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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할 것이다. 이 말씀은 마치 내일 비가 올 거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너무나 평온하고 일상적인 말투였지만 듣는 사람들의 귀에는 말은 하늘에 날벼락처럼 들렸습니다. 이 노스님의 법명은 해공이었습니다. 광주사에서 이미 40년 넘게 머무셨는데 19살에 출가해서 평생 청정하게 수행만 하셨고 말씀도 별로 없으셨죠. 평소에는 아침 저녁 예보를 드리는 것 외에는 선방에 앉아 참선을 하거나 밭에 나가 일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스님이 무슨 신통역을 부리는 걸 본 적도 없고 심오하고 현란한 이치를 설법하시는 걸 들은 적도 없었죠. 그런데 그렇게 평범해 보이던 노스님이 지금 이런 말씀을 하신 겁니다. 수제자인 명덕스님이 황급히 여쭈었습니다. 스님 몸도 정정하신데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배공스님은 빙그레 웃으셨습니다. 갑자기가 아니다. 내 마음속은 이미 명확하다. 하지만 스님 오늘 안색도 평소와 같으시고 식사도 여느 때처럼 하셨는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해공스님이 담담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고 죽는 것은 본래 그런 것이다. 가야할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가는 법이지. 너희가 미리 준비할 수 있도록 내가 미리 일러주는 것뿐이다. 제자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어떤 이는 몰래 눈물을 훔치고 어떤 이는 슬픔을 억누르고 또 어떤 이는 속으로 의심을 품었습니다. 정말로 스승님이 자신의 죽을 날을 미리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로부터 7일 동안 해공 스님은 평소와 똑같이 일어나고 똑같이 드시고 똑같이 좌선을 하셨습니다. 다만 평소보다 더 침묵하셨고 모습은 더욱 평온해 보이셨죠. 스님은 오랫동안 아껴두었던 경전들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고 절의 뒷일들을 깨끗하게 정리하셨습니다. 그리고 먼 곳에 있는 옛 버택에 보내는 편지도 직접 쓰셨습니다. 드디어 7일째 되는 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해공 스님은 목욕 재개하고. 가사를 입으신 뒤 부처님께 저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선방의 단정에 앉아 눈을 지긋이 감고 입으로 불보살님의 이름을 외우셨습니다. 시간이 좀 흐르자 제자들이 둘러싼 가운데 해공 스님은 몸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숨소리는 점점 희미해졌지만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염불소리가 멈추고 모든 것이 고요해졌습니다. 스님은 그렇게 앉은 채로 떠나셨습니다. 이 일은 금세 운남성 불교계에 퍼졌습니다. 사람들은 해공 스님은 보살이 다시 오신 것이다. 이것은 신통력의 묘용이다. 우연일 뿐이다. 수행자의 최고의 경지다 라며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마침 그 때 한국 불자님들도 잘 아시는 당대의 큰 스님 허운 노스님께서 운남성에서 법을 펴고 계셨습니다. 소식을 듣고 허운 스님이 광주사를 찾아오셨습니다. 당시 95세의 고령이셨지만 여전히 정정하셨고 걸음걸이는 바람처럼 가벼우셨죠. 스님은 해공 스님의 영전에 저를 올리고 대중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배검스님은 평생 청정하게 수행하시더니 이제 앉아서 입적하시어 점토에 왕생하셨구나. 참으로 기뻐하고 찬탄할 만한 일이다. 그때 명덕 스님이 기회를 틈타 허운 스님께 여쭈었습니다. 큰스님 제자들 마음에 의문이 하나 있습니다. 저희 스승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죽을 나를 미리 하셨을까요? 이것은 신통력입니까? 보통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입니까? 호운스님은 주위를 둘러보셨습니다. 저의 스님들과 조문혼 제가불자들 수십 명이 모두 기대에 찬 눈빛으로 스님을 바라보고 있었죠. 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다들 궁금해 하니 내가 이야기를 좀 해주겠네. 하지만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하나 물어보자. 너희는 어떤 사람이 죽을 때를 미리 알고 자유롭게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사람들이 대답했습니다. 대단한 신통력이 있어야 합니다. 아주 높은 경지까지 닦아야 합니다. 고사리 다시 오셔야 가능합니다. 허운 스님은 고개를 저으셨습니다. 다 틀렸다.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하자 허운 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죽을 때를 알고 앉아서 자유롭게 떠나는 것은 신통욕이 아니다. 대단한 경지도 아니고 보살만의 전유물도 아니다. 이것은 그저 수행하는 사람의 마음 공부가 겉으로 자연스럽게 드러난 것일 뿐이다. 공부가 그 자리에 이르면 나타나는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다. 누가 그 자리에 이른다니요? 명덕 스님이 되물었습니다. 그게 어떤 공부입니까? 허운 스님은 바로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평생 이곳저곳을 다니며 수많은 선지식을 챙겨냈고 수많은 고승들이 자유롭게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았다. 오늘 내가 직접 겪은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줄 테니 다 듣고 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자세를 고쳐 안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허운 스님의 눈빛이 아득해지며 옛일을 회상하셨습니다. 그건 광 종남산은 예부터 수행자들의 성지여서 산속 곳곳에 숨어사는 고행승들이 많았다. 그들은 동굴에 살며 산나무를 먹고 계곡물을 마시며 1년 내내 산을 내려오지 않고 조직 공부만 했지. 내 토굴에서 산 중턱으로 3리쯤 올라가면 천연동굴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에 우명이라는 법명을 가진 보행성이 살고 있었다. 듣자 하니 거기서 산지 30년이 되었더라고. 그는 평소 말이 거의 없었고 사람과 어울리지 않았다. 가끔 누가 찾아가도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말도 안 하고 앉으라고도 안 하니 사람들이 머쓱해서 그냥 돌아오곤 했지. 산중 수행자들은 무명 스님이 진짜 거행하는 분이라고 했다. 그 동굴은 겨울엔 뼈가 시리게 춥고 여름엔 모기 때가 들끓는데도 불평 한 마리 없이 몇 십 년을 앉아 있었으니까 언젠가 누가 무슨 수행을 하냐고 물으니 두 글자로 대답했다더구나. 염불 나도 몇 번 찾아갔었는데 갈 때마다 바위 위에 단점이 앉아 눈을 감고 있더군. 아는 척을 안 하니 나도 방해하지 않고 구글 입구에 잠시 서 있다가 오곤 했지. 어느 해 겨울 눈이 많이 내렸다. 무명 스님이 얼어죽진 않았나 걱정이 되어 식량과 소모를 챙겨서 가보았다. 그런데 동굴에 스님이 안 계시는 거야. 이상하다 생각하고 있는데 산 안에서 이 청이 들리더구나. 내려다보니 무명스님이 큰 바위 위에서 나무꾼 몇 명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나무꾼들은 근처 마을 사람들인데 가끔 산에 와서 수행자들에게 식량을 나눠주던 이들이었지. 