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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속은 괜찮아? 콘스프야. 일부러 묽게 끓였으니 마셔.”
어떻게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뜨자 아침이 밝아 있었다.
서둘러 샤워를 마치고 내려가자 강우가 기다렸다는 듯 식탁으로 불렀다.
“..고마워.”
인서는 슬그머니 그의 시선을 피하며 수저를 들었다.
“정말 무슨 일 있는 거야? 어제도 그러더니 안색이 계속 안 좋은데?”
“일은 무슨... 그냥 오랜만에 마시고 싶었어.”
“흠...”
별로 인서의 말을 믿는 것 같진 않았지만 더 이상은 캐묻지 않았다.
약간 어색한 기운이 감도는 식탁 위로 느닷없이 고양이가 뛰어 올랐다.
“지나! 내려가!”
기겁을 한 강우가 소리쳤다.
하지만 고양이는 유유자적 식탁 위를 걸으며 커피와 스프그릇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이런 버릇없는 고양이! 내려가! 내려가라고!”
강우의 고함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식탁 위 음식에 흥미가 떨어진 고양이는 인서에게 다정한 눈인사를 건네고 그의 무릎 위로 폴짝 내려왔다.
지나는 늘 밥을 챙기고 화장실을 치워주며 털을 빗겨주는 인서를 제일 잘 따랐다.
반면 언제나 소리만 지르는 강우는 일부러 보란 듯 무시하기 일수였다.
“모래 좀 뿌리고 다니지 마!”
라고 강우가 말하면 심술궂게도 화장실 모래에 올라가 요란하게 앞발로 모래를 떨어댔다.
쿨럭쿨럭 몸에서 헤어볼이 나올 것 같으면 강우의 침대 위로 올라가 토했다.
아끼는 고가의 난초를 잘근잘근 씹어놓고, 피아노 위에 올라가 영역표시를 했다.
다행히 뚜껑이 닫혀있었기에 망정이지 엄청나게 비싼 피아노를 망칠 뻔 했다.
사실 주인에게 버림받은 지나는 사람의 손길을 늘 그리워했다.
강아지처럼 쓰다듬어달라고 열심히 꼬리를 흔들며 매달리진 않지만 늘 동그란 눈동자로 사람의 행동을 주시하며 눈빛을 보낸다.
크고 따뜻한 손으로 날 쓰다듬어줘... 라고.
인서는 늘 지나를 보살피고 만져주지만 강우는 피아니스트란 자부심에 손에 상처를 입을까 조심하느라 전혀 쓰다듬어주지 않았다.
그러니 지나가 심술을 부릴 만 했다.
게다가 강우가 소리 지르면 지나도 같이 하악거리며 털을 곤두세웠다.
사람과 고양이가 서로 대치한 채 노려보는 걸 인서는 몇 번이나 목격했다.
그럴 때마다 강우에게 좀 더 친절하게 대하라고 말하지만 콧방귀만 뀔 뿐이다.
“잘 먹었어.”
식사를 마친 인서는 몇 안 되는 그릇을 닦아 건조대에 엎어둔 뒤 출근준비를 했다.
어제 있었던 여러 일들은 깨끗이 잊고 일찍 출근해 새롭게 하루를 시작하고 싶었다.
“같이 나가. 오늘 재활용 쓰레기 버리는 날이야.”
플라스틱과 종이박스를 들고 강우가 인서를 따라 나섰다.
“넌 참 ....”
인서가 그런 강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의외로 성실한 거 같아.”
“성실하면 성실한 거지 의외는 또 뭐야?”
“훗.. 아니야.”
말 그대로 강우는 의외로 착실했다.
입이 험하고 성격이 꼬인 것만 빼면 다른 사람의 식사를 준비해주거나 분리수거 날을 기억해 정확히 내놓는다거나 하는 걸 보면 가정교육을 잘 받고 자란 사람이란 게 느껴졌다.
분리수거함에 쓰레기를 넣는 강우에게 인사를 하고 인서는 가게로 향했다.
모퉁이를 돌아 주택가를 벗어날 즈음 갑작스레 어깨를 낚아채는 손길에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너!...”
놀란 인서 앞에 어젯밤 보았던 권영이 나타났다.
찜질방에 간다더니 전혀 씻지 않은 몰골로 나타난 권영을 보자 인서는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너 그새 남자생겼냐?”
“뭐?”
“다 봤어. 한 집에서 나오던데? 아주 다정히...”
“..네가 어떻게...”
“그냥 .. 어제 네 뒤를 좀 밟았지. 엄청 큰집으로 들어가기에 이상하다 싶어서 지켜봤어. 동거하는 거냐? 남자랑? 나 좋다고 그렇게 쫓아다닐 땐 언제고 그새 마음이 변해 다른 남자한테 갔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꽤 부자를 물었나봐. 그런 집에 살다니... 뭐하는 인간이냐?”
“네가 상관할 일 아니야. 그리고 그 사람네 집에서 묵은 건 다른 사정이 있어서야.”
