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젤과 소다수(외 1편)
고선경
너에게서는 멸종된 과일 향기가 난다
투룸 신축 빌라 보증금 이천에 월세 구십, 어떻게 해야 너를 웃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두 시간 동안의 폭우, 일주일 동안의 아침. 유리병 속 무한히 터지는 기포
현관에 놓인 신발의 구겨진 뒤축이 웃는 표정을 닮았어 너는 침대에 누워 있고 바람이 많이 부는 청보리밭에 가고 싶다 멸종된 기억을 가지고 싶다 너의 머리카락이 가볍게 홑날릴 때 나는 사라진 언어를 이해하게 된다
아침의 어둠이 이젠 익숙해 그래도 같이 씻을까 산책을 갈까
세상에서 가장 느린 산책로 쓰러진 풍경을 사랑하는 게 우리의 재능이지
네 손의 아이스크림과 내 손의 소다수는 맛이 다르다 너의 마음은 무성하고 청보리밭의 청보리가 바람의 방향을 읽는 것처럼 쉬워
무한히 터지는 기포 나는 너의 숨을 만져보고 싶다
너는 머나먼 생각처럼 슬프거나 황홀한 곳까지 나를 데려갈 수 있다 이렇게 차가운 빛의 입자는 처음이야 아이스크림 속에도 휴양지가 있는 것 같아 매일 집에서 너를 보는데도
놀랍지 세상에 없는 농담 같아
마른 손 위에서 거품을 일으키며 녹는 이상한 열매가 사랑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느린 목욕 시간 투명해지는 몸들이 자국을 가르치지
사라지지 않는 생각이 나를 쓰다듬고 있어 생활이라는 건 감각일까 노력일까
너와는 어디에서도 쉴 수 없어 미리 장소를 지워두었지 날씨를 오려두었지 향기만 남겨두었지 욕실용 슬리퍼가 바닥을 끄는 소리 어둠 속에 잠겨가고 우리는 우리의 미끄러운 윤곽을 읽는 데 몰두한다
시간이 잼처럼 졸고 나는 불붙은 기억이 되려 한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숨 뼈와 살이 좁혀진다
우리는 목이 마르고 자주 등이 젖지
옥상의 페인트 빛깔이 어둠에 섞일 때 어떤 믿음은 난간 같았어
야경이라는 건 어둠이 밀려날 수 있는 데까지를 말하는 걸까 이 도시는 사람들의 소원으로 빼곡해
아무도 없는 곳으로 놀러가면 내 손바닥에 밴 아오리사과 향기 그러나 압정을 한 움큼씩 쥐고 있는 기분
우리는 목이 마르고 자주 등이 젖지
리듬을 이해하지 않으면서 리듬에 대해 얘기했어
등이 젖은 사람을 따라 걷다가 저마다 웅덩이가 있구나 퐁당퐁당 생각했어
아무것도 훼손하지 않으면서 훼손되지 않고 싶다
너와 손을 맞잡고 싶지만 내 손안의 압정을 함께 견디고 싶지는 않다
깊은 바다로 다이빙하는 것과 작은 물웅덩이로 다이빙하는 것 어느 쪽이 더 위험할지
그딴 건 모르겠고 물수제비나 뜨자 나는 요령이 없어
내려다본 골목에 채소를 가득 실은 푸른 트럭이 서 있다 누군가가 몰래 무 하나를 훔쳐간다 희고 싱싱해서 그냥 먹어도 맛있을 것 같다
방수가 잘되는 페인트를 엎지르고서 우리는 온몸이 젖고 있었다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 2023.10 ---------------------- 고선경 / 1997년 안양 출생. 한양여자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202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