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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허경신(謙虛敬愼)
겸손하고 마음을 비우고 경건하고 신중하게 하라
謙 : 겸손할 겸(言/10)
虛 : 빌 허(虍/6)
敬 : 공경할 경(攵/9)
愼 : 삼갈 신(忄/10)
우리나라에 많은 종가(宗家)가 있지만, 가장 전형적인 종가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의 종가라고 다 동의할 것이다.
지금의 종손 청하(靑霞) 이근필(李根必) 어른과 그 윗대 종손 동우(東愚) 이동은(李東恩) 어른을 만나보면, 두 어른 모두 겸손하고 마음을 비우고 경건하고 신중하게 처신하고, 그런 자세로 집안을 다스려나간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두 어른을 만나본 다른 분들도 모두 그렇게 말한다. 도산서원 원장겸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을 맡고 있는 김병일(金炳日) 원장은 두 분의 그런 처신에 깊이 감동을 받았다.
도산서원(陶山書院) 선비문화수련원에서 연수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가장 감동받은 연수과정이 '퇴계 종손과의 대화'라고 한다. 항상 겸손하고 남을 배려하고 경건하게 신중하게 처신하는 것에서 크게 감동을 받는다.
비록 상대가 어린아이라도 꿇어 앉아서 따뜻한 말씀으로 대화를 나누고, 퇴계선생을 비롯한 조상이나 집안 자랑을 절대 하지 않는다. 이러한 퇴계 종가는 영조(英祖) 때 멸문(滅門)의 화(禍)를 당할 뻔한 일이 있었다.
1728년 영조 4년에 이인좌(李麟佐)와 정희량(鄭希亮)이 영조를 몰아내려고 반란을 일으켰다. 정희량은 만고충신 동계(桐溪) 정온(鄭蘊)의 현손이었다. 난에 가담했다가 실패해 처형 당하고 집안에 크나큰 화를 입혔다.
정희량의 형님이 일찍 죽고 연달아 조카까지 죽자, 정희량의 아버지 정중원(鄭重元)은 명당인 경북 영주의 순흥(順興)으로 이사를 했다. 정씨 집안의 아들이 총명하고 풍채가 좋다는 소문이 널리 났다.
그때 마침 퇴계 종가에서 사위감을 구하고 있었는데, 정희량의 중매가 들어왔다. 종손이 정희량의 집에 가서 신랑감을 보니, 늠름한 대장부로 마음에 들었다. 더 자세히 보니, 거칠고 반역을 도모할 상(相)이 비쳤다.
그래서 종손은, "우리 딸은 많이 모자라고 몸이 약해서 훌륭한 아드님의 배필이 되기에는 부족합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정중하게 사양했다. 정희량의 부친은 몹시 서운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당시 퇴계 종가와 혼인을 맺는 것은 집안의 크나큰 영광이었다. 혼인을 안 했기 때문에 그 뒤 정희량이 역적으로 처형됐지만, 종가에는 아무런 화가 미치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안동 일대에서 전설로 전해지고 있지만, 선생의 6대 종손 이수겸(李守謙) 공 때 실제 있었던 일이다. 그 증손 이이순(李淳)이 지은 '행략(行略)'에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자식을 위해서 혼사를 논의하는데, 도내 문벌 있는 집안에서 혼사 맺기를 원했다. 곁에서 권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공은 허락하지 않았다. 얼마 있지 않아 그 집안은 과연 망했다. 사람들은 공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탄복했다.
종손의 신중한 자세가 집안을 구했다. 500년 이상 종가를 유지해 나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겸손하고 자신을 비우고 경건하고 신중한 것이 그 비결인 듯하다.
[참고]
주역 15. 지산겸(地山謙)
大義 : 裒多益寡(稱物平施). 不富以其鄰(過恭非禮).
[서괘전]
有大者, 不可以盈, 故受之以謙.
크게 소유하는 자는 가득 채우지 아니 하므로 謙卦로 받았다.
[정전]
소유하는 바가 성대하고 가득하여 넘치기에 이르면 안 되므로 반드시 겸손해야 한다. 그러므로 대유의 다음으로 겸괘가 받았다. 괘가 坤上艮下이니 땅속에 산이 있는 상이다. 地體는 성정이 비천하고 艮體는 성정이 고대한 것인데, 산이 땅 아래에 있는 모양은 곧 겸손한 상이다. 인사적으로는 숭고한 덕을 가진 사람이 비천한 사람의 아래에서 자처하므로 겸손한 뜻이다.
謙, 亨, 君子有終.
겸손한 처세는 형통하니, 군자가 시종일관 하는 바이다.