“아~ 물론 사정이 있겠지. 아주~~ 중요한 사.정. 예를 들면 사내놈들끼리 물고 빨고 온갖 더러운 짓은 다 하는...”
“닥쳐!!”
인서가 권영의 멱살을 쥐었다.
“어어.. 폭력은 금물. 여기 너네 가게 근처 아니야?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래?”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어제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했잖아! 이대로 경찰서로 끌고 갈까?”
“진정하라니까. 내가 뭘 어쨌다고 이러는 거야.”
능글맞게 빈정거리는 꼴이 보기 싫어 인서는 밀쳐내듯 멱살을 놓고 돌아섰다.
그를 무시한 채 가게로 향했다.
권영은 인서를 뒤쫓아 오며 계속해서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늘어놓았다.
“저 남자가 잘해 주냐? 네가 깔리는 역할이야, 아님 저 남자? 뭐 누구든 상관없지. 근데 한동네에서 살며 소문나면 어쩌려고 그러냐? 호모가 하는 가게에 강아지를 맡길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몰라. 그 남자 집 대문에 호모가 사는 집이에요, 라고 쓸 지도 모르지.”
“앞으로 한번만 더 나한테 말 걸면 그땐 곧바로 신고할 거야. 농담 같아? 그럼 어디 더 지껄여봐.”
인서는 보란 듯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제야 입을 닫은 권영은 못마땅한 듯 인서를 노려보다 바닥으로 침을 뱉은 후 가버렸다.
저 인간이 바라는 건 뻔하다.
협박 같지도 않은 협박으로 돈을 뜯어낼 궁리겠지.
애초에 그 싹을 잘라버리지 않으면 분명 질질 끌려 다니며 돈을 뜯길 것이다.
인서는 두 번 다시 그와 돈으로 얽히는 일은 없을 거라 굳게 다짐했다.
그러나 일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이런 제기랄!! 어떤 미친놈이 감히 내 집에 이딴 걸 썼어!! 가만 두지 않겠어!!”
며칠 후 강우의 집 대문과 담벼락에 붉은색 락카스프레이로 ‘더러운 호모가 사는 집’이란 글씨가 흉측하게 써져있었다.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난 강우가 경찰에 신고하고 범인을 잡겠다며 경비업체를 불러 CCTV를 설치하는 등 한바탕 난리를 쳤다.
인서는 그 범인이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섣불리 나서서 권영의 얘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자신의 성벽도 털어놓아야 한다.
강우에겐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가 안다면 지금까지처럼 편하게 곁에 머물 게 하지 않을 것이다.
강우에게만은 경멸의 눈빛을 받고 싶지 않았다.
락카는 지워지고 CCTV가 24시간 대문 앞을 지켰다.
경찰이 찾아와 간단한 조사도 했지만 중한 죄가 아니라서 범인검거에 적극적으로 나서진 않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 인터넷 고양이까페에 올린 지나에 관한 글을 보고 입양하고 싶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몇 명의 후보자들 중 환경도 좋고 경험도 많아 보이는 곳을 골라 연락했다.
그쪽에선 언제든 데리러 가겠다고 했다.
그날 밤 강우네 집으로 간 인서는 입양처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흠.. 그래? 잘됐군.”
그래도 그동안 꽤 오랜 기간 함께 있었는데도 강우는 별 감흥 없는 표정으로 어깨를 들썩였다.
인서는 내일 가게로 오기로 한 입양자에게 줄 지나의 물건들을 정리했다.
특히 좋아하던 쥐인형이 달린 낚싯대와 레이저 포인트, 여러 종류의 캔, 사료도 챙겼다.
내일 아침 화장실과 밥그릇만 챙겨 가면 된다.
“지나랑 함께하는 밤도 오늘로 끝이구나... 왠지 서운하다.”
인서는 지나를 무릎위에 앉히고 목을 긁어주었다.
내일 가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고양이는 그저 부드러운 손길에 취해 가르릉거리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좋아! 오늘밤은 이별파티를 해야겠군.”
강우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서며 짝하고 박수를 쳤다.
그 소리에 놀란 지나가 눈을 치켜뜨고 강우를 노려본다.
“건방지게 쳐다보지 마. 너에게 오늘은 특별히 비싼 캔을 간식으로 주지.”
주방으로 간 강우는 사람이 먹을 와인과 과자, 고양이가 먹을 간식을 챙겨왔다.
두 명과 한 마리가 모여 앉아 조촐한 이별파티를 열었다. 어차피 마시기 위한 명목일 뿐이었지만.
다음날 대문을 나서던 인서는 깜짝 놀라 멈춰 섰다.
누군가 돌을 던져 CCTV 카메라를 부순 것이다.
이번 범인도 누군지 알 것 같아 등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다시 들어가 강우에게 말하자 불같이 화를 내며 뛰쳐나갔다.
“이 자식!! 이번에야 말로 가만두지 않겠다!!!”
