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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하게 앉아 있어. 뭐 간단한 안주거리라도 만들 테니까.”
옷을 갈아입고 나온 강우가 인서를 소파에 앉히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거실 테이블에 와인과 두 개의 잔, 카나페와 연어샐러드가 차려졌다.
“성공적인 리사이틀을 마친 나를 위하여.”
강우가 잔을 들고 스스로를 위해 건배하자 인서도 어쩔 수 없이 잔을 들었다.
“자, 한마디 해.”
“네??”
“건배사를 하라고.”
“.......별로 할 말이...”
“빨리. 뭐라도 말해봐.”
“.....음......... 지나..를.. 위하여?...”
“그딴 털복숭이를 위해 건배하다니... 뭐... 어쨌든... 됐어. 똥고양이를 위하여”
얇은 와인잔이 부딪치는 경쾌한 소리가 났다.
향 만큼이나 맛도 깊은 와인이었다.
인서는 입안을 감도는 꽃향기에 살며시 미소 지었다.
와인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꽤나 고급스런 맛이란 건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오늘 얼마나 굉장했는지 알아?”
와인병이 비워져 가자 살짝 취기가 오른 강우가 자신의 공연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잡지, 신문, 클래식 방송 채널에서도 취재를 나왔었다고.”
“아...그래요?”
“그럼! 공연이 끝나자마자 몰려들어 플래쉬 세례를 쏟아내는데 일일이 취재에 응해줄 수 없을 지경이었다니까!”
“와아.. 대단해요.”
“후후, 그렇지? 내가 좀 유명하긴 하지만 오늘의 독주회로 더더욱 유명세를 떨치게 될 거야. 벌써 다음 공연 스케줄을 잡자고 여기저기 에이전시에서 난리거든. 하하하”
건아하게 취해가며 그의 자화자찬도 한껏 날개를 펼치기 시작했다.
“자자, 여기 더 비싼 와인이 있다고.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 특별히 서비스하지.”
“와아, 감사합니다.”
둘 다 술이 세지 않아 인서도 강우 못지않게 알딸딸하게 취해 있었다.
“한번은 이탈리아에서 공연이 있었는데 호텔에서 점심 먹은 게 잘못된 거야. 공연까지 1시간도 안 남았는데 갑자기 배가 뒤틀리며 식은땀이 줄줄 나기 시작했어. 눈앞이 노랗고 미치겠는 거야.”
“그래서요?”
“그래서는 뭘 그래서야. 일단 참는데 까지 참아보자는 생각으로 공연에 들어갔지.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기억도 안 나. 아래서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고 구역질은 치밀고... 손에 땀이 나서 몇 번이나 손가락이 미끄러질 뻔 했지. 그래도 나의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버텨냈어. 그러다 결국 마지막 곡이 끝남과 동시에 화장실로 뛰어갔지. 무대인사고 뭐고 화장실에서 미친 듯이 쏟아내고 병원으로 실려 갔어. 하마터면 공연장에서 참극이 벌어질 뻔 했다니까.”
“하하하하! 그랬으면 월드뉴스에 소개됐을 거예요. 한국의 유명 피아니스트 공연 중 ... 싸버리다!.... 풋... 하하하하!”
“큭큭큭... 그랬음 난 영원히 공연계를 떠났을 거야. 나의 쿨하고 뷰티한 이미지에 그런 치명상을 입힐 순 없어!”
“하하하! 자기 입으로 뷰티하대! 하하”
어느새 와인 두 병이 비우고 세 번째 병도 반쯤 비어가자 두 사람 모두 잔뜩 취해 완전히 혀가 꼬부라지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뷰티하고 핸섬한 걸 어쩌겠어~”
“하하하하! 인정! 겉모습이 멀쩡한 건 인정! 게다가.. 피아노 칠 때 진짜 근사해요. 완전 멋져”
“피아노! 피아노!!”
인서의 멋지다는 말에 한껏 고양된 강우는 비틀대며 일어나 피아노로 달려갔다.
완전히 취해 몸은 말을 듣지 않는대도 피아노 치는 실력만은 제정신이었다.
