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의 구체(球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박병규 옮김
어쩌면 세계사란 몇 가지 비유의 역사이다. 이러한 역사의 한 장(章)을 스케치해보려는 것이 이 짧은 글의 목적이다.
기원전 6세기, 음유시인 크세노파네스는 이 도시 저 도시로 돌아다니며 호머의 시구를 음송하는 데 신물이 났기 때문에 신들에게 인간적 측면을 부여한 시인들을 책망하고, 그리스인들은 하느님 같은 유일신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 유일신이란 바로 영원한 구체였다. 플라톤의 ꡔ티마이오스ꡕ를 보면, 구체는 표면의 어느 지점에서나 중심과 등거리이므로 가장 완벽하고 가장 균일한 형체라고 한다. 올로프 지곤 해석에 따르면, 크세노파네스 얘기는 유비이다. 즉 하느님이 회전타원체라고 한 까닭은 이 형태가 신성을 표상하기에 가장 좋은, 적어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크세파노스 로부터 40년 후, 파르메니데스도 동일한 이야기를 했다(“존재(the Being)는 아주 둥근 구체와 유사한 것으로, 그 힘은 중심에서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든지 일정하다”). 칼로헤로(Calogero)와 몬돌포(Mondolfo)는 파르메니데스가 무한한 구체, 다시 말해서 무한히 증가하는 구체를 직관적으로 파악했으며, 내가 괄호 안에 인용한 말은 역동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파르메니데스는 이탈리아에서 가르쳤다. 그가 죽고 몇 년 후, 시실리아인 엠페도클레스는 정교한 우주발생론을 만들어냈다. 이 우주발생론의 어느 단계에 이르면 흙, 물, 공기, 불의 원소들은 무한한 구체, 즉 “순환의 고독을 즐기는 ‘둥근 구체’(Sphairos redondo)”를 형성한다.
세계사는 계속 진행됐고, 크세노파네스가 공격했던 너무나 인간적인 신들은 시적 허구나 악마의 위치로 떨어졌다. 그러나 한 신은, 즉 ‘삼중으로 위대한 헤르메스’(Hermes Trismegisto)은 수많은 책을 구술했으며(클레멘트에 의하면 42권, 이암블리쿠스에 따르면 2,000권, 헤르메스의 다른 이름인 토드(Thoth) 신의 사제들에 따르면 36,525권), 그 책 속에는 모든 것이 다 씌어져 있다고 한다. 3세기부터 편찬된 혹은 날조된 이 허황한 도서관의 한 부분이 이른바 헤르메스 총서(Corpus Hermeticum)이다. 12세기 말 프랑스 신학자 알랭 드 릴(Alain de Lille, 또는 Alanus de Insulis)은 이 총서에서, 어떤 사람 얘기로는, ‘삼중으로 위대한 헤르메스’가 썼다고 여기는 ꡔ아스클레피오스ꡕ(Asclepius)에서 후세 사람들이 결코 잊을 수 없는 다음과 같은 공식을 발견했다. “하느님은 지적인 구체이며, 그 중심은 모든 곳에 있으나 원주(圓週)는 어느 곳에도 없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끝이 없는 구체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알베르텔리 생각에 따르면(전에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랬듯이) 이런 얘기는 주사(subject)와 빈사(predicate)가 서로를 부정하므로 형용모순이다. 이것이 진리이겠지만, 헤르메스 책의 공식에서 우리는 그러한 구체를 어느 정도 직관할 수 있다. 이러한 이미지는 8세기에 이르면 상징적인 작품 ꡔ장미 이야기ꡕ에서 다시 나타나고 -이 책에서는 플라톤의 말이라고 한다-, 백과사전 ꡔ삼중의 거울ꡕ(Speculum Triplex)에서도 나타난다. 16세기에 들어서면, ꡔ팡타그뤼엘ꡕ 마지막 권 마지막 장에서 이에 대한 언급을 볼 수 있다. “그 지적인 구체, 그 중심은 모든 곳에 있으나 원주는 어느 곳에도 없는 그 구체를 우리는 하느님이라고 부른다.” 중세의 정신으로 보면 그 의미는 명백하다. 즉, 하느님은 개개의 피조물 내에 있으나 어느 피조물도 ‘주’를 제한하지 못한다. “저 하늘, 저 꼭대기 하늘도 주를 모시지 못할 것이다”고 솔로몬은 말했다. 구체에 대한 기하학적 은유는 이 말의 주석으로 여겼다.