그는 자신이 유명세가 있는 피아니스트라 안티도 있을 거라며 분명 그 안티팬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카메라만 부수면 될 줄 알았냐? 멍청한 놈.”
카메라는 깨졌지만 녹화된 USB는 멀쩡히 남아 강우의 컴퓨터로 화면을 전송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돌멩이를 들고 한쪽 눈을 감으며 요리조리 조준해서 던지는 사람의 모습이 고스란히 녹화되어 있었다.
역시나 이권영이었다.
카메라만 부수면 못 볼 거라고 생각하는 점이 너무나 이권영다워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의 모습이 찍혔으니 더는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다.
인서는 오늘이라도 당장 권영을 만나야겠다고 결심했다.
오늘 지나가 새로운 곳으로 입양을 가게 되면 더 이상 강우의 집에 올 일도 없어진다.
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강우가 더 이상 피해를 입게 해선 안 된다.
결심을 하고 가게로 향하던 중 적절한 타이밍으로 권영이 나타났다.
“이따 가게 닫을 시간에 와. 할 얘기가 있어.”
“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지.”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권영이 비웃음을 지으며 사라졌다.
또 다시 그의 어처구니없는 올가미에 걸려든 것 같아 인서는 비참한 기분이었다.
점심 무렵 지나를 데려가기로 약속한 사람이 찾아왔다.
인서는 강우에게 전화를 걸어 고양이를 데리고 오라고 했다.
잠시 후 강우가 지나와 함께 가게로 왔다.
“어머, 네가 ‘지나’구나. 인터넷에서 본 사진 그대로 정말 예쁘게 생겼네.”
새주인이 되기로 한 여자가 조금은 호들갑스럽게 지나를 맞이했다.
“거짓말이 심하네. 아무리 뜯어봐도 이 녀석 예쁜 거랑은 거리가 멀잖아.”
강우가 못마땅한 듯 퉁명스럽게 내뱉는다.
여자는 무안해 얼굴을 붉히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이 사람이 고양이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그래요. 익스트림 페르시안종 인걸 생각하면 지나는 정말 멋진 외모를 지니고 있죠.”
인서가 팔꿈치로 강우를 퍽 치며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쳇...”
아까부터 어쩐지 강우는 잔뜩 불만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료는 이 브랜드를 제일 좋아해요. 청어 맛이에요. 간식은 하루에 한번 한 캔씩만 주시면 되요. 많이 주면 금방 비만해지니까 조금만 신경 써 주세요.”
“네. 제가 잘 챙길게요.”
새주인이 될 여자는 이동장에서 고양이를 꺼내 안으려 했다.
하지만 여자의 짙은 향수냄새에 자극받은 지나는 문뜩 자신을 버렸던 옛주인을 떠올리고는 카학-하고 공격성을 드러내며 그녀의 손등을 사정없이 할퀴었다.
“아얏!”
여자가 고양이를 놓치자 바닥으로 내려선 지나는 강우의 다리사이로 도망쳐 숨었다.
“괜찮으세요? 공격적인 녀석이 아닌데 이상하네...”
여자의 손등에 그어진 가늘고 긴 빨간색 줄을 보며 인서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읏.....괜찮긴 한데.. 지나는 아무래도 제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에요.”
여자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
지나는 여자와 눈이 마주치자 여전히 하악질을 해 대며 공격태세를 갖춘다.
“어떡하죠? 아무래도 오늘 데려가는 건 무리겠어요.”
여자가 안타깝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죄송해요. 원래 이런 녀석이 아닌데 오늘 좀 이상하네요.”
“다음에 다시 올게요. 그때까지만 부탁드립니다.”
“네, 걱정 마세요. 그 대신 갖고 있는 물건 중에 아무거나 하나만 두고 가주세요. 이 녀석이 새주인의 냄새에 익숙해지게 훈련이 필요할 거 같아요.”
“아, 그렇군요. 그럼 제가 끼고 있던 장갑 한 짝을 놓고 갈게요.”
“감사합니다. 먼 길 오셨는데 정말 죄송해요.”
인서는 여자에게서 장갑을 받아들며 고개 숙여 사과했다.
“아니에요. 무슨 일이든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그럼 다음에 또 뵐게요.”
“네, 안녕히 가세요.”
여자가 가게를 나간 후에야 지나는 강우의 다리 사이에서 빠져나와 인서에게로 다가왔다.
“너 이 녀석,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응? 저렇게 착해 보이는 주인님도 없는데 말야.”
“잠깐 얼굴 본 걸로 착하긴 개뿔.”
“유기견 센터에 봉사활동도 다니고 길고양이들에게 매일 밥도 챙겨주시는 분이란 말야. 그 이상 어떻게 더 착해?”
“알게 뭐야. 어쨌든 저 여잔 틀렸어. 탈락이야.”
“뭐?”
