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신의주경제특구 원문보기 글쓴이: 韓世振
◇건국훈장 독립장(6)
김철수 김태연 김한 정헌태 최윤구 한위건
독립유공자 명단 속에 숨은 중복 포상자 YTN 보도 내용 2019.8.18
독립 유공자를 찾아 예우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공신력'입니다.
그래서 훈장은 국가가 철저하게 고증을 거쳐 검증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현재 국가가 인정한 유공자 중에는 같은 사람이 두 번 포상을 받는, 이른바 '중복 포상자'가 적지 않습니다.
독립운동가 '공창준'은 항일 투쟁의 정신적 토대가 됐던 '대종교' 교인이었습니다.
인명부에 적힌 이름 아래를 보면 '심연'이란 호로도 불렸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1905년 일본이 우리 외교권을 빼앗자, 함경도에서 홍범도와 함께 일본군과 맞서 싸웠고, 공적을 인정받아 지난 1995년에 훈장을 받았습니다.
보훈처 자료에 나오는 또 다른 유공자, 공심연.
포상을 받은 시기 등이 달라서 다른 인물처럼 보이지만, 공적 내용을 자세히 보면 내용이 상당 부분 일치합니다.
본적과 함께 활동한 인물, 가입한 단체, 심지어 아들 이름도 같습니다.
정부 홈페이지에서도 '공창준'과 '공심연'은 같은 사람이라는 단서가 확인되지만, 등록된 기록만 보면 현재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인물입니다.
이런 기묘한 동거는 8년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민간 역사학자가 '중복 포상'일 가능성이 크다며 민원을 내자 보훈처가 뒤늦게 같은 사람인지 아닌지 조사에 나섰습니다.
[조준희 / 역사학자 : 바로잡는 게 사실 어려운 건 아니거든요. 왜냐하면, 제가 1차 자료를 발굴해서 갖고 있고 그 자료를 제가 얼마든지 제공해줄 수가 있는데 그 자료를 요청하지 않는 거예요.]
실제 '중복 포상'이 확인돼 고친 사례도 있습니다.
춘천의 독립운동가 김우천 지사는, '유천'과 '우천' 두 이름으로 대통령 표창과 애족장, 훈격이 다른 2개 포상을 받았습니다.
최근에야 같은 사람으로 확인돼 낮은 서훈이 취소됐습니다.
만주에 민족학교인 '배달학교'를 세운 조용석 지사는 한자만 다른 두 가지 이름으로 두 번 포상됐다가 26년 만에 바로 잡혔습니다.
지금까지 '중복 포상'을 이유로 서훈이 취소된 경우는 적어도 22명, 연도별로 보면 지난 1991년과 2017년 두 해에만 몰려 있습니다.
[반병률 /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 : 사회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면서 겨우 보훈처가 거기에 대응하는 형식으로 돼왔죠. 수동적으로 해왔죠. 조직이기 때문에 그동안 해왔던 과거에 있던 것들(잘못)을 인정하기가 불편한 거죠.]
보훈처 역시 이 문제를 치부로 여겨 숨기기보다는 주도적으로 문제를 찾고 바로 잡으려는 모습을 보여야 오히려 국민에게 더 믿음을 줄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조선혁명군 노래
1절: 동무야 잘싸웠다 조선의 혁명군 총끝에 번개불이 번쩍거리여
악마의 왜놈들을 쳐부시던 밤
악마의 왜놈들을 쳐부시던 밤
입술에 피흘리고 너는 갔구나
2절: 고향에 돌아가면 네자랑 충성을 늙으신 부모님께 전하여 주마
태극기 앞에놓고 쓰러지면서
태극기 앞에놓고 쓰러지면서
마지막 충성으로 너는 갔구나
1930년대 양세봉장군이 영솔한 조선혁명군에서 널리 부르던 노래 입니다.
-----------------------------------------------------------------------------------------
재만독립군단인 조선혁명군의 중대장이었던 고 최윤구 선생은 1919년부터 20년간 일제와 무장투쟁을 전개한 전형적인 독립군이다. 그는 1938년 화전현 전투에서 전사했다. (민족문제 연구소.글)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사령 최윤구(崔允龜)장군의 흥경현 전투(興京縣 戰鬪)
始祖 孤雲 崔致遠先生의 慶州崔氏 後孫 淸道人.號. 蒼岡 崔鉉九將軍의 功績 (抗爭名 允龜.雲龜.允九允求.允奎.尹九.東京)
경북 청도 사람이다. (1885.8.23-1942.9.10)
1919년 청도군 운문면에서 3월18일 3.1운동이 일어나 3.1운동에 참여하고 한성임시정부 조직 관련이 발각되어 만주로 도만하여 한교공회에 가입하여 외교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22~3년 통의부에 가담한 이래 독립운동에 맹활략하다가 압록강연안을 넘나들며 면사무소파괴등 군자금모집과 일본군경과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27년6월1일부터는 참의부 군사위원(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28년에는 환인현 횡도천구역에서 동 제3중대장으로 활동하였다.1929년에 삼부(참의부.정의부.신민부) 통합하여 국민부.조선혁명당.군으로 개편되었다.<통화현 당안관자료 (독립기념관)참조>
1930년1月24日 한국독립단으로 崔允龜대장은 부하들과 장백현에 들어가 심각한 노름판으로 가정파탄등 독립운동가 밀고 등을 척결하기위해 장백현으로 들어갔다.이지역은 중국마적단과 충돌할수있는 지역이다.그럼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취췌한 사건이다.어러모로 감수하고 진압한후 독립단원인 金世浩가 체포되어 징역7년을 언도 받은 일도 있었다. 또한 군자금모집및 압록강 변강에서 무기 구매등 운반에도 앞장섰다.<1931년김세호(金世浩)본명김정호(金正浩)31세.독립운동관련판결문참조>自治機關執行委員長이정일及최윤구/정의부소속 조선독립단 소대장 金京根及金允龜(崔允龜)/正義府 中隊長 張哲昈.金京根의 密偵처단및 軍資金 募集 活動.판결원문참조/이제우.김세호 최윤구 공훈사료관/국가보훈처참조>
그리하여1932년 3월11일부터 본격적인 한.중 연합작전으로 항일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조선 혁명군 중대장으로서 총사령 양세봉(梁世奉), 참모장 김학규(金學奎), 중대장 조화선(趙化善)·최윤구(崔允龜).정봉길(鄭鳳吉) 등과 함께 한·중 연합군을 조직하였다. 조선 혁명군은 1929년 12월 29일 중국 요녕성(遼寧省) 신빈현(新賓縣)에서 민족 유일당 조직 동맹(民族唯一黨組織同盟)을 바탕으로 창건된 남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정당인 조선 혁명당(朝鮮革命黨) 산하의 독립군이다.<광복. 김학규편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1934년 참조>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조선 혁명당은 종래의 독자적인 투쟁 방식을 탈피하여 중국인들과 연합 작전을 모색하면서 한·중 연합군으로 조직되었다. 조선 혁명군은 1932년 10월까지 남만주 일대에서 200여 차례의 많은 전투를 치르며 크게 활약하였다. <동북항일의용군/1998/231~234면참조>
1932년 3월 조선 혁명군은 신빈현성 일본 수비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영릉가성(永陵街城)을 점령하였다. 이 전투에서 패전한 일본군이 흥경성(興京城)을 거점으로 복수전을 기도하고 있다는 정보를 들은 조선 혁명군은 1933년 3월 중국 의용군과 함께 즉시 흥경성 공격 작전을 감행하였다. 일본군은 영릉가성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흥경현성(興京縣城)에서 주력 부대가 참전하고 비행기까지 동원하였으나, 치열한 공방전 끝에 조선 혁명군은 일본군을 격파하고 흥경성도 탈환하였다.
