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신> '나'란 무엇인가 / 임보 (시인, 교수)
로메다 님,
인간이란 숙명적으로 고독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우리는 '이 세상에 내던져졌다'고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말합니다.
부조리한 세상을 인간은 이방인처럼 서먹서먹하게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소외감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이 세상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로메다 님이 존재의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은 아주 정상적인 것입니다.
전혀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존재의 외로움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오히려 무딘 감각을 지닌 비정상적인 사람일 지도 모릅니다.
두렵게 생각지 말고 충분히 괴로워하십시오.
그러한 고뇌를 통해 로메다 님은 한 단계 높은 성숙한 영혼에 도달할 것입니다.
어쩌면 시를 생각하는 마음도 이러한 숙명적인 외로움과 무관하지 않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로메다 님,
우리의 존재가 실존주의자들이 회의한 것처럼 그렇게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 나는 시에 대한 담론은 잠시 접어두고
인간 존재의 근원에 관해서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로메다 님,
'나'가 어떤 존재인지,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겠지요?
'나'는 물론 부모로부터 왔습니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 두 생명의 통합에 의해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내 생명의 뿌리는 부모님 이전으로 한없이 거슬러올라가게 됩니다.
2분의 부모→4분의 조부모→8분의 증조부모→16분의 고조부모→……
이처럼 한 세대를 거슬러올라갈 때마다 2배수로 불어나면서
조상의 갈래는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됩니다.
오늘의 '나'를 이 땅에 오게 하기 위해 600년 전쯤 얼마나 많은 조상들이
이 지상에 대기하고 있었는지 계산해 볼까요?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으면 20세대 전이 되니까, 2의 20승입니다.
2의 20승이면 100만 명이 넘은 숫자입니다.
'나'의 혈관 속에는 600년 전 100만이 넘은 조상들의 피가 맥맥히 흐르고 있습니다.
그 100만 명 가운데 어느 한 분만 안 계셨더라도 오늘의 이러한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명의 끈은 수 백만 년을 거슬러올라가 태초의 조상,
아니 창조주에까지 닿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우리의 혈관 속 DNA는 과거 전 조상의 통합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과거 전 조상의 결집으로 응결된 하나의 집합체입니다.
결코 어쩌다가 우연히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놀라운 섭리로 말미암아 기적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소중한 존재입니까?
로메다 님,
이제는 우리의 미래를 한번 생각해 볼까요?
우리가 배우자를 맞이하여 아들과 딸 둘씩을 낳는다고 가정합시다.
그리고 그 아들과 딸들이 결혼하여 둘씩의 자녀를 갖게 되고
다시 그 자손들이 그렇게 둘씩의 자손들을 계속 얻게 된다면
600년 뒤 '나'의 피를 가진 후손들이 이 지상에 얼마나 존재하게 될까요?
100만 명이 넘습니다.
이 지상에 인류 역사가 얼마나 지속될 지는 알 수 없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내 피를 지닌 후손들은 점점 불어나
언젠가는 이 지상의 모든 인류들의 혈관 속에 내 피가 흐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입니까?
'나'는 미래 인류들의 조상입니다.
'나'는 미래 인류들이 새롭게 시작되는 하나의 출발점입니다.
내가 어떤 배우자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내가 어떤 자녀를 얼마만큼 생산하느냐에 따라
미래 인류들의 모습은 달라집니다.
나는 미래 인류들을 좌우할 수 있는 막중한 존재입니다.
내 존재가 무의미하다고요?
과거 전 인류들이 나에게 귀결되었고
미래 전 인류들이 나로부터 비롯되는
나는 전 인류의 한 교차점―인류의 한 중심입니다.
로메다 님,
이제는 공간적으로 우리 생명체 곧 '나의 몸'의 의미를 한번 생각해 볼까요?
우리의 몸, 육신은 어떻게 만들어졌습니까?