단테의 시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을 담고 있다. 이 우주론은 천 사백년 동안 인간의 상상력을 지배했던 것으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었다. 지구는 부동의 구체이며, 그 주위로 9개의 구체가 동심원을 이루며 회전한다. 그 중 처음 7개는 행성의 하늘이다(달, 수성, 금성, 태양, 화성, 목성, 토성의 하늘). 여덟번째는 붙박이 별들의 하늘이고, 아홉번째는 ‘원동자’라고 부르는 크리스탈 하늘이다. 이 하늘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빛으로 된 엠피리우스(Empyrius)이다. 텅비고, 투명하며, 회전하는 구체들로(어떤 체계에 의하면 55개이다) 이루어진 이 정교한 조직은 정신적 필수품이 되기에 이르렀다. ꡔ천체의 운동에 관한 가설ꡕ은 아리스토텔레스 학설을 부정했던 코페르니쿠스가 자신의 저술에 붙인 소심한 제목이었는데, 이제 우리들의 우주관이 되었다. 어떤 사람, 즉 지오다르노 브루노같은 사람이 보기에 창공에 균열이 있다는 사실은 일종의 해방이었다. 브루노는 ꡔ성회 수요일 만찬ꡕ에서 세계는 무한한 원인의 무한한 결과이며, 하느님(divinity)은 가까이에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들 자신이 우리들 가운데 있다는 것보다 더욱 우리들 속에 있기 때문이다”고 밝혔다. 브루노는 사람들에게 코페르니쿠스적 공간을 설명해 줄 말을 찾아냈다. 그리하여 널리 알려진 어느 페이지에 이렇게 썼다. “이제 우리는 우주가 만물의 중심이라고, 다시 말해서 우주의 중심은 도처에 있으며, 원주는 어느 곳에도 없다고 확실하게 주장할 수 있다.”
의기양양한 이 글은 1584년, 그러니까 아직도 르네상스가 빛을 발하던 시기에 씌어진 것이다. 이로부터 70년 후에는 그와 같은 열정은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길을 잃었다고 느꼈다. 과거와 미래가 무한하다면 사실 ‘언제’라는 것은 없기 때문에 시간 속에서 길을 잃었고, 각 존재가 무한한 것으로부터 그리고 무한소로부터 균등한 거리에 있다면 ‘어느 곳’이란 없기 때문에 공간 속에서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그 누구도 어떤 날, 어떤 장소에 있지 않았으며,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몰랐다. 르네상스기에 인류는 청년기에 도달했다고 생각했으며, 브루노, 캄파넬라, 베이컨의 입을 통해서 이를 천명했다. 17세기에 인류는 노쇠했다는 느낌에 풀이 죽었다. 이를 합리화하려는 시도에서 모든 피조물은 아담의 죄과 때문에 숙명적으로 완만하게 타락한다는 믿음이 생겨났다.(창세기 5장에는 “므두세라는 모두 구백 육십구년을 살고 죽었다”고 하며, 6장에는 “그 때 세상에는 느빌림이라는 거인족이 있었다”고 한다.) 존 단(John Donne)은 비가 ꡔ세계의 해부ꡕ 출판 1주년에 즈음하여 요즘 사람들은 요정이나 피그미 족처럼 키가 작고 수명이 너무 짧다고 한탄했다. 존슨(Johnson)이 쓴 전기에 따르면, 밀턴은 이제 지상에서 서사시를 쓰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글랜빌(Glanvill)은 “하느님의 훈장”, 아담은 망원경과 현미경에 재미를 붙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로버트 사우스(Robert South)는 유명한 글을 썼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이라도 아담의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으며, 아테네도 천국의 초보 상태에 불과하다.” 풀 죽은 이 17세기에 이르면, 루크레티우스의 6운각 시에 영감을 주었던 절대공간, 그리고 브루노에게 하나의 해방이었던 절대공간은 파스칼에게는 미로이고 심연이었다. 파스칼은 우주를 증오했으며, 하느님을 숭배하고 싶었으나 하느님보다는 증오스러운 우주가 더 현실적이었다. 하늘이 말을 하지 않는다고 탄식했으며, 우리의 삶을 무인도에 도착한 난파자의 삶에 비교했다. 물리적 세계의 중압감을 끊임없이 느꼈고, 현기증과 두려움과 고독을 느꼈다. 그는 이런 감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자연은 무한한 구체로, 그 중심은 모든 곳에 있으나 원주는 어느 곳에도 없다.” 브룽스비(Brunschvicg)판에는 이렇게 되어 있으나, 원고에서 망설이고 지워진 곳까지 재생해낸 투르네(Tourneur)의 원전 비평 연구판(Paris, 1941)을 보면 파스칼이 ‘소름끼치는’(effaroyable)이라는 단어로부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소름끼치는 구체, 그 중심은 모든 곳에 있으나 원주는 어느 곳에도 없다.”
어쩌면 세계사는 몇 가지 비유에 대한 다양한 억양의 역사이다.◇
1951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