“고양이가 싫어하잖아. 아까 하악거리는 거 봤지? 이 녀석은 이제 여자라면 질린 거라고. 그 못된 여자가 자길 버린 걸 뻔히 아는데 비슷한 또래의 젊은 여자에게 또 가겠냐?”
“하지만......”
“어쨌든 안 돼.”
“억지 부리지마. 힘들게 찾은 입양처라고. 하루라도 빨리 네 집에서 쫓아내고 싶어했잖아.”
“다른 사람으로 찾아봐.”
“입양 보낼 생각은 있는 거야?”
“당연하지!”
강우는 힘주어 대답했다.
잠시 후, 지나는 도로 이동장에 담겨 집으로 돌아갔다.
한바탕 입양소동이 지나간 후, 바쁜 오후 시간이었지만 인서는 누나의 눈을 피해 잠깐 은행에 다녀왔다.
오늘 밤 권영과 협상을 하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다.
물론 많이 요구한다고 해서 줄 수 있는 처지도 아니다.
그저 그를 잘 다독여 다시는 강우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오후 내내 안색이 어두운 인서를 보며 희주가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아무것도 아니라며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
누나가 퇴근하고 폐점 시간이 되자 기다렸던 권영이 아닌 강우가 느닷없이 나타났다.
“끝났지? 오늘은 밖에서 한잔 하자.”
강우는 인서를 완전한 술친구로 인정해 버린 듯 했다.
나이차 따윈 잊고 요 근래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아... 그게... 오늘은 좀 힘들 거 같아. 약속이 있어서.”
“약속? 무슨 약속?”
“...그냥.. 옛날 동창이랑...”
“그래? 그럼 같이 마시지 뭐.”
“안 돼!”
답답한 마음에 인서가 화내듯 소리쳤다.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혹시.. 여자친구? 설마 첫사랑?”
갈수록 애먼 소리만 해 대는 강우는 갈 생각은 않고 아예 의자에 눌러앉았다.
누구랑 만나는지 꼭 봐야겠다는 태도였다.
“그만 돌아가. 여자친구 그런 거 아니고 우린 좀 심각한 얘기를 해야 해서 네가 있으면 안 될 거 같아.”
“그러니까 점점 더 궁금해지잖아.”
“됐다니까. 어서 돌아가.”
인서가 강우의 팔을 잡아 끌어 강제로 일으켰다.
등을 떠밀어 가게 밖으로 내몰려는 순간, 운 나쁘게도 권영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옥신각신하는 인서와 강우를 보더니 흠칫 놀란 모습이었지만 이내 그럼 그렇지.. 라는 묘한 뉘앙스의 표정을 지었다.
그걸 눈치 챈 인서는 여기 더 있다간 권영이 강우까지 끌어들일 것 같아 더욱 힘껏 강우를 밖으로 내몰았다.
그를 쫓아내고 셔터를 내려버린 후에야 인서는 돌아섰다.
“배고파. 자장면 한 그릇만 시켜 먹으면 안 되냐?”
여전히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권영의 말투와 태도에 인서는 짜증이 났다.
“안 돼. 얘기 끝나면 혼자 먹으러 가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무슨 얘길 하자는 거야?”
“왜 아무 상관없는 사람 집에 자꾸 못된 짓을 하는 거야? 오늘 아침에 CCTV 부순 것도 너란 거 다 찍혔어.”
“쳇.. 요즘은 어딜가도 그놈의 CCTV 때문에 짜증난다니까.”
“죄를 안 지으면 되잖아.”
“그게 내 맘대로 되나? 땡전 한 푼 없는 나 같은 사람이 굶어죽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잖아.”
“정직하게 땀 흘리며 일해서 번 돈으로 정당하게 살아. 그럼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아.”
“나도 그렇게 살고 싶어!! 하지만 그래봤자 등신 취급만 당할 뿐이잖아! 정직하게 벌어? 정당하게 살아? 넌 그렇게 살아서 지금 행복하냐? 그렇게 사니까 다른 놈들이 널 얕보는 거야! 실제로 나같이 어리숙한 인간에게도 당했잖아!”
“그게 지금 나한테 할 소리야?!”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테이블을 쾅 내리치며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그 바람에 의자가 뒤로 넘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조용하던 애견샵 안이 금세 시끄러워졌다.
잠이 들려던 강아지들이 일제히 짖어댄 것이다.
인서는 애써 화를 억누르며 강아지들을 일일이 쓰다듬어 안정시켰다.
겨우 조용해지자 인서는 주머니에서 아까 찾아두었던 현금을 꺼내 던지듯 권영 앞에 놓았다.
“내가 가진 전부야. 이걸로 자장면을 사 먹든 놀음판에서 날리든 또 여자한테 뜯기든 네 마음대로 해. 그리고 다시는 나타나지마.”
권영은 마치 먹잇감을 앞에 둔 맹견처럼 두 눈을 번뜩였다.
하지만 이내 입술을 삐죽이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다.
“쳇.. 내가 이깟 돈을 바라고 네 주위를 맴돈 줄 알아?”