한국인 애국지사 *양세봉 (1894~6-1934 ) *박대호 (1892-1947 ) *최윤구 (1885-1942 ) *조화선 (1892-1942 ) *김학규 (1900-1967 ) *김두칠 (1893-1946 ) *고이허 (1902-1937 ) *김경근 (1885- ? )*김세호(1899- ? )서세명(1895-1955)김두칠선생은 1937년에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사망 신고를 미리했다고 합니다.
신개령전투(新開嶺戰鬪)·양제대전투(羊祭坮戰鬪)
*한.중연합작전의 부대.계급.명칭은 다향하다 중대장.사령.로군.특무대 기본 단위는 한국은 중대장.사령 중국은 특무대.로군.사령등의 명칭을 감안하여 독서 하시면 될듯 합니다.
일본·만주국 연합군이 점점 가까이 진격해 오자, 흥경현(興京縣)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동변도(東邊道) 보안사령부 제2사단장 전덕승(田德勝), 기마사단장 왕전무(王殿珷)와 제7사단장 소본량(邵本良)이 각각 청원·남잡목에서 흥경을 향해 진격해왔다. 신개령은 흥경현으로 들어오는 관문의 하나다.
5월 2일, 적군이 신개령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왕동헌(王潼軒)은 3백여명의 대도회원과 자위군 병사들을 거느리고 신개령에서 방어전(防禦戰)을 펼쳤다.
처음엔 우지산(于芷山)이 일본군보다 먼저 전투를 시작하고 싶지 않아 인화용 심지를 뺀 포탄을 자위군 진지에 떨어뜨렸다. 당연히 어떤 포탄도 폭발하지 않았다. 이후 소본량이 휘하의 병력을 이끌고 공세를 한층 강화했다. 왕동헌과 주보승의 지휘 아래 요령민중자위군(遼寧民衆自衛軍) 병사들은 용감하게 총과 활을 쏘며 적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저녁이 되었는데도 적군은 물러서지 않고 탐조등으로 산봉우리를 환히 비추며 포격을 가했다. 군인 출신인 주보승이 선두에서 독전(督戰)을 잘해 준 덕분에 적군의 포격에도 커다란 손실을 입지 않았다.
다음날, 특무대장 조화선(趙化善)은 신개령으로 가서 병력을 교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조화선의 부대가 격전지로 들어서자, 갑자기 큰 비가 내렸다. 적군은 그 틈을 타 산꼭대기로 진격했고, 조화선은 침착하게 대원들에게 전날 가져온 이불과 돗자리를 머리 위로 올리고 적군을 향해 사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빗소리에 총성(銃聲)과 포성(砲聲)이 어우러지며 천지를 울렸다. 여러 차례 진격과 후퇴가 거듭되었다.
오후가 되자 영릉의 식당과 주민들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만두와 물을 격전지로 가져왔다. 조화선과 그의 부하들은 더욱 더 사기가 높아졌으며, 처음으로 조선과 중국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전투에 임하는 모습에 기쁘기도 하고 위로가 되었다.
해질 무렵, 적군이 항공기를 출동시켜 부대를 강화했다. 포탄에서 터져나온 검은 연기와 안개가 온 천지를 뒤덮었다. 조화선은 항공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대원들에게 동굴로 들어가 누워 있으라고 명령했다. 귀를 찌르는 고함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흙탕물이 대원들에게 더 많이 튀었다. 특무대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 땅을 우리 조선인 손으로 구하겠다고 다짐했다.
저녁때 다시 큰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특무대원들은 입춘의 한기로 인해 추위에 벌벌 떨었다. 영릉 주민들 스스로 조직한 보호대가 방수포며 이불과 돗자리를 가져왔다. 대원들은 나뭇가지로 천막을 치고, 안에서 적군을 잠시도 한눈팔지 않고 감시했다.
사흘째 되는 날 새벽, 이춘윤(李春潤)은 다른 부대를 보내 특무대와 교대하도록 하고 특무대는 영릉으로 옮기게 했다.
1932년 북평에서 발행된《구국순간(救國旬刊)》‘요령항일구국군(遼寧抗日救國軍) 제6로군 요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우지산은 왜놈들의 명령을 받아 구국군(救國軍)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5월 2일, 중포 18대, 박격포 18대, 평사포 12대와 보병 4천 5백여명이 신개령까지 행진하여 쌍방이 교전하였다. 적군은 우리 구국군을 세 차례 포위하고, 맹렬히 공격했다. 이춘윤 사령관이 3천여명의 병사를 지휘하여 침착하게 저항했다. 3일이 경과하였고, 큰 비에도 병사들의 사기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후 전략상의 변화로 환인 이호래로 퇴각하여 잠시 군대를 정비한 후 다시 저항하기 시작했다. 이번 전쟁에서 적군은 2백여명의 사상자를 냈고 소령 참모 1명, 연대장 1명, 중대장 1명, 소대장 1명이 전사했으나 아군은 몇 명의 사상자를 냈을 뿐이다.〃
사흘째 전투는 더욱 격렬했다. 30여명의 자위군 사상자가 영릉으로 옮겨졌다. 적군이 강하고 아군이 약해진 상황에서, 자위군은 3일 밤낮을 완강히 저항한 후에 환인현 이호래로 철수했다.
