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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가게 문을 닫은 인서가 사료와 화장실 모래 등을 챙겨 강우의 집으로 왔다.
어제 공연을 마치고 오늘 오전에 귀국한 강우는 피곤했는지 소파에 널브러져 한창 졸고 있었다.
“깨워서 죄송해요. 가져온 것만 얼른 챙겨놓고 갈게요.”
인서는 미안한 표정으로 물건들을 들여놓았다.
“가? 왜?”
비몽사몽 잠이 덜 깬 강우가 헝클어진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눈을 반만 뜬 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네? 그건...”
집에 가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그런 얼굴로 물어오자 인서는 순간 당황했다.
“왜 가는데? 여기서 자는 거 아니야? 내 침대엔 절대 고양이를 올려놓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당신이 데리고 자.”
“하지만......”
“이 녀석 사람이 옆에서 자지 않으면 밤새 엄청나게 울어댄다고. 이전에도 그래서 내가 얼마나 밤마다 힘들었는데... 난 지금 무지 졸려. 이대로 잘 거니까 당신은 아무 방이나 맘대로 써. 그럼 이만......”
강우는 여전히 잠에 취한 듯 비틀비틀 방으로 가버렸다.
넓은 거실에 홀로 남은 인서는 어찌해야 할 지 몰라 난처한 표정으로 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
지나는 인서가 반가운 지 아까부터 다리에 얼굴을 부비며 한껏 애정을 표시하고 있었다.
또 다시 여기서 자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기에 아무 준비도 없이 왔다.
“후우.. 뭐가 뭔지 모르겠다.”
인서는 난처한 표정으로 지나를 바라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불편한 마음으로 전에 머물던 방에서 하룻밤을 보낸 인서는 다음날 아침 뜻하지 않게 늦잠을 자고 말았다.
밤새 뒤척이다 새벽녘 겨우 잠이 들었는데 알람도 듣지 못하고 자버린 것이다.
창밖이 환하게 밝은 걸 느끼고 잠이 확 깬 그는 벌떡 일어나 세수만 하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집안은 인기척 없이 고요했다.
강우가 아직 방에서 자고 있다고 생각한 인서는 현관으로 향했다.
신발을 신고 나가려는 순간 벌컥 현관문이 열리며 강우가 안으로 들어섰다.
트레이닝복에 운동화,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이마에 흐트러진 걸 보니 아침운동을 다녀오는 것 같았다.
“벌써 가려고?”
“늦었어요. 늦잠을 자는 바람에...”
“아침식사는?”
“먹을 시간이 없어요. 그만 가볼게요.”
“...알았어. 그럼 수고.”
인서는 허둥지둥 인사를 마치고 뛰어 나갔다.
가게 정리도 하고 문 앞도 청소하고 밤새 지저분해졌을 케이지도 치우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헐레벌떡 뛰어 와 정신없이 오픈 준비를 했다.
그러고 보니 늦잠 잔 탓에 경황이 없어 지나 밥도 챙겨주지 못하고 왔다.
어떡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 인서는 강우에게 전화를 했다.
“아...저.. 유인서입니다. 죄송하지만 지나 밥 좀 챙겨주세요. 제가 깜빡했어요.”
[고양이는 당신이 돌본다고 하지 않았었나? 난 집만 제공하기로 한 거 같은데.]
수화기 너머로 빈정대는 목소리가 들린다.
“...죄송해요. 오늘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그만...”
[휴우.. 하는 수 없지. 특별히 오늘만이야.]
“네. 감사합니다.”
[아침은 먹었어?]
“네? .. 아직이요.”
[기다려]
“에? 여보세요?”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기자 인서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20분도 안 되어 버터에 구워 시나몬과 메이플 시럽을 뿌린 따끈따끈한 토스트를 든 강우가 가게에 나타났다.
“먹어.”
인서 뿐 아니라 갓 출근해서 앞치마를 두르고 있던 희주 또한 어리둥절해하며 강우와 토스트를 번갈아 보았다.
