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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큰 소동이 있은 후 며칠이 지났다.
다행이 그 사이 권영이 다시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소심한 성격상 사나운 강우와 또 마주칠까 두려워 잠시 피해서 눈치를 살피고 있을 게 뻔했다.
인서는 권영의 일이 마무리 되지 않아 무거운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또 언제 느닷없이 들이닥칠까 두려워 일찍 가게 문을 닫고는 했다.
소동이 있던 날 강우가 희주에게 전화를 걸었던 탓에 누나도 권영의 일을 알아버렸다.
걱정시키기 싫어 혼자 해결하려던 인서는 어쩔 수 없이 누나에게 권영이 저지른 일을 털어놓아야 했다.
희주는 당장 경찰에 알리자고 펄펄 뛰었지만 인서는 가게 이미지도 있고 일을 크게 벌이기 싫어 알아서 해결하겠다고 누나를 안심시켰다.
그 사이 권영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작은 소동은 있었다.
강우가 또 다시 지나의 입양자를 퇴짜 놓은 것이다.
벌써 두 번째였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이번엔 또 뭐가 문젠데?”
“개가 있잖아!”
“개와 고양이를 같이 기르는 집은 많아.”
“안 돼. 지랄 맞은 개한테 치일게 뻔해.”
“그 반대겠지! 새끼 말티즈라 지나보다도 훨씬 덩치가 작다고! 오히려 지나가 괴롭힐까 걱정인걸.”
“하여튼 개랑 고양이는 상극이야. 같이 기르는 집은 절대로 안 돼.”
“잘 알아보고 정한 곳이야. 네가 젊은 여자 있는 집 싫다고 해서 이번엔 노부부만 사시는 한적한 전원주택으로 정했단 말야. 두 분 다 너무 착하고 좋은 분들이었어. 지나 사연을 듣고 눈물까지 글썽이셨다니까.”
“늙으면 눈물샘이 약해지기 마련이야.”
“하아......”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강우를 보며 인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기 말야... 혹시... 지나를 보내기 싫은 거야? 그 동안 정이 들었다거나 해서 그냥 기르고 싶은...”
“뭐?!! 절대 아니야.”
“그럼 왜!”
“... 그러니까.... 뭐.... 꿈자리 뒤숭숭할까봐 그런다! 괜히 잘못 보내면 그 못생긴 고양이가 꿈에서까지 날 괴롭힐 거 같단 말야. 아무튼 다른 집 찾아봐. 젊은 여자 없고, 다른 고양이나 개가 없는 집으로.”
손목이 다 나았는지 확인 겸 병원에 갔다가 가게에 잠시 들른 강우에게 입양 이야기를 꺼냈다 또 다시 퇴짜를 맞은 인서는 강우의 진심을 알 수 없어 혼란스럽기만 했다.
손에 상처날까 한번 다정히 쓰다듬어 주지도 않으면서 강우는 지나의 새 입양처에 대해 꽤나 까다롭게 굴었다.
일부러 보내기 싫어 심술을 부리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빨리 나가버려!’ 라는 말을 수시로 내뱉고는 했다.
강우의 진심이 뭔지 모르겠다.
그날 밤 가게 문을 닫고 강우의 집으로 들어서자 오랜만에 경쾌한 피아노소리가 들려왔다.
손목 때문에 며칠 쉬었던 연습을 다시 시작한 듯 했다.
물 흐르듯 위에서 아래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아름다운 선율에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강우는 인서가 온 것도 모르고 한창 연주에 빠져 있었다.
인서는 현관 앞에 멈춰 서서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감상했다.
강우의 피아노를 듣고 있으면 발가락이 제멋대로 까딱거리며 박자를 맞추게 되고, 모르는 곡인데도 흥얼흥얼 선율을 따라 고갯짓을 하게 된다.
하지만 오늘 곡은 인서도 알고 있는 곡이었다.
