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기휴가 기행 제5부) 홍룡폭포로 유명한 양산 홍룡사(虹瀧寺)
@홍룡사(虹瀧寺)는 깊은 계곡과 폭포가 많고 또한 경치가 빼어나 금강산의 축소판이라고 불리는 천성산(해발 922m) 기슭의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지번으로는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홍룡로 372 이다. (일주문) 일주문과 사찰안내서를 보면 한자로는 <홍롱사(虹瀧寺)>인데 한글로는 <홍룡사>로 표기되어 있고 인터넷에도 <홍롱사>가 아닌 <홍룡사>로 회자하고 있다. <瀧>은 롱, 랑, 상의 세가지로 음으로 읽혀진다. 뜻으로는 1)적실롱 또는 비 부슬부슬올 롱/ 폭포 롱, 2)물이름 낭, 3)여울 상 이다. 나의 짧은 식견으로 홍룡사, 홍룡폭포로 표기하는 것은 분명한 오류지만 사찰의 표기에 따라 이하 홍룡사, 홍룡폭포로 그대로 표기한다.
@ 홍룡사의 창건배경 및 역사 홍룡사는 사찰 안내에 선학원(禪學院)에 속하는 사찰로 되어 있다. 선학원은 조금 생소한 것이라 선학원(禪學院)에 대해 찾아보았다. 이하는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에 나온 해설이다. 『일본 불교의 침탈에 대응하여 범어사를 중심으로 한 임제종(臨濟宗) 종무원은 동래(東萊), 초량(草梁), 대구(大邱), 경성(京城) 네 곳에 포교당(布敎堂)을 세우고 임제종 간판을 걸었다. 1912년 11월 임제종은 범어사 등지에 두었던 조선임제종 임시 사무소를 개설한 이후 조선임제종 중앙포교당(朝鮮臨濟宗中央布敎堂)이라는 이름으로 서울 사동(寺洞) 28통 6호로 이전하였다. 여기에 불법(佛法)의 정통인 선리(禪理)를 탐구하고, 선풍(禪風)을 선양함으로써 불교 중흥을 이룩하고자 조선불교선학원(朝鮮佛敎禪學院) 본부를 설립하였다.
선학원은 「사찰령」 발표 이후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우리나라 승단이 급속도로 세속화되어 가는 것을 개탄, 불조(佛祖)의 정맥을 굳게 계승하기 위해 창설된 선종의 중앙 기관이다. 처음 발기인은 남전(南泉), 도봉(道峰), 석두(石頭) 등 세 승려가 주도하였지만, 「선학원 창건 상량문」의 발기인 명단에는 용성(龍城), 성월(惺月), 도봉(道峰), 석두(石頭), 남전(南泉) 등이 있다. 당시 남전은 범어사 경성포교당의 포교사였으며, 석두 역시 범어사 승려였다. 총계 2만 5,500원의 자금으로 1921년 8월 10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불과 3개월 만인 11월 30일에 준공하여 입주하였다. 1926년에는 재정 빈곤으로 범어사의 포교당으로 전환되었다. 이때에는 범어사가 운영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선학원의 변천을 보면 1934년 12월에는 조선총독부로부터 재단 법인 설립 허가를 받아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朝鮮佛敎中央禪理參究院)으로 변경되었으며, 선리의 수행과 연구에 의하여 승려 및 일반 신도에게 정신적 수양을 베풀기 위한 각종 시설을 하려는 것이 법인 구성의 목적이었다. 선학원은 창건 이후 선학원 자체에 의한 자력 구제 방안을 꾸준히 강구하게 되는데, 이것이 곧 재단 법인의 설립으로 명실 공히 중앙 선원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1934년 12월 30일 선학원 계열의 수좌, 조선불교 선종의 종헌이 제정되었으며, 오늘날에는 조계종· 선학원 관계가 재정립되어 재단법인 선학원으로 다시 개원되었다.』 라고 되어 있다.