“내꺼 하는 김에 좀 더 만들었어. 고양이한텐 배 터지게 먹을 만큼 사료를 부어주고 왔으니까 걱정 말고.”
“....아..네... 저기... 감사..합니다...”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토스트를 받아 들었다.
“그럼 난 이만”
토스트를 넘기고 강우는 쿨하게 사라졌다.
“뭐야? 뭐야? 둘이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
“안 친해.”
“친한 사이도 아닌데 이렇게 토스트까지 해서 갖다 주냐?”
희주가 인서에게 바짝 다가와 추궁하듯 물었다.
“음식 만드는 게 취미인가봐. 전에 그 집에서 잠깐 묵을 때도 아침식사는 자기 손으로 해 주더라고.”
“어머, 진짜? 완전 멋지다! 유명 피아니스트에 모델 뺨치는 외모. 거기에 요리솜씨까지! 완벽해! 완벽해!”
희주가 물개박수를 치며 감탄한다.
“근데 좀 이상하다. 집에서 먹는 거면 몰라도 왜 여기까지 배달서비스를 해 줘?”
“... 나도 몰라. 그냥 음식 쓰레기 남는 게 싫었을 지도 모르지.”
“에이, 먹다 남은 거면 몰라도 이렇게 맛있게 만들어다 주는데 무슨 음식 쓰레기? 그 동안 둘이 많이 친해졌나보네~ 네가 꽤 마음에 들었나봐”
“아니라니까.”
퉁명스럽게 말하며 인서는 바쁜 척 고양이캔이 잔뜩 쌓인 선반을 치우기 시작했다.
돌아선 그의 귓불이 빨갛게 물들었다.
인서는 도대체 이런 행동을 하는 차강우의 의중을 전혀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친절하게, 혹은 상냥하게 대해주면 가슴이 설레고 얼굴이 붉어진다.
사실 강우가 무슨 의도를 갖고 이런 친절을 베풀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아마 십중팔구 아무 생각 없이 행동했을 게 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식사를 하지 않았다는 말에 일부러 토스트를 가게까지 갖다 주는 그의 행동에 마음이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입 베어 문 토스트는 혀끝에서 달콤하게 녹아내렸다.
아직 따뜻한 온기가 가득한 걸 보니 만들자마자 은색 호일로 포장해 서둘러 달려온 걸 알 수 있었다.
왠지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달콤한 마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인서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비상이야!! 저 고양이 녀석이 엉덩이에 똥을 매달고 미친 듯 뛰어다니고 있어! 으아아악! 안 돼!! 소파는 절대로 안 돼!! 끄아악!!!!!!! 얼른 와! 당장 튀어 와서 저 똥 좀 어떻게 해 봐!! 안 그럼 똥 매달고 있는 저 고양이를 당장 밖으로 쫓아버릴 거야!!]
여보세요 라는 말을 하기도 전 쉴 새 없이 비명을 질러 댄 강우는 그대로 뚝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얼마나 크게 소리를 질렀는지 옆에 있던 희주에게 까지 다 들릴 정도였다.
인서가 어이없단 표정으로 희주를 바라보자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하아...... 다녀와라.”
인서는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인 후 서둘러 가게를 뛰어나갔다.
***
2주가 지났지만 지나의 새 가정을 찾아주는 일은 어렵기만 했다.
인터넷에도 올리고 가게 앞 유리에도 사연을 붙여 놓았지만 몇 명 문의가 있었을 뿐 데려가겠다고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고양이는 여전히 강우의 집에서 지냈으며 인서가 하루에도 몇 번씩 드나들며 돌봐주었다.
게다가 이틀에 한번 꼴로 그 집에서 자고 오게 되면서 인서는 의도치 않게 차강우란 사람에게 익숙해졌고 둘 사이도 예전보다 훨씬 친근해졌다.
“늘 얻어먹는 것도 미안해서...”