예전 두 사람이 한껏 취해 있을 때 강우가 신이 나서 쳐 주었던 쇼팽의 곡이다.
제목은 ‘고양이 왈츠’.
다채로운 음들이 쉴 틈 없이 쏟아져 나와 잠시도 딴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경쾌하고 즐거운 곡이었다.
고양이 걸음처럼 사뿐사뿐 가벼운 손놀림으로 건반을 두드리며 기분 좋게 미소 짓고 있을 강우의 모습이 그려진다.
옆자리에 앉아 가까이서 듣고 싶은 욕심에 현관을 벗어나 복도를 지나던 중 갑작스런 전화벨 소리에 피아노가 뚝 멈췄다.
흠칫 놀라 인서의 발걸음도 멈춰버렸다.
잠시 전화벨이 울리다 “네, 차강우입니다.” 라고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인서는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아, 이권영씨.”
왜 권영의 이름이 강우의 입에서 나오는 지 이해할 수 없어 인서는 복도 너머에 선 채 숨을 죽였다.
“우리 사이의 계산은 다 끝난 거 아니었나?”
계산?
무슨 계산??
인서의 눈이 점점 더 휘둥그레졌다.
“감사인사 받자고 한 일은 아니야. 이런 전화는 별로 유쾌하지 않군. 전화 할 시간에 열심히 벌어서 하루라도 빨리 갚도록 해.”
탁-하고 신경질적으로 전화기를 피아노 위에 올려놓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아까까지 기분 좋았는데. 이 자식 목소릴 들으니 갑자기 짜증이 샘솟는군. 우주 쓰레기 같은 놈!”
유치한 욕을 퍼붓고는 다시 피아노 연습을 시작한다.
인서는 불길한 예감에 심장이 거칠게 뛰는 걸 느꼈다.
입안이 바싹 마르고 이대로 도망쳐 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뭔가 자신만 모르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 것 같아 불안했다.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뒤 용기를 내어 거실로 들어왔다.
“어!.. 언제..왔어?”
강우가 피아노에서 시선을 들어 인서를 보고는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것만으로도 인서는 그가 자신에게 비밀이 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무슨.. 얘기야? 방금....통화...”
천천히 다가가며 조심스레 묻는 인서의 표정은 보기에 안쓰러울 만큼 창백했다.
“....어?... 통화?... 아아!.. 그냥.. 아는 사람.”
“이권영이라고......”
“... 흔한 이름이잖아. 내 공연 스탭 중에 이권영이라고 있어.”
별 거 아니라는 듯 천연덕스럽게 손을 휘젓는다.
인서는 양해도 없이 피아노 위에 놓인 강우의 휴대폰을 낚아 채 통화목록을 눌렀다.
역시나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이권영의 번호였다.
순간 허를 찔린 듯 강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이내 흥미 없단 표정으로 돌아갔다.
“어떻게 된 거야? 왜 네가 그 녀석과 연락을 하지? 계산은 또 무슨 얘기야?”
점점 흥분해서 목소리가 높아지는 인서와는 반대로 강우는 느긋하게 기지개를 켜며 일어섰다.
“으자자자자~ 저녁도 거르고 다섯 시간 내내 연습만 했더니 배고파 죽겠다. 뭐 좀 시켜먹자.”
속이 타는 인서를 내버려두고 소파에 앉아 야식집 책자를 뒤적이는 강우.
“역시 밤엔 닭발이지. 뼈 없는 매운 닭발에 소주 마시자.”
걸핏하면 외국에서 자랐다고 얘기하면서 입맛만은 지겹도록 토종스러웠다.
“설명해줘.”
여전히 선 채 강우를 내려다보는 인서의 표정은 점점 더 차가워져 갔다.
그제야 자신의 얼렁뚱땅이 전혀 통하지 않을 분위기임을 파악한 강우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진지한 자세로 고쳐 앉았다.
“흐음... 이틀 전에 연락이 왔어. 그 자식한테 말야.”
“그래서?”
