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
복음서에서 여러 차례 나오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는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루카 8,2)로 소개되어 있다. 그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던 십자가 밑에(마태 27,56 참조), 예수님의 무덤 곁에 있었던 여인이다(마태 27,61 참조). 또한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첫 번째 사람으로(요한 20,11-16 참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알려 주었다(요한 20,18 참조).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 시신이나마 모셔 가려 하였던(요한 20,15 참조) 그의 모습에서 주님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에 대한 공경은 12세기부터 시작되어 널리 퍼졌다.
제1독서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 아가의 말씀입니다.3,1-4ㄴ
신부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
그이를 찾으려 하였건만 찾아내지 못하였다네.
2 ‘나 일어나 성읍을 돌아다니리라.
거리와 광장마다 돌아다니며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으리라.’
그이를 찾으려 하였건만 찾아내지 못하였다네.
3 성읍을 돌아다니는 야경꾼들이 나를 보았네.
‘내가 사랑하는 이를 보셨나요?’
4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복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0,1-2.11-18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12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15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18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라뿌니'는 삶의 '빛'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위험한 아이들’(1995)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비록 여성이지만 해병대까지 나온 존슨 선생은 문제아들만 모여있는 한 반을 맡게 됩니다. 그 반의 대장은 ‘에밀리오’란 아이인데 선생님께 성희롱까지 합니다. 처음에 존슨 선생은 이런 분위기에 적응이 안 되었지만 아이들을 믿어주기로 합니다.
우선 아이들이 관심 있어 하는 특공 무술 활용법을 가르쳐줍니다. 그러면서 공부에도 흥미를 느끼게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반대하는 사람이 교장 선생님입니다. 교장은 존슨 선생을 교장실로 부릅니다. 그런데 노크하지 않았다며 존슨 선생을 나무랍니다. 그리고 다시는 가라테와 같은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에밀리오와 같은 반 아이가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라울이라는 아이입니다. 에밀리오는 반 아이들이 존슨 선생의 뜻에 따라 착해지는 것을 눈 뜨고 못 봐줍니다. 그런데 라울은 선생님 편입니다. 둘은 정학을 맞습니다.
존슨 선생은 먼저 라울의 집에 찾아갑니다. 부모는 사고만 치는 라울 때문에 긴장을 했지만 선생님은 라울에 대해 많은 칭찬을 합니다. 라울은 완전히 선생님 편이 됩니다. 라울은 머리가 좋은 캘리라는 친구와 함께 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라울과 두 친구를 불러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시켜줍니다. 하지만 라울만 나옵니다. 캘리와 다른 친구는 아르바이트해야 해서 식당에 올 수 없었던 것입니다. 라울도 며칠 동안 결석해야 한다고 합니다. 레스토랑에 오기 위해 옷을 사느라고 돈을 빌렸는데 갚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라울에게 자신이 돈을 꾸어주겠다고 합니다. 단 졸업할 때 갚는 조건으로. 라울은 자기가 졸업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습니다. 선생님은 라울이 졸업할 것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존슨 선생은 이제 캘리를 찾아갑니다. 반에서 가장 머리가 좋아서 공부하면 잘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캘리는 학교에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임신해서 학교에서 나오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존슨 선생은 학교에 아이를 받아달라고 청합니다.
그다음엔 또 에밀리오가 문제입니다. 감옥에 갔다고 돌아온 갱단 일원이 자기 여자 친구를 뺏어간 에밀리오를 죽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에밀리오는 자기가 먼저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며 그 학생을 죽이려 합니다. 선생님은 에밀리오를 설득합니다. 교장 선생님에게 그 갱단 일원이 마약을 판다는 것을 말하면 그가 또 감옥에 가게 될 것이고 그러면 졸업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다음 날 에밀리오는 교장 선생님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교장 선생님은 노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에밀리오의 말을 듣지 않고 돌려보냅니다. 그 후 에밀리오는 총에 맞아 죽은 상태로 발견됩니다.
존슨 선생은 충격을 받고 학교를 그만두려 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말립니다. 라울은 그러면 자신에게 왜 졸업하라고 했느냐 따지고 임신한 캘리는 다시 학교에 나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을 쉽게 보내드릴 수 없어요. 선생님은 우리의 빛이니까요.”