내가 가까이 가서 들어보니 무명스님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 이제 정토로 갈 것이다. 너희가 마을에 가서 알려 다오? 3일 뒤에 산에 올라와 내 뒷일을 좀 처리해다오. 나무꾼들은 깜짝 놀라서 울었다. 아니 스님 정도 멀쩡하신데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무명스님이 말했다. 마음이 맑아지면 저절로 아는 법이다. 그러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산으로 올라가시더구나. 나도 급히 따라가서 물었다. 스님 정말 가시는 겁니까? 무명 스님이 발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셨다. 그분과 눈을 마주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눈빛이 바닥이 보일 정도로 맑아서 잠념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티끌만큼도 없더라고. 그분이 말씀하셨다. 내가 이 동굴에서 30년을 살며 30년 동안 연구를 하고 30년 동안 좌선했소 이제 공부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갈 때가 된 것이요. 내가 물었다. 인구가 여기에 이른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무명스님이 웃으며 말했다. 마음이 맑으면 밝아지고 밝으면 비추게 됩니다. 심청증 명 명증 능조 내 마음도 비추고 내 목숨도 비추지요. 목숨이 다해가는 걸 마음이 저절로 맑게 아는 겁니다. 그러고는 다시 산으로 올라가셨다. 나는 한참을 서서 그 말을 곱씹었지만. 그때는 잘 이해가 안 갔다. 3일 뒤 마을 사람들과 함께 동굴에가 보았다. 무명스님은 바위 위에 단정이 앉아 몸을 살짝 앞으로 숙이고 손으로 인을 맺은 채 미소를 띠고 계셨다. 이미 입적하신 뒤였지. 그 순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아 저것이 바로 생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구나. 자 이것이 내가 본 첫 번째 일이다. 너희는 여기서 무슨 이치를 얻었느냐. 명덕 스님이 내답했습니다. 무명스님이 갈대를 미리 한 것은 마음이 청정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마음이 맑아지니 자신의 생사를 꿰뚫어본 것이지요. 맞다 허운 스님이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마음이 맑으면 밝아진다. 이것이 첫 번째 이치다. 하지만 너희는 어떤 마음이 진짜 청정한 마음인지 생각해 보았느냐. 사람들이 침묵하자 스님이 이 말씀하셨다. 많은 사람이 마음이 청정하다는 걸 아무 생각 없는 상태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진짜 청정한 마음은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생각이 또렷하고 분명해서 미혹되지 않는 것이다. 무명스님이 30년 동안 연구를 한 것은 억지로 생각을 누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모든 생각을 또렷하게 알아차리기 위해서였다. 생각이 오면 오는 줄 알고 가면 가는 줄 아는 것 그렇게 오래하다 보니 생각은 분명 조용해지고 마음은 저절로 맑아진 것이다. 마음이 지극히 맑아지면 마치 거울처럼 모든 걸 비춘다. 내 마음의 상태도 비추고. 내가 지은 업도 비추고. 나의 인연도 비춘다. 2년이 다 해가는 것을 거울 보듯 흔히 알게 되는 것 이것은 신통력이 아니라 마음 공부에 자연스러운 결과다. 사람들이 깊이 생각에 잠기자 허운 스님이 계속하셨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를 해 주마. 방서 21년 내가 양주 고민사에서 참선할 때였다. 고민사는 선종 도량이라 규율이 엄격하고 수행 분위기가 아주 치열했지. 거기서 3년을 지내며 큰 도움을 받았다. 그곳에 5000이라는 노스님이 계셨는데 참석만 40년 넘게 하신 분이었다. 평소 말수는 적었지만 천방에서 한마디 하실 때마다 사람들의 막힌 속을 뻥 뚫어주곤 하셨지. 나도 그분께 지도를 많이 받았다. 오철 스님은 매일 정오가 되면 반드시 선방에서 좌선을 하셨는데 천둥이 쳐도 꼼짝을 안 하셨다. 누가 이유를 물으니 이 시간은 양기가 쏟는 때라 공부하기 딱 좋다고 하셨지. 그렇게 40년을 하루같이 하셨다 선방 사람들은 오철 스님의 정력이 대단하다는 걸 다 알았다. 한 번은 절에 불이 나서 다들 놀라 뛰쳐나갔는데 스님은 불길 속에서도 꼼짝 않고 앉아 계셨다 보를 다 끄고 나서 왜 안 피하셨냐고 물으니 탈 운명이면 피해도 타고 안 탈 운명이면 불쑥에서도 안 탄다. 뭘 그리 당황하느냐 하셨지? 다들 그 배짱에 혀를 내둘렀다. 어느 날 저녁 다들 좌선하고 있는데 오철 스님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니 대중들에게 말했다. 나 오늘 여러분과 작별해야겠어. 다들 놀라서 웅성거렸다. 어디 가십니까? 아니 갈 곳으로 간다 하시고 언제 가십니까 하니 오늘 밤이다 하셨다 선방이 발칵 뒤집혀서 방장 스님이 달려오셨다. 스님 왜 이러십니까? 오철 스님이 말했다. 내가 참선을 해서 이제 공부가 이루어졌으니 내 생사를 내가 주관할 수 있게 되었소 내 발로 걸어갈 수 있을 때 가는 게 억보의 질질 떨려가는 것보다 낫지 않소 방장 스님이 유언을 남기시라 하니 잠시 생각하시다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평생 참선하다가 한마디 깨달았으니 들려드리리라. 생은 어디서 오고 사 죽음은 어디로 가는가? 이 껍데기를 꿰뚫어보면 오고 감이 본래 없다. 그러고는 방으로 돌아가 오격재개하고 방석 위에 앉으셨다. 제자들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데 밤 9시 45분쯤 되자 스님이 눈을 뜨고 붓을 가져오라 하셨다. 그리고는 계송을 하나 쓰셨다. 40년 동안 화두를 들었더니 이제 손을 놓으니 곧 본래 자리로다. 누가 나에게 갈 곳이 어디냐 묻는다면 바람 불어 구름 흩어지니 다리머리 위에 떠 있구나. 붓을 놓고 눈을 감으시더니 호흡이 점점 잦아들다가 밤 10시가 다 되어 앉은 채로 떠나셨다. 나도 그때 선방에 있어서 이 모든 걸 지켜보았다. 법당은 감동으로 가득 찼습니다. 한참 뒤 누군가 물었습니다. 스님 오철 스님이 공부가 이루어져 생사를 스스로 주관한다고 하셨는데 어떤 공부가 되어야 그렇게 됩니까? 이것이 내가 말하려는 두 번째 이치다. 바로 공부가 한 조각을 이루는 것 타성일편 그리고 생사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생사자재이다. 공부가 한 조각이 된다는 게 뭐냐? 수행하는 마음이 촘촘해서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 걷거나 앉거나 눕거나 움직이거나 조용하거나 마음이 수행해서 떠나지 않는 것이다. 참선하는 사람은 의심이 끊어지지 않고 면부라는 사람은 부처님 이름이 흩어지지 않는 상태 이게 바로 공부가 한 조각이 된 상태다. 이렇게 되면 마음에 힘이 생긴다. 외부의 방해를 막아내고 육체의 고통을 뛰어넘고 죽음의 순간에도 정신을 차릴 수 있는 힘이다. 생각해보라 보통 사람들은 죽을 때 어떠냐. 몸이 무너지는 고통에 시달리고 가족들은 옆에서 울고 마음속엔 온갖 미련과 두려움이 밀려온다. 그때는 염불은커녕 말 한마디도 못한다. 하지만 공부가 한조각이 된 사람은 다르다. 평소에 훈련이 잘 되어 있어서 몸은 아파도 마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마음이 집중하고 머무는 데 익숙해서 고통에 끌려가지 않는 것이다. 평소에 연습을 안해놓고 죽을 때 정신차리겠다는 건 헛된 망상이다. 평소에 푹 익혀놔야 죽을 때도 물 흐르듯 되는 법이다. 오철스님은 24시간 내내 화두와 하나가 되어 있었기에 생사를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생사자재란 안 죽는다는 게 아니라 죽을 때 당황하지 않고 맑은 정신으로 내 발로 걸어가듯한다는 뜻이다. 