“재촉하지 마. 얘기하고 있잖아.”
인서는 울컥 치미는 화를 꾹 참아 눌렀다.
“내 개인적인 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아무튼 내가 유명인이란 걸 알아냈더군. 당신도 알다시피 조금만 검색하면 내가 누군지는 금방 알게 되잖아. 지난번 공연도 성공적이라 기사도 꽤 많이 났고. 요즘도 여성지에서 자꾸 화보를 찍자며 연락이 와서 참 곤란하던...”
“제발!!”
자꾸 삼천포로 빠지는 이야기에 인서는 바짝 애가 탔다.
“아, 쏘리. 아무튼 나한테 전화를 해서는 내가 유인서 당신의 새 애인이냐는 둥 이상한 헛소리를 하더라고. 그래서 영어로 신나게 욕을 퍼붓고 끊으려고 했는데 되먹지 못한 협박을 하잖아.”
“...협..박?”
“당신이랑 내 관계를 언론에 퍼트리겠다고 하기에 만약 그러면 명예훼손과 동시에 천문학적인 액수의 손해배상 청구는 물론, 허위사실 유포와 공갈 협박으로 형사소송 및 고발조치 하겠다고 했지. 내가 게이가 아님을 증명해줄 수많은 X-girl friend들이 널리고 널렸으니 난 뭐 별로 손해 볼 게 없다고. 내가 아이돌처럼 퓨어한 이미지가 생명인 연예인도 아니잖아.”
“......그랬...더니.. 그 자식이 뭐래?”
“뭐라긴.. 완전 바짝 쫄았지. 내가 또 목소리 깔고 정색하면 무섭거든. 그리고 거짓말도 아니고. 날 건드려봤자 본인만 심신이 괴로워진다는 걸 확실히 설명해줬어.”
“그걸로 끝이 아니었지? 계산 얘기는 뭐야?”
“응?.. 그런...얘길..했던가?”
또 다시 슬그머니 넘길 셈으로 딴전 피우는 강우를 인서가 무섭게 노려보았다.
“협박이 안 통하니까 이번엔 동정심 유발 작전으로 바꾸더라고. 못된 여자한테 속아서 땡전 한 푼 없는 신세라며 자신도 어쩔 수 없이 비빌 언덕을 찾아 너에게 올 수 밖에 없었대. 자기에겐 여기가 인생의 끝이라나 뭐라나. 다시 시작할 자금만 있으면 이번에야 말로 번듯하게 성공해 너에게 제대로 돈도 갚고, 사과도 하고 하겠다며 눈물을 펑펑 쏟아가며 애원하더라고. 아니면 이젠 한강 다리에서 뛰어 내리는 수밖에 없다고 하잖아.”
“그래서 설마...”
“뭐.. 한 사람 인생 구한다고 생각하면 그리 큰돈도 아니었어. 몇 억쯤 뜯어낼 심산인가 했는데 겨우 2천을 부르더라. 하여튼 그 자식은 배포도 없어.”
“......주진.. 않았지? 설마 그 돈.. 진짜로 준 건 아니지?”
“음...”
슬쩍 인서의 시선을 피해 눈동자를 굴리는 강우.
“줬는데.”
“차강우!”
“다시 시작하고 싶다잖아. 2천만원만 있음 새로 사업을 시작할 수 있대. 꼭 성공해서 네가 날린 돈 두 배로 갚겠다고 약속했어. 내 돈도 갚고.”
“아아.. 미치겠네..”
“그럴 거 없다니까. 방금 그 전화도 감사인사 하려고 한 거야. 열심히 일해서 갚겠다고 했어.”
“아니야! 권영인 그럴 애가 아니라고! 네 돈 들고 벌써 지방으로 튀고 있을 거야! 아니! 아직 근처에 있을지도 몰라! 일단 경찰에 신고하고 찾아봐야..”
절망적인 얼굴로 뛰어나가려는 인서를 강우가 붙잡았다.
“이거 놔! 빨리 찾아야 해!”
