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숨 막히는 세상이다. 올해도 수능이 끝난 다음 날 보지 않아야 할 기사를 본 것이다. 엄마와 함께 고등학생 아들 둘을 미국에 4년째 유학 보낸 50대 초반의 아빠가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는 기사였다. 아빠는 일거리가 끊겨 학비를 보내지 못하는 경제적 고통과 함께 홀로 남아 있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미안하다. 너희들은 아버지처럼 살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과의 인연을 접었다는 소식에 마음이 조려왔다.
이 기사를 보며 생각했다. 미안하다니, 아비가 왜 미안해야 하지? 아비는 오로지 자녀를 위하여 외로움과 힘든 노동을 감내하며 ‘사랑’ 하나로 헌신했는데 말이다. 아버지처럼 살지 말라니, 이 또한 자녀에 대한 헌신과 사랑으로 자신이 선택한 삶의 방식인데 말이다. 이 기묘한 모순을 어떻게 소화해 낼 것인가? 이러한 현실이 계속된다면 한국엔 미래가 있을 것인가 마음이 움츠려든다.
그런데 아버지처럼 사랑하면 행복해야 하지 않는가. 그것도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는 모두가 행복해야 진정한 행복이고 사랑이지 않는가. 어느 한쪽만이 행복하기만 하다면 이건 진정한 행복도 진정한 사랑도 아니다. 부모는 ‘지금 여기’에서 행복한 꿈을 꾸지 못하고 미래의 성공을 위해 입시에 숨 막히는 자녀를 바라보아야 하고, 자녀는 자녀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꿈’을 접는 아빠 엄마를 바라보아야 하는, 서로의 힘겨운 시선과 배치. 결론은 역시 모두가 행복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 사회의 기러기 가족은 모두 오로지 ‘사랑’하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자녀의 성공과 행복을 위하여 희생한다고 한다. 행복하게 살려면 성공해야 하고 성공하려면 ‘돈’이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하는 믿음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론은 부모가 돈을 생산해내지 못하면 자녀는 성공할 수 없고, 성공하지 못하면 자녀는 행복하지 못하고, 자녀가 성공하지 못하면 결국 부모의 인생은 실패한 일생이 되고 마는 레일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이는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얼마 전 중학교 교사로 일하는 선생님이 원어민 영어교사로부터 “한국엔 미래가 없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유를 묻자 그 외국인은 “여러 나라에서 아이들을 가르쳐 보았지만 한국 아이들처럼 버릇없고 기본적인 예의나 규율도 지키지 않는 아이들은 본 적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런가 하면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기 않고 소란스럽기 짝이 없으며 엎드려 자는 아이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고 그 사람들이 투표권을 행사해 나랏일을 결정할 테니 이 나라에 미래가 있겠느냐?’고 충고를 하여 얼굴이 뜨거웠다는 것이다.
필자는 가끔 일본에서 사귄 사람들이 서울에 오면 서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카페에 간적이 있다. 그날도 식당 부근의 카페에 옮겨 앉아 얘기를 이어가는데 갑자기 실내가 엄청 소란스러워졌다. 앞사람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아 주위를 보니 서너 살짜리 아이들이 떼쓰는 소리에 삼십대 초중반 부모들이 얼렀다 야단쳤다 하는 소리가 섞여 홀 전체가 거대한 소음 덩어리가 되었다. 이런 광경을 일본인과 같이 목격하면서 오늘 이 일본인은 무엇을 느꼈을까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처럼 어른들의 놀이터에 아이들이 오는 모습이 늘어나고 있다. 책을 읽거나 차 마시며 담소하던 카페가 애들이 뛰어노는 운동장이 되어 가고, 모처럼 목을 축이며 세상살이의 고단함을 푸는 장소에서조차 어린이의 칭얼거림을 듣게 되었다. 아이들이 일으키는 소음도 괴롭지만 카페나 술집이 그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 생각하면 더욱 괴롭다. 작고 약한 몸이 견디기에 공기는 너무 나쁘고 음악 소리는 너무 시끄럽기 때문이다. 더구나 술집에선 무장 해제를 하고 아이가 되는 어른이 많아 보여서는 안될 것들이 연출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하라는 것’ 대신 어른이 ‘하는 것’을 보고 배운다. 어린이들에게 학교 아닌 곳은 없고 술집은 일탈을 배우는 학교가 될 수 있다. 그래도 우리 사회가 ‘동물의 왕국’이 되는 건 막아야 할 거 아닌가!