“브라보! 브라보!!”
인서도 역시나 정신없이 취해서 와인잔을 들고 비틀비틀 걸어오며 평소라면 절대 입 밖에 낼 일 없는 단어까지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자, 다음은 우리 유인서씨가 맨 처음 신청했던 그 곡! 엘리제를 위하여!!”
“와아!-”
인서가 좋다고 박수를 치자 강우는 현란하게 편곡된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빨라지다 느려지고 한없이 감미롭게 이어지다 어느 순간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고 강하게 연주한다.
인서는 강우가 앉은 피아노의자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황홀경에 빠진 사람처럼 넋 놓고 그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최고! 당신은 최고의 피아니스트야!!”
“하하하하! 하하하하!”
밤이 깊도록 두 주정뱅이의 수다는 오래오래 이어졌다.
***
다음날 아침, 간밤의 숙취로 깨질듯이 아픈 머리를 움켜쥐고 인서는 겨우 눈을 떴다.
속이 쥐어짜듯 쓰리고 아파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키려는데 온 몸이 뭔가에 결박된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윽... 뭐...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
코가 닿을 듯 가까이 있는 사람의 얼굴에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다.
가까스로 초점을 맞춰 확인하자 차강우였다.
“....읏....”
인서가 눈을 뜬 곳은 바로 강우의 방. 그의 침대 위였다.
게다가 강우의 팔다리가 인서의 몸을 바짝 끌어안고 있어 일어날 수도 없었다.
인서는 열심히 기억을 떠올려보려 했다.
어젯밤 늦게까지 와인을 마시며 잔뜩 취했고 어렴풋이 피아노 연주를 들었던 것 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는 영 생각이 안 난다.
지금 상황으로 보아하니 그 후로 둘 다 인사불성이 되어 한 침대에 올라 뒤엉켜 잠이 든 게 분명했다.
“으음... 깼어? 더 자...”
“읏!!”
강우의 눈이 반쯤 떠지는 가 싶더니 이내 인형을 끌어안고 잠 든 아이처럼 인서의 몸을 더 바짝 품에 안고는 다시 잠이 들었다.
이러다 또 누군가와 착각해 키스하는 건 아닐까 순간적으로 긴장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강우는 그대로 규칙적인 숨을 내쉬며 자고 있었다.
그러나 인서는 눈을 뜬 이후 심장이 쿵쾅거려 다시 잠들 수 없었다.
따뜻하고 넓은 품에 폭 안겨 있는 모습은 사랑하는 사람과 늘 꿈꿔 오던 장면이었다.
꼭 껴안은 채 한 침대에서 잠들고 일어나는 일상.
그건 말 그대로 인서에게는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차강우와 인서가 서로 사랑하는 연인관계는 아니었지만 상상으로나마 동경해오던 장면이 현실로 나타나자 당황스러우면서도 가슴이 뛰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그렇게 혼자 두근거려봤자 차강우 이 사람은 아무 생각도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두근거리지만 한편으로 씁쓸하기도 했다.
이 따뜻한 품은 자신의 것이 아니다.
꼭 끌어안은 강한 두 팔도, 이따금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톡톡 두드리는 손길도 모두 그가 잠결에 연인에게 하는 것이지 인서에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여기서 울면 정말 이상한 사람이 될 것 같아 인서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참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강우의 품에서 벗어나 조용히 방을 나왔다.
거실엔 간밤에 벌인 와인파티의 잔해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가 무척이나 아끼는 고가의 피아노 위에도 먹다 남은 와인잔이 그대로 올려져 있고 테이블엔 흘린 음식과 빈 접시가 너저분하게 놓여 있었다.
인서는 간단하게나마 테이블을 정리하고 아침이 환하게 밝기 전 그 집을 나왔다.
***
[고양이]라는 목적이 사라지자 인서와 차강우의 접점 또한 없어져 버렸다.
원래 친분이 있었던 사이도 아니고, 딱히 친하게 지내야 할 이유도 없다.
