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연무성과 부지不識
부지불식不知不識이란 말이 있고, 또 목불식정目不識丁이란 말도 있다. 그러고 보면 불식不識이라 읽는 것이 상식이고, 부지不識라 읽는 것은 특이한 경우에 한정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글의 제명을 “확연무성과 부지”라 명명했다.
양무제가 달마대사에게 물었다.(梁武帝問達磨大師)
“어떤 것이 성제 제일의입니까?”(如何是聖諦第一義)
“확연하여 성제랄 것도 없습니다.”(磨云廓然無聖)
“짐을 대면하고 있는 이는 누구십니까?”(帝云對朕者誰)
“알려줄 수 없습니다.”(磨云不識)
황제가 계합하지 못하자 마침내 강을 건너서 소림에 이르고 9년 동안 면벽했다.(帝不契 遂渡江至少林面壁九年)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어떤 것이 불법의 명백한 대의입니까?” 이 질문이 양무제의 질문 “어떤 것이 성제 제일의입니까?”와 그 대의는 동일하다. 성인이 증득한 진제를 성제라 일컫고, 최고로 존귀하여 위가 없는 법을 성제라 말한다. 또 제일의제는 실상 법계 필경지畢竟智 제일의공 제불보리와 같다. 성제가 바로 제일의제이다. 양무제는 달마대사한테 성인 곧 부처님의 교법 가운데 구경이 무엇인지를 물은 것이다.
“확연하여 성제랄 것도 없습니다.”(廓然無聖) 바로 확연하다. 텅 비고, 지극히 적정하며, 확 트이고, 툭 터져서, 일체 막힘이 없다. 이 확연이 곧 무변허공 각소현발이다. 이 경계는 성제 또는 제일의제라 말할 것이 없다. 단지 중생을 교화하고자 하는 방편으로 성제라 말한 것일 뿐이다. “다만 범정이 다할 뿐이요, 따로 성해랄 것이 없다.”(但盡凡情 別無聖解) 문답은 언제나 질문에 정답이 있다. 양무제가 갖고 있는 성제관과 제일의제관을 확연무성 한마디로 최파한 것이다.
“짐을 대면하고 있는 이는 누구십니까?” 짐을 대면하는 이는 차치하고, “누구를 대면하는 짐은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참으로 난감한 질문이다. 내가 만일 십신 초위의 대심범부라면, 또는 내가 만일 십주 초위에 무상정각을 성취한 보살이라면, 필경에는 내가 만일 구경각을 증득한 원각불이라면, 뭐라고 말할까?
“알려줄 수 없느니라.”(不識) 이 글의 주제 중에 하나가 바로 부지不識이다. 이 부지는 무지無識와 같다. 무지란 말이 구마라집 삼장이 번역한 유마힐소설경에 나온다. 아래와 같다.
이와 같이 모든 보살이 각각 설하고 나서 문수사리에게 질문했다. “어떤 것이 보살이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입니까?”(如是諸菩薩各各說已 問文殊師利 何等是菩薩入不二法門)
문수사리가 말씀하셨다. “나의 뜻과 같은 것이라면, 일체 법에서 말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으며, 지시할 수도 없고 나타낼 수도 없습니다. 모든 문답을 여의면, 이것이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입니다.”(文殊師利曰 如我意者 於一切法無言無說 無示無識 離諸問答 是爲入不二法門)
무언무설을 “말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다.”라고 번역하고, 무시무지를 “지시할 수도 없고 나타낼 수도 없다.”라고 해석했다. 먼저 무언과 무설의 언설은 같은가? 다른가?