같은 시기, 양세봉은 자신의 병력과 제6로군을 지휘하며 양제대에서 전투를 벌였다. 적군은 아군에게 계속 타격을 가하며 추격해오다가 양세봉이 미리 잠복시킨 부대의 기습을 받자 선봉부대는 뿔뿔이 흩어졌고 도망치다가 서로 짓밟아 5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다음날, 적군은 대오를 다시 정비하여 양제대를 공격해왔다. 적군의 포대가 자위군의 바리케이트를 부수자, 양세봉은 철수를 결정하고 영릉으로 돌아가 이대광 사단과 만나 환인으로 물러났다.
5월 3일 만주국군이 영릉으로 쳐들어오자, 조화선의 특무대와 자위군 제4중대, 제16사단은 구룡안(九龍眼)에 잠복하여 왕전무의 기마부대와 교전하였다. 이춘윤이 직접 전투를 지휘했고, 조화선의 특무대가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웠다. 수십명의 사상자를 낸 적군은 뿔뿔이 흩어졌다.
5일에는 새롭게 정비를 마친 만주국군이 자위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춘윤은 3개 중대와 새로 재편된 2개 대대 병력을 이끌고 노성까지 철수했고, 조화선의 특무대는 황사(皇寺)까지 철수한 뒤, 이 두 고지를 점령하여 방어 시설을 구축하고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우지산은 직접 노성 하북에 와서 전투 준비를 마쳤다. 공격에 앞서 우지산이 노성에 사람을 보내 이춘윤에게 투항을 권고했지만 거절당했다. 자위군은 만주국군이 진영으로 돌아가기 전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 공격으로 만주국군 참모 유지번(劉芷番)과 일본군 고문 이치가와 고다로[市川光太郞]와 대대장 야마다 이시로[山田一郞] 등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우지산도 폭격 위험에 처했다. 커다란 손실을 입은 적군은 즉시 노성 북관(北關)으로 우회, 자위군 진영을 포위하고 맹렬히 공격해왔다.
조화선은 적군이 노성을 포위하려 하자, 즉시 특무대원들을 적군의 배후에 배치시켜 사격하도록 했다. 노성과 황사, 양쪽에서의 협공으로 적군은 이내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대한 적군의 공격에 맞서 자위군 대원들은 다섯 시간에 달하는 전투를 벌였고, 이춘윤은 해가 질 때까지 싸우다가 이호래로 물러났다.
양세봉이 다른 자위군 부대와 함께 영릉에서 돌아올 때, 노도구령(老道溝嶺)에서 왕전무의 기마부대와 조우전(遭遇戰)을 벌였다. 놀란 자위군 병사들이 우왕좌왕(右往左往)하자, 이대광을 비롯한 군관들이 양세봉을 향해 숨죽여 접근하라고 일러주었다. 양세봉이 권총(拳銃)을 발사해 세 명의 기마병을 잇달아 사살하자, 왕전무의 부대가 황급히 물러났다. 양세봉은 이대광의 협조 아래 흩어진 병사들을 다시 정비했다.
저녁 때에 이춘윤은 이호래의 한 지주 집에서 수뇌부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왕동헌·양희부·양세봉·유극검 등이 참석했다. 회의를 통해 그들은 지난 전투들을 신중히 검토하고 분석했다. 이춘윤은 특히 양세봉의 의견을 귀담아들었다.
양세봉은 이렇게 말했다.
“현재 적군은 강한 데 반해 우리 군대는 약합니다. 만약 군대를 도시에 집중시키면, 인적 손실이 커서 전력이 약화되는 결과가 초래될 것입니다. 잠시 산에 은거하며 반격의 기회를 기다리는 것이 가장 좋을 듯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보급품을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춘윤은 사람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반격 작전 계획을 발표하였는데, 양세봉이 제시한 두 가지 의견에 동의했다. 그들은 자위군 총사령부에 지원을 요청했다.
★ 흥경성(興京城)을 탈환하다 ★
중국인 열사 *왕동헌 (1873-1952 ) *당취오 (1898-1939) *이춘윤(1901-1933) *왕봉각 (1895-1937) *등철매 (1892-1934) *장종주 (1882-1940) *양희부 (1896-1936)*서송삼(1896- ?)*림진청(1888-1974)*손수암(字.茂恩)★왕동헌(왕자신)선생은 한국사람은 모두 혁명지사이고 영웅호걸이다 라고 했습니다.
5월 8일에 우지산(于芷山)이 이끄는 만주국군은 흥경현을 점령했다. 일찍이 이춘윤(李春潤)의 병사들에게 체포되었던 만주국의 관리 장요동(張耀東)이 전란을 틈타 도시를 빠져나갔는데, 그가 다시 돌아오자 우지산은 그를 현장(縣長)으로 임명했다.
일본 영사관과 보민회는 모든 정보망을 동원하여 요령민중자위군(遼寧民衆自衛軍)의 위치를 파악하려고 동분서주(東奔西走)했다. 우지산의 병사들은 집집마다 반일 인사를 조사했는데, 특히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잡는다는 명목으로 모든 조선인 가정을 샅샅이 뒤졌고, 심지어 조선인들이 많이 다니는 교회도 조사했다. 요령민중자위군의 습격에 대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길거리를 지나가는 행인들을 조사하는가 하면, 의심스럽다 싶으면 가차 없이 끌고 가서 고문을 자행했다. 요령민중자위군이 주둔하는 곳이라고 생각되면 항공기를 출격시켜 폭격을 가했다. 많은 사람과 가축이 죽거나 다치고 집이 불탔다.