간밤에 또 강우네 집에서 자게 된 인서는 여느 날과는 달리 강우보다 먼저 부엌으로 들어와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그 집에서 자는 날 아침이면 으레 강우가 차려준 아침을 먹는 게 미안해져 오늘은 큰 맘 먹고 준비해 본 것이다.
간단한 콩나물국에 계란말이가 다인 단출한 밥상이지만 오랜만에 누군가가 차려준 아침을 먹는 강우는 감격스럽기만 했다.
“오오, 땡큐!”
호들갑스럽게 감사인사를 건넨 뒤 수저를 들었다.
“음.. 먹을 만은 하지만 간이 좀 세. 좀 더 심심하게 만들면 좋겠어. 계란말이는 퍼석하군. 너무 익혔어.”
거짓말로라도 맛있다고 할 법 하건만 강우는 지나치게 솔직하고 성격의 남자였다.
사실 인서의 요리솜씨는 대략 모양만 낼 뿐 그리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오늘 약속 있어서 많이 늦을 거 같은데 가게 일찍 닫고 오면 안 돼? 집을 오래 비워두면 저 녀석이 가죽소파를 다 뜯어놓을 지도 몰라.”
강우는 멀찍이서 아침햇살을 쬐고 있는 고양이를 흘끗 쳐다보며 말했다.
“노력은 해볼게. 손님이 많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어느새 강우에 대한 인서의 말투도 편해져 있었다.
그를 보면 설레는 마음을 억지로 누르고 편해지자고 인서는 매일같이 자신에게 주입시키고 있었다.
강우 또한 외국에서 자랐다는 말을 앞세워 두 살이나 연상인 인서를 완전히 친구로 받아들였다.
애인과도 헤어지고 공연도 끝난 요즘 강우는 정기적인 연습 외에 시간이 남으면 심심하다며 종종 가게로 찾아와 차를 얻어 마셨다.
그리고 이따금 밤엔 둘이 와인파티를 벌리기도 했다.
애주가인 강우에게 인서는 좋은 술친구이기도 했다.
물론 인서는 아무리 취해도 지난번처럼 강우의 침대에서 함께 잠드는 일만은 피했다.
네발로라도 계단을 기어올라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아침식사 후 지나의 화장실 모래를 갈아주고 사료와 물까지 챙겨준 인서는 그제야 가게로 향했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인 하루였다.
주인이 휴가를 간다며 페럿 두 마리를 3일간 맡긴 것 외에 별다른 일은 없었다.
미용하러 온 강아지들을 씻기고 커다란 녀석들은 산책도 시키며 빠르게 시간이 흘러갔다.
그날 저녁, 검은 모자를 쓰고 점퍼 후드를 푹 뒤집어쓴 낯선 남자가 자꾸 가게 안을 흘끔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처음엔 귀여운 동물들을 구경하려는 건가 싶었는데 인서가 돌아보면 부리나케 숨는 모양새가 영 수상쩍었다.
몇 차례 그런 모습이 반복되자 점점 더 수상해졌다.
가게를 자꾸 살피는 게 뭔가를 훔쳐가려는 낌새가 느껴져 인서는 바짝 신경을 곤두세웠다.
점점 폐점시간은 다가오는데 수상한 남자는 사라질 기미 없이 몰래 숨어 엿보기를 반복했다.
이쯤 되자 인서는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렇다고 아직 피해도 없는데 경찰을 부르기도 애매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가게 문을 닫는 척 하며 슬쩍 밖으로 나갔다.
남자가 황급히 전봇대 뒤로 숨는다.
인서는 모르는 척 유리문을 잠그고 셔터를 내렸다.
살며시 전봇대 쪽을 바라보자 그 뒤에 숨은 남자의 등이 기둥 밖으로 다 보인다.
본인 눈에 안 보이면 다른 이들 눈에도 안 보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어이없을 뿐이다.
인서는 살금살금 전봇대 뒤쪽으로 다가가 남자의 어깨를 확 낚아챘다.
“당신 뭐야!!”