홍룡사는 신라 제30대 문무왕 13년인 673년 원효(元曉)스님이 낙수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송고승전』에 따르면 원효스님께서 척판암에서 정진하고 있을 때, 중국 당나라 산서성 태화사에 수도하던 천명의 대중이 뒷산이 무너져 위급한 사고를 당할 것을 예견하고 ‘해동원효 척판구중(海東元曉 拓板救衆)’이라고 쓴 현판을 날려 보내 태화사 상공에 날아다니게 했다. 대중이 공중에 뜬 판을 보고 놀라 일주문 밖으로 나온 순간에 산사태가 나서 절은 무너져 버리고 대중은 모두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그 후 그들을 구해준 인연으로 1천명의 중국 대중이 도를 구하기 위해 원효 스님을 찾아왔는데, 이때 원효스님께서 천성산에 89개 암자를 짓고 머물게 했다고 한다. 그 후 대중들은 천성산 상봉(지금의 화엄벌)에서 원효 스님의 『화엄경』 강설을 듣고 모두 득도했는데 절 옆의 폭포에서 몸을 씻고 설법을 들었다고 해서 ‘낙수사’라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그 낙수사가 바로 지금의 홍룡사이다.
또 산 이름 역시 본래 원적산이었으나 대중 1천명이 모두 득도하여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천성산(千聖山)이라고 바뀌었다고 하며 이것이 바로‘천성’이라는 이름이 생긴 연유이다. 당시 89암자에서 정진하고 있는 대중들을 운집시키기 위해 큰 북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그 북을 매달아 두었던 집북재와 화엄경을 설하던 화엄벌이 지금도 남아있다.
@홍룡사는 조선 제14대 선조대왕 때까지만 하더라도 일주문을 포함 15개의 전각을 거느린 영남제일 선원으로 납자들의 선불장(選佛場)이었지만 임진왜란 때 전소(全燒)하여 절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10년대에 통도사 법화(法華)스님이 중창하였다. 절 이름 홍룡(虹瀧)은 폭포 이름에서 유래한다. 홍룡폭포는 제1폭포와 제2폭포가 있는데, 옛날에 천룡(天龍)이 폭포 아래에 살다가 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전한다. 1970년대 말 우광(愚光)스님, 혜오스님이 주지로 부임한 뒤 중건과 중수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은 대웅전, 종각, 선방, 천수관음을 모신 무설전, 산신각, 백의관음과 낭견관음을 모신 관음전, 요사채 등이 있고, 폭포 옆에 약사여래전이 있다. 사찰전경 대웅전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을 협시로 모셨다. 무설전 오르는 길 무설전이다, 법당 안에는 천수관음이 봉안되어 있다. 신중탱, 상단에 예적금강이 보인다. 무설전에서 내려다 본 풍경 무설전을 내려와 올려다 본 풍경 수정문이다. 이 문을 통하여 산신각, 약사전, 관음전과 폭포로 간다. 홍예교다. 물이 있었다면 더 멋질 것이라 사료된다. 산신각 산신각에는 산신과 나반존자를 모셨다. 홍룡폭포 가는 길. 바위마다 푸른 이끼가 세월을 이야기한다. 왼쪽은 관음암, 오른쪽은 약사전이다. 보합을 든 약사여래 @진사들이 찾는 홍룡사의 백미는 사찰보다도 관음전과 물보라를 뿜어내며 쏟아지는 웅장한 폭포가 있는 여기 이 풍경인데 불행히도 이번 나의 방문 때는 폭포가 너무 빈약하여 아쉬움을 주었다. 이번 휴가기간 동안 내내 비소식이라 특별히 이곳을 기대하고 장노출을 대비하여 ND필터와 잘 사용하지 않은 무거운 삼각대까지 준비하였는데 이곳 양산만은 비가 오지 않은 모양이다. 아마도 다음 인연을 지으라는 암시인가 보다. 짙은 녹음 속에 적막함까지 느껴지는 관음전 중부지역은 물난리를 겪었는데 여기 양산만은 가물었나 보다. 강수량이 많았다면 정말 멋진 폭포일 텐데... 아쉽다. 멀고도 먼길 물보라 토해내는 우렁찬 멋진 폭포를 기대하고 왔는데... 관음전이다. 법당 안은 좁지만 백의관음과 낭견관음을 모시고 있다. 백의관음 @백의관음(白衣觀音) 33관음(觀音)의 한 분으로 항상 흰옷을 입고 흰 연꽃에 앉으신 관세음보살이다. 태장계만다라에서는 관음원 제3열 제7위에 그려져 있다. 낭견관음 @홍룡사 관음전의 낭견관음(瀧見觀音) 낭견관음은 33 관음 중 한분이다. 보문품의 게송에 의하면 이 관음을 염하면 불도가니가 변하여 연못이 된다는 관음이다. 