소속에 따라 왕동헌(王潼軒)과 양세봉(梁世鳳)은 제10로군을 이끌고 현의 동남쪽에서 활동했고, 양희부(梁希夫)는 제11로군과 함께 현의 동쪽에서 활동했다. 이춘윤도 제6로군을 이끌고 현의 서남쪽에서 활동했으니, 모두 현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활동했던 셈이었다.
5월 14일에 이춘윤은 조화선(趙化善) 특무대 등 3백여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환인현(桓仁縣)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동창대로 이동할 때, 일본군 기마중대의 습격을 받았지만 조화선 특무대의 반격으로 적병 13명을 사살하고 3명을 생포했다.
5월 16일에는 현의 서남쪽 2.5킬로미터에 있는 오가보자(吳家堡子) 이북에서 자위군 제16사단과 특무대의 1개 소대 병력이 적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적군은 자위군을 향해 야전포(野戰砲)를 맹렬히 퍼부어 댔다. 자위군은 대대장 두 명과 병사 30여명이 죽고 50여명의 부상자를 냈다.
5월 20일 아침에 왕동헌은 최윤구(崔允龜)가 지휘하는 조선혁명군 제4로군과 자위군 병사 5백여명을 거느리고 동창대에서 소본량(邵本良)이 거느린 만주국군 병사 1천여명과 아홉 시간에 걸친 교전을 벌였다. 두 부대는 총검(銃劒)을 앞세우고 서로 백병전(白兵戰)까지 벌였다. 날이 어두워지자 적군은 3백여명의 사상자가 나오는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자위군은 일본군 장교 오스카 세키노 소좌를 사살하고 보병총(步兵銃) 1백여정과 탄환 수천발을 노획했다.<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조문기)참조>
5월 18일부터 이춘윤은 각 부대를 소집해 흥경현을 향해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했다. 총사령부에서 온 증원 부대 제7로군은 곽정산의 지휘 아래 동쪽을 책임지고, 이춘윤은 제6로군과 함께 남부를, 양세봉과 양희부는 서부 전선을 각각 책임지기로 하면서 현을 포위했다.
조화선은 1백여명의 특무대를 민간인으로 변장시킨 후 성안으로 잠입시켰다. 그들은 조선인이 경영하는 일신여관, 농민객전, 소화여관, 동창여관 등에 묵었다. 조화선과 경위대원들은 서세명이 새로 문을 연 유창호(裕昌號)에 묵으며 특무대원들의 활동을 지휘했다.
이춘윤은 양세봉의 부대에게 매일 저녁 현 주변의 산에 사람을 보내 양철통에 폭죽을 넣고 불을 붙여 적군을 교란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적군은 폭죽이 터지는 소리를 총성으로 오인하고 마구잡이로 난사하며 두려움을 없애려 했다. 어떤 때는 날이 밝아질 때까지 총을 쏘기도 해 많은 양의 탄환을 낭비했다.
어느 날 저녁에는 자위군의 한 분대가 당나귀 꼬리에 폭죽을 달고 불을 붙여서는 산을 내려보내 적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 기회를 이용해 양세봉은 1개 소대 병력과 대도회원들을 내려보내 현을 습격하게 했다. 남산과 북산의 적군은 서로 총을 겨누고, 계속 자기편끼리 사격하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속임수에 걸린 것을 깨달았다.
적군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현과 부근의 포대 안에서만 웅크리고 있을 뿐, 감히 멀리 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조화선의 경위대와 특무대는 마을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을 위로,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우지산은 만주국군 정부의 현청에 설치한 사령부에 가서 이 같은 상황을 보고하며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20일에 현에 주둔하는 만주국군이 작전계획에 따라 심해(沈海) 철도를 따라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춘윤은 적군이 철수하기 전에 반격하여 현을 되찾기로 결정하고 부대들을 다시 배치했다. 양세봉과 왕동헌은 제10로군을 이끌고 후륜(後侖)까지 야간 행진하여 몸을 숨겼고, 이춘광과 양희부는 부대를 이끌고 쌍묘자(雙廟子) 서쪽에 잠복했다.
21일에 날이 밝자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자위군 병력이 사방팔방에서 일제히 현으로 진격했다. 적군의 기관총과 야전포가 자위군을 향해 사정없이 발사됐다. 양군 모두 사상자가 늘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위군은 사흘 동안 끊임없이 적군을 공격했고, 마침내 적군은 완전히 지치고 말았다. 우지산은 분노하여 외지에서 1개 기마연대 병력을 불러왔다.
양세봉의 부대가 먼저 현에 들어오자 조화선 특무대는 조선혁명군과 안팎으로 공조하며 시가전(市街戰)을 벌였고, 마침내 신시가 대부분을 점령했다.
25일에 자위군은 서문에서 맹렬하게 퍼붓는 적군의 총탄을 무릅쓰고 진격했는데, 신시가의 대원들도 성안으로 진격했다. 우지산은 불리한 전세를 파악하고 후퇴를 명령했다. 그는 퇴각하면서 하마터면 제7로군에 생포될 뻔했지만, 용케도 청원으로 황급히 도망쳤다.
자위군은 마침내 성을 완전히 점령하고 말았다. 양세봉과 대원들은 모두 ‘반역자와 일본을 타도하여 조국을 지키자!’라는 글귀가 적힌 완장을 달았다. 제10로군이 삼각기를 들고 줄을 맞춰 자위군 본대와 함께 입성하자, 주민들은 모두 중화민국 국기를 흔들며 폭죽을 터뜨리고 승리를 축하했다.
흥경현을 탈환한 자위군은 ‘흥경현 반일민주정권’을 수립하고 양경현(楊慶賢)을 새 정부의 현장으로 선출했다. 각종 행정기관이 새롭게 정비를 마친 후 학교와 상점들도 모두 문을 열었다. 도시는 반일 분위기로 팽배해 곧 항일투쟁의 근거지로 발전했다.
현청 지원국은 양식과 사료를 걷어서 양세봉 부대에 전달했다. 그리고 일부 조선인 대원에게 자위군과 같은 회색 군복을 입히고 중화민국 국기가 달린 모자를 씌웠다. 일부 대도회원은 검은색 옷을 입었다. 이렇게 해서 이들이 조선인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게 만들었다. 총사령부에서는 이춘윤에게 중장 계급을, 왕동헌·양희부·양세봉에게는 소장 계급을, 그 밖의 군관에게는 각각 영관·위관·하사관 계급을 각각 하사했다. 그러나 양세봉은 공개적으로 그 계급장을 달고 다니지는 않았다.