“히이익!!!”
감전이라도 된 듯 화들짝 놀라 남자가 돌아서자 인서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인서야... 잘... 지냈..어?...”
이마 위로 식은땀을 흘리며 비굴하게 미소를 짓는 남자는 바로 이권영이었다.
돈과 인생, 사랑했던 소중한 기억마저 무참히 짓밟고 여자와 함께 달아났던 사기꾼이 갑작스레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인서는 심장이 차갑게 식어버리는 것 같았다.
“오...오랜...만이다. 하..하... 그치?”
눈치를 살피며 어색하게 웃음을 짓다 인서의 돌덩이 같은 표정을 보고는 이내 시선을 바닥으로 내린다.
“여긴 왜 왔지?”
인서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어? ... 어... 그게......”
“내게 사기 친 돈을 돌려주러 온 거야?”
“나도 당한거야!! 그 여자한테 나도 당한 거라고!”
“뭐?”
“걔가 임신했다고 나한테 거짓말 했어! 멀리 가서 아이 낳고 살자고...”
“그래서 친구인 날 배신하고 도망간 거냐?”
“아..아니야!! 난 절대 안 된다고 했는데 그 여자가!!”
“어이없는 핑계 대지마!”
화가 난 인서가 소리치자 권영은 잔뜩 목을 움츠린 채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며 떠듬떠듬 변명을 해 나갔다.
“나...난.. 정말 열심히 장사해 보려고 했는데.. 그... 그 여자가 자꾸.. 날 유혹했어... 그리고는 아이를 가졌다고... 내 애를 가졌다는 데 어떡해!”
마치 따지듯 말하는 권영을 인서는 그저 경멸의 눈으로 노려보았다.
“..너..너한테.. 얘기하면.. 완전.. 화낼 거 같고... 그렇지 않아도 가게는 다 네 돈으로 낸 건데.... 그래서.....”
“그래서 내 이름으로 그렇게 엄청난 빚을 지고 도망쳤다는 거야? 그게 범죄인 건 알고 있어?”
“알아! 알지만.... 인서..너는... 착하잖아... 신고 같은 거 안했어... 그렇지?.. 나한테도 늘.. 상냥하게 대해줬고..... 떠나고 나서야 알았어! 나도 널 좋아했어! 진짜야! 지금도 좋아해!”
“닥쳐!”
신경질적인 고함에 권영이 움찔했다.
“한번만 더 그딴 소리 지껄이면 당장 경찰서로 끌고 가겠어!”
“미안해!! 요..용서해 줘!!”
권영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싹싹 빌었다.
그렇게 늦은 시간은 아니라서 아직 거리에는 문을 연 가게도 많았고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수상쩍은 눈으로 두 사람을 흘끔거렸다.
인서는 혹 주변 상인들이 알아볼까 서둘러 권영의 멱살을 잡아끌고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진영이 걔 완전 날라리 사기꾼이었어. 아르바이트 할 때는 청순가련한 척 온갖 연기를 다하더니 같이 떠나고 나서 얼마 후에 잠깐 한눈 판 사이 돈을 몽땅 들고 날랐다니까. 그 계집애 잡는다고 전국 방방곡곡 안 가본 데가 없어.”
조용한 실내로 들어오자 어느 정도 진정이 됐는지 권영은 아까의 위축된 모습에서 점점 벗어나 인서에게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인서를 함부로 대하던 습관이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것이다.
온종일 굶었다며 가게 테이블에 놓여있던 간식용 스낵을 허락도 없이 우걱우걱 씹어대더니 물을 두 컵이나 들이켰다.
그러고 나서도 컵라면이나 찬밥을 찾으며 염치없이 굴었다.
인서는 자신도 사기를 당했다며 거지꼴로 나타난 권영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권영이 인서의 돈으로 차린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허진영은 스무 살이라고 했지만 그것도 거짓말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실제 스물 네 살이었고 임신을 빌미로 권영과 함께 잠적했지만 얼마 못 가 임신도 거짓이었고, 권영이 챙긴 돈을 모조리 들고 사라져버렸다.