여태껏 동네를 지나며 마주친 적 한번 없을 만큼 활동 시간이나 라이프 스타일도 다르다.
인서는 강우를 만나기 전의 일상으로 되돌아왔다.
일찍 일어나 가게를 청소하고 동물들을 돌보며 오픈 준비를 한다.
찾아오는 손님들을 상대하며 부족한 물건들을 채워 넣고 새로 필요한 것들을 주문하다보면 금방 오전 시간이 지나간다.
점심을 먹고 동물들을 데리고 산책을 다녀와 목욕시키고 필요할 땐 병원도 데리고 갔다 온다.
누나가 좋아하는 TV드라마 얘기를 하고, 이따금 손님들이 늘어놓는 수다도 들어주다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 밤이 된다.
가게 문을 닫고 맡겨진 동물들이 잘 잠들 수 있게 일일이 살펴본 뒤 좁은 방으로 돌아오면 그날의 일과가 모두 끝이 난다.
하루의 피로를 샤워기 물줄기 아래서 씻어낸 후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게 일주일. 또 일주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하아....”
인서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불을 끄고 이불 속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요 근래 계속 이렇다.
전에는 피곤해서 눕자마자 잠이 들었는데 요즘은 이리저리 뒤척이며 쉽게 잠들지 못했다.
사실, 불면의 이유는 알고 있다.
그렇다고 그 이유를 쉽게 받아들일 순 없었다.
“...하아......”
또 다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러지 말자. 정신 차려!”
스스로를 다그치며 자기 뺨을 찰싹하고 때렸다.
가뜩이나 잠이 오지 않는데 더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다.
결국 한참을 뒤척이던 인서는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어차피 잠도 안 오는데 가만히 누워 있는 게 갑갑했다.
간절히 커피가 마시고 싶은 마음에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다 달콤한 인스턴트 커피를 탔다.
비좁은 방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커피를 마셨다.
“...훗....유인서.. 이 바보 같은 놈...”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올 지경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 애써 표정관리를 하고 있지만 지금 인서의 가슴에선 폭풍이 일고 있었다.
별 거 아니라고,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거라고 몇 번이고 스스로를 달래보지만 이 마음의 폭풍은 벌써 2주가 지나는 데도 없어지기는커녕 점점 더 커져 기어이 불면증이란 귀찮은 병까지 얻어버렸다.
사실 차강우는 전혀 인서가 좋아할 타입이 아니었다.
인서는 좀 더 사람냄새 나는.. 조금은 못나고 모자라 옆에서 챙겨 주어야 할 것 같은 사람에게 더 끌리는 성향이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오랫동안 권영의 옆에서 그를 짝사랑해 왔는지도 모른다.
이래저래 이용당하는 걸 알면서도 그가 매달리면 뿌리칠 수가 없었다.
‘너 밖에 없어’ ‘네가 아니었음 큰일 날 뻔 했어.’ ‘한번만 더 도와줘, 부탁이야.. 응? 인서야’
그가 매번 반복하는 말에 잘도 끌려 다녔다.
이제 와 생각하면 그때의 자신은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 같았다.
권영에게 휘둘리고 이용당하며 이따금 그가 툭 내던지는 립서비스에 가슴 설레고 뿌듯해했던 걸 생각하면 어이가 없다.
결국 이용가치가 떨어지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배신하고 여자와 떠나버렸다.
모든 빚을 인서에게 떠넘기고...
그 무거운 빚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서는 모든 걸 잃어야 했다.
결국 제대로 된 취직자리에 이력서조차 낼 수 없는 처지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돈을 잃은 것뿐이라면 차라리 견디기 쉬웠을지 모른다.
오랜 시간 사랑해왔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아픔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마음껏 조롱당한 상처는 가슴 한 구석에 꽤 깊게 자리 잡아 보통의 일상생활로 돌아오기까지 많이 힘겨웠었다.
상처 난 마음을 치유해준 건 사람이 아닌 부드러운 털과 따뜻한 체온을 가진 동물들이었다.
누나의 가게에서 수많은 동물들과 부대끼면서 인서는 겨우 일상으로 되돌아왔다.