성안에 있는 조선인 청년들이 잇달아 입대하고, 조선인 상점과 기업은 제10로군에게 자금을 부쳐 왔으며, 교회에서도 항일투쟁에 도움이 되는 기부금을 내왔다. 양세봉은 반일운동의 앞날이 결코 어둡지 않다고 느꼈다. 이렇게 해서 조선혁명군은 해산의 위기에서 벗어났으며, 마침내 무장전투력의 강화를 통해 항일투쟁을 수행할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5월 초 자위군이 현에서 철수한 이후부터 5월 말까지 20여일 동안 쌍방은 쉼없이 전투를 벌여 일본·만주국 연합군은 4백여명의 전사자와 5백여명의 부상자를 냈고 2백여명이 자위군에게 투항했다. 요령민중자위군은 2백여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야전포 8문과 보병총 5백정, 탄환 수만개를 노획했다.
6월6일 밤 이께다가 일본군 제12사단 제4야전부대를 거느리고 관전.집안 등으로 진공하였다.
부총사령 장종주를 수행한 최윤구는 일본군이 관전을 진공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날밤으로 자위군 부대와 함께 영전방향으로 진공하였다.이튼날 날이밝자 100여명의 일본군이 관전현성으로 진공해왔다.사격이 시작되었다.일본군은 수차 반겨해왔으나 사상자만 늘었다.얼마후 그들은 300여명의 증원을 투입하였고 비행기 5섯대로 자위군 진지를 폭격하였다. 이번전투에서 적30여명을 사상하였고 총과 탄약을 노획하였다.
8일새벽 장종주는 최윤구에게 100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적군의 진지를 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6월9일 또 300여명의일본군이 진공해왔다.일본군은 강대한 화력의 엄호하에 수차 진공했으나 번마다 격퇴당하였다.
일본군이 반령 일대로 진격하자 최윤구(1885)는 장종주(1882)와 함께 군대를 인솔하여 전면적인 반공격을 진행하였다. 이때 일본군은 비행기의 엄호하에 보병작전을 시작하였다. 비행기의 폭격으로 한.중연합군은 40여명의 사상자를 내면서도 완강하게 진지를 고수하였다. 날이 어두어 지자 적군은 퇴각하기 시작하였으며 자위군도 탄환이 떨어졌다.
최윤구는 장종주를 수행하여 관전현성으로 돌아왔다.
6월 15일에 이춘윤은 제6로군 산하 뇌부해(雷富海)의 부대와 기병 제4사단 산하 이대광의 부대를 청원 철도 주변에 포진시켰다. 6월 16일에는 하준언(何俊彦)이 지휘하는 제17사단 병력을 청원으로 진격시키고, 동시에 왕동헌·양세봉의 부대와 유극검 부대를 청원으로 출동시켰다.
양세봉은 최윤구 부대에게 왕동헌과 유극검을 따라 청원으로 가라는 군령을 내렸다. 그들은 만전자(灣甸子)·풍도수구(風陶樹溝)·칠도하(七道河)를 지나 청원현 부근까지 밤낮으로 쉬지 않고 걸어갔다. 그리고 어두운 밤을 이용해 각각 장령자(長怜子)와 마전채(馬前寨), 오리보(五里堡) 일대로 숨어들었다.
청원현은 심해철로가 모든 지역을 관통하기에 비교적 교통이 편리하다. 흥경현을 공격하는 일본군이 이곳에서 자주 진격과 후퇴를 반복하여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자위군은 현 안에 연락원을 두는 동시에, 현의 공안국장 문승침(文升枕)에게 투항하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문승침은 항일투쟁에 대한 의지가 조금도 없었다. 자위군은 할 수 없이 무력으로 청원을 수복하기로 결정하고 공격을 개시했다. 뇌부해·이대광·하준언 부대는 미리 남구(南口) 등에서 청원 일대의 철로와 교량을 파괴하고, 초소 몇개를 불태웠으며, 흑우(黑牛)에서는 일본군 2개 소대 병력과 교전하기도 했다.
흥경혈전
6월 17일에 왕동헌과, 최윤구·유극검 등은 군대를 이끌고 청원현으로 진격했다. 만주국군이 미리 견고한 바리케이드를 쳐놓고 기다리고 있어 자위군이 진격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최윤구와 유극검이 앞장서서 전선을 지휘하고 3일 밤낮으로 열한차례나 공격한 끝에 양군 포함 사상자가 3백여명에 이르렀지만 마침내 적군을 격퇴시켰다. 만주국군은 지휘관인 소본량도 부상을 입었으며 2백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피해를 입었다.
한편 이춘윤부대와 조화선부대는 6월17일 일본군은 2천여 명의 정안군(靖安軍) 유격대(중국인.조선인.일본인 등으로 조직하였고 소맷부리가 붉은색이라서 불은소매(紅柚頭 홍유두) 군대라고도 불렀다)와 함께 기관총 40자루. 각종 포 20문.탄약60여 수레로 무장하고 남잡목 기차역에서 내려서는 밤낮으로 진군하여 흥경현을 공격해 왔다. 이춘윤 부대의 일부가 목기(木奇)에 주둔해 있었으나 힘에 부쳐 철수하고 말았다.
6월18일 일본군이 영능가를 점령하자, 이춘윤은 호위병과 특무대 조화선을 노성에 보내 저지선을 치고 전투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19일 아침8시 적군이 노성 하북으로 진격해 오면서 쌍방의 혈전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대포를 맹렬히 퍼풋는 것도 모자라 비행기로 포탄을 뿌렸다. 총탄 소리가 귀를 뚫을 지경이었으며, 탄약 연기가 자욱했다.
이춘윤은 조화선에게 특무대를 이끌고 즉시 발보구(拔補溝)에 잠복해서 적군의 진격에 대항하라고 명령하고 자신은 부대를 이끌고 적진을 향해 돌격했다. 조화선은 모든 특무대원을 발포구와 쌍용사(雙龍寺)도로 양쪽에 배치해놓고 적군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적군이 마침내 이춘윤부대의 방어를 뚫고 발포구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 조씩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두 조가갔을 때, 조화선이 신호탄을 쏘았다. 그러자 병사들이 맹렬한 기세로 도로로 돌진했다.