졸지에 땡전 한 푼 남지 않은 권영은 인서가 두려워 돌아올 수도 없었다.
만에 하나 경찰에 신고라도 됐다면 자신은 꼼짝없이 사기대출혐의로 체포될 게 분명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여자에게 배신당한 분노는 있어 어떻게든 허진영을 잡겠다며 전국을 헤매고 다녔다.
하지만 작정하고 도망친 여자를 어디서 잡는단 말인가.
결국 갖은 고생 끝에 도로 인서에게 돌아오고 말았다.
여기저기서 무시당하고 서러운 취급을 받으면서 권영은 한없이 따뜻했고 아낌없이 쏟아주었던 인서의 마음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여자에게 당한 쓰라린 배신을 위로받고 싶었다.
인서라면 자신의 모든 걸 용서하고 받아줄 거란 확신이 있었다.
왜냐면 그는 오랫동안 자신을 사랑해왔으니까.
그런 뻔뻔한 자신감으로 권영은 인서를 찾아왔다.
“나도 피해자야. 정말 여자란 족속은 알다가도 모르겠어. 어떻게 그렇게 천사 같은 얼굴로 사기를 칠 수 있지?”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애처롭게 인서를 올려다보는 권영.
인서는 그런 권영의 눈빛을 외면하며 가게를 이리저리 서성였다.
치가 떨릴 만큼 배신감이 느껴지지만 거지꼴로 나타나 자꾸 볼 맨 소리를 늘어놓으니 마음이 약해진다.
그런 자신의 나약함이 싫어 또 다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온다.
“인서야... 한번만 봐주라... 응? 나 진짜 갈 데가 없어... 가족들한테 연락해봤자 내 놓은 자식 취급이라 눈곱만큼도 반기지 않아. 너 밖에 없어. 진짜야...”
바지자락이라도 잡고 늘어질 기세로 애원한다.
인서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래서 이제 와 나타난 이유가 뭐야? 나한테 원하는 게 뭐냐고?”
“어? 어....없어. 그냥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거짓말 하지 마!”
“진짜야! 진짜로....보고 싶어서...”
인서가 무섭게 노려보자 권영이 황급히 눈을 돌리며 말을 얼버무린다.
“그래? 그럼 얼굴 봤으니 됐지? 그만 가봐. 더 있다간 내가 경찰을 부를 지도 몰라."
“에이.. 그러지 말고.. 오랜만에 보니까 정말 좋다. 그동안 네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몰라. 다들 날 바보 취급할 때도 너만은 늘 다정했잖아. 우리 엄마보다 네가 더 보고 싶었어. 진심이야.”
예전에 이런 말을 들었더라면 인서는 너무 기뻐 이성이 마비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권영은 늘 인서에게 매정했고 매번 악담을 쏟아내며 화풀이만 해댔다.
다정한 말은 한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열이 펄펄 끓어 아픈 인서를 간단히 전화 한 통으로 불러내 밀린 술값을 지불하게 했던 권영이었다.
그 오랜 세월동안 배려라고는 눈을 씻고 찾을 레야 찾을 수가 없었던 인간이다.
그의 말이 백퍼센트 거짓말이라는 건 세 살 어린애도 알 것이다.
인서는 울컥 치미는 화를 애써 억누르며 말했다.
“결론을 말해. 내 인내심도 한계야. 더는 너와 마주하고 싶지 않아.”
“...어.. 그게 말야....저기...”
“할 말이 없는 모양이군. 그만 나가줘.”
인서가 단호하게 말했다.
“도...돈 좀 꿔줘!!”
상황이 급박해지자 권영이 다급히 외쳤다.
“...뭐?”
인서는 너무 어이가 없어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당장 잘 곳이 없어... 찜질방이라도 가게 조금만...”
“하아.....”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을 만큼 추락해버린 옛사랑의 모습에 인서는 진저리가 쳐졌다.