이제야 평온한 마음을 갖고 하루하루를 보내기 시작했는데 또 다시 미지의 폭풍이 다가오려 한다.
인서는 두려웠다.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두 번 다시 짝사랑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너무 자신에게 불리하고 일방적으로 상처받을 수 밖에 없다는 걸 경험상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자신과 같은 성향의 사람을 찾아 나설 용기도 없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그저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아무 사심 없이 기대오는 사랑스런 동물들을 돌보며 살아갈 생각이었다.
그런 인서 앞에 나타난 강우는 애써 외면하고 싶은 감정으로 자꾸만 인서를 몰아갔다.
그래봤자 혼자만의 감정임을 알기에 인서는 서글펐다.
내일 세상이 끝난다 해도 차강우에게 자신은 그저 애견샵 점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혼자 애달프게 고민해봐야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다.
그게 바로 짝사랑인 것이다.
오늘도 인서는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
지나를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또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원래 주인이었던 강우의 전 여자친구에게 보낸 게 벌써 3주 전인 것이다.
이 동네에 다시 나타날 리 없는 그 고양이를 인서는 영업시간이 끝날 무렵 가게 근처 어두운 골목길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하지만 지나는 예전의 그 ‘지나’가 아니었다.
길고 풍성했던 털은 진흙탕에 뒹굴었는지 온통 엉겨 붙어 더러워져 있었고, 눈곱이 잔뜩 낀 눈 하며 어디서 다쳤는지 앞발까지 살짝 절고 있었다.
“지나야!”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지만 인서는 금방 그 고양이가 지나란 걸 알아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주일 내내 밤낮으로 붙어있다시피 했던 고양이다.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게다가 지나는 인서가 부르자마자 목이 메는 소리로 울어대며 절뚝절뚝 뛰어왔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이 몰골은 또 뭐고! 너 집 나왔니?”
인서가 고양이를 안아들었다.
앞발이 아픈 지 신음소리를 냈다.
“다친 거야?! 대체 어디서!!”
대답해 줄 리 만무하지만 인서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다그쳐 물었다.
“안되겠다. 일단 병원부터 가자”
인서는 급히 가게 문을 닫고 24시간 영업하는 근처 동물병원으로 뛰어갔다.
얼마나 길에서 헤매며 굶주렸는지 그렇게 통통하던 배가 홀쭉해져 있었다.
진찰 결과 오른쪽 앞발에 살짝 실금이 가 있었다.
아무래도 차를 피하려다 다친 것 같았다.
큰 사고가 나지 않은 게 다행이다.
그토록 깨끗하고 윤기 나던 털을 앞발깁스와 진드기 때문에 몽땅 밀어야 했다.
가벼운 마취로 재운 뒤 재빨리 털을 깎고 목욕까지 시켰다. 그리고 깨어나기 전 치료도 마쳤다.
병원을 나와 가게로 돌아오자 자정이 훌쩍 넘어 있었다.
인서는 지나를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들어와 부드럽게 불린 사료와 캔을 섞어 주었다.
고양이는 며칠 굶은 것처럼 허겁지겁 순식간에 그릇을 비웠다.
밥과 물을 배불리 먹은 지나는 푹신하게 깐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금세 잠이 들었다.
인서는 털이 몽땅 밀려 완전 다른 모습으로 변한 지나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대체 지나가 왜 이 동네에 나타난 걸까? 그것도 갖은 고생을 한 길고양이 모습으로...
인서는 지나의 진짜 주인인 그 여자의 연락처를 모른다.
강우의 전화번호는 알고 있지만 와인에 취해 그 집에서 자고 일어난 후 한번도 연락해 본 적 없다.
물론 연락이 온 적도 없었다.
인서는 휴대폰을 들고 고민하다 늦은 시간이라 실례인 줄 알면서도 강우의 번호를 눌렀다.
어쨌든 지나가 여기 있다는 걸 알려야 했다.
신호음이 들렸다.
다시는 만날 일 없다고 생각했던 상대와의 통화라 무척이나 긴장되었다.