“그만둬.”
“안 돼! 넌 속은 거야! 권영인 그 돈..”
“알아.”
순간 인서의 표정이 굳어졌다.
“...뭐?...”
“나도 알아. 그 우주 쓰레기 같은 자식은 끝까지 쓰레기 짓을 할 거란 거 안다고.”
“그런데 왜......”
권영은 돈을 갚을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고 그저 그 돈을 갖고 튈 생각뿐이란 걸 강우 또한 알고 있다는 말에 인서는 어리둥절했다.
“그래야 그 자식이 떨어져 나갈 거 아냐. 당신 주위에서.”
“..!!..”
예상치 못한 대답에 인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슬려. 지난번엔 우연히 내가 근처에 있어서 구해줬지만 다음에 또 그런 일이 벌어지면 어떡할 거야? 당신이 아무리 게이라도 그딴 자식한테 억지로 당하는 건 싫겠지?”
“그... 그건......”
“뭐야? 왜 대답이 시원찮아? 설마 그런 플레이가 취향인 건 아니겠지? 내가 두 사람을 방해한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인서가 빨개진 얼굴로 발끈해서 소리쳤다.
“훗, 그렇겠지.”
씩하고 미소 짓는 강우의 얼굴은 놀랄 만큼 매력적이었다.
홀린 듯 멍하니 바라보다 인서는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하던 이야기로 돌아왔다.
“어..어째서.. 나한테.. 그렇게 신경 써 주는 거야?”
무언가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궁금해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린.. 오랜 친구도 아니고... 또...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잖아.”
내가 당신을 몰래 좋아하고 있을 뿐......
화끈 거리는 얼굴을 겨우 숨기며 물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당신이 그 자식이 나타난 이후로 늘 죽상을 하니까. 지금도 봐봐. 미간에 잔뜩 주름이나 잡고 말야. 10년은 늙어 보이네.”
“!!”
강우의 손이 다가오더니 인서의 이마를 콕 찍는다.
깜짝 놀란 인서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좀 웃어봐. 웃으니까 완전 어려보이고 귀엽던데.”
“....무....무슨......”
“연상한테 귀엽다는 건 좀 실례인가? 당신이 이해해. 난 아메리칸 스타일이잖아.”
“매일 말만 아메리칸 스타일이지. 토종한국인이면서.”
인서는 세차게 뛰는 심장소리가 들릴까 두려워 살짝 물러나며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했다.
“쿡... 그런가?”
장난스럽게 웃는 모습에 또 가슴이 덜컹한다.
차강우란 사람에게 한없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좋아한다’는 감정을 숨기고 조금 아는 사람 정도로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잘 지내왔다고 생각했는데 또 다시 단숨에 푹 빠져 머리까지 잠겨버렸다.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버린 것이다.
기쁘기도 하고 괴롭기도 했다.
그가 자신을 걱정해주고, 생각해준 건 너무나 기뻤다.
하지만 그로인해 큰 폐를 끼쳤으니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그의 배려는 감사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금전적 피해가 없는 말 그대로 배려 차원에서 끝나야 할 문제였다.
“저기.. 2천만 원 이라고 했지?”
인서는 풍선처럼 들뜨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현실로 돌아왔다.
“역시 그냥 있을 수는 없어. 그 녀석 어떻게든 찾아내서 그 돈 돌려줄게.”
인서의 말에 강우의 표정이 못마땅한 얼굴로 바뀌었다.
“내버려둬. 벌써 튄 놈을 어디서 찾겠다는 거야?”
“찾아봐야지. 어떻게든 잡을 거야.”
“시간낭비야. 그딴 놈은 잊어. 돈을 챙겨갔으니 낯짝 있는 인간이라면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겠지.”
“그럴 순 없어.”
“하여튼 그만두라니까!”
고집을 부리는 인서를 보며 강우는 버럭 짜증을 냈다.
그는 인서가 자꾸 이권영에게 연관되어 끌려 다니는 게 싫었다.