명덕스님이 물었습니다. 스님 오철스님은 참선을 하셨는데 염부라는 사람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허운 스님이 미소 지으셨습니다. 당연하다. 세 번째 이야기를 들어보라. 선통 인연 내가 구화산에서 지장보살 도량을 참배할 때였다. 산에 덕청이라는 고행승이 계셨는데 높지도 않고 자*도 않으며 50년 넘게 수행하신 분이었다. 이분은 자신의 경지에 대해 절대 말하지 않았다. 누가 깨달음을 물으면 고개를 저었고 신기한 걸 봤냐고 물으면 입을 다물었다. 매일 딱 두 가지만 하셨다. 염불과 노동 하루 종일 나무 아미타불을 외우고 일할 때도 속으로 염분을 하셨다. 산중 사람들은 덕청 스님이야말로 진짜 성실한 수행자라고 했다. 어려운 교리도 모르고 특별한 비법도 없었다. 누가 물으면 그냥 염분해라 하고 비결을 물으면 비결 없다. 그냥 해라 하고 얼마나 해야 하냐고 물으면 마음에 부처님 생각 말고 다른 생각이 없을 때까지 해라 하셨다. 그분의 생활은 정말 단순했다. 다 쓰러져 가는 좁은 토굴에 아미타불상 하나 낡은 방석 하나가 전부였다. 옷은 남이 버린 걸 기워 입어서 누덕이었고 먹는 건 산나물과 잡곡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분 얼굴엔 늘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눈빛이 맑고 투명해서 옆에만 있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런 분이었다. 나는 한 달 동안 그분을 지켜봤는데 늘 산길을 걸으며 연부를 하고 계셔서 차마 방해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산을 내려오고 나서 몇 년 뒤에 들으니 그분이 돌아가셨더라구 그런데 그 과정이 참으로 불가사의했다. 돌아가시기 1년 전부터 주변 정리를 시작하셨다. 평생 모은 푼돈을 절에 기부하고 입던 옷과 쓰던 물건을 도반들에게 나눠주고 직접 아미타경을 써서 부처님 앞에 올렸다. 가기 석 달 전부터는 문을 걸어 잠그고 염분 얼굴에만 매달리셨다. 나 이제 서방 정토로 갈테니 준비해야 한다면서 하루에 물 한 그릇만 드시고 밤낮으로 염불만 하셨다. 문틈으로 보면 부처님 앞에 앉아 편안한 얼굴로 계속 염불만 하고 계셨지. 석 달 뒤 어느날 아침 스님이 문을 열고 나오시더니 사람들에게 말했다. 오늘 아미타 부처님이 나를 데리러 오셨다. 나 이제 간다. 사람들이 몰려드니 서쪽을 향해 합장하고 나무 아미타불을 세 번 부르고는 편안하게 앉아서 가셨다. 그때 방안에 기이한 향기가 가득 찼고 하늘에서 은은한 음악 소리가 들렸는데 무슨 곡조인지는 모르겠지만 듣는 사람마다 마음이 환희로워졌다고 한다. 허운스님은 합장하고 나무 아미타보를 나지막에 읍졸리셨습니다. 덕청 스님은 평생 염불하여 임종 때 부처님의 마중을 받고 가셨다. 이게 염불수행의 가장 큰 이익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세 번째 이치는 성실하게 수행하면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덕정 스님은 50년 동안 신통력도 감흥도 바라지 않고 오직 우직하게 염불만 했다. 그렇게 하니 나중에는 마음의 부처님 이름 하나만 남게 되고 그 마음이 아미타부처님과 통하게 된 것이다. 생각해보라. 두 사람이 매일 생각하고 그리워하면 마음이 통하지 않겠느냐? 염부라는 사람이 매 순간 부처님만 생각하면 부처님 마음과 내 마음이 통하게 된다. 그러니 부처님이 데리러 오실 때 어찌 모르겠느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습니다. 허운 스님이 정리하셨습니다. 자 이제 알겠느냐 죽을 때를 알고 편안하게 가는 것은 신비한 일이 아니다. 무명스님처럼 마음이 거울처럼 맑아져서 생사를 비추어 보든 오철스님처럼 공부가 한 덩어리가 되어 생사를 주관하든 덕청스님처럼 우직하게 연구를 하여 부처님과 통화든 그 이치는 하나다. 정부가 그 자리에 이르면 저절로 된다는 것이다. 명덕 스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큰 스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 세 분은 모두 수십 년간 수행한 고승들이지 않습니까? 저희 같은 둔한 범부들이나 먹고 살기 바쁜 제과자들은 그렇게 할 시간이 없습니다. 저희도 죽을 때를 알고 편안하게 갈 수 있을까요? 허운 스님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하셨습니다. 아주 좋은 질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가능하다. 아니 누구나 할 수 있다. 사람들이 놀라워하자 스님이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앉아서 죽고 서서 죽는 좌타림만 것이 고승들만의 전유물인 줄 아느냐? 천만의 말씀이 나는 평범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그렇게 가시는 걸 수도 없이 보았다. 내가 강서성 운거산에 있을 때 겪은 이야기 하나 해주마. 산악의 마을에 부처님을 믿는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글자도 모르고 경전도 몰랐지. 아는 거라곤 오직 나무와 밑탑을 6 글자뿐이었다. 그렇게 30년을 하셨다. 아침에 눈 뜨면 연불 밥 지으면서 염분 밤새면서 연불 자기 전에도 연불 손에는 늘 염주를 쥐고 계셨지. 한 번은 손자가 물었다. 할머니 맨날 부처님 찾는데 부처님이 어떻게 생겼어? 할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나도 모른다. 하지만 염보를 하면 마음이 내 집에 온 것처럼 아주 편안해진단다. 손자가 또 물었다. 극락세계는 왜 가려고 해? 여기가 싫어? 할머니가 말했다. 여기도 좋지 하지만 여기는 늙고 병들고 슬픈 일이 많잖아. 극락에는 그런 게 없고 즐거움만 있다더라. 나는 고통 없는 곳에 가고 싶구나. 이 말이 얼마나 소박하고 진실하냐. 어려운 교리는 몰라도 이 괴로운 많은 세상을 떠나 극락을 구하는 마음 연미의 토국은 만나기 확실했던 것이다. 이게 진짜 믿음이다. 마을 사람들은 염불할매라고 불렀다. 미신이라고 비웃는 사람도 있었지만 할머니는 화도 안내고 웃으며 계속 연불만 했다. 어느 날 할머니가 아들에게 말했다. 아미타 부처님이 데리러 오신단다. 나 3일 뒤에 갈거니까 산에 있는 스님들 좀 모셔다. 다오 아들은 어머니가 노망나신 줄 알고 안 믿었지만. 너무 완강하셔서 어쩔 수 없이 스님 몇 분을 모셔왔다. 3일 뒤 할머니는 목욕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침상에 단정히 앉으셨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말했다. 나 이제 간다 너희들 싸우지 말고 잘 살고 옆에 공부를 열심히 해라. 나중에 극락에서 만나자. 그러고는 눈을 감고 연불하다가 편안하게 숨을 거두셨다. 얼굴은 웃고 계셨고 몸은 숨처럼 부드러웠다. 다들 죽은 사람이 이렇게 예쁠 수가 있나 하고 놀라워했다. 허운 스님은 대중을 둘러보며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이 할머니가 그를 알았느냐 참선을 했느냐 그저 30년 동안 바보처럼 우직하게 염불만 했다. 그런데도 갈데가 되니 미리 알고 편안하게 가셨다. 그러니 죽음을 미리 알고 편안하게 가는 건 머리가 좋고 나쁨이나 출가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진짜로 닦느냐 진수에 있다. 진짜로 닦는다는 게 뭐냐를 파는 것이다. 오늘은 염분에다가 내일은 참선했다가 모레는 주무웠다가 이건 수행이 아니다. 그냥 장난치는 거지 진짜 수행자는 한 가지 법을 정하면 죽으나 사나 그것만 판다. 어려움이 와도 유혹이 와도 장애가 와도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하루하루 쌓여서 공부가 익으면 그 할머니처럼 되는 것이다. 할머니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오직 아미타를 하나를 붙잡고 30년을 매달렸다. 