낭견관음은 관음도에서는 바위에 앉아 폭포수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특이한 것은 33관음도에서는 낭견관음은 아름답고 우아한 여인상을 나타내는데 여기 홍룡사의 낭견관음은 보관을 쓴 남성미를 풍기고 있는 것이 조금 색다르다.. (瀧見觀音의 롱(瀧)의 음은 여기서는 ’물이를 낭’으로 읽는다) <낭견관음(瀧見觀音)의 설화> 중국 당(唐)나라 때 가흥현(嘉興縣) 지방에 큰 가뭄이 몰아닥쳤다. 그 마을에 호(胡)씨라는 농부가 살고 있었는데 어머니마저 병석에 누워 계시고 설상가상으로 남편이 들판에서 나물을 캐다가 이웃과 다투게 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극심한 가문에 어머니를 돌보랴 옥에 갇힌 남편까지 돌보아야 하는 호씨의 아내는 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하루는 나물을 캐러 들판을 돌아다니던 중 산 계곡쪽에서 어떤 형상이 눈에 아련 거린는데 그 형상은 폭포 옆에 있는 바위에 앉아서 폭포를 감상하고 있는 관세음보살이 아닌가. “아, 물이 저기 있구나!” 하고 너무 기뻐서 눈을 크게 떠고 다시 보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지랑이 속에서 헛것을 봤다고 생각한 호씨의 아내는 풀이 죽어 계속 이 밭고랑 저 밭고랑을 다니며 나물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힘든 나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호씨의 아내는 나물을 캐러 밭을 살피는 중 말라붙은 여울 사이에서 이상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호기심이 생겨 가까이 가서 보니 땅에서 반쯤 나와 있는 불상이었다. 흙을 털어내고 자세히 보니 관세음보살의 모습이었다. 보살의 얼굴을 자세히 보던 그녀는 얼마 전에 아지랑이 속에서 흘긴 본 관세음보살의 그 모습이라는 것을 알았다. 호씨의 아내는 흙이 묻은 관음보살을 깨끗이 닦은 후 근처의 절로 모시고 그날로부터 매일 시간을 내어 관세음보살상 앞에서 향을 피우고 지극정성으로 비를 내려달라고, 남편이 감옥에서풀려 나기를 기원을 드렸다. 그로부터 얼마후 마을에 기적이 일어났다. 여전히 비는 오지 않았지만 관음불이 나타난 곳에서 물이 솟아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은 마치 폭포가 떨어지는 기세처럼 솟아났는데, 옆에 있는 말라붙은 여울을 채우고 흘러가더니 가흥현을 가로지르는 강을 채우기 시작 했다. 갑자기 들리는 물소리를 듣고 몰려나온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저마다 물길을 내어 자신들의 논과 밭에 물을 대었다. 가흥현의 마을사람들이 물이 솟은 연유를 조사하다가 이 모든 것이 호씨의 아내가 밭에서 캐낸 관음보살을 지극정성으로 모신 인연임을 알게 되었다. 호씨의 아내와 관세음보살에 관한 이야기가 온 마을에 퍼지자 가흥현의 사람들은 호씨의 아내가 모신 관세음보살을 낭견관음(瀧見觀音), 혹은 관폭관음(觀瀑觀音)으로 불렀다. 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감옥에 갇힌 남편도 석방되어 돌아 왔다. 이 모든 것은 관세음보살님의 가피(加被)라 여기고 호씨의 가족들은 물론 마을사람들도 그후 지극정성으로 낭견관세음보살을 모셨다고 한다 종각 ~제6부는 국내 최대최고의 동굴법당인 약사전이 있는 여여정사로 이어진다.~ |
출처: 현림의 소리 원문보기 글쓴이: 나그네
첫댓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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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아미타불
감사 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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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잠시 머물면서 즐갑하고 갑니다
항상 건강하시고,행복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