승조스님이 주석한 주유마힐경은 집삼장과 도생스님의 견해도 함께 있다. 모든 보살의 질문에 대한 문수보살의 답변 중에 “말할 수 없다.”(無言)를 집삼장은 “곡변하여 설한 것이다.”(什曰 說曲辯也)라고 하고, “설명할 수 없다.”(無說)를 “한차례 지나간 말을 설한 것이다.”(什曰 說一往說也)라고 주석했다. 무설은 무언을 반복해서 말했다는 뜻이다. 곧 무언은 무설과 같고, 무시는 무지와 같다. 이 시示자에는 보이다 가르치다 알리다 등의 뜻이 있고, 지識자에도 적다 기록하다 표시하다 나타내다 등의 뜻이 있다. “알 수 없다”는 무식과 “나타낼 수 없다”는 무지를 명확히 구별하기 위하여 설무구칭경은 “표창할 수도 없고 지시할 수도 없다.”(無表無示)라고 표현했다.
이를 의거하면 무식無識으로 독음하고 알 수 없다는 뜻을 취하는 것보다는 표지의 개념으로 무지無識라 독음하고 “나타낼 수 없다” 또는 “알려줄 수 없다”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옳을 듯하다. 또 하나의 이유는 무언과 무설 무시가 모두 안에서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무식 또는 무지만 홀로 안의 의식작용으로 보는 것보다는, 셋과 함께 동일한 작용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짐을 대면하고 있는 이는 누구십니까?”(對朕者誰)
“말할 수 없습니다.”(無言) “설명할 수 없습니다.”(無說) “보여줄 수 없습니다.”(無示) “나타낼 수 없습니다.”(無識) “알려줄 수 없습니다.”(不識) 어떻게 말해도 그 도리는 같다.
신화엄경론에서 각수보살의 이름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여 신해발심을 밝혔다. “각수라 이름한 것은 문수의 묘혜로 정사正邪를 잘 간택하여 스스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며, 또한 스스로 깨달은 법으로 남을 깨닫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위의 보살이 깨달은 것은 무슨 법인가? 이 지위 가운데서 깨닫는 법이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기의 몸과 마음이 본래 법계임을 깨닫는 것으로 백정무염白淨無染하여 앞에 금색세계와 같음이 이것이며, 둘은 자기의 몸과 마음에 분별하는 체성이 본래 능소가 없어서 본래부터 부동지불임을 깨닫는 것이며, 셋은 자기의 마음에 정사를 잘 간택하는 묘혜가 바로 문수사리임을 깨닫는 것이다. 십신심의 최초에 이 삼법을 깨닫는 것을 각수라 이름하며, 곧 이 신심 가운데 잘 깨닫는 행의 명칭이 각수보살임을 천명한 것이다. 이 모두는 모름지기 자기가 수행할 법문을 스스로 인식하여야 바야흐로 믿음을 성취하기 때문이며, 남에게는 그러할 분이 있지만 자기에게는 그러할 분이 없다고 믿는다면 신심이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名爲覺首 爲明以文殊妙慧善簡正邪 能自覺故 亦於自所覺法能覺他故 此位菩薩所覺何法 於此位中 其覺有三 一覺自身心 本是法界 白淨無染 如前金色世界是 二覺自身心分別之性 本無能所 本來是不動智佛 三覺自心善簡擇正邪妙慧是文殊師利 於信心之初 覺此三法名爲覺首 即明是信心之中 善覺之行 名爲覺首菩薩 總須自認是自所行之法門 方成信故 信他而有 自無其分 不名信故)
십신 초위의 대심범부는 자기의 몸과 마음이 청정무구한 법계 곧 금색세계와 같음을 깨닫고, 자기의 몸과 마음이 부동지불임을 깨달으며, 자기의 마음이 문수사리임을 깨닫는 것이다. 법계가 법이고, 부동지불이 불이며, 문수사리가 승이니, 나의 몸과 마음에 불법승 삼보가 있다. 십신 초위의 대심범부는 이 불법승 삼보를 어떻게 드러낼 수 있는가?
“짐을 대면하고 있는 이는 누구십니까?”