원래 그런 인간인 줄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사라졌던 그 사이 성격이 더 뻔뻔해지고 더 지저분해진 것 같았다.
인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 상황을 빨리 끝내버리자고 결심했다.
그는 주머니를 뒤져 지갑에 있던 지폐를 모두 꺼냈다.
그래봤자 8만 2천원이 전부였다.
“자, 이게 내가 가진 전부야. 이거 갖고 빨리 여기서 나가. 그리고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또 한 번 내 눈에 띄면 그땐 정말 경찰에 신고해 버릴 거야.”
“고마워! 역시 넌 내 진정한 친구야!”
“꺼져!”
“아..알았어! 갈 게! 지금 가!”
권영은 빼앗듯 인서에게서 돈을 낚아 채 허둥지둥 가게를 뛰어 나갔다.
그 모습마저도 너무나 한심해 보여 눈물이 났다.
“차라리 평생 나타나지 말지... 차라리....”
그를 좋아했던 학창시절의 순수한 기억마저 더럽혀진 것 같아 인서는 눈가가 시큰해졌다.
“그만둬. 울 가치도 없어.”
자꾸 흘러넘치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인서는 스스로를 꾸짖었다.
갑자기 나타난 권영 때문에 꽤 늦게야 가게를 닫은 인서는 터벅터벅 강우의 집으로 향했다.
이젠 현관 비밀번호까지 알고 있는 사이이기에 주인이 없는 걸 알면서도 인서는 주저 없이 현관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낮에 잠시 들렀을 때 거실 불을 켜 놓은 덕분에 어둠 속에 더듬더듬 복도를 지나는 수고는 덜었다.
소파에서 길게 늘어져 자고 있던 지나가 폴짝 뛰어 내려와 느릿느릿 다가온다.
인서에게 남은 다른 동물들의 냄새를 덮으려는 듯 부지런히 다리사이를 오가며 목을 부비는 고양이.
“혼자 외로웠지? 미안...”
하필 오늘은 강우도 늦는다고 했기에 지나는 거의 온종일 홀로 집을 지켰다.
제일 좋아하는 고양이캔을 따서 주자 야금야금 신나게 먹는다.
물그릇을 닦아 새 물을 떠 주고 화장실 모래에 쌓인 배설물을 치우고 집안 곳곳에 배인 냄새를 탈취제로 지웠다.
하는 김에 물걸레로 거실 바닥도 새로 닦았다.
냉장고를 열자 맥주가 보인다.
주인은 없지만 나중에 허락을 받기로 하고 꺼내 마셨다.
오늘밤은 취하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 것 같았다.
한 개 두 개 꺼내 마시다 보니 눈앞이 조금 어질어질해진다.
강우는 자정이 훌쩍 넘어서야 돌아왔다.
“아아.. 왔어? 이리 와서 같이 마시자.”
“웬일이야? 혼자 취하도록 마신거야?”
“하하.. 그냥.. 좀.. 마시고 싶어서. 미안. 술은 내일 다시 채워 놓을게.”
“그런 건 됐어. 이왕 마시는 거 좋은 걸로 마시지.”
강우는 겉옷을 벗어 식탁 의자에 걸고 와인 셀러에서 아직 코르크를 제거하지 않은 새 병을 들고 왔다.
“괜찮아, 괜찮아. 아무 거나 마시면 되지. 뭐면 어때 취하면 그만이지.”
주정하듯 헤실헤실 웃으며 손까지 휘적대는 인서에게 강우는 새로 딴 와인을 길고 볼록한 글라스에 따라 건넸다.
“고마워”
“천천히 마셔.”
잔을 받자마자 단숨에 들이키는 인서를 보며 강우가 다급히 말했다.
하지만 말릴 새도 없이 잔은 금세 비어버렸다.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 일도 없어. 진짜야! 아무 일도 없어!”
“알았어. 진정해.”