물론 우리의 몸은 처음에 부모로부터 물려받았지만
오늘의 이러한 육신이 되도록 길러준 것은 삼라만상의 협동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내가 그동안 섭취했던 모든 음식물이며
내가 그동안 한순간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호흡했던 모든 공기며
그동안 햇빛을 위시해서 내가 무의식중에 받아들인 우주 공간 속에 존재한
모든 요소들의 총체적인 작용에 의해 이 몸뚱이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로메다 님,
한 그루의 나무가 하는 일을 지켜보면
한 생명체가 얼마나 다양한 우주적 요소들을 끌어 모으며 살아가는가 짐작이 갑니다.
뿌리로는 물을 비롯해서 땅속에 들어있는 많은 영양분들을 빨아들이고
잎과 가지로는 필요한 햇빛과 공기들을 얼마나 열심히 모읍니까?
한 알의 사과 속에는 실로 헤아릴 수 없는 방대한 우주적 요소들이 농축되어 있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의 식탁 위에 놓인
한 개의 달걀,
한 마리의 물고기,
한 점의 육류(肉類)…
이러한 음식들 속에 서려 있는 우주적 요소들은 실로 아득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조그만 부엌에서 조리된 단순한 음식물에 의해 형성된 것 같지만
사실은 전 우주적 요소들이 총 동원되어 빚어낸 신비로운 결정체입니다.
한 생명체의 몸뚱이는 전 우주의 축약·수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을 지칭하는 순 우리말 '몸'의 어원이 '모으다' 아닙니까?
실로 우리 조상의 슬기로운 생명관을 엿보게 하는 말입니다.
로메다 님,
이제는 우리의 목숨이 끊긴 뒤, 사후(死後)를 한번 생각해 볼까요?
생명이 멈춘 뒤 우리의 육신은 어떻게 됩니까?
우리의 육신을 구성했던 모든 요소들은 흩어지고 흩어져서
그것들이 왔었던 애초의 우주 공간 속으로 스며들게 됩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내 육신의 요소들로 이 우주는 가득 차게 됩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죽음'을 '돌아간다'고 표현한 것도 이해가 되지요?
로메다 님,
우리의 '몸' 역시 하나의 응결체며 하나의 교차점입니다.
전 우주적 요소들이 응집(凝集)되어 잠시 내 몸을 이루었다가
다시 그 요소들이 우주 공간 속으로 흩어져 가는 하나의 교차점입니다.
앞에서 '나'는 전 과거 조상들의 응결이며 전 미래 인류의 출발점으로
전 인류의 교차점이며, 중심점이 된다고 했지요?
그러니 나라는 생명체는 역사적(혈연적)으로도 공간적(육체적)으로도
이 세상의 축약이면서 한중심입니다.
'나'는 축소된 우주― 소우주입니다.
'나'는 이 우주 전체에 버금갈 만큼 소중합니다.
이러한 '나'는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유일무이한 절대적 존재입니다.
로메다 님,
우리는 때때로 자신을 비하(卑下)하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나는 왜 아무개처럼 좋은 기억력을 못 가졌을까?
나는 왜 아무개처럼 얼굴이 예쁘지 않을까?
그러나 로메다 님,
내가 가지고 있는 장점도 적지 않습니다.
아무개보다 기억력은 뒤질지라고 상상력은 더 앞설 수 있고
아무개보다 얼굴은 덜 예쁠지라도 종아리는 더 아름다울 수 있지 않습니까?
내 생명체는 어느 누구도 갖지 못한 절대적 가치를 지녔습니다.
로메다 님, 자신에 대한 긍지를 가지십시오.
당신은 창조주의 특별한 배려에 의해 이 세상의 주인으로 선택된 것입니다.
로메다 님, '나'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이처럼 소중합니다.
생명체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다 소중합니다.
하나하나 그것들의 내력을 깊이 생각하면 신비롭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로메다 님,
오늘의 내 얘기를 통해 세상을 바라다보는 시야가 달라졌으면 합니다.
밝고도 아름다운 세상이 그대 앞에 펼쳐져 있지 않습니까?
세상은 창조주가 마련한 그대의 정원이요.
당신은 그 정원의 주인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 임보 교수 시창작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