나중에는 마음속의 부처님 말고는 아무것도 얻게 된 것이다. 그런 사람이 어찌 정토에 못 가겠느냐 누군가 또 물었습니다. 스님 우직하게 해야 한다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 바빠서 염분할 시간이 없습니다. 허운 스님이 버럭하셨습니다. 누가 염불하는데 시간이 많이 필요하더냐? 염분은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다. 걸을 때 밥 지을 때 일할 때 입으로 소리내기 힘들면 속으로 하면 된다. 이걸 흩어진 마음으로 하는 연불 사념이라 한다. 그리고 또 아침 저녁으로 딱 10분이라도 시간내서 집중적으로 하는 걸 정한 일과 정하라 한다. 이 두 가지를 병행하면 된다. 일 다 때려치우고 산에 들어오라는 게 아니다. 마음만 있으면 시장통해서 염분할 수 있다. 중요한 건 시간이 얼마나 많으냐가 아니라 얼마나 간절하게 하느냐 하루에 1만 번을 해도 건성으로 하면 소용없고 백번을 해도 마음을 다해 부처님을 부르면 그게 진짜다. 그 시골 할머니가 농사짓고 살림하면서 시간이 많아서 염분했겠느냐 마음이 진실했기 때문이다. 그때 허운 스님이 갑자기 목소리 톤을 바꾸시며 경고하셨습니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게 있다. 죽을 때를 알고 편안하게 가는 것을 수행의 목표로 삼지 마라. 사람들이 의아해하자 스님이 설명하셨습니다. 그것은 수행의 결과이지 목적이 아니다. 나도 언제 죽는지 알아야지 나도 멋지게 죽어야지 하고 집착하면 오히려 마구니가 낀다. 그 생각 자체가 욕심이고 번뇌이기 때문이다. 욕심이 껴있는데 마음이 어떻게 맑아지겠느냐? 진짜 수행자는 결과 따위 신경 안 쓴다. 염부라는 사람은 오직 염분만 하고 참선하는 사람은 오직 화도 만 든다. 언제 깨달을지 언제 갈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이걸 바라는 바 없는 마음이라 한다. 바라는 게 없어야 오히려 이루어진다. 앞서 말한 고슴들이나 할머니가 나는 꼭 미리 알고 죽어야지 하고 수행했겠느냐. 아니다 그냥 하다 보니 저절로 됐다 라는 것이다. 만약 매일 그 생각만 했다면 절대 그렇게 못되었을 것이다. 이때 구석에 있던 젊은 스님이 벌떡 일어나 질문을 던졌습니다. 스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생사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는 온통 어떻게 죽느냐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죽을 때를 미리 알고 편안하게 죽으려는 것도 결국 죽음에 대한 집착 아닙니까? 질문이 아주 날카로웠습니다. 모든 시선이 허운 스님에게 쏠렸습니다. 스님은 오셨습니다. 너는 죽는 게 두려우냐. 명언 스님은 잠시 머뭇거리다 솔직하게 대답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두렵습니다. 출가는 했지만 죽음을 생각하면 막막합니다. 솔직해서 좋구나 허은스님이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 인지상정이다. 수행자라도 공부가 부족하면 무서운 법이지. 내가 방금 멋지게 죽으려는 게 집착 아니냐고 물었지? 네 대답은 아니다이다. 오히려 정 반대다. 죽을 때 자유로운 사람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집착을 완전히 내려놓은 사람이다. 보아라 죽기 싫어 발버둥치는 사람들의 임종이 어떠냐 공포에 질려 허우적되고 눈을 못 감고 괴로워한다. 왜냐? 삶에 대한 집착 죽음에 대한 공포가 꽉 차 있어서 못 놓는 것이다. 반면에 편안하게 가는 분들을 보라. 웃으면서 마치 여행 가듯 간다. 이미 삶에 대한 집착을 놓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잘 죽는 것 좌타림망은 죽음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 죽음을 초월한 것이다. 죽음을 통제하는 게 아니라 죽음을 내려놓는 것이다. 명언 스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그런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까? 집착을 버렸다면 고통스럽게 죽든 편안하게 죽든 상관없는 거 아닙니까? 밀리 있는 말이다. 진짜 도인은 죽는 모습에 연연하지 않지 하지만 편안하게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는 3 가지 큰 의미가 있다. 허운 스님은 손가락을 꼽으며 설명하셨습니다. 첫째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다. 오늘 너희가 왜 여기 모였느냐? 해공 스님이 보여주신 그 모습 때문에 감동받아서 모인 것 아니냐. 만약 스님이 평범하게 돌아가셨다면 누가 믿음을 내겠느냐 고승들이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건 사람들에게 아 불법은 진짜구나 하는 믿음을 심어주기 위한 방편이다. 둘째 자기 자신을 위해서다 죽는 순간에 한 생각이 다음 생을 결정한다. 죽을 때 정신이 혼미하고 두려우면 엄역에 끌려가서 어디로 태어날지 모른다. 하지만 죽을 때 정신이 또렷하면 내가 갈 곳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니 임종 때 맑은 정신 점령을 유지하려는 건 집착이 아니라 지혜다. 셋째 이게 제일 중요하다. 잘 죽는 사람은 그만큼 잘 살았다는 증거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생각해보라 죽는 순간의 정신을 차리려면 평소에 얼마나 수행이 잘 되어 있어야겠느냐. 마음이 청정하고 정력이 강하고 지혜가 깊어야 한다. 그런 사람은 살아있을 때 어땠겠느냐. 분명 분명히 평온하고 어떤 위기에도 당황하지 않고 욕심에 휘둘리지 않았을 것이다. 살아 있을 때 이미 자유로운 사람이 죽을 때도 자유로운 법이다. 그러니 잘 죽는 것은 죽음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일생을 얼마나 치열하게 잘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성적표와 같은 것이다. 핵심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얼마나 맑게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명언 스님은 그제야 환해진 얼굴로 합장했습니다. 스님 이제야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허운 스님은 대중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명원이가 좋은 질문을 해줘서 속시원히 말할 수 있었다. 수행은 잘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을 때 명백하게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살아서 명백하면 죽어서도 명백하다. 살아서 흐리멍텅하면 죽어서도 흐리멍덩하다. 그러니 기이한 현상을 좋지 말고 내 마음을 밝히고 생사를 해타라는 걸 목표로 삼아라. 그러면 편안한 죽음은 더불어 따라오는 것이다. 스님은 잠시 숨을 고르시고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말세에 우리가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딱 정리해주겠다. 사람들이 귀를 쫑긋 세웠습니다. 제일 실용적인 부분이니까요. 말세라 사람들은 근기가 약 하고 유혹이 많아 수행하기 힘든 건 사실이다. 하지만 방법만 제대로 알면 다 성취할 수 있다. 내 경험을 바탕으로 몇가지 당부하겠다. 첫째 자기 분수를 알고 맞는 법을 골라라. 삼촌이 맞는 사람은 참손하고. 염분이 좋으면 염분하고 주문이 좋으면 주문을 외워라. 남들이 좋다고 우루루 따라가지 말고 내가 해 보고 마음이 편안하고 환희로운 걸 골 그리고 하나 정했으면 제발 바꾸지 말고 그것만 봐라. 둘째 계율을 지켜라.