입장권이 있어야 놀이공원에 가고 기차표가 있어야 기차를 탈 수 있듯이 예의를 지켜야 문명사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 논어 맹자를 읽고 니체와 하이데거를 논한다고 교양인이 되는 게 아니다. ‘티피오’(T:시간 P:장소 O:상황)에 맞게 행동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학위나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교양인이 아니다. 아이와 함께 갈 수 있는 곳과 갈 수 없는 곳도 구별하지 못하고 기본적인 예의조차 가르칠 수 없다면, 무례한 사람이 넘쳐나 이 나라는 희망찬 미래를 그리기가 어렵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래서 손자를 둘 둔 딸에게는 '어른들 모이는 곳에 애를 데려가면 안 돼. 애는 어른이 아니라서 애야. 결국 눈총 받고 욕먹게 돼. 애가 욕먹는 거 싫으면 절대 그런 곳에 데려가지 마. 네 애는 너한테나 귀하지 다른 사람한테도 그렇게 귀한 건 아니야.'라고 꼭 가르쳐 주고 싶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은 내가 너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너도 장래 아이들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어려서 부터 잘 가르쳐야 후회가 덜 할 것이며, 네가 낳은 아이를 잘 가르치는 그 길이 품격있는 나라를 만드는 길이기 때문이다.
한국교육신문: 2013-12-02 오후 12:58:00
e-리포터김광섭광양여자중학교
최선을 다한다면 고귀한 삶이 될 것이다
사람은 먹어야 살고, 입어야 살고, 집이 있어야 사는 물질의 자장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래서 성인이 되면 자기도 삶을 영위해야 하고 아이들에게 교육도 시켜야 하며 이들이 독립할 때 까지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혹부리 영감의 혹처럼 힘들고 괴롭다고 갖다 버릴 수도 없는 혹이다. 손자 둘을 키우면서 날마다 힘들어 하는 딸의 모습에서 인간의 삶이란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란 것을 가까이서 느끼게 된다. 이처럼 한 존재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하는 혹이 될수도 있지만 사람은 또 그 혹으로 인해 성숙해지기도 하고 삶의 의미를 찾기도 한다.
우리는 삶의 과정에서 모든 것을 선택할 자유는 있지만 그러나 현실에서는 일정한 한도를 벗어나기 어려워 선택의 갈림길에서 항상 방황하게 된다. 어떤 삶을 선택하든 공과 과가 있다. 필자는 농촌에서 나라나 봄이면 씨를 뿌려 여름 내 땀 흘려 가꾸고, 가을이면 수확하고 겨울이면 내년을 기약하며 땅을 쉬게 하고 농군들은 숨을 고르는 자연의 순환을 보며 자랐다. 정성을 기울인 만큼 작물들은 풍성하게 자랐고 땅은 비옥해졌다. 때로는 가뭄이나 홍수, 태풍이 휩쓸고 갈때도 있었지만 자연 재해를 이겨내는 것도, 견뎌내는 것도 크게 보면 노력의 일부일 뿐이다. 그러나 이번 필리핀에 불어닥친 태풍은 인간의 한계를 넘는 대재앙이 아닐 수 없다.
뜻을 품고 그 뜻을 위해 최선을 다하면 삶은 절대 인간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긍정적인 마인드는 땅으로부터, 농부인 내 부모와 이웃들로부터 배운 덕분이다. 얼마 전까지 나는 대개의 삶이 이럴 거라 믿었다. 아니, 삶이란 이러해야 한다고 믿었다. 무심히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어느 해녀의 말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나를 사로잡은 할머니 해녀의 말은 이러했다. “바다가 친정 어매보다 낫수다.” 였다.
친정어머니는 돈 달라는 자식에게 몇 번 돈을 주고 이내 타박하지만 바다는 끝도 없이 베풀어 준다는 것이다. 언제든 들어만 가면 완성품을 내어주는 바다와 노력한 만큼 내어주는 땅의 차이를 그날 처음 발견하는 기회가 되었다. 바다와 땅의 차이는 그뿐 아니다. 어머니보다 따스하게 모든 것을 내어주지만 때로 목숨을 앗아갈 만큼 비정한 것이 바다이다. 배를 타는 사람은 망망대해에서 배밑창 하나 사이로 천국과 지옥이 갈라진다. 바다의 방식도 땅의 방식도 우리가 살아가는 다양한 방식 중 하나일 뿐이다.
이처럼 인생을 살아가는데 절대적이며 유일한 답은 없다. 남과 다른 길을 걷는 것이 불안하여 보통의 직장인으로, 보통의 아버지로 사는 것도, 그 길이 답답하여 불안하게 꿈을 좇으며 사는 것도, 그 누가 옳다 그르다 말할 수 없다. 다만 다른 선택을 했을 뿐이고 책임져야 할 부분이 다를 뿐이다. 땅을 선택하는 자는 그만큼 노력해야 한다. 바다를 선택한 자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거친 풍랑과 늘 싸워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을 선택한 '교사의 삶은 어디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인가?'를 되묻게 된다.
이제 곧 졸업시즌을 맞아 학교를 졸업하고 세상 속으로 나가야 할 젊은이들 모두가 원하는 삶을 똑같이 공평하게 살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는 앞서 가고 누군가는 뒤처지고 누군가는 전혀 다른 길을 갈지도 모른다. 어떤 삶에든 고통은 따르겠지만 최선을 다한다면 어떤 삶이든 고귀한 삶이 되리라는 믿음을 떠나는 아이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