“어떻게 그만둬? 입장을 바꿔 생각해 봐! 네 주변인 때문에 내가 그런 큰돈을 썼다면 넌 마음이 편하겠어?”
“나라면 돈 쓴 사람 성의를 봐서라도 그냥 있겠어.”
“말도 안 돼. 난 그렇게 뻔뻔한 짓 못해.”
“당신은 너무 착해! 가끔 이기적으로도 살아봐! 사람이 어떻게 일생을 착하게만 사냐! 그러니까 그딴 놈한테 사기나 당하지, 이 어수룩한 인간아! 그건 착한 것도 아니고 그냥 멍청한 거야!”
“그래! 나 하나도 안 착해! 그냥 멍청하고 모자란 놈일 뿐이야!”
“모자라다고는 안했어!”
“그게 그거지 뭐야!”
“틀려!”
누가 들어도 억지스럽지만 강우는 고집스럽게 주장했다.
더 있다간 유치한 말싸움으로 이어질 것 같아 인서는 돌아섰다.
“어쨌든 ... 날 생각해 준 건 고마워. 마음만 받을게. 그리고 이 문젠.. 내가 알아서 해결할게. 더 이상 참견은 하지 말아줘.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해...”
인서는 진득하니 발치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양이를 품에 안고 계단으로 향했다.
“...저기.. 진짜 고마워... 잘 자.”
강우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무 대꾸도 없었지만 인서는 다시 한 번 인사를 건네고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인서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강우는 이내 재미없단 표정으로 소파에 벌렁 드러누웠다.
좀 전까지도 출출했는데 지금은 입맛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강우는 인서가 2층으로 올라간 후에도 널브러진 채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다.
사실 처음 권영의 전화를 받았을 때만 해도 이 놈이 감히 누구한테 협박을 늘어놓나 싶어 혼쭐을 낼 생각이었다.
클래식을 전공한 사람이라고 해서 사생활까지 우아하지는 않다.
어린 나이에 피아노 신동으로 불렸고 그 때문에 오랜 시간 부모에게서 떨어져 홀로 유학생활을 하며 온갖 인종들 틈에 섞여 경쟁해 온 삶이었다.
그 사이에서 자신만의 확고한 영역을 다지고 이만큼 성공하기까지 가끔은 부조리한 상황과 맞닥뜨리기도 했고, 시기어린 눈초리와 대 놓고 무시하는 거친 인간들을 상대해야 할 때도 많았다.
말 그대로 호수 위 백조처럼 고고한 자태로 우아하게 앉아 피아노를 치지만 여기까지 오는 게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니 이권영 같은 인간 하나쯤 벌벌 떨며 혼비백산 도망치게 만드는 건 강우에게 식은 죽 먹기다.
하지만 이내 인서의 얼굴이 떠올랐다.
요 근래 수심이 가득하던 얼굴이 생각나자 마음이 달라졌다.
또한, 지난번 가게에서 이권영이 인서를 덮치려 했던 일이 또 다시 반복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인서는 감정표현이 풍부한 타입이 아니라서 그런지 이따금 경계심을 풀고 웃을 때 자신도 모르게 눈길이 갔다.
웃는 얼굴이 아이처럼 맑고 사심이 없었다.
왜 그런지 정확한 이유를 댈 순 없지만 그렇게 웃는 인서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었다.
그 웃음을 못 본지도 오래되었다.
그게 다 이권영이 주변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심히 비위에 거슬리지만 꼬여든 파리를 처리하는 건, 죽이든지 내쫓던지 둘 중 하나뿐이다.
차마 죽일 순 없으니 멀리 쫓아내는 수밖에.
절대 들키지 않고 처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이없게도 엄청 빨리 들켜버렸다.
다시 편히 웃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일을 꾸민 건데 오히려 화만 잔뜩 내게 만들었다.