적군은 즉시 반격해 왔다. 별동대원들은 죽음을 전혀 두려하지 않고 용감하게 적군과 싸웠다. 큰 소리를 지르며 전진하면서 일본군 토비 소탕 부사령 중좌1명.소좌1명.대위2명.소위 및 병사 40여 명을 죽였고, 별동대 병사는 7명이 희생되었다. 중국 자위군이 악전고투하고 있을 때 완강하게 저항하던 적군이 비행기를 출동시켜 엄호케 하면서 벌떼처럼 동쪽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목기.영능.흥경현성 세 곳에 마구잡이로 총을 쏘아 댔다. 그 바람에 하북(河北)의 상점과 민간인 집이 불에 타는 등 ,온 천지가 불바다가 되었다. 사람들은 잇따라 도망치기 시작했고, 곳곳에서 들리는 울움소리와 신음 소리로 그야말로 마을전체가 난장판이 되었다.
이춘윤과 조화선 등은 오후3시쯤 현의 거리에서 최후의 저항을 했다. 전방은 병사의 수와 무기에서 너무도 큰 차이가 나서 힘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전쟁을 오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편 후방은 일반 사람들에게 까지 피해가 미치고 사기마저 떨어져 오후 4시쯤 전 대원을 왕청문으로 철수시키지않을 수 없었다.
6월 19일에 왕동헌과 최윤구의 부대는 다시 영액문(英額文)을 공격했다. 주민들의 협조에 힘입어 8리 정도 되는 철도를 파괴했고, 영액문 일대를 누비던 동국화(董國華) 휘하의 만주국군 1개 중대 병력을 격퇴시켰다.
7월 하순: 최윤구 조화선의 조선혁명군이 단독으로 통화현 쾌대무자快大茂子에서 일만군 80명을 사살했다.
같은 달 최윤구와 조화선 부대는 통화현 쾌대무자(快大茂子)에서 일본의 꼭두각시인 동국화 보대와 맞다뜨려 격렬한 전투를 벌렸다. 적군은 3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조문기)참조>
9월 적이 주둔하고 있는우모오(牛毛坞)를 포위공격을 하였다.
장종주는 조선특무대 박대호.최윤갑(구)의 부대를 우모오 외곽지역으로 이동시켰다.
우모오는 환인현과 관전현 경계에 자리잡고있는데 사방으로 산으로 둘러싸여 지세가 복잡하였다. 압록강지구 초토사령관 서문해(徐文海)의 거점 이였는데 8개련의 약1.000여명 이나 되는 일본군 나까이지로 한개 중대가 주둔해 있었다. 9월7일새벽 장종주.대도회.박대호.최윤구.동술선.리대광등과 조선특무대와 협동작전으로 우모오 거리로 돌격하였다.일시에 포화속에서 육박전이 벌어졌고 적군이 여기 저기 너부러 졌다. 일본군 중대장1명군관5명사병20명격살하고 40명은 부상시겼다. 8일 서문해의 진지를 향해 포를3발 쏘자 서문해가 황급히 말을타고 도주 하였다.<항일투쟁 반세기.(김 양)참조>
1933년 1월 양세봉은 부대를 거느리고 왕청문 남의목수둔(南依木樹屯)에 도착했다. 그는 여기서 조선혁명군 주요 지도부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결정했다. "조선혁명군"이라는 명칭도 되찿고, 조선혁명군 총사령은 여전히 양세봉이. 부총사령은 박대호가 담당한다. 아래에 3개 방면군을 설치하고 제1방면군 사령관은 한검추 제2방면군 사령관은 최윤구, 제3방면군 사령관은 장명도가 각각 담당한다.
이러한 일련의 군사제도 재정비를 거쳐 조선혁명군과 각급 지방 조직이 강화되었고 혁명군 장교와 사병들의 자신감 또한 높아졌다. 그들은 조선인 청년 중에서 장정을 뽑아 대원으로 삼는 한편 뿔뿔이 흩어진 자위군을 받아들렸다. 이에 따라 부대원의 수가 크게 늘어 다시 한 번 동변도 일대에서 항일 기치를 높이 들게 되었다.
최윤구 부대는 왕동헌의 제10로군과 함께 청원 일대에서 10일간 전투를 하였다.
7월 최윤구의 특무대는 자위군 제6로군과 같이 심해로(沈海路)의 영반(營盤)과 남구전(南口前),남잡목, 청원현을 계속해서 공격하여 여러 곳의 철도노선을 파괴했다.
7월3일,조화선. 최윤구. 최주봉 등은 자위군과 함께 흥경현 대전자령(大甸子玲)으로 적을 유인해 공격한 끝에,일본의 이이츠키가 이끌던 군대를 섬멸하고 대량의 무기와 군수품을 얻었다.
(소화8년)에 발행된 (최근조선의 치안 상황)에 따르면 압록강 주변을 무장 공격한 것은 모두 16번이고 인원은 101명에 달한다.
만주국 봉천 경비대 사령부는 요동 지역의 항일 무장 세력 지도부를 잡기 위해 대자보를 붙이고 현상금을 내걸었다. (중국인) 왕봉각은 5천 원. 양세봉은 4천 원 (중국인) 왕전양.조화선.최윤구.한검추는 각각 3천 원 소자여는 2천 원 노장청(老長靑)은 1천 원 등으로 현상금을 정했지만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다른 연구물에는 왕복각.양세봉은2만원 박대호.최윤구.조화선.한검추는1만원의현상금을 걸었다는 내용도있다.)
1934년 8월 조선혁명군 제2사단 최윤구 부대와 항일군 왕봉각 부대는 통화현 강전자에서 일본군 통화 수비대와 저녁 내내 교전을 벌렸다. 적의 사상자가 80여 명에 이르렀다.