계율은 수행의 밑바탕이다. 그릇이 깨져 있으면 물을 못 담듯이
계율을 어기면 마음이 불안해서 선정 집중이 안 생긴다.
마음만 착하면 되지 형식적인 개율이 뭐 중요해라고 하는 건 큰
착각이다. 계율은 너희를 오가매는 게 아니라 너희가 악업을 짓
않게 보호해 주는 울타리다. 술. 마시고 거짓말하고 나쁜 짓하면서 연불백날해 봐라. 밑빠진. 독에 물 붓기다. 기본. 오
것 밥 먹을 때. 반드시 지켜라. 셋째 일상생활 속에서 수행해라. 좌선하고 염분할 때만 수행이 아니다. 걸을 때 딴 생각 안 하는 것 밥 먹을 때 감사하는 것 사람 대할 때 자비로운 마음 쓰는 것 이 모든 게 수행이다. 육조 스님께서 물 긷고 나무 하는 것이 다
라고 하신 게 바로 이 뜻이다 넷째. 내 공부가 어디까지 왔나 스스로? 점검해라. 점검하는. 기준 3 가지를 알려주마 예. 꿈속에서도 정신 차리는가 잘 때 꿈인 줄 아느냐. 꿈속에서도. 연구를 할 수 있느냐. 꿈은. 죽고 난 뒤의 상태와 비슷하다. 꿈에서 헷갈리면 죽어서도 헷갈린다. 이 아플 때도 평온한가? 몸이 아프면 짜증나고 수행하기 싫어진다. 하지만 진짜 공부가 된 사람은 이건 내 업장이다. 생각하고 아픔 속에서도 염분한다. 아플 때가 진짜 시험 무대다. 예치님들은 병 속에서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삶 임종 때 자유로운가? 이건 지금 당장 실험 못하지만 앞에 두 가지가 되면 이것도 된다. 꿈 속에서 주인이 되고 병 속에서 편안하면 죽을 때도 자유롭다. 다섯째 신기한 거 좋지 마라. 요즘 사람들 뭐 어디 용한 스님 있다 하면 우르름 올려가고 기적을 바란다. 다 부질없다. 진짜 수행은 담백한 것이다. 밥 먹고 차마시듯 꾸준히 하는 것이다. 나도 젊을 땐 신통욕 얻으려고 별짓 다 해봤는데 헛수구였다. 마음 내려놓고 우직하게 하니까 오히려 진짜 체험이 오더라. 빨리 가려 하지 말고 소처럼 두벅두벅하라. 허운 스님은 창밖을 보시더니 말씀을 메주셨습니다. 오늘 내가 한 말 요약하면 딱 이거다. 죽음을 미리 아는 건 신통력이 아니다. 공부가 익으면 저절로 안다. 마음이 맑으면 거울처럼 비춘다. 공부가 하나 되면 생사가 자유롭다. 성실한 수행이 답이다. 일상 속에서 마음을 바라 기적 바라지 말고 한 우물만 파라. 이 말만 기억하고 실천하면 너희도 다 할 수 있다.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저를 올렸습니다. 허운 스님은 나가시다가 문앞에서 다시 뒤를 돌아보며 간곡하게 덧붙이셨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하마. 오늘 네 말 듣고 감동받아서 아 나도 열심히 해야지 하고 발심했을 것이다. 근데 작심3일이 문제다. 감동은 쉽지만 꾸준
건 어렵다. 며칠. 지나면 또 흐지부지되고 게을러질 것이다. 수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거다. 냄비처럼. 확 끓었다가 식지 말고
뚝배기처럼 은근하고 끈기 있게 가라. 그래야 죽을 때 웃을 수 있다.
스님은 합장하고 전선이 사라지셨습니다. 사람들은 그 뒷모습
오랫동안 바라보았습니다. 이날의. 법문은 많은 사람의 인생을 바꿨습니다. 그리고. 15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광족사의. 한 노스님이 찾아왔습니다
당시 수제자였던 명덕 스님을 찾았습니다. 법사님. 15년 전 허운 스님께서 여기서 법문하신 거 기억하십니까? 명덕?
반가워하며 말했습니다. 당연히 기억하지요. 제 수행의 지표가 되었습니다. 노스님이. 말했습니다. 제가 그때 당돌하게 질문했던 명
저는. 젊었고 스님 말씀이 반만 이해가 갔습니다. 지난 15년 동안. 스님 말씀을 화두삼아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오 명원 스님. 그동안 공부는 많이 하셨으니까 명원 스님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아직 멀었지요. 하지만. 최근에야 문득. 알게 된 게 하나 있습니다. 무엇
허운? 스님께서 하신 공부가 여기에 이르렀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명덕. 스님이 놀라서 쳐다보았습니다. 스님. 설마. 명원 스님
끄덕였습니다. 저 7일. 뒤에 갑니다. 오늘 작별. 인사하러 왔습니다. 명덕 스님은. 말을 잊지 못했습니다. 명원 스님의. 얼굴을 보니 15년 전에 그 날선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눈빛이 호수처럼 맑고 평온했습니다 스님 정말입니까? 허운 스님? 말씀이 맞았어요. 이건 신통역이. 아니더군요 그냥
때가 된 걸 아는 겁니다. 지난 15년 동안 밥 먹으나 자나 오직 염불만 했습니다.
처음엔 잡생각이 많아서 힘들었는데 나중엔 염불이 저절로 되더군요.