하지만 자고 있는 지 한참을 전화벨이 울려도 상대방은 받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인서는 강우에게 문자를 남겼다.
지나를 가게 근처에서 발견했고 다쳐서 치료도 했다는 내용이었다.
내일 아침에라도 문자를 보면 그에게서 무슨 연락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강우에게선 연락이 오지 않았다.
전화도 몇 번 걸어 보았지만 여전히 받지 않았다.
주인에게 직접 연락을 하고 싶어도 강우를 통하지 않고는 그녀의 전화번호를 모른다.
집으로도 찾아가 보았지만 외출중인지 초인종을 눌러도 대답이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그 사이 지나는 빠르게 회복되어 갔다.
아직 털이 자라려면 멀었지만 절뚝대던 앞발을 이제는 제대로 디딜 수 있게 되었다.
영양가 있게 잘 먹인 덕분에 바짝 말랐던 몸도 다시 통통해져 갔다.
계속 강우와 연락이 안 되자 이제 그만 포기해야겠다고 결심한 날 느닷없이 그가 가게에 나타났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 못생긴 고양이가 왜 다시 나타나?”
다짜고짜 가게로 쳐들어온 그는 지나를 찾는 듯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지나는 제 방에 있어요.”
허락도 구하지 않고 가게 안쪽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는 강우를 인서는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한 달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인서는 긴장되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그를 뒤쫓아 갔다.
강우가 방문을 열자 방석위에서 자고 있던 지나가 귀찮은 듯 고개를 들고 야옹하고 운다.
“털이 없으니 더 못생겨졌군. 저 녀석이 왜 여기 있는 거야?”
“제가 묻고 싶은 말이네요. 어떻게 된 거에요? 지나는 그때 그 여자분이 데려간 거 아니었나요?”
“맞아. 나도 그 이후로는 몰라. 이미 끝난 여자랑 연락하고 살진 않으니까.”
인서는 지나를 처음 발견했던 때의 장소와 상황을 얘기해주었다.
“거지꼴로 다쳐서 발견되다니. 대체 무슨 일인지...”
강우는 어이가 없단 듯 혀를 찼다.
“지나가 길을 잃은 걸지도 몰라요. 지금 주인이 애타게 찾고 있을 지도 모르고요. 전화 좀 해주세요.”
“뭐?! 내가 왜!”
“연락처를 알고 있잖아요.”
“쳇. 그 여자랑 통화하고 싶지 않아.”
“그럼 전화번호 알려 주세요. 제가 해볼게요.”
강우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꺼내 전화번호를 보여주었다.
인서는 여자의 번호를 저장하며 지나가는 말투로 무심한 척 물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연락이 안 되는 거예요?”
“아아.. 일본에서 공연이 있었어. 좀 전에 겨우 집에 돌아왔다고. 휴대폰 켜자마자 이상한 문자가 보이기에 여기로 바로 달려온 거야.”
..그랬..구나... 일본...
인서는 괜스레 안도했다.
일부러 무시해서 전화를 안 받거나 문자를 씹은 게 아니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졌다.
“빨리 전화해봐.”
강우가 인서를 재촉했다.
인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네, 안녕하세요. 지나 주인분 맞으시죠?”
[네? 누구요?]
“‘지나’요. 고양이.”
[... ...누구세요?]
“저는 지난번에 차강우씨 집 앞에서 봤던 애견샵 직원입니다. 제가 며칠 전에 지나를 길에서 발견했거든요. 이제야 주인분 연락처를 알아서 전화 드리는 겁니다.”
[아아... 잘 됐네요. 마침 애견샵이라고 하니 그쪽에서 알아서 해 주세요]
“네? 그게 무슨...”
[새로 사귀는 사람이 고양이 알레르기에요. 창문을 열어놨더니 나가길래 그냥 뒀는데 그쪽 동네까지 갔나보군요. 잘 됐어요. 알아서 처분해 주세요.]
“이봐요! 처분이라니요!”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당신이 기르던 동물이잖아! 가족 아니었어?!”