1934년 8월 말 동변도 유격 특무대장 박창해는 일본 앞잡이가 되어 양세봉을 찿아 다녔다. 목적은 1.투항시키는것 2.투항실패에는 살해 하는 것이 었다. 朴長海는 마침내 양세봉의 소재를 알아냈다. 통하현 삼가 유자촌의 대지주 왕명번(王明番)을 내세워 산림대 우두머리 아동양(亞東洋)을 투항시켰다. 아동양은 예전에 양세봉과 왕래가 있었던 자였다. 박장해는 거금으로 아동양을 매수하고 양세봉에게 사람을 보내 투항을 권유하라고 시켰다. 양세봉은 단호히 거절했다. 이에 박장해는 양세봉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암살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아동양은 그간에 연합투쟁을 협의 한적도 있고해서 그를 믿고 아동양의 무기를 인수코져 따라 나섯다. 이들에게 속아 통화현 삼가유자촌으로 걸음 하다가 아동양이 권총을 쏘아 갑자기 당하였다. 그날이 1934년 09월 19일 초승달이 뜬 밤이 였다. 이튼날 새벽에 양세봉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김도선의 집으로 옮겨 5일 장으로 애도의 뜻을 표했다. 혁명당.군 국민부 인사들이 모여 장례식에 참가하였다. 참가한 사람들로는 장명도.양하산.김동삼.고이허.김활석.김두칠.박대호.최윤구.조화선.윤일파.홍심원.이문추.김대성.정광배.김해산과 산림대장 천량등이 있었다.
10월19일경 평정산, 노도구령,이호래,도독화락(都督火洛),청원 북하가보자,흑우 등지에서 특무대 조화선 부대 최윤구 부대, 자위군 유극검, 이선교, 오영산 부대는 적군과 여러 차례 격전을 벌여 양쪽 모두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1934년 10월에 향수하자 방초구(芳草溝)에서 조선혁명군의 네번째 전체 간부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에 고이허, 총재는 김동삼,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에 김활석, 총사령부 비서장에 김영근, 중앙보안대장에 한진지, 정치위원에 김활석·문무경, 외교위원장은 김동이, 조직위원장은 김동삼, 노동위원장은 박대호, 선전위원장에 김두칠, 혁명위원장에 최석용(한검추), 교육위원장에 고이허, 군민위원장에 김진방, 재정위원장에 이상관이 각각 선출되었다. 이하 16명의 위원을 두고, 국민부를 해체하기로 결정했으며 조선혁명당 중앙은 조선 혁명의 의무금 징수와 정보 수집 기관으로 바뀌었다. 또 조선혁명군의 편제는 참모장에 김두칠, 제1방면군 사령관에 한검추, 제2방면군 사령관에 최윤구, 제3방면군 사령관에 조화선으로 개편되었다.<조선혁명군 역사에 대하여.(황용국)참조>
1935년 9월 20일에 조선혁명군 제1방면군 사령관 한검추는 중국의 항일의용군 왕봉각 부대와 집안현 제8구에서 회의를 열고 ‘중한항일동맹회’를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중한항일동맹회 성립 선언’을 발표한 그들은 집안·통화현에서 여러 차례 회의를 열고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동북의 빼앗긴 땅을 회복하며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삼는다”고 명시하면서 “군사적 수단을 통해 일본의 군사 행동과 정치적 음모를 분쇄하는 동시에 행정 수단으로 중·한 양국의 새로운 정치권력을 수립한다”고 제시했다. 중한항일동맹회는 고이허를 정치위원장, 왕봉각을 군사위원장으로 추대했고 한검추를 의용군 총사령관으로 선임했다.
1936년 6월 조선명군 제2사 최윤구부대는 유하현 오봉루를 습격하여 일본군 한개 소대를 소멸 하였다.
1936년여름에 朝鮮革命軍 第2師 崔允龜부대와 中國楊靖宇 부대는 도합 400여 명 으로 된 연합작전이 있었다. 자동차 한 대를 파괴하였으며 달려드는 적들을 향하여 맹사격을 퍼부었다. 약 한시간 전투하여 적들은 떼죽음을 당했으며 전투 후 조선혁명군은 각종 무기 30여 자루를 나누어 받았다.
1937년 2월에 중국의용군 사령 왕봉각이 통화에서 체포 되면서 혁명군 한검추와 부하 약 70명이 투항에 이르러 조선혁명군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1937년 봄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총사령 양정우는 주요간부를 환인현 쌍수하에 보내서 조선혁명군 간부 김활석.김두칠.박대호.최윤구.정동오. 등과 회담하였다.
회담에서 中.朝 雨國人民을 단결시켜 협동작전으로 공동의 적 일본침략자를 물리치고 민족의 해방을 챙취하기 위하여 끝까지 투쟁 할것을 다짐하였다.
1938년 적군은 강대하고 아군은 약소해지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조선혁명군은 결코 죽지 않았다. 후반기의 부사령관 朴大浩와 제2방면군 사령관 崔允龜를 중심으로 한 조선혁명군의 반일 의지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조선혁명군 정부 연구.(장세윤)참조>
그들은 반일 교육을 더욱 강화하고, 내부 단결을 더욱 굳건히 해 나갔다. 군비와 군량의 부족을 극복하고 압록강 주변과 백두산 지역을 종횡무진하며 적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렸다.
1938년3월18일 최윤구(현구).박대호(상춘) 등은 즙안 로령철로 터널 공지전투에 참가 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위군경 7명을 격살하고 5명을 포로 했으며 근로자 1.731명을 구원 해냈으며 건축물 12동 자동차 3대를 불질렀다.적은 이번 전투에서 20만원(일본돈) 이상 손실을 보았다.
적들은 이번 전투를 동변도 숙청사상 최대의 현장 로령사건이다 라고 하였다.
이러한 성과로 인하여 조선혁명군과 양정우부대와 더욱 가까워졌고, 서로 작전협정을 맺은 계기가 되었다.<료령성 조선민족 혁명투쟁사.(김 양)참조>
그리하여1938년3 월 박대호와 최윤구는 60여 명의(일설180명) 조선혁명군 간부와 대원들을 이끌고 환인현 요전수구(搖錢樹溝)에서 정식으로 항일연군 제1군에 합류했다. 한인독립사로 편제하며 한인 독립사 사령은 최윤구가 담당하였다.<중국동북지역 민족운동과 한국현대사.(장세윤)참조> <战遼東 조문기.주편 2012년 312면313면 참조>
1938년 9월6일 김활석.정동오.총령 김동산 등이 투항하여 조선혁명군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 길림성 당안 일본자료를 인용한 연구물에는
최대대장(崔大隊長)겸 총참모장 되어 1940년2월15일 변절한 정빈.최주봉이 일본군.경 600명과 몽강전투에서 정빈(程斌).최주봉(崔冑峰)은 토벌대를 앞세워 (최윤구.양정우)를 추적하였다.