강우는 자신의 잔을 들고 인서의 맞은편에 앉았다.
천천히 와인을 마시며 인서의 얼굴을 살폈다.
취해 붉어진 뺨과 초점 흐린 눈동자. 역시나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그렇다고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아하는 상대를 추궁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마시고 싶다면 그냥 같이 마셔주면 된다.
“그러고 보니 안주가 없네. 잠깐 기다려 까나페라도 만들게.”
“오오! 요리하는 피아니스트! 멋지다~”
“주정뱅이.”
“헤헤.."
“까나페는 요리도 아니야. 천천히 마시고 있어”
강우가 선반에서 크래커와 연어통조림을 꺼내는 동안 인서는 빈 잔에 새로 와인을 따랐다.
긴 유리잔 안으로 붉게 채워지는 색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잔을 들자 조리대를 향해 돌아서 있는 강우의 등이 유리를 통해 보인다.
큰 키와 군더더기 없는 등에 꼭 맞게 재단된 화이트 셔츠가 그의 모델 같은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정말 근사한 남자다.
다소 성격이 유별난 걸 빼면 그야말로 완벽한 남자였다.
이권영같은 인간이랑 비교 자체를 할 수 없을 만큼 멋진 사람.
그렇기에 강우가 자신을 좋아해 줄 가능성은 완벽히 제로다.
어떻게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쓰레기한테 조차 존중받지 못하고 이용만 당하는 자신이 어떻게 차강우같은 사람과 어울린단 말인가.
지금 이렇게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사이가 된 것 만으로도 천운인 셈이다.
만약 고양이가 아니었다면 강우는 자신과 조금의 접점도 없이 죽을 때 까지 얼굴 한번 마주 칠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서글프기도 했다.
하다못해 그가 좋아하는 클래식이라도 잘 알아 대화가 통하는 사이라도 됐으면 좋으련만 그쪽 분야 얘기만 나오면 꿀 먹은 벙어리처럼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다.
“자, 안주도 먹으면서 천천히 마셔.”
강우는 어느새 완성된 까나페를 인서 앞에 놓았다.
“이런 벌써 반병이나 비운거야?”
조금 전 코르크를 연 와인이 반이나 사라진 걸 보고 강우는 깜짝 놀라 인서를 쳐다보았다.
“미안. 비싼 걸 왕창 마셔버렸네. 헤헤... 그래서 난 맥주면 됐다니까.”
“비싸고 싸고 간에 마시는 건 상관없어. 다만 평소보다 좀 많이 마시는 것 같아서... 벌써 꽤 취한 것도 같고.”
“나? 아니야, 아니야. 멀쩡해.”
주정뱅이들이 그렇듯 인서는 빨개진 얼굴로 열심히 손을 저어 보지만 몸은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만 마시는 게 좋겠다.”
강우가 잔을 빼앗으려 인서에게 다가왔다.
“싫어, 조금만 더. 오늘은 취하지 않으면 못 잘 것 같단 말야.”
인서가 잔을 품에 숨기며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삐죽인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아무 일도.”
토라진 듯 고개를 홱 돌리는 인서를 보며 강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라면 취해도 절대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할 사람이 아니건만 오늘 인서의 모습은 뭔가 달랐다.
“역시 안 돼.”
강우는 반강제로 인서가 보물처럼 소중히 품은 와인잔을 빼앗으려 몸을 숙여 그의 양 팔을 잡았다.
강우의 조각처럼 잘 생긴 얼굴이 바짝 다가오자 인서는 순간적으로 숨을 삼켰다.
그리고는 자석에 이끌리듯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내밀었다.
강우의 것에 닿는 순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릿속이 어질어질 당장이라도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찰나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고 깜짝 놀라 입술을 뗀 인서가 두 눈을 크게 깜빡였다.
눈이 마주치자 강우 또한 얼어붙은 듯 멍하게 인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하....하하... 아주 귀여운 술버릇이 있었네. 하하!”
그러더니 이내 인서의 뺨을 쭉 잡아당겼다.
