글자를 고수하고 있다. 그렇지만 사언으로 맞추기 위하여 생략한 곳이 적지 않다. 가령 “無邊虛空 覺所顯發 覺圓明故 顯心清淨 (顯)心清淨故 見塵清淨 見(塵)清淨故 眼根清淨 (眼)根清淨故 眼識清淨 (眼)識清淨故 聞塵清淨 聞(塵)清淨故 耳根清淨 (耳)根清淨故 耳識清淨 (耳)識清淨故 覺塵清淨”라는 문장 중에 괄호 안의 글자는 모두 생략된 것이다. 근청정고는 글자는 같지만 안근과 이근으로 나뉘고, 식청정고도 또한 안식 이식으로 달리 보아야 한다. 이것이 정수를 중복으로 보는 이유이다.
일체여래의 법신불도 또한 오로지 광명 한가지로 장엄할 뿐이다. 이 경사에 어찌 중생이 빠질 수 있는가? 이곳이 또한 일체중생의 청정한 근본각지이기도 하다. 이 근본각지根本覺地는 보광명지이고 보광명근본지이다. 바가바와 일체여래 그리고 일체중생 셋 중에 하나도 광명을 여읜 곳이 없다. 이 때문에 일체중생의 신심과 일체여래의 적멸이 평등본제이고, 또는 평등한 본제이다. 이 평등을 형용사로 쓸 수도 있고, 명사로 쓸 수도 있다. 평등이 바로 본제이기 때문이다. 이 평등과 본제 또는 평등본제가 바로 시방세계를 원만하게 하고 불이를 수순하시는 주체이며, 일체 정토를 나투시는 불이의 경계도 또한 평등본제이다. 불이가 곧 평등이다.
광주고향을 다시 천명한다. 자정기심성본향(自淨其心性本鄕)이란 말이 있다. 논란이 많은 구절이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본래 청정한 마음자리 본성품의 고향이네” “티 없이 깨끗한 그 자리가 심성의 본향이라” “스스로가 뜻을 맑게 하면은 곧 마음의 본고향이라” “스스로 조촐한 그 마음이 자성의 본향이다.” 등등이다. 이를 직역하면,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자성의 본향이다.”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저절로 청정한 그 마음이 일체 불성의 근본 고향이다.”라고 해석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심은 중생심으로 보고, 성은 불성 또는 여래성으로 보기 때문이다. 불성이 중생심의 근본고향이 아니고, 중생심이 불성의 근본고향이다. 또 어째서 그러한가?
통현장자의 논문을 인용한다. “십개지불은 부동지불을 근본으로 삼고, 부동지불은 보광명지를 근본으로 삼으며, 보광명지는 무의주지를 근본으로 삼고, 무의주지는 일체중생을 근본으로 삼는다.”(十箇智佛以不動智佛爲本 不動智佛以普光明智爲本 普光明智以無依住智爲本 又無依住智以一切衆生爲本)“무릇 범부지로 좇아서 십신심을 수학하고 제불 정각의 불과가 자심과 다름이 없음을 믿으니, 본성의 청정함이 제불의 각성과 같다. 모든 분별의 본성이 청정함을 무의주지라 일컬으니, 제불의 근본지와 같다.”(從凡夫地修學十信心 信諸佛正覺之果 無異自心 本性清淨 如諸佛性 所有分別本性清淨 名無依住智 如諸佛根本智)
모든 분별은 중생심이고, 또한 일체중생의 청정한 근본각지이며, 이 때문에 모든 분별의 본성이 청정할 수 있으며, 이를 무의주지라 한다.
함평천지의 대원을 품은 늙은 몸이 빛고을을 보기 위하여 대장정에 나서니, 그 경계가 또한 남행하는 선재동자와 같다. “제주어선을 빌려 타고 해남으로 돌아서 들어갈 즈음, 흥양에 돋은 해는 보성에 비춰주고 있고, 고산의 아침 안개는 영암에 둘러 있다.”
제주어선의 어옹은 “대교의 그물을 펼쳐서 인천의 고기를 걸러내는”(張大敎網 漉人天魚) 재주가 있다. 어옹의 분상에는 사람이나 천인이 모두 고기와 같다. 해남海南의 남녘 남南 자는 파자하면 십문팔천十門八千 또는 십문팔간十門八干이 된다. 십간 중에 중앙 무기토를 제외하면 사면팔방이다. 십문의 안과 팔방의 밖을 모두 수용하기 때문에 이 남 자는 일체를 구족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해남이 곧 흥양興陽이고, 보성에 앉아 흥양에 돋은 해를 보고서 홀연히 대오한다. 일념에 정각을 성취한다. 돌아들 제의 즈음 제가 그러하다. 찰나제이고 평등본제이다. 찰나제삼매에 들어가 무상정각을 성취할 때, 삼세제불이 일시에 성불한다. 정각을 성취하는 일념에는 시제가 없다. 구세를 일념으로 관통하는 평등세가 곧 평등본제이다. 일제一際나 본제 진제 무제 실제 등이 모두 정각을 성취하는 찰나를 말한다.
그 경계 또는 산천경계가 바로 “고산의 아침 안개는 영암에 둘러 있다.” 해남이 피안이고, 흥양과 보성 그리고 고산 영암이 모두 빛고을이 아님이 없다. 호남 54개 고을마다 연화장세계가 분명하도다. 그래서 호남이 전라全羅이다. 차안에 피안이 완전무결하게 펼처져 있다. 차안이 바로 그대로 피안이다.
봄을 찾기 위해서 동쪽을 향하여 나서지 말라.
서쪽 동산의 한매가 눈 위에 꽃망울을 터트렸느니라.
尋春莫須向東去 西園寒梅已破雪
2022년 4월 13일 74세 길상묘덕 씀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