포위작전에 이르러 최대대장이 출현한 것을 포착 한봐. 이에 맹렬하게 공방전을 펼치다가 적군 아군 할것없이 수많은 사상자가 났다. 이전투에서 통화 이통에 일본장교 경위(警尉)등이 허다하게 사살 되였다. (1938년12월~1940년2월이든 적과싸우다 전사한것은 분명하다.)
【이에 대해 사망.(전사)일자가 제적에는 "1942년으로 왜 되었는가?" 궁금 할 겁니다.그럼 간략하게 정리한 다면 첫째.고향 청도에서 당시 미결혼자 유생(儒生) 3.1운동과 관련이 있어 수배를 받자.급히 친척등이 도와 비밀 약소차례 밀양박씨와 결혼. 혼인신고 못했음. 둘째.중국滿洲망명 농민부부위장 "양자 男5세7세중 5세1명 朱永○만 데리고(경주군.산내면)" 신부나이 당시 어려 맞춤인듯. 기차로 농민위장(아이가 있는.부부위장) 만주로 망명. 셋째.崔允龜(鉉九)戰死후.혼인신고 미필관계로 자식 양자포함 3명이 고아가 됨. 그래서 먼저 1939년 혼인신고를 해야했다.(추적.의심피하기위해)비로서 자식들 등재와.최현구(윤구)사망신고를 한것이(전사.소식 늦게 들었는듯.우편배달. 보통1개월걸린시절)1942년9월10일로 된 除籍 사유가 있었음을 밝힘니다.】
《출처》◈紅熱記事 - 碧血丹心守沃土 - 東北抗日聯軍 2011.3 武國友/主編 李 青/著 /吉林出版集團 吉林文史出版社
참조문서:한국독립운동사연구제1집 계기화선생의 회고 437쪽 한검추(최종륜)은 만주경찰학교에 수용되어 5~6백명 증모하여 출동한 사실이 있다고 한다.
<정부에서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 하였다.>>
<< 2005년 독립장을 서훈 하였다. 同一 인물로서 미전수...>>
崔允龜 - 본명 최현구(崔鉉九) 청도군 운문면 지촌리 출생 1885-1942=처 밀양 朴씨○化
朴大浩 - 본명 박상춘(朴相春)청도군 화양면 고평리 출생 1892-1947=밀양박씨=처경주李씨父敏雨
金斗七 - 본명 김현제(金賢濟) 청도군 매전면 용산리 출생 1893-1946=처 밀양 朴씨○述
徐世明 - 본명 서명수(徐明洙) 밀양읍 교동리 출생 1895- 1955=달성 서씨 =처
박대호는 동북항일연군 후근부에 안배되어 항일하다 1942년에 무송.이도백하 산굴밀영속에서 전략 적 자리잡고 동지들과 이곳 밀영에서 헤여져 다시 유격전술을 도모키로 하고 1943년 청명일에(양력4월6일음력3월2일)동지들과 만나기로 약속 했었다.그후 1943년 청명일이 되어 나타난그들은 이미 체포되어 변절된 상태로 박대호를 체포하기위해 나타난 것을 모르고 박대호는 청명일 약속 장소에 나갔는데 반가움을 되로하고 동지를 앞세우고 유인한 일본군,경들에게 포위되여 생포 당하였다. 결국 체포되어 길림성 무송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후에는 길림성 안도현 명월진 태평촌에 있는 반일분자 수용소로 수감되어 강제노동을 하다가 1945년 감옥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그리고 얼마후 감옥에서 나와 누적된 고문의 휴유증으로 1947년 55세에 사망하였다고 전한다.
박대호 아들 둘을 동북항연군에 보냈다고 하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아들 한명만 동북항일연군에 보냈는데 아직도 생사 확인을 못하고 있는 실정 이라고 하며,또 한명은 아버지 박대호 부사령을 따라 조선혁명군에서 활동하다가 1943년 음력3월2일(청명일)에 같이 체포되어 무송감옥에서 고문을 못이겨 정신이 돌아버려 감옥에서 버려져 얼마후 사망 하였다고 전한다.
<<조선혁명군 부사령 박대호 사령은 아직도 상훈도 하지 않고 있다.>><김두칠외교부장은 체포 된것은 맞지만 굴복 하지도 않았으며.아군에 피해 준것도 없다. 모두 변절한자에 의해 속아 체포되었다.박대호선생과 김두칠선생에 대해서는 행적이 비슷하다.해방후 박대호1947.김두칠1946년에 두분 모두고문에 못이겨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병환으로 별세 하였다. 상훈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보여지는데 무슨 이유인가 행적은 무엇을 보는가 투항하여 아군에게 어떤 피해를 주었는가 피해를 준 사실이 있는가?)
독립군들을 왜 푸대접을 하는지 모르겠다. 누구를 위해 왜적과 싸웠는가 자기 가족과 재산을 다받쳐 20년~30년간 내나라 해방시켜 보겠다고 밤낯을 가리지 않고 배를 골아가며 왜적과 만주에서 목숨걸고 싸웠건만 돌아오는것은 푸대접과 홀대.....
“조선혁명군 추도가”
1.가슴 쥐고 나무밑에 쓰러 졌다 혁명군 가슴에 서흐르는 피 푸른 풀 에 즐박해
2.만리 장천 무주고흔 부모 형제 다버리고 홀로서 나무밑에 한을 품고 쓰러진다.
3.산에 나는 까마귀야 시체 보고 우지 마라 몸은 비록 죽었지만 혁명 정신 살아있다.
조선혁명군은 민족해방운동을 위해 한국인이 조직한 강력한 무장 군대였고 중국동북 지역에서 활동한 여러 민족의 항일무장 조직중에서도 역량이 뛰어났다. 용감하고 치열하게 싸워 많은 업적을 쌓았으며, 목숨을 건 투쟁정신으로 민족의 기개를 한껏 드높혔다. 항일 투쟁사에서도 그들에 공헌은 영원히 빛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