“당신은 모자라지 않아. 멍청하지도 않고... 다만.. 너무 순진하고 착할 뿐이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강우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가볍게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
다음날 아침, 인서가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벌써 주방에선 강우가 식사 준비 중이었다.
“왔어? 먼저 먹어.”
강우는 자기 몫의 계란프라이를 하느라 등을 돌리고 선 채 말했다.
“응. 고마워.”
인서는 접시에 놓인 토스트를 한입 베어 물고 천천히 씹으며 말할 기회를 찾았다.
지난 밤 얼렁뚱땅 마무리 짓고 올라갔지만 내내 마음에 걸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강우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해 준 건 너무나 기쁘고 고맙지만 큰 폐를 끼친 것은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다.
“저기.. 어제 말했던 거...”
“응?”
여전히 등을 돌리고 선 채 프라이팬을 뒤적이는 강우.
“조금만 기다려줘. 어떻게든 그 녀석 찾아내서 해결할게.”
“...... 그건 됐다고 했잖아.”
벌써 프라이를 두 개나 했는데 또 다시 계란 하나를 깨뜨린다.
“내 입장에선 그럴 수 없어. ... ... 아무튼 생각해줘서 고마워.”
“....뭐.... 별로....”
어깨만 한번 으쓱해 보인 뒤 또 계란 하나를 더 깬다.
“대체 계란프라이를 몇 개나 먹으려는 거야?”
“......”
“어제 밤에 못 먹고 자서 배가 많이 고팠나보네.”
“.....응......”
뭔가 석연찮은 뉘앙스로 짧게 대답한 강우는 인서가 아침식사를 다 하고 일어설 때 까지 무려 일곱 개의 계란 프라이를 더 했다.
“지나 아침밥 줬으니까 이따 점심때쯤 간식으로 캔 하나만 따서 줘.”
인서는 허겁지겁 사료를 먹는 고양이를 몇 번 쓰다듬은 뒤 서둘러 가게로 향했다.
인서가 나가고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나자 그제야 강우는 들고 있던 뒤집개를 던져버린 뒤 돌아섰다.
분주한 척 인서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프라이팬만 잡고 있었더니 계란이 접시에 산처럼 쌓여버렸다.
강우는 힘없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아.. 젠장!!”
그는 한껏 숨을 참고 있던 사람처럼 큰 소리로 씩씩대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왜이래, 차강우! 미친 거야?!”
절망적인 비명소리에 밥을 먹고 있던 고양이가 거슬리는 듯 찌푸린 얼굴로 흘낏 쳐다보았다.
“으악!.. 환장 하겠네!!”
심장이 벌렁거리고 얼굴이 달아오른다.
어젯밤 꿈이 또 다시 머릿속에 그려지자 자연스레 나타난 현상이었다.
지난밤 강우는 야식을 포기하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직전까지 인서와 대화를 하다 잠들어서 그런지 꿈에서 인서가 나왔다.
처음엔 평소처럼 거실에서 와인을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는 평범한 꿈이었다.
현실과 별다를 것도 없었다.
그런데 뭔가 점점 현실과 다른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잔뜩 취하기 전까진 말도 표정도 많지 않은 인서가 평소와 달리 방긋방긋 환하게 웃으며 보기만 해도 즐거운 모습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런 그의 모습이 무척이나 행복해 보여 강우마저 스르륵 미소 짓게 만들었다.
그런데 꿈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인서는 강우와 눈이 마주치자 부드럽게 미소 짓더니 잔을 내려놓고 다가왔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강우의 뺨을 살며시 감싸 안고 다가와 입맞춤을 했다.
여기까진 지난번 인서가 완전히 취해 술주정으로 장난스럽게 했던 뽀뽀와 별다를 게 없었다.
거기서 깼더라면 강우도 그저 그런 개꿈이겠거니 하고 가볍게 넘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꿈속의 자신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런 인서의 허리를 감싸 안고는 무릎 위에 앉혔다.
그리고 절대 장난이라고는 할 수 없는 딥키스를 나누기 시작했다.