여자의 말에 화가 난 인서는 그답지 않게 격앙되어 소리 질렀다.
옆에 있던 강우가 의아한 표정으로 왜 그러냐고 묻는다.
[그깟 고양이 한 마리가 무슨 대수라고. 자기 발로 집에서 나갔으니 난 모르는 일이야. 죽이든 살리든 주은 사람이 알아서 하세요. 그리고 다시는 연락하지 말아요.]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겼다.
너무 화가 나 인서는 곧장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그 사이 수신거부로 해놨는지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럴 수가!”
전화를 끊은 인서는 격분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씩씩거리며 이리저리 서성였다.
“뭐야? 그 여자가 뭐래?”
“... 일부러 버린 것 같아요.”
“뭐?!!”
강우도 놀랐는지 말문이 막힌 모습이다.
“...이기적인 인간. 그런 짓을 하다니...”
인서는 겨우 화를 누르고 웅크려 앉아 지나를 꼭 끌어안았다.
동물과 사람의 관계에서 늘 나쁜 건 사람이다.
먼저 설레발치며 좋아하다 먼저 아무렇지 않게 버린다.
동물들은 영문도 모른 체 사람이 좋아하면 좋아하는 대로 휘둘리고 싫증나면 싫증나는 대로 버려진다.
그렇게 한때 따뜻한 집에서 보살핌 받던 동물들은 아무 것도 아닌 이유 하나로 차가운 길거리로 내쳐져 추위와 두려움에 떨며 쓰다듬던 주인의 손길을 그리워한다.
그녀에게 일부러 버려진 지나는 살 길을 찾아 본능적으로 자신을 돌봐주었던 사람들이 있던 곳으로 온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길고양이들의 텃새와 공격을 피하고 사람들의 애꿎은 발길질과 욕설을 받으며 차에 치이고, 더러운 진흙탕을 뒹굴며 겨우겨우 도착한 것이다.
그렇게 인서에게 발견되기까지 지나는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을 것이다.
그런 지나가 대견하기도 하고 너무 안쓰러워 인서는 꼭 끌어안고 몇 번이나 입을 맞추었다.
“원래 싸가지 없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가 기르는 동물에게까지 그럴 줄은 몰랐군. 나름 잘 돌본다고 생각했었는데...”
애지중지 위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 애완동물을 자신의 액세서리 정도로 밖엔 취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어떡할 거야? 주인이 찾으러 올 생각이 없다고 하잖아.”
“그러게요... 여기서 기르고 싶지만 보다시피 다른 동물들도 너무 많고 비좁은 방에서 살기엔 적합하지 않고......”
인서가 말끝을 흐리며 슬쩍 강우를 올려다보았다.
"뭐야? 왜 그렇게 보는 거야? 내가 이런 못생긴 고양이를 기를 인간으로 보여?“
강우가 그 잘생긴 눈을 치켜뜨며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다.
“그럼 새로운 입양처를 알아볼 때 까지만 탁묘를 부탁해도 될까요?”
“탁묘? 우리 집이 무슨 탁아소인줄 알아?!”
“부탁 좀 드릴게요. 사료나 모래 같은 필요한 물건들은 제가 다 보내 드릴게요. 이런 좁은 방에만 가둬두기 안쓰럽잖아요. 차강우씨 집은 넓고 전에 잠깐이지만 지냈던 기억이 있으니 낯선 곳보다 훨씬 적응하기 좋을 거예요. 지나도 지금 많이 지친 상태니까 잠시라도 편안하고 좋은 곳에서 쉬게 하고 싶어요.”
인서가 지나를 안고 불쌍한 표정으로 말했다.
때마침 지나도 구성진 목소리로 야옹하고 길게 울어댔다.
“이제야 한국과 일본에서 하는 공연 마치고 좀 쉴까 했더니 나보고 고양이 뒤치다꺼리나 하라고?”
“사료도 제가 주고, 화장실도 깨끗이 치울게요.”
“나 원 참....”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주세요. 달려갈게요.”
“.......쳇....”