“...뭐?... 돈.. 때문이.. 아니라고?”
인서는 당황했다.
당연히 돈을 주면 얼씨구나하고 받아 가버릴 줄 알았는데 너무도 의외의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그럼.. 왜...”
어리둥절해 있는 인서에게 권영이 다가왔다.
옷깃이 스칠 만큼 바짝 다가선 권영이 느닷없이 인서의 양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난 널 되찾기 위해 온 거야.”
“......무슨...!!..읍!...”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라는 외침은 이내 권영의 입술에 막혀버렸다.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아 인서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 곧 권영이 강제로 입맞춤을 해 오는 걸 깨닫고는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하지만 오히려 벽으로 밀어붙여져 바짝 압박을 가해오는 권영의 몸과 벽 사이에 끼인 채 옴짝달싹 못하는 신세가 돼버렸다.
설렘이나 떨림, 흥분과는 영 거리가 먼 무자비한 힘으로 눌러대는 키스에 인서는 입술이 찢어져 피맛이 베어나는 걸 느꼈다.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겠단 일념으로 발버둥 치며 고개를 돌려 권영의 입술을 피하려했다.
“그..그만! 싫어!... 읍!”
하지만 이내 뒤통수가 잡혀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입술 사이로 권영의 혀가 밀고 들어와 마구 유린하기 시작했다.
문뜩 취기에 살짝 맞닿았던 강우의 입술이 떠올랐다.
이런 무자비한 키스에 그때의 떨리는 입맞춤이 더럽혀지는 것 같아 눈물이 났다.
권영의 손이 과감하게 인서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읏!.. 싫어!!”
성급하게 허리와 엉덩이를 더듬는 손길에 진저리치며 인서는 젖 먹던 힘까지 모아 권영의 가슴을 밀쳐냈다.
우당탕 진열 돼 있던 물건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그 사이로 권영도 쓰러졌다.
인서는 손등으로 세차게 입술을 문지르며 권영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넌 최소한의 양심도 없어!!”
자신의 감정을 이용해 사기를 치더니 이젠 갑자기 나타나 이런 모욕까지 주는 권영을 당장 죽여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돈 줬잖아!! 그러니까 제발 가란 말야!!”
울부짖듯 소리쳤다.
“돈 때문이 아니라고 했잖아!”
권영이 벌떡 일어나 억울한 말투로 외쳤다.
“세상에 내 편은 너 한명 뿐이었어! 진심이야! 그딴 여자한테 속아서 널 떠났던 걸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
“그만!! 더 이상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아!”
“인서야.. 넌 날 좋아했잖아. 사랑한다는 거 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어. 그땐 내가 미안했어. 떠나 있는 동안 매일 네 얼굴만 떠올랐어. 너라면 날 다시 받아주고 전처럼 사랑해줄 거라고 믿었어.”
어느새 권영이 다가와 인서의 어깨를 붙들었다.
간절한 표정으로 눈을 보며 호소했지만 인서는 그 말을 그대로 믿을 만큼 순진한 나이는 아니었다.
자신의 어깨에 올려진 권영의 손을 뿌리치고 한걸음 물러섰다.
“날 얼마나 농락해야 직성이 풀리는 거야? 그렇게 매달리면 내가 바보처럼 널 받아줄 거라 생각했어? 너 때문에 난 모든 걸 잃었어. 직장도, 돈도, 미래도. 하나뿐인 가족에게까지 피해를 입혔다고! 그때의 내 비참함을 네가 이해할 수 있어?”
“그...그건.. 정말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용서해줘. 응? 인서야... 난 너 밖에 없어. 나도 진짜 널 좋아하게 됐단 말야!”
“닥쳐! 어서 나가! 나가란 말야!!”
“싫어! 날 다시 받아준다고 할 때 까지 안 가!”
“앗!!.. 무슨 짓이야!”
권영이 다시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덤벼들었다.
막무가내로 끌어안고 목덜미에 물어뜯는 것 같은 키스를 퍼부어댔다.
“싫어!! 흣!.. 안 돼!!!”
기어이 인서를 힘으로 눕히고 올라타서는 거칠게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단추가 뜯어져 나가고 어찌해 볼 겨를도 없이 상체가 드러났다.
인서는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쳤다.
넓지 않은 가게 안을 남자 둘이 싸움을 벌이듯 버둥거린 탓에 물건들이 사방으로 떨어지고 강아지들은 다시 짖기 시작했다.
“이게 뭐하는 짓들이야!!”
갑자기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인서의 몸을 뒤덮고 있던 권영이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놀랍게도 험상궂은 표정으로 버럭 소리를 지른 사람은 차강우였다.
“다..당신...뭐야! 어..어떻게 들어왔어!”
어지간히 당황했는지 권영이 말까지 더듬으며 주춤거렸다.
“계속 그렇게 누워있을 셈이야?! 정신 차리고 어서 일어나!”
