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신> 시적 장치의 특성 / 임보 (시인, 교수)
로메다 님,
지난번의 내 글을 읽고 진학의 결심을 새롭게 했다니 반가운 일입니다.
그런데 나의 시 강론은 계속 듣고 싶다니 공부에 지장이 없을지 염려되는군요.
당분간 시에 대한 내 담론 시간을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로메다 님,
무슨 글이든 글을 쓸 때 핵심이 되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 입니다.
이를 내용과 형식이라고 구분해서 논하기도 하는데
구조주의 문학자들은 이렇게 구분한 것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기도 합니다.
그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수박의 겉과 속의 경계가 모호하지만 분명히 겉과 속이 있는 것처럼
작품의 내용과 형식이 서로 겹쳐서 그 구분이 명료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 할지라도
내용과 형식 즉 주제와 표현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없는 바는 아닙니다.
나는 서로 겹치는 모호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내용과 형식이라는 말 대신
'편내용', '편형식'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합니다.
(내용과 형식에 관한 논의는 첨부자료를 참고하기 바랍니다.)
우리가 맨 처음 거론했던 이미지는 편내용적인 것이고
앞에서 소개했던 대우나 기승전결의 구조 같은 것은 편형식의 범주에서 다룰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시에서 즐겨 사용하는 표현 기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고
또한 그것들이 지닌 특성은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보통의 산문과는 달리 시에서 즐겨 구사되는 표현 형식 즉
시라는 글이 되게 하는 형식을 나는'시적 장치'라고 부릅니다.
시적 장치라고 할 수 있는 대표적인 표현 기법으로
비유(은유), 상징, 전이(轉移), 우의(寓意), 의인(擬人), 역설, 과장, 운율, 대우 등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이들 표현 기법들을 나는 다음과 같이 3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첫째, 감춤의 성질(은폐지향성)---상징, 은유, 우의, 전이
둘째, 불림의 성질(과장지향성)---역설, 과장, 비유, 의인
셋째, 꾸밈의 성질(심미지향성)---운율, 대우, 아어(雅語)
첫째, 감춤의 성질은 은폐지향성입니다.
시에서는 산문에서처럼 직설적으로 명료하게 표현하기보다는
은근히 숨겨서 표현하고자 합니다.
어떤 추상적 정황을 구체적인 다른 사물을 끌어다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상징의 기법이 그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비유 가운데은유의 경우도 그 원관념(본의)을 숨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간의 일을 동·식물의 입장을 빌어 표현하는우의(寓意)도 그렇고,
자신의 이야기를 타자에 의탁해서 서술하는 전이(轉移)도 감춤의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불림의 성질은 과장지향성입니다.
시에서는 사실대로 기술하기보다는 사실보다 불려서 표현하고자 합니다.
시는 정보가 아닌 정서 전달의 글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백발이 삼천 발' 같은 과장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고,
논리적인 모순을 담고 있는 역설적인 진술도 과장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에서 구사된 비유도 과장적인 요소를 담고 있을 때 능률적으로 작용합니다.
비인물을 인물로 표현하는의인법이나 무생물을 생물로 표현하는활유법 역시 과장에 근거한 기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셋째, 꾸밈의 성질은 심미지향성입니다. 즉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경향이지요.
시가 예술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에 운율을 실어 율동적으로 표현하려는 것은 미의식의 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대우의 구조 역시 심미성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요즈음 현대시 이론에서는 시어(詩語)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보편적인 시에 보다 적합한 시어들이 없는 바가 아닙니다.
딱딱한 것보다는부드러운 것이, 추한 것보다는 고운 것이,
속된 것보다는 우아한 것들이 선호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시어들을 만들기 위해서시인들은 시어의 조탁(彫琢)을 게을리 하지 않는데
이 또한 심미지향성 때문이라고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감춤>과 <불림>과 <꾸밈>
이 세 가지가 시다운 표현이 곧 시적 장치의 특성인데
나는 이들을 아울러 <엄살스럽게>라는 말로 즐겨 표현합니다.
시는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을 엄살스럽게 표현한 짧은 글입니다.
각 장치들에 대한 개별적인 논의는 다음 기회에 할 것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 임보 교수 시창작교실 -
[참고 자료]
내용(內容)과 형식(形式)
예술 작품을 논할 때 자주 내용과 형식이라는 말이 거론됨을 볼 수 있다.
예술 작품을 내용과 형식으로 양분해서 설명하려는 태도는
멀리는 아리스토텔레스에까지 이어지는 오랜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흔히 내용과 형식의 관계를 음식과 그릇에 비유해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작품에서의 내용과 형식의 관계가
음식과 그릇의 관계처럼 분명한 한계를 지닌 것이 아니므로
내용과 형식을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한 것이라고 구조주의자들은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은 작품을 이루는 어떤 요소가 내용이면서 형식일 수 있고,
또한 형식이면서 내용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무용 속에서 동작과 육체를 구분할 수 없는 것처럼
내용과 형식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럴듯한 지론으로 보인다.
그러나 좀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양분론(兩分論)과 불가분론(不可分論)에는 각기 어떤 문제성을 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품을 이루고 있는 구성 요소들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요소들 가운데 어떤 것은 불가분론자의 주장처럼 내용과 형식의 한계가 모호한 것도 드물지 않다.
그러나 어떤 요소들은 내용에만 관여하는가 하면 또 어떤 요소들은 형식에만 관여하는 것도 없지 않다.
말하자면 작품에서의 주제는 전자의 대표적인 예가 되고
정형시에서의 그 틀은 후자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양분론의 결함은 양면 걸침의 경우를 도외시하고 모든 요소들을 양분할 수 있다고 믿는 데 있고,
불가분론의 문제점은 모든 요소를 걸침의 관계로만 보려는 데 있다.
구분할 수 있는 것도 있고 구분할 수 없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서로 인정한다면 문제는 풀리지 못할 것도 없다.
걸침의 관계에 있는 요소들도 편내용적인 것과 편형식적인 것으로 구분할 수도 있으리라.
시에서의 소재는 편내용적인 것이고,
운율은 편형식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이스크림을 담고 있는 깔때기 과자는 먹을 수도 있는 그릇이니까 편형식적이라고 할 수 있고,
아이스크림 위에 얹힌 고명 땅콩은 편내용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아예 모든 요소들을 내용과 형식으로 나누는 일이 거북하고 곤란하다면
편내용적, 편형식적이라는 용어로 바꾸어 써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불가분론자들도 구분의 어려움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내용이나 형식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요사이 작품의 분석에서 내용과 형식을 거론하면
보수적인 낡은 문학이론에 젖어 있는 것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이는 크게 잘못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내용과 형식에 상관되는 걸침의 요소일수록 우리는 그것을 회피해 갈 것이 아니라
더욱 문제삼아 분별해 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즉 그 요소가 지닌 어떠한 기능은 그 작품의 내용에 어떻게 관여하고 있고,
또 다른 어떤 기능은 형식의 구조에 어떻게 참여하고 있는가를
보다 치밀하게 따져 보는 일이야말로 보다 가깝게 작품의 구조에 접근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분별하기 어려우므로 뭉뚱그려 함께 생각하자는 것은
일을 처리하는 현명한 방법일 수 없다.
무용가의 한 동작에서도 춤의 내용과 형식을 분별해 낼 수 있다면
이 얼마나 황홀한 일이겠는가.
---<엄살의 시학> pp.146-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