강우는 짜증스런 표정으로 고민하다 결국엔 승낙해주었다.
“감사합니다!”
“대신 돌보는 건 당신이 해. 난 몰라.”
“네. 제가 다 할게요.”
안심이 되어 그런지 인서는 자신도 모르게 활짝 웃어버렸다.
그런 인서를 바라보던 강우의 표정이 순간 멈칫했다.
환하게 미소 짓는 인서의 얼굴은 나이보다 훨씬 어리고 순진해 보였다.
그 미소를 보며 강우 또한 동화된 듯 따라 웃어버렸다.
“정말 오지랖 넓은 사람이군.”
“... 뭐, 동물에 한해서 지만요.”
“일단 이 녀석은 지금 데려갈게. 이따 밤에 필요한 것 챙겨갖고 집으로 와.”
“네.”
“분명히 말하지만 맡아줄 사람이 나타날 때 까지 만이야!”
“그럼요. 인터넷에도 올리고 저도 따로 열심히 알아볼게요.”
인서의 다짐을 받아낸 후에야 강우는 지나를 한 팔로 안아들고 성큼성큼 가게를 나갔다.
손가락에 상처가 생길까 절대 고양이를 안아주지 않던 사람이기에 그런 강우를 보며 인서는 흠칫 놀랐다.
이동장을 줄까 생각했지만 이번 기회에 강우와 지나가 조금이라도 친해지면 좋겠다싶어 그만두기로 했다.
밖으로 나오자 털이 홀라당 깎여서 그런지 지나가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다.
“쳇...”
강우는 하는 수 없이 자신의 겉옷 안으로 고양이를 폭 감싸 안았다.
털 묻는 게 싫어 다리 사이로 스치는 것도 질색했던 것에 비하면 정말 많이 변한 모습이었다.
어릴 때부터 동물을 길러본 적도 없고 좋아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털 날리고 아무 때나 울어대고 냄새난다며 싫어했었다.
게다가 피아니스트로서 무엇보다 열 손가락을 소중히 여기는 강우로써는 걸핏하면 발톱을 세워 손등을 공격하는 고양이는 경계대상 1호였다.
그랬던 사람인데 길에서 고양이를 품에 안고 집으로 가고 있다니....
스스로가 생각해도 희한한 경험이었다.
일본에서 돌아와 집에 도착하자마자 한국에서만 사용하는 휴대전화를 켰을 때 인서에게 여러 통의 전화가 와 있는 걸 발견한 강우는 왠지 모를 반가움을 느꼈다.
그와는 한국 공연이 있었던 한 달여 전, 밤새 와인을 마시고 취했던 날 이후 만나지 못했다.
고양이가 없으니 딱히 연락할 용건도 없었고 바쁜 공연준비로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이따금 그날 밤의 기억이 떠오르곤 했다.
꽤 유쾌한 시간이었다.
비싼 와인을 마음껏 마시고 흥에 겨워 피아노를 치고 침대에서 뒤엉켜 잠이 들었다.
물론 눈을 떴을 때 그는 옆에 없었지만 묘하게 침대 안이 따뜻하고 포근했던 기억이 있다.
늘 표정 변화도 거의 없고, 딱히 싹싹한 태도도 없는 퉁명스런 말투의 남자가 와인에 취해 양 볼이 발그레해지고 헤실헤실 웃으며 피아노 연주에 박수를 치고 좋아했던 모습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훗.. 좀 귀여웠지?”
집으로 걸어가며 강우는 품안의 고양이에게 말했다.
그러다 순간 멈칫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남자를 귀엽다고 느낀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2살이지만 연상의 남자를.
딱히 아이돌 타입의 귀여운 외모도 아니고 평범 그 자체인 남자를 잠깐이지만 귀엽다고 느낀 자신에게 새삼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는 진저리치듯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는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첫댓글 으흐+_+ 인서가 상처받지 않기 바래요ㅠ
네..^^;; 그..그래야 할텐데요....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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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재미있어여 다음편은 언제 나오나여??
감사합니다^^ 다음 편은 지금 막 올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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