살짝 물러나려는 인서의 뒷목을 도망치지 못하게 붙잡고 강하게 입술을 눌러 벌리게 만든 뒤 혀를 밀어 넣어 마음껏 입 속을 휘저었다.
숨이 막힌다며 가슴을 밀어내려는 저항도 가볍게 물리치며 강요하는 듯한 키스를 이어갔다.
품안의 인서는 힘겨운 듯 강압적인 키스에 신음소리를 흘렸다.
그 소리에 더욱 자극받은 강우는 그대로 인서를 소파에 쓰러트린 채 성급한 손길로 온 몸을 더듬었다.
“하아.. 아아!.. 싫...어...”
비음 섞인 신음이 묘하게 귀를 자극해 더욱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안..돼!.. 흐읏!”
어느새 자신은 인서의 옷을 들추고 맨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그 어떤 글래머러스한 여자의 가슴을 만질 때 보다 인서의 볼품없는 평평한 가슴을 더듬을 때가 더 흥분되었다.
“아아앗!!”
마지막 저항을 물리치고 결국 바지까지 벗겨내서는 자꾸만 오므리는 허벅지를 강제로 벌리고 당연하단 듯 그 사이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는 마음껏 쾌감을 만끽했다.
하늘로 붕 날아오르다 한순간에 뚝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사이 온 몸이 흠뻑 땀으로 젖어들었다.
그렇게 클라이맥스로 치달은 욕망이 정점을 찍은 후 폭발했다.
세포 하나하나 솜털까지 모조리 곤두서는 것 같은 쾌락의 최고점을 만끽한 후 갑자기 온 몸에 한기가 들었다.
아랫도리가 서늘해지며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어...어...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설......마.......
이미 잠은 깼지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현실을 확인하는 게 두려웠다.
설마 하는 마음에 슬그머니 속옷을 더듬다 “으아아악!!” 하고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10대 이후로 처음이었다.
하고 싶어 환장할 나이도 아니고, 여태껏 여자가 궁했던 적도 없었기에 성인이 된 이후 처음 맞은 초유의 사태에 강우는 황당함을 넘어 충격을 받았다.
옷을 벗어던지고 욕실로 뛰어 들어가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머리부터 뒤집어썼다.
몽정이라니!
나이 스물여덟에 몽정이라니!!
그것도 남자를 상대로!!!!
강우는 너무 어이가 없어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샤워를 마치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후 다시 침대에 누워 이건 그냥 개꿈이다, 아무것도 아닌 꿈이다. 라며 세뇌하듯 중얼거렸다.
다시 잠들면 혹시나 또 그런 꿈을 꿀까봐 두려워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그렇게 아침까지 뒤척이다 결국 뻘겋게 충혈 된 눈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주방으로 나와 아침을 준비하며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
하지만 막상 식사를 하러 온 인서를 보자 어젯밤 꿈속에서 미친 듯이 저 몸에 파고들던 장면이 떠올라 도저히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인서는 이런 저런 말을 건네지만 강우는 제대로 대꾸조차 못한 채 얼른 나가라고만 속으로 빌었다.
애꿎은 계란프라이만 접시에 쌓여갔다.
오늘 온종일 먹어도 저 많은 계란을 다 먹진 못할 것이다.
인서가 나가고 나서야 그는 겨우 참았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꿈속이지만 자신을 상대로 관계를 가졌다고 하면 인서가 기분나빠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다 그래도 게이라면 그렇게 싫어하진 않으려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취향이란 게 있지.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한테 그런 취급당하면 기분 좋을 리 없잖아. 라고 결론내리고 절대 말하지 말자고 결심했다.
“그래. 여자. 여자를 사귀자. 예상외로 솔로생활이 길어져서 그런 이상한 현상이 벌어진 거야.”
지나의 주인이었던 여자에게 차인 후 한동안 혼자였는데 슬슬 새 여자친구를 사귈 시기가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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