“알려줄 수 없느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응당 어떻게 여래 응공 정등각이 정각을 성취함을 알아야 하는가?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응당 알아야 한다. 여래는, 일체 경계에 관찰하는 바가 없고, 일체 법에 평등하여 의혹하는 바가 없으며, 이성二性이 없고, 체상도 없으며, 심행心行이 없고, 주지住止도 없으며, 한량이 없고, 변제도 없으며, 멀리 이변을 여의고 중도에 머무르며, 일체 문자나 언설을 벗어나는 곳에서, 정각을 성취함을 알아야 하느니라.”
“여래는 일체 중생의 심념으로 행하는 바 근성과 욕락 번뇌 염습에서 정각을 성취함을 알아야 하느니라. 요점을 열거하여 말한다면, 여래는 일념 중에 삼세의 일체 제법에서 정각을 성취함을 모두 알아야 하느니라. 불자여, 비유하면 마치 대해가 사천하 중에 일체중생의 색신 형상을 두루 투영시켜 나타낼 수 있는 것과 같으며, 이 때문에 모두 일념을 대해로 삼는다고 말하느니라. 제불의 보리도 또한 이와 같으니, 일체중생의 심념이나 근성 욕락에서 두루 나투시지만 나투시는 바가 없느니라. 이 때문에 이름을 제불보리라 설하시니라.”
불자여, 제불의 보리는 일체 문자로 선설할 수 없고, 일체 음성으로 미칠 수 없으며, 일체 언어로도 설할 수 없는 것이니라. 다만 응현하는 바를 따라 방편으로 열어서 보일 따름이니라.”(佛子 諸菩薩摩訶薩應云何知如來應正等覺成正覺 佛子 菩薩摩訶薩應知 如來成正覺 於一切義無所觀察 於法平等無所疑惑 無二無相 無行無止 無量無際 遠離二邊 住於中道 出過一切文字言說 知一切衆生心念所行根性欲樂煩惱染習 舉要言之 於一念中悉知三世一切諸法 佛子 譬如大海普能印現四天下中一切衆生色身形像 是故共說以爲大海 諸佛菩提亦復如是 普現一切衆生心念根性樂欲而無所現 是故說名諸佛菩提 佛子 諸佛菩提 一切文字所不能宣 一切音聲所不能及 一切言語所不能說 但隨所應方便開示)
다시 말한다. “불자여, ‘여래도 또한’ 제불의 보리는 일체 문자로 선설할 수 없고, 일체 음성으로 미칠 수 없으며, 일체 언어로도 설할 수 없는 것이니라. 다만 응현하는 바를 따라 방편으로 열어서 보일 따름이니라.”
“짐을 대면하고 있는 이는 누구십니까?”
“알려줄 수 없느니라.”
만일 부지를 불식으로 이해하면 어떠할까?
“짐을 대면하고 있는 이는 누구십니까?”
“알지 못하느니라.”(不識)
무엇을 알지 못할까? 여래도 또한 제불의 보리를 알지 못할까? 알지 못한다는 대답도 또한 “다만 응현하는 바를 따라 열어서 보이는 방편일 따름일까?”
2022년 4월 17일 74세 길상묘덕 씀
첫댓글 _()()()_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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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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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여래는, 일체 경계에 관찰하는 바가 없고, 일체 법에 평등하여 의혹하는 바가 없으며, 이변이 없고 명상이 없으며, 행동도 없고 거지도 없으며, 한량이 없고 변제도 없으며, 멀리 이변을 여의고 중도에 머무르며, 일체 문자나 언설을 벗어나는 곳에서, 정각을 성취함을 알아야 하느니라
위 문장을 아래와 같이 수정했습니다. 이유는 정각을 성취하는 열 가지 문을 정확히 분별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래는, 일체 경계에 관찰하는 바가 없고, 일체 법에 평등하여 의혹하는 바가 없으며, 이변이 없고, 명상이 없으며, 행동도 없고, 거지도 없으며, 한량이 없고, 변제도 없으며, 멀리 이변을 여의고 중도에 머무르며, 일체 문자나 언설을 벗어나는 곳에서, 정각을 성취함을 알아야 하느니라
하단의 일부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