자신에게 쏟아지는 호통소리를 들으며 인서는 살았다는 안도감과 결국 이런 꼴을 보이고 마는 구나 하는 절망감을 동시에 느꼈다.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고 싶은데 어쩐 일인지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만 할 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젠장!”
강우는 거칠게 욕설을 내뱉고는 인서를 단번에 일으켜 세웠다.
어깨를 감싸 안아 비틀대는 몸을 지탱하게 한 뒤 권영을 노려보았다.
잠시 당황했지만 권영 또한 이내 강우를 알아보고 적대감을 드러냈다.
“누군가 했더니 그 자식이로군.”
“너! 역시 맞았어! CCTV!"
강우는 권영의 얼굴이 CCTV를 부수던 사람의 것과 똑같다는 걸 알아챘다.
“오호라! 잘 만났다! 지난번 그 낙서도 네 놈 짓이지! 당장 경찰서로 끌고 갈 테다!”
“아..아니야! 난 아니라고!!”
험상궂은 표정의 커다란 남자가 다가오자 위협을 느낀 권영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훗, 어차피 도망칠 곳도 없잖아? 순순히 경찰서로 가시지?”
“오..오지 마! 오지 마!”
“큭!”
물러서던 권영이 기회를 엿보다 그대로 강우의 가슴을 럭비선수처럼 어깨로 들이받았다.
갑작스런 공격에 강우는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으악! 손! 내 손!!”
넘어지며 오른 손을 잘못 짚은 강우는 손을 받쳐 든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괜찮아?! 어디 좀 봐봐!”
놀란 인서가 강우의 손을 살폈다.
“아파! 아프다고!! 부러졌나봐! 난 끝났어! 손이 부러지다니! 내 인생은 끝났어!”
완전히 패닉에 빠진 강우는 오른손을 부여잡고 대성통곡이라도 할 낌새였다.
“잠깐 좀 보자니까!”
“아아아! 피아니스트 로널드는 끝났어... 다시는 건반을 두드리지 못할 거야...”
절망에 빠진 햄릿처럼 비극적인 대사를 중얼거리는 강우를 보며 인서는 어찌해야 할 지 몰라 서성이다 문뜩 권영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 깨달았다.
황급히 돌아보자 언제 빠져 나갔는지 가게 문이 열려 있었다.
강우에게 이길 수 없을 것 같으니 재빨리 도망친 것이다.
“일단 병원에 가 보자. 단순히 근육이 좀 놀란 걸 수도 있잖아.”
“아니야.. 부러진 게 분명해.. 난 끝났어...”
“부러지면 그 정도로 아프지 않을 걸? 아마 데굴데굴 구를 만큼 아팠을 거야.”
“아팠어! 아팠다고!! 내 사회적 체면과 인격 덕분에 참은 거야! 안 그랬음 벌써 바닥을 몇 바퀴나 굴렀다고!”
어린애처럼 억지를 쓰는 강우를 보며 인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 진정하고 일단 병원부터 가자.”
강우를 달래 가게를 나서며 인서가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가게에 들어온 거야?”
아까부터 묻고 싶었지만 워낙 경황이 없어 이제야 묻게 되었다.
“아아.. 집으로 가는데 아무래도 가게에서 스친 남자 얼굴이 묘하게 낯익더라고. 아니나 다를까 CCTV부순 그 자식이었잖아. 확인하자는 마음에 다시 가게로 갔지. 문은 닫혔는데 안에서 쿵쾅거리는 요란한 소리가 나기에 순간 도둑이 들었나 싶었는데 뭔가 네 목소리도 희미하게 들리더라고. 누군가랑 다투는 것 같기에 희주씨한테 연락해보니 뒷문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알려줬어.”
비상시 외엔 거의 사용하지 않는 가게 뒷문이 있었는데 희주가 비밀번호를 알려준 덕에 강우는 제 시간에 맞춰 가게에 들어올 수 있었다.
덕분에 권영의 손에서 벗어난 인서는 거듭 감사인사를 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럴 여유도 없이 한밤중 응급실로 달려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병원에 도착해 엑스레이를 찍었지만 다행히 뼈에는 이상이 없었다.
순간적으로 근육이 놀라 통증이 있었지만 이삼일 지나면 괜찮아 질 거라고 했다.
붙이는 파스 몇 장이면 해결될 일을 손목이 부러졌네, 피아니스트로서의 인생이 끝났네 어쩌네 하며 온갖 진상을 떨어댄 걸 생각하면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프로 피아니스트에게 3일이나 연습을 못 한다는 게 얼마나 큰 손해인지 알아? 클래식에 문외한인 당신이 알 턱이 없지!”
“네네.. 그러시겠죠.”
“쳇. 어쨌든 지금도 욱신거리고 아프다고.”
“진통제 받아 왔으니까 집에 가서 먹고 푹 자.”
병원을 나서서 강우의 집으로 향했다.
“들어가. 오늘은.. 그냥 가게에서 잘게.”
강우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 인서는 돌아서려했다.