며칠 전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지고 마음이 텅 비면서 투명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아 이제
갈 때가 됐구나 하고 자연스럽게 알았습니다. 명덕스님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스님 울지 마십시오. 그냥 허운 스님 말씀만 기억하십시오. 공부가 되면 저절로
안다 안 되면 구해도 못 얻는다. 의심하지 말고 무직하게 해라. 언젠가 스
알게 될 겁니다. 명원. 스님은 합장하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7일 뒤 명원 스님은 자신의 토굴에서 단정히 앉아 미소를 머금고 떠나셨습니다. 15년. 전 해공 스님과 똑같은 모습
장례를. 치르러 가서 유품을 정리하다가 낡은 공책을 발견했습니다. 첫 페이지에는. 15년 전 허운 스님의 말씀이 적혀 있었습니다. 죽음을 아는. 것은 신통력이 아니다. 마음이 맑으면. 비춘다. 성실하게 닦으면. 저절로 이룬다. 그리고 그. 밑에 명언 스님이 직접 쓴 마지막 메모가 있었습니다. 허운 스님이. 말씀하신 공부가 여기에 이른다는 것 내가 15년을 해보니 이제야 알겠다 이건 죽어서. 아는 게 아니라 살아서 아는 것이다 내가 언제. 죽는지를 아는 게 아니라 내가 지금 이 순간 온전하게 살아있음을 아는 것이다. 이걸 깨달으니. 생사가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명덕 스님은. 그 글을 보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드디어 깨달은 것입니다. 잘 죽는 것은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요. 그들은 죽는 법을 알았던 게 아니라 진짜로 사는 법을 알았던 것입니다. 명덕
스님은 부처님 앞에 엎드려 참회했습니다. 인도간 자신은 여전히 무언가를 바라고 경지를 탐하고 남의 시선을 의식하
했던 것입니다. 명원 스님이나 그 시골 할머니에 비하면 한참 멀었던 것이죠. 스님은 발혼했습니다. 이제
이제부터 모든 망상을 내려놓고 바보처럼 무직하게 염불만 하겠습니다. 신통력도 가뭄도 바라지 않고 오직 내 마음을 밝혀
맑은 정신으로 가겠습니다. 그 순간 명덕 스님은 마음이 한없이 가벼워지는 걸 느꼈습니다. 수행의 비결은 복잡한
게 아니었습니다. 딱 2 글자 성실 로시였습니다. 물형 피우지 말고 욕심내지 말고 중도에 포기하지 말고 묵묵히 나아가는 것 공부가 무르익으면 생산은 저절로 자유로워지는 법입니다. 여러분 굳이 죽을 때를 기다릴 필요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깨어있는 것 지금 이 순간 정성을 다하는 것 그것이 바로 생사를 초월하는 길입니다. 오늘 오늘부터 지금 당장부터 우리도 우직하게 시작해 봅시다. 나무 아미타불 소림사 뒷산에 험준한 동그란 회색 승복을 입은 한 스님이 가부자를 틀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의 표정은 아주 오만해 보였고 온몸에서는 은은한 빛이 감도라 마치 천지와 하나가 된 듯한 기운을 품고 있었죠. 동굴 안에서 벽을 보고 앉아 있던 달마대사가 천천히 몸을 돌렸습니다. 그 깊고 그윽한 눈동자는 마치 오래된 우물처럼 고요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경외심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회색오세 스님은 자신감을 숨기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선사님 저는 지난 2년 동안 선정 수행을 닦아. 이제는 7일 동안 깊은 명상에 들어 있어도 정신이 맑고 잡념이 허터지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이 스님은 달마대사가 9년 동안이나 벽을 보고 수행하여 그 깊이를 알 수 없다는 소문을 듣고 어떻게 하면 더 깊은 선정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지 가르침을 청하러 온 것이었죠. 달마데사는 그를 한참 동안 조용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어 딱 두 글자를 뱉었습니다. 아직 멀었다. 회색옷의 스님은 멍하니 있다가 얼굴에 불쾌한 기색을 스치며 말했습니다. 선사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20년을 뼈를 깎는 고행을 했는데 아직 임문조차 못 했다는 겁니까? 7일 동안 깊은 선정에 드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달마의 목소리는 물처럼 평온했습니다. 물론 대단한 일이지. 하지만 자네는 선정에 가장 높은 경지가 그저 깊은 명상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이 말은 마치 번개처럼 회색옷의 스님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구경하던 다른 스님들까지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명상의 목적이 깊은 선정에 드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보다 더 높은 경지가 있단 말인가? 스님은 표정이 수시로 변하다가 겨우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선사님께서 보시기에 명상의 최고 경진은 무엇입니까? 달마데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먼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무심이다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의아해했습니다. 무심이라니 마음을 죽은 제처럼 만들어서 아무 생각도 안 하는 걸 말하는 건가? 그게 깊은 선정 상태라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지? 더구나? 수행자가 정말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중생을 구제하고 보살의 길을 간다는 말인가? 사람들의 의심스러운 표정을 본 달마대사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담담하게 한마디만 남겼습니다. 너희가 진정으로 무심히 무엇인지 깨닫게 될 때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다시 벽을 향해 돌아앉아 더 이상 사람들을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회세 곳에 스님은 그 자리에 서서 속이 타들어갔습니다. 자신의 깊은 수행력을 인정받고 달마대사의 칭찬과 더 높은 가르침을 얻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알 수 없는 수수께끼만 받았으니까요. 더 곤혹스러운 것은 달마가 말한 무심히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의문은 이 스님뿐만 아니라 당시 불교계 전체를 고민에 빠뜨렸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의 거의 모든 수행자들은 선정의 최고 경지가 깊은 명상에 들어가는 것이고 그 시간이 길수록 좋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고승들이 며칠 심지어 몇 달씩 선정해 드는 것을 영광으로 알았고 이것을 수행력이 높다는 증거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달마데살은 왜 무신만이 최고 경지라고 했을까요? 이 강단에 보이는 두 글자 뒤에 어떤 깊은 불법의 진리가 숨어 있을까요?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달마대사가 동쪽으로 오기 전 서천 인도에 있을 때로 돌아가 이 서천의 조사가 어떻게 이 진리를 깨달았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서기 500년 무렵 먼 나라 인도에서 한 젊은 왕자가 보리수 아래에서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훗날 선종의 시조가 된 달마입니다. 그는 남인도 향지국 왕족 출신으로 매우 총명하고 불법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성인이 된 후 그는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반야다라 존자 밑에서 수행을 시작했죠. 어느 날 달마가 스승에게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스승님 저는 선정 수행을 닦아. 이제 3일 동안 깊은 선정에 들어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이런 선정은 끝이 아닌 것 같습니다. 스승님 선정의 끝은 어디입니까? 반야다라 존재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니가 3일 동안 선정해 든다니 너의 정력이 대단하구나. 하지만 네가 선정의 끝을 묻기 전에 내가 먼저 묻겠다. 너는 왜 선정에 들려고 하느냐 망상을 끊어버리고 번뇌를 멀리하기 위해서입니다. 달마는 주저 없이 대답했습니다. 그럼 네가 선정해서 나온 뒤에는 어떠하냐? 