학생들은 알았던 것입니다. 스승이 빛이라는 것을. 자신들이 방황했던 이유는 자신들을 믿어주는 참 스승이 없었다는 것을. 그래서 존슨 선생은 아이들과 함께 하기로 마음을 바꿉니다.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는 ‘빛’이십니다. 이것으로 오늘 복음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예수님을 왜 마리아 막달레나가 “라뿌니!”, 곧 ‘스승님’으로 불렀는지 이해가 갑니다. 일곱 마귀에 들려 죄에 물들어 있던 마리아에게 필요했던 것은 자신을 믿어주는 스승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냉담하는 어떤 자매에게서 신앙을 강요하지 말라는 뜻으로 하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인생엔 해답이 없어요. 안 그런가요?”
이 말 안에는 아직 그리스도를 스승이요 빛으로 만나보지 못했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인생은 답이 없기에 어둠 속에서 헤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만나면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스승이 없는 삶은 어둠의 삶입니다.
사자 무리가 사냥꾼에게 모조리 살해당했습니다. 새끼 사자만이 간신이 살아남았습니다. 새끼 사자는 양의 무리가 자기를 핥아주니 기분이 나아졌습니다. 그래서 양의 무리와 함께 메에 메에 하며 성장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자의 무리가 양의 무리를 습격했습니다. 그리고 그들 무리와 함께 있었던 사자의 뒤통수를 칩니다. 정신 차리라는 것입니다. 사자 무리의 대표는 그 사자를 물가로 끌고 가서 생김새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양의 고기를 먹으라고 합니다. 사자는 자기의 형제들인 양을 못 먹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먹게 되고 그때 사자의 포효를 하게 됩니다.
스승은 이런 사람입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이 될 수 있는지 믿어주고 그렇게 믿도록 양식을 주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당신처럼 될 수 있음을 믿어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자이시면서 사자인 줄 모르는 우리에게 오셔서 이름을 지어주신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오늘 예수님께 마리아라는 이름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아버지를 자신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처럼 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어야 그분을 빛이요, 스승이요, 구원자로 만난 것입니다. 마리아도 이렇게 되자 제자들에게 가서 이렇게 소리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
https://youtu.be/le75iSRvsMw
자기보다 못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갑질하는 사람, 자신의 지위를 내세워 아랫사람을 함부로 하는 사람, 익명성이 보장되기에 인터넷 안에서 악성 댓글 달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 등등…. 이런 사람을 우리는 절대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을 좋아하십니까? 이런 사람들과 반대의 모습, 즉 겸손하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사람, 남을 배려하며 밝게 웃는 사람 등의 모습을 좋아할 것입니다. 그래서 갑질하고, 함부로 대하고, 악성 댓글을 남기고, 그 밖의 부정적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남으로부터 칭찬과 지지를 받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렇게 행동해도 잘 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욕먹으면 오래 산다’라고 하던데, 이렇게 욕 많이 먹으며 오래 산다고 과연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재산과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으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봅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은 분명히 행복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특히 하늘 나라의 주인이신 주님께서는 이런 모습을 절대로 좋아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부정적 평가에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그 사람이 오히려 불쌍한 사람임을 기억하며 측은히 여겨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우리는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첫 사람을 알려졌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제일 먼저 당신의 부활하신 몸을 보여주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던 십자가 밑에 있었고, 부활하신 무덤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극진한 사랑이 부활의 첫 목격자가 되는 영광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과 늘 함께하던 제자들은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자마자 뿔뿔이 흩어졌고, 죽음 뒤에는 다락방에 숨어서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당신을 끝까지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그 호언장담은 공허한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사랑했던 제자들이지만, 예수님과 수난과 죽음에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모두를 사랑하시는 주님이시지만, 가장 어렵고 힘든 순간에 함께 있었던 마리아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셨고, 당신의 부활을 처음으로 전할 수 있는 영광까지 주신 것이었습니다.
유한한 시간인 이 세상 안에서의 행복을 좇겠습니까? 아니면 영원한 시간인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행복을 좇겠습니까? 후자를 원한다면, 주님 마음에 드는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내 꿈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단 한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세상 모든 비난과 오해를 견딜 수 있다(정여울).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