“무슨 말이야? 자고 가야지. 밤새 고양이가 울어대는 걸 나보고 참으라고? 가뜩이나 손도 아픈데.”
강우는 어이없단 듯 인서를 쳐다보며 대문을 열고 그가 들어가길 기다렸다.
인서는 짧게 한숨을 내쉰 뒤 집안으로 들어섰다.
기다리고 있던 고양이가 현관 앞까지 마중 나와 다리사이를 오가며 인서를 반겼다.
지나를 품에 안아들고 부드러운 털의 감촉을 느끼자 어쩐지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
자연스레 온 몸의 힘이 풀리며 쓰러지듯 현관 앞에 풀썩 주저앉았다.
“괜찮아?”
강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인서를 내려다보았다.
“...응... 미안...”
인서가 어색한 억지미소를 지으려 하자 강우의 인상이 더욱 험악하게 구겨진다.
“아까 그건 뭐야? 단순한 몸싸움으론 보이지 않았어.”
인서는 순간적으로 숨을 삼켰다.
경황이 없어 미처 아까의 상황을 설명해야 한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
“목에 그.... 그.... 에잇!.. 키스마크가 덕지덕지 붙은 걸 아냐고!!”
강우가 갑자기 버럭 화를 냈다.
인서는 화들짝 놀라 벌어진 셔츠를 바짝 여며 쥐었다.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라 새빨개졌다.
“이..이건... 그..그러니..까...”
인서는 어떻게 말해야 할 지 몰라 떨리는 입술로 말을 더듬었다.
“그 CCTV 부순 놈 전부터 알던 사이였어? 어떻게 둘이 있었던 거야?”
“... ...”
인서는 고개를 푹 숙였다.
“뭔가 일이 있는 모양이군. 일단 자리를 옮기지.”
강우는 인서를 일으켜 거실로 데려왔다.
소파에 앉히고 주방에서 와인을 병째로 들고 돌아왔다.
잔에 채우자마자 인서는 급히 한 잔을 비워냈다.
제정신으론 도저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연거푸 두 잔을 비워낼 때 까지 강우는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미안해...”
인서는 우선 사과부터 했다.
그의 집에 낙서를 한 것도 CCTV를 부순 것도 권영의 짓이니 따지고 보면 자신이 원인이었다.
“그 녀석은.. 초등학교 동창이야... 그때 이후로 줄곧 친구였어.”
그렇게 입을 뗀 인서는 결코 돌아보고 싶지 않은 과거의 일을 조금씩 천천히 이야기해 나갔다.
친구였던 권영에게 이용당하고 모든 걸 잃은 채 지금은 누나의 가게에서 살며 일을 돕고 있다는 부끄러운 과거사를 모두 이야기했다.
“그리고......”
인서가 잠시 말을 멈추고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으로 손끝이 떨려왔다.
이 말을 하면 강우가 자신을 경멸할지도 모른다는 걸 알기에 두려웠다.
조금의 용기가 더 필요했다.
“.....난... 오랫동안.. 그 녀석을.. 좋아했어.”
“....??....”
강우는 언뜻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제와 밝혀서 미안해.. 네가 찜찜하다면 다시는 이곳에서 자는 일은 없을 거야.”
“무슨 말이야?”
“...... 내 연애대상은... 남자야...”
“Are you gay??"
강우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지는 걸 본 인서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당장이라도 이 자릴 피해 숨고 싶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경멸당한다는 건 예상보다 훨씬 큰 상처가 될 것 같았다.
“그 녀석은.. 내가 자길 좋아한다는 걸 이용했어. 내가 뭐든 다 해줄 걸 알고 있었어.”
“Oh my God”
“무슨 짓을 해도 받아줄 거라 생각했나봐. 날 속이고 여자랑 도망쳐놓고는 이제와 자길 받아 달래. 날 좋아하게 됐다며... 말도 안 되는 얘기지...”
“I can't believe it!"
“...그래서.. 오해를 한 것 같아. 내가 이 집에 들락거리니까 당신이 나랑 사귀는 줄 알고....”
“이런 미친!"
“미안해... 권영이한테 당신이랑은 절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얘기했으니까 너무 불쾌하게 생각하진 말아줘. 단순히 고양이 때문에 내가 신세를 지고 있는 거라고 분명히 얘기했으니까...”
인서는 강우가 오해받은 것 때문에 화가 났다고 생각해 열심히 변명의 말을 덧붙였다.
“이상한 오해는 하지 않을 거야. 한번만 더 이 집에 못된 짓 하면 경찰에 고발한다고 했으니까 다시는 그런 짓 못할 거야. 내가 약속할게. 그리고.. 정말 미안해. 내가 진작 얘기했어야 하는데... 불쾌한 일 겪게 해서 정말 미안해.”
인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깊이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몇 번을 거듭해도 미안한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자식이 당신을 강제로 안으려고 했단 거야?!! 이렇게 키스마크를 남길 때 까지 반항도 제대로 안 한 거야?!!”