반야다라 존재가 되물었습니다. 달마는 잠시 멈칫했습니다. 선정해서 나오면 다시 망상이 일어나고 번뇌가 생겨납니다. 그렇다면 계속 선정 속에만 머물러 있을 셈이냐?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중생을 구제하라 하셨는데 니가 계속 선정 속에만 있으면 어떻게 중생을 제도하겠느냐? 달마가 깊은 생각에 잠기자 반야다라 존자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선정 수행을 하면서 깊이 들어갈수록 좋다고 생각하고 선정 중에 망상이 생기지 않으면 그것이 깨달음인 줄 안다. 하지만 그것은 망상을 잠시 눌러놓은 것일 뿐 진짜로 끊어낸 것이 아니다. 마치 풀 위에 돌을 올려놓은 것과 같아서 돌을 치우면 풀은 다시 자라나는 법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진정으로 망상을 끊을 수 있습니까? 달마가 급히 물었습니다. 반야다라 존자는 먼 곳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습니다. 망상을 끊는 것이 아니라 망상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망상은 본래 비어있는 것이다. 네가 그것을 끊으려 집착하면 오히려 또 다른 집착에 빠지게 된다. 진정한 선정은 깊이나 시간의 길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머무는 것이 없는 곳 신무소주 신무소주에 있다. 마음이 머무는 곳이 없다. 달마는 생각에 잠겨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렇다 마음이 머무는 곳이 없다는 것이 바로 무심이다. 도심은 마음이 없는 게 아니라 마음이 있되 그 마음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걷고 서고 안고 눕고 밥 먹고 옷 입는 모든 것이 선이다. 하지만 선정이라는 경계에 집착하면 오히려 선의 참뜻을 잃게 된다. 이 말씀은 달마에게 긴 사색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 후로 그는 선정 수행을 계속하면서 스승의 가르침을 세세히 음미했습니다. 점차 그는 스승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문제는 선정에 들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마음의 집착이 있느냐 없느냐였습니다. 어느 날 달마가 나무 아래 앉아 있는데 근처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린 삼이승 2명이 사소한 일로 시끄럽게 싸우고 있었는데 서로 자기가 옳다고 우기고 있었습니다. 달마는 눈을 뜨고 그 광경을 보며 마음속에 어떤 울림을 느꼈습니다. 저 두 삼이승이 끝없이 싸우는 건 마음에 집착이기 때문이 아닌가 서로 내가 맞고 너는 틀렸다는 생각에 집착하니까 번내가 일어나는 것이다. 바로 그때 바람이 불어 나무에서 낙엽이 우수수 떨어졌습니다. 달마는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을 보며 마음이 확 트이는 것을 느꼈습니다. 낙엽은 바람 부는 대로 움직이지만 어디로 가겠다고 고집하지 않는다. 바람에 저항하지도 않고 그저 자연스럽게 떨어진다. 이것이 바로 무심의 경지로구나. 그 순간부터 닮아낸 스승이 말한 무심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무심은 마음을 죽은 제처럼 만들어서 아무 생각도 안 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억지로 생각을 눌러서 억지로 어떤 상태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무심은 순리에 따르고 인연에 따르는 것입니다. 모든 생각과 마음이 일어나지만 그 마음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또 몇 년이 지나 반야다라 존재가 병들어 임종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스승은 달마를 침상 앞으로 불러 말했습니다. 내가 보니 너는 이제 진정으로 무심의 묘한 뜻을 깨달았구나. 하지만 내가 부탁할 것이 하나 있다. 스승님 말씀하십시오. 따르겠습니다. 달마가 공손히 말했습니다. 바냐다라 존재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말했습니다. 동쪽에 진화국 중국의 대승의 기운이 있다. 하지만 그곳의 수행자들은 대부분 명분이나 글자에 집착하거나 신통력을 추구하거나 선정의 즐거움에 빠져 있다. 진정으로 무심의 묘한 뜻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미가 그곳으로 가서 진정 인연이 있는 사람을 찾아 이 무심의 번맥을 이어가도록 해라. 제자 달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습니다. 하지만 제게 의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 진화국에는 고승 대덕들이 많다는데 어째서 스승님께서는 진정으로 무심을 하는 자가 드물다고 하십니까? 반야다라 존재는 탄식하며 말했습니다. 바로 그 고승 대덕이 너무 많다는 것이 장애가 된다. 그들은 모두 자기 수행의 경지에 집착한다. 어떤 이는 경전에 어떤 이는 선정에 어떤 이는 신통력에 집착하여 불법의 근본인 무심을 잊어버렸다. 네가 그곳에 가면 알게 될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반야다라 존재는 편안하게 눈을 감았습니다. 달마는 스승의 유언을 받들어 동쪽 중국으로 갈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은 험난하고 위험이 가득한 바닷길이었습니다. 많은 제자가 말렸지만 달마의 뜻은 굳건했습니다. 3년 동안 바다 위를 떠도는 동안 달마는 수없이 많은 생사의 고비를 넘겼습니다. 한 번은 큰 폭풍우에 만나 배가 뒤집힐 뻔했습니다. 배 안에 사람들은 모두 공포에 질려 허둥지둥했지만 유독 달마만이 편안하게 앉아 표정이 호수처럼 고요했습니다. 폭풍이 지나간 후 누군가 물었습니다. 스님 방금 그렇게 위험했는데 왜 하나도 무서워하지 않으십니까? 선정해 드신 겁니까? 달마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나는 선정에 들지 않았소 그럼 어떻게 그렇게 침착하실 수 있죠? 그 사람은 더욱 궁금해했습니다. 그저 무심했을 뿐입니다. 달마다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죽고 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니 무서워하는 것도 좋고 너무 무서워하는 것도 좋습니다. 올 것은 오고 갈 것은 가는 법입니다. 나는 억지로 안 무서워하려고 하지도 않고 공포에 내맡기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자연스럽게 두었을 뿐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무심입니다. 배 위에 사람들은 알듯 말듯했습니다. 그들은 닮아가 선정의 힘으로 공포를 극복했다고 생각했지만 진정무심은 공포를 극복해야지라는 생각조차 없는 것입니다. 공포를 이겨내려는 생각이 있다면 이미 마음이 있는 USIM 것이니까요. 3년의 항해는 달마에게 무심에 대한 더 깊은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그는 진정한 무심이 단순히 좌선할 때만 필요한 게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에 관통해야 함을 알았습니다. 어떤 상황을 만나든 마음이 경계에 휘둘리지 않고 생각에 끌려다니지 않는 것 이것이 진짜 무심이었습니다. 서기 527년 달마는 마침내 남조 양나라에 광주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 잠시 머무는데 양무제 소현이 불법을 깊이 믿어 저를 짓고 스님을 도우며 공덕을 쌓는다는 소문을 듣고 달마는 금릉 남경으로 가서 이 황제를 만나기로 했습니다. 건강성의 궁전은 화려했습니다. 양무제는 용상에 앉아 서천에서 온 고승을 맞이하며 기뻐했습니다. 그는 즉위한 일에 수많은 절을 짓고 수천 명의 승려를 출가시키고 유경을 베껴 쓰고 승려들을 공양했습니다. 선사 짐에게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 양무제가 기대에 차서 물었습니다. 그는 서천에 고승이 자신의 공덕이 무량하다고 칭찬해 줄 거라 믿었죠. 하지만 달마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습니다. 공덕이 없습니다. 소무공덕 이 네 글자는 양무제에게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았습니다. 황제의 얼굴이 굳어졌습니다. 짐이 저를 짓고 삼보를 공양했는데 어째서 공덕이 없단 말이요? 폐하께서 하신 일은 인천 인간과 천상의 작은 과보일 뿐 번뇌가 있는 원인입니다. 달마가 평온하게 말했습니다 마치 그림자처럼 있어 보이지만 결국 허망한 것입니다. 도시의 진정한 공덕은 지혜가 밝고 마음이 비어 고요한 것인데 이것은 세상의 방법으로 구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양무제는 더욱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 무엇이 진짜 공덕입니까? 