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화자 좋다. 태평성대로구나.
개 같은 인생
여우 비 인가? 햇빛이 쨍쨍 쏟아지다가 먹장구름이 몰려오더니 소나기가 한 소금 지나간다. 양반은 비를 쫄딱 맞아도 뛰어가는 법이 없었다. 그놈의 체면이 무엇인지?
한 점잔은 젊은이가 허름한 집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려고 쪼그리고 앉자있는데 왠 머슴이 말을 걸어왔다.
“개거든 가시게”
젊은이는 영락없이 비 맞은 장닭 신세가 되었지만. 비를 맞아도 양반(兩班)은 양반이다. 얼마 후에 젊은이는 처마 밑을 나오며
“개니 가네”
젊은이는 참봉 댁 자제였다. 한양에 과거보러 갔다가 집에 오는 길에 비를 맞은 것이다.
머슴은 원래가 정승 자제였다. 조부가 사화에 연류 되어 가솔이 뿔뿔이 해어지고 그는 어느 양반집 노비가 되었다. 이 토담집은 그가 거처하는 움막이었다.
어이 저기! 이것도 인연이니 집에서 담근 막걸리라도 한 잔 하고 가시게!
춘심아! 뭐하고 있느나? 빨리 시렁에서 약주 가져오지 않고!
10년은 객지 벗이라고 했다. 얼추 열 살 차이도 길에서는 동무가 된다. 반상(常民 兩班)이 유별하다 하지만 어디 양반입네! 상놈입네! 붙이고 다니는 것도 아니다.
둘이서 주거니 받거니 대낮부터 막걸리 한 동을 다 비우고, 대취해서 골아 떨어져 다음날 해가 중천일 때 부스스 일어났다.
머슴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 춘심이는 방년의 꽃다운 나이여서 오라비는 걱정이 태산이다. 옆 동내에서는 과부도 아닌 젊은 처자를 보쌈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들렸다.
춘심이도 그 젊은이에게 반했는지. 그날따라 앉았다 섰다하며 뭐 마려운 강아지 같이 안절부절 했다.
전대미문의 해괴한 사건
내가 누군가? 필시 방법이 있을 터! 그래서 여동생을 참봉댁에 보내서 바느질 감을 받아오라고 하였다. 춘심이는 손끝이 매섭기로 소문이 난 터라, 바느질에는 이골이 낫다.
젊은이도 행동거지가 단정하고 예쁘기 만한 처자에게 정신을 뺏겼다. 참봉댁에는 과년한 딸이 있었다. 자기 맘에 드는 신랑감이 없다나! 그래서 때를 놓치고 얼추 서른이 되었다. 그런데 규수 앞에 어께가 떡 벌어진 장정이 얼씬 거리니 눈에 콩깍지가 씨었다. 그리고 해가 바뀌자.
하루는 젊은이가 믿을만한 일꾼들을 불러놓고 여차저차하게 보쌈 작전을 설명하였다. 그래서 달이 없는 그믐날 머슴이 사는 움막에 잠입을 했다. 숨어있던 머슴이 몸을 날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미리 준비한 이불 홋청 속에 젊은이를 넣고 포박해 버렸다.
밖이 소란하자 여동생이 오라비 방으로 건너왔다. ‘너를 시집보내고 혼자는 살 수 없어 평소 봐 둔 처자를 보쌈해 왔다. 그 여인도 많이 놀랐을 것이다. 오늘 밤 너와 함께 있는 것이 좋겠다.’ 그러면서 동생 방으로 포대 하나를 옮겨놓고 처자를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나가버렸다.
한편으로는 처자는 뭘 먹어서 겨울철 생굴처럼 오동통통하고 탱글탱글하게 무겁다냐? 불평을 하며 젊은 일꾼들은 왠 포대를 들쳐 매고 본가로 들어왔다. 그리고 도련님 당부라며 처자를 보쌈해 왔는데 오늘 밤은 아씨 마님이 알아서 보살펴 주었으면 한다고 했다.
아니 도련님이! 왜? 여기? 아! 조금 있다가, 아! 불 꺼요. 부끄러위요..
아니 아랫마을 총각 아닌가? 여긴 왜? 아! 조금 있다가, 아! 나 죽네!
다음날 동시에 두 집에서 난리가 났다. 장정 둘이 포대에서 나와 알몸으로 젊은 처자를 껴안고 있으니 말이다.
젊은이는 집안 단속을 철저히 했으나 용케도 참봉어른이 먼저 알게 되었다. 털끝만큼도 관용이라는 것을 모르는 어르신 아닌가? 그래서 가깝게 지내는 현감에게 변고를 고하기에 이르렀다.
사또도 처음 본 사건이었다. 복면을 하고 범방(犯房)한 것도 아니고 더구나 장정을 포박하여 포대에 넣어두었으니 보쌈도 아니다. 그러니 미풍양속을 어지럽게 한 것이 아니다. 곡절은 어렴풋이 잠작이 가나 치죄를 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손님은 왕이다.
경들은 앞장서시게! 보료에 오래 앉아있다 보니 좀이 쑤시네. 어디 가까운 주막에라도 가서 동동주에 파전이라도 먹고 와야겠네! 그래서 온양 행궁을 떠나 성종대왕이 미행을 하였다. 여기 행궁은 요양 차 임금이 가끔 유숙하고 가는 휴양지다.
그런데 주막 토벽에 갈겨 쓴 글씨가 눈에 띠었다.
客 而 王 (손님은 왕이다).
제상이 임금에게 아뢰었다. 마마! 들켰사옵니다. [
왕 일행은 보부상 차림으로 미행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옆 좌석에서 재미난 이야기가 들렸다. 어제 간밤에 어떤 양반집 자제가 노비를. 그것도 과부가 아니고 처녀를 보쌈해 왔다데! 아니야 미수에 그쳤나봐. 치한(癡漢)도 아니고, 반상(班常)이 유별한 세상인데 어떻게?
그래서 수행하던 형판을 시켜 소문의 진위를 은밀히 파악해보라고 했다. 한식경 후에 허겁지겁 달려온 온양 현감이 성종임금에게 전대미문의 해괴한 사건을 보고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이 사건은 죄로 다스릴 수 없으니 어찌해야 할지 고견을 내려주십사 하는 진언이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민망스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마침내 성종대왕은 이번 사건을 제상들에게 맡겼다. 그래서 한양에 있던 정승들 까지 모여 숙의를 하였다.
현감은 어명을 받아라! 역모 때문에 노비가 된 자를 바로 복권해 주거라. 또한 반상의 혼인은 이번에 한하여 허락하노라!
현청마루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풍악이 빠지면 섭하지. 지화자 좋다. 땡이로구나! 성군이로구나! 태평성대로다.
첫댓글 ㅎㅎㅎ 잼난 글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