“어?... 아.. 이건.... 피하려고 했지만...”
“아직 그 자식에 대한 감정이 남아 있어서 어영부영 받아들이려고 한 건 아니고?”
“뭐?! 말도 안 돼!”
“확실히 정리된 거 맞냐고!”
“당연하지! 이젠 그 자식한테 털끝만큼도 관심 없어!”
“맹세할 수 있어?”
“물론 맹세할 수 있..........지만.....”
갑자기 격앙되어 대답하다 인서는 문뜩 대화의 초점이 흐려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논쟁이 되어야할 부분은 자신이 게이임을 고백한 것과 그 사실이 강우를 불쾌하게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였다.
결과에 따라 다시는 강우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강우가 그런 인서를 기분나빠하면 두 사람의 관계는 여기서 끝인 것이다.
그런데 강우는 묘하게도 다른 부분에서 열을 올리고 있다.
지금 상황에서 인서가 권영에게 감정이 남아 있느냐 안남아 있느냐가 왜 중요한 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야? 무슨 맹세를 그렇게 뜸을 들여?”
강우가 순간 험상궂게 미간을 찌푸렸다.
“저기... 내 말.. 제대로 들었어?”
“무슨 소리야?”
“.....내가.... 게이라는....”
“당연히 들었지. 누굴 가는 귀 먹은 노인네로 알아?”
“... ...”
인서는 잠시 숨을 고르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괜..찮아?... 앞으로 내가 지나를 돌보러 여기 오는 거라던가... 이따금... 같이 술을 마신다거나.... 이 집에서 자고 가는 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괜찮지 않음 어떻다는 거야?”
“불쾌..하지 않겠어?”
“글쎄... 그런 생각은 안 해 봤는데?”
“...아.....”
그 순간 어쩐지 인서는 금방이라도 터질듯 부풀었던 풍선에서 푸쉬쉭 바람이 빠지는 것 처럼 긴장감이 훅 가라앉는 걸 느꼈다.
동시에 꾹꾹 눌러왔던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갑자기 왜 이래?”
예고도 없이 투두둑 떨어진 눈물에 강우가 더 놀란 듯 물었다.
“아... 미안... 그냥.. 조금 안심이 돼서....”
무슨 뜻이냐고 묻자 인서가 급히 눈물을 닦으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실은.. 다 말하고 나면 두 번 다시 못 볼 줄 알았거든. 다들 이상해하잖아...”
“칫.. 바보 같긴.”
“...응... 좀.. 바보 같네....”
“자, 그딴 자식 잊어버리고 오늘밤은 신나게 마셔보자고.”
강우가 인서의 잔을 가득 채웠다.
두 사람은 챙하고 소리가 나게 잔을 부딪친 후 시원하게 들이켰다.
인서는 가슴이 서서히 따뜻해짐을 느꼈다.
두려워 피하고 싶었던 사실을 털어놓았는데도 강우가 변함없는 태도로 있어준 것에 크게 감격했다.
그가 더욱 좋아질 것 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반면 아무리 좋아해도 강우에겐 결코 자신의 마음이 받아들여질 리 없는 견고한 벽 같다는 느낌도 받았다.
그래도 지금은 안심되고 좋았다.
강우가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지금 이 순간이 행복했다.
와인 한 병을 완전히 비워 낸 후 인서는 지나와 함께 2층 방으로 올라갔다.
취한 인서가 제대로 올라가는지 확인한 강우는 그제야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옷을 벗고 샤워를 하며 생각했다.
유치원을 다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주위에 여자가 끊긴 적이 없었다.
먼저 사귀자고 한 적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여자 쪽에서 고백해 온 경우가 허다했다.
물론 큰 키와 멀끔한 얼굴을 보고 다가왔다 변덕스럽고 다소 괴팍한 성격에 떨어져 나가기 일수였지만 그래도 어쨌든 주변에 여자는 넘쳐났다.
그래서 여자가 아닌 남자를 연애대상으로 삼는 것에 대해선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상식적으로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건 알아도 그건 어디까지나 책이나 드라마 속 이야기일 뿐이었다.
이렇게 가까이 그런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완전 비호감에 얼굴도 영 시원찮던데... 이해가 안 가네. 그딴 인간 뭐가 좋아서...”
오랫동안 인서가 좋아했다던 이권영은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호감가는 인간이 아니었다.
비주얼도 성격도 밑바닥인 그런 사람이 뭐가 그리 좋다고 가진 거 다 내주었는지 다시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간다.
“그딴 자식이랑 비교도 안 될 만큼 내가 훨씬 잘생겼는데 말야.”
그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깔보는 듯 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뭐? 그런 사기꾼이랑 날 비교해서 어쩌겠다는 거야?! 어이가 없구만...”
그러다 문뜩 자신이 말도 안 되는 소릴 지껄이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04.02 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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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너무 재미있어여 잘 보고갑니다...다음편 너무 기대대여
넘 잼있어요!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