지혜가 깨끗하고 묘하며 본체가 스스로 비어 고요하니 이런 공덕은 세상의 것으로 구할 수 없습니다. 양무제는 눈살을 찌푸렸습니다. 달마의 말이 너무 심오해서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무엇이 성스러운 진리의 으뜸입니까? 제 1의 제 팍 트여서 성스러움도 없습니다. 확연 무성 달마가 간결하게 답했습니다. 짐을 마주하고 있는 그대는 누구입니까? 양무제가 화를 참으며 물었습니다 모릅니다. 불식 양무제는 완전히 화가 났습니다. 이 서천에서 온 승려가 오만하고 무례할 뿐만 아니라 말도 안 되는 소리만 한다고 생각했죠. 결국 그는 손을 저어 달마를 물러가게 했습니다. 붐을 나온 달마는 북쪽으로 올라가 숭산 소림사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절 뒤편에 산동굴에 멈춰서서 그 유명한 몇몇 9년 9년 동안 벽을 바라보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달마다 구 년 동안 폐관수련을 하며 깊은 선정에 들었다고 생각하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달마의 면벽은 선정에 드는 것이 아니라 무심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었고 진짜 인연이 있는 제자를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억지로 어떤 경지에 들어가려 하지도 않았고 어떤 수행법에 집착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자연스럽게 앉아 마음을 거울처럼 하여 사물이 오면 비추고 가면 남기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겨울 눈이 펑펑 내릴 때 새 한 마리가 동굴 입구로 날아왔다가 조각상처럼 움직이는 달마의 머리 위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달마는 알았지만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새가 머리 위에 있는 게 무슨 상관일까요? 수행에 방해되지도 않고 마음에도 영향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무심입니다 알지만 머물지 않는 것 응하지만 집착하지 않는 것 일반적인 선정 수행자라면 감각을 차단해서 새가 온 줄도 몰랐겠지만 달마다 그 다음에 주변의 모든 것을 알면서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해 봄 거미 한 마리가 달마 앞에 줄을 쳤습니다. 하루 종일 걸려 정교한 거미줄을 만들었죠. 달마는 조용히 바라보며 부수지도 칭찬하지도 않았습니다. 거미가 줄을 치는 건 거미의 본성이고 거미줄이 아름답다. 추라다 하는 건 인간의 분별심일 뿐 발마의 무심과는 상관없었으니까요. 세 번째 해 여름 동 부글바글 돌틈에서 풀이 자라나 닮아야 옷자락 옆까지 올라왔습니다. 달마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푸른 풀의 생명이 있고 그는 그의 수행이 있으니 서로 방해될 게 없었습니다. 그렇게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며 달마는 동굴에서 한 해 한 해를 보냈습니다. 남들이 보기엔 벽을 보고 입정 선정에 든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무심의 상태를 유지하며 이 묘한 뜻을 이해할 제자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기다림은 9년째 되던 해까지 이어졌습니다. 그 해 겨울 살을래는 듯한 추위와 함께 눈보라가 몰아쳐.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습니다. 그 때 체격이 건장한 중년 남자가 동굴 앞에 와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눈이 온 몸을 덮어도 그는 꼼짝 않고 동굴 안에 달마를 응시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해가입니다. 본명은 신광으로 젊어서 유교와 도교의 책을 섭렵했으나 인생의 무상함을 느껴 출가했습니다. 그는 여러 곳을 다니며 많은 선정법을 배웠고 꽤 깊은 정력을 가졌다고 자부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의문을 풀 수 없었습니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추구하는가? 그는 달마가 소림사에서 면벽 수행 중이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동굴 밖에서 하루를 꼬박꼬박 앉아 있었지만 달마는 거들떠보*도 않았습니다. 이튿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 폭설이 내려 눈이 무릎까지 차올랐습니다. 달마는 밖에 임기척을 알았지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냉혹해서가 아니라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해가가 거칠해가 아닌 진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사흘째 해질 무렵 해가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는 품에서 칼을 꺼내 자신의 왼쪽 팔을 단숨에 잘랐습니다. 선열이 눈밭을 붉게 물들였습니다. 그러나 해가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남은 오른손으로 잘린 팔을 들고 달마. 앞으로 다가와 공손이 말했습니다. 선사님 제 팔을 바칩니다. 부디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십시오. 안심 안심 그제야 닮아가 몸을 돌렸습니다. 깊은 눈으로 해가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그 불안한 마음을 네게 가져오너라 내가 편안하게 해주겠다 해가는 멍해졌습니다. 마음을 가져오라니 마음이 어디 있지? 그는 눈을 감고 내면을 뒤져 그 불안한 마음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찾았지만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이 도대체 어디 있는가? 몸속에 살과 뼈뿐인데 생각 속에 생각은 생겨났다 사라지는데 어느 게 진짜 마음인가 한참 뒤 해가가 눈을 뜨고 허탈하게 말했습니다. 제 마음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역심요 불가득 달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미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아 여여 안심 이 한마디는 번개처럼 해가의 영혼을 때렸습니다. 그는 문득 깨달았습니다. 마음이란 본래 실체가 없어 얻을 수 없는 것인데 자신이 그동안 불안한 마음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없애려고 괴로워했다는 것을요. 마음이 없는데 편안하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선사님 알겠습니다. 해가가 감격해서 외쳤습니다. 저는 그동안 선정을 통해 마음을 안정시키려 했는데 그것 자체가 집착이었습니다. 마음은 본래 모양이 없으니 편안하게 할 필요도 없었던 것입니다. 너는 첫 번째 단계만 깨달았다. 닮아가 말했습니다. 너는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건 알았지만 그 얻을 수 없는 마음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는 아직 모른다. 해가는 의아해하며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달마는 동물 몽골 밖에 눈을 가리켰습니다. 저 눈송이가 하늘에서 떨어질 때 눈송이 모양을 유지하려고 고집하더냐. 아니요 그 눈송이가 땅에 닿아 물이 되면 눈송이가 아니더냐 해가 생각에 잠기자 달마가 계속했습니다. 눈이 물이 되어도 형태는 변했지만 본질은 무리다. 무심도 마찬가지다. 아무 생각도 안 하는 게 아니라 눈송이처럼 인연 따라 변화돼 어떤 형태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너는 지금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만약 마음은 얻을 수 없다는 그 생각에 또 집착한다면 그건 또 다른 집착에 빠지는 것이다. 해가는 깊은 생각 끝에 크게 깨달았습니다. 제자. 알겠습니다 무심은 마음이 없는 게 아니라 마음이 있으되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눈이 내리고 녹는 것이 자연스럽듯이 억지로 할 필요도 집착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제 조금 알기 시작했구나. 달마가 흐뭇해하며 물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것과 실천하는 건 다르다. 내 묻겠다. 팔을 잘라 피가 나는데 아프냐 해가는 무의식적으로 잘린 팔을 보며 말했습니다. 아픕니다. 그럼 너의 마음이 그 아픔에 휘둘리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