“이 친구 아주 위험한 인간일세. 내가 여자였음 성희롱으로 고소당해. 정신 차려!”
“아야야야!”
양 볼을 사정없이 잡고 흔드는 바람에 인서는 울상을 지었다.
“이 주정뱅이! 얼른 올라가 잠이나 자!”
강우는 그대로 볼을 잡아당겨 인서를 일으킨 뒤 계단 쪽으로 돌려세우고 엉덩이를 가볍게 발로 찼다.
떠밀리듯 계단으로 향한 인서는 비틀거리며 방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2층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그제야 강우는 힘이 빠진 듯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으아! 큰일 날 뻔 했어! 그대로 확 껴안아버릴 뻔 했어! 아저씨 주제에 왜 저리 귀여운 거야!!”
강우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비틀거리며 방으로 들어간 인서는 등 뒤로 방문이 닫히자마자 참았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심장이 터져버릴 듯 뛰었다.
몸이 휘청거릴 만큼 취해 있었지만 머릿속만은 그 어느 때 보다 멀쩡했다.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
미쳤어.... 내가 어떻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를 일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언제나 소극적이고 특히나 애정문제에 대해선 극도로 위축되어버리는 인서였다.
아무리 술을 마셨다지만 충동적으로 키스를 하다니...
다시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건 인서가 둘러대기 전에 강우가 먼저 술 취해 저지른 실수로 덮어준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자신은 변명 아닌 변명을 해대느라 식은땀을 흘리고 있거나 모든 걸 다 끝내버리겠단 극단적인 생각에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고백한 그 후의 이야기는 뻔한 전개가 될 것이다.
일단은 강우의 표정이 일그러질 것이고, 심한 경우 욕을 하며 내쫓거나 다시는 접근하지 말라며 벌레 보듯 경계할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그런 반응을 보이지는 않더라도 앞으로는 자신을 꺼려할 게 분명했다.
충동적으로 키스는 했지만 그 기세로 고백까지 가지 않은 걸 천만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하아...”
인서는 쓰러지듯 침대위에 엎드렸다.
조금 전까지도 권영의 일로 머릿속이 꽉 차 있었는데 어느새 그 자리에 강우가 들어앉았다.
눈을 감자 아까 닿았던 입술의 감촉이 떠올랐다.
다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부끄럽지만 좀 더 느끼고 싶었다.
그의 입술이 다시 한번 뜨겁게 키스해온다면...
촉촉하게 젖은 혀가 자신을 휘감고 강하게 빨아들인다면...
아마 정신이 혼미해져 그대로 쓰러져버릴 지도 모른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호흡이 가빠지는 것 같았다.
이토록 누군가에게 육체적으로 끌렸던 적은 없었다.
여태껏 권영을 짝사랑해왔지만 그를 상대로 음란한 상상을 하고 몸이 달아오르고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안타까웠던 기억은 없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자신은 그저 권영을 마치 친형제처럼 사랑해왔던 것 같다.
천방지축 서툴고 거친 그를 보살펴주는 역할에 푹 빠져 있었던 기분이다.
그를 챙겨주고 돌봐주며 사랑이라 생각했지만 그건 그저 가족애에 가까운 사랑이 아니었을까.
과거에 권영을 좋아했던 감정과 지금 강우에게 끌리는 감정은 어딘가 다른 점이 많다.
권영과 키스를 한 적은 있지만 그것 역시 성적인 흥분을 동반하지는 않았다.
겨우 입술이 닿았던 것만으로 몸이 달아오르는 지금의 기분과는 많이 달랐다.
육체적 끌림을 동반한 사랑을 얘기한다면 인서에게는 강우가 진짜 첫사랑이 되는 게 아닐까.
하지만 혼자서 아무리 이런저런 생각을 해 봤자 아무 소용없는 짓이었다.
어차피 늘 그래왔듯 인서에게 사랑은 시작조차 할 수 없는 먼 나라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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