○君子有終 : 겸허(謙虛)하게 근신(謹慎)하는 것은 군자가 시종일관해야 하는 도리이다. 유종(有終)은 시종일관(始終一貫)한다는 의미와 종극(終極)에 달한다는 의미의 두 가지 해석이 있다. 겸허한 자세를 군자가 지녀야 할 기본적인 품덕이라고 볼 때, 늘 그러해야 한다는 의미인 시종일관한다고 해석함이 더 제격이다. 따라서 본 괘의 각 효사는 건괘의 해당효사(당해 군자)를 주체로 하는 겸도로 해석하면 이해하기에 편하다.
○謙 : 겸손하여 자만하지 않음이다. 잡괘전에 경(輕)이라 하였다. 설문(說文)에 경(輕)은 경차(輕車)이다. 군자가 겸허하지 못하고 교만과 허욕으로 꽉 차여있다면 가벼운 수레와 같이 경쾌한 행보를 할 수 없을 것이다.
老子說: 是以聖人, 終不爲大, 故能成其大. 江海所以能爲百穀王者, 以其善下之也, 故能爲百穀王. 是以, 聖人之欲上民也, 必以其言下之; 欲先民也, 必以其身後之. 故居上而民弗重也, 君前而民弗害也. 天下皆樂推而弗厭也, 非以其不爭與. 故天下莫能與爭.
[정전]
겸괘(謙卦)는 형통하는 도이다. 사람이 덕이 있으면서도 자처(自處)하지 않는 것을 겸손(謙巽)하다고 한다. 사람이 겸손으로 자처하면 어디를 간들 형통하지 않겠는가? 君子有終은 군자가 뜻을 겸손하게 가지고 이치에 통달하므로, 천명을 낙으로 삼고 남과 다투지 않으며 내적으로 충실을 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양하고 물러나서(退讓) 자신의 덕을 자랑하지 않으며, 편안한 마음으로 겸양의 덕을 따르면서 평생토록 의지를 바꾸지 않는다. 스스로 낮추므로 사람들이 더욱 존경하고, 스스로 덕을 회장(晦藏)하므로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 곧 군자가 시종일관하는 미덕이다. 소인이라면 욕심이 생기면 바로 경쟁에 돌입하고, 덕이 있으면 반드시 자랑하기 때문에, 비록 겸손하려고 애를 쓰더라도 이를 편안하게 지킬 수가 없으므로 시종일관하는 미덕이 없는 것이다.
彖曰, 謙亨, 天道下濟而光明, 地道卑而上行. 天道虧盈而益謙, 地道變盈而流謙, 鬼神害盈而福謙, 人道惡盈而好謙. 謙尊而光, 卑而不可踰, 君子之終也.
[단왈]
謙이 형통(亨通)하다는 것은 천도(天道)는 아래를 구제함에 공명정대하고, 지도(地道)는 겸허히 근신하며 위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즉 天道는 가득한 것을 덜어내어 더욱 겸허하도록 하고, 地道는 가득한 것을 변하게 하여 겸덕을 영원히 유지하도록 하며, 귀신(鬼神)은 가득한 것은 해하고 겸손한 것에는 복을 주며, 人道는 가득한 것은 싫어하고 겸손한 것을 좋아한다. 그러므로 겸손한 도는 존귀하고 광명하므로 경시하여 뛰어 넘을 수가 없는 것이니 군자가 시종일관 하는 바이다.
○虧盈 : 꽉 찬 것을 이지러뜨림(月滿則虧, 水滿則溢).
○卑而不可踰 : 귀하게 여겨야 한다. 경시하고 넘어서지 못한다. 卑는 輕視하다. 踰는 타고 넘어가다(禮不踰節).
[정전]
謙亨, 天道下濟而光明, 地道卑而上行; 濟는 際가 되어야 한다. 이는 겸괘의 형통하는 뜻을 밝힌 것이다. 천도는 기운이 아래와 사귀어 만물을 화육하므로 그 도가 광명하다(下際는 아래로 사귐을 말한다). 지도는 낮은 곳에 처하며 겸손하므로 기운이 위로 올라 하늘과 사귄다. 이는 상하가 모두 자신을 낮추기 때문에 형통하는 도인 것이다.
天道虧盈而益謙
천도의 운행이다. 가득차면 이지러지고 겸손하면 더해지는 것이므로 日月陰陽의 소식과 같다.
地道變盈而流謙
地勢를 보면 가득 차인 곳은 변하여 패이게 되며, 낮고 패인 곳은 흘러 들어오는 것이 있어서 더욱 차이는 것과 같다.
鬼神害盈而福謙
鬼神은 조화의 자취를 말하는 것이다. 가득 차면 화를 가져다주어 해를 끼치고, 겸손하면 복을 내려 돕는 것이다. 무릇 과하면 덜어내고 부족하면 더해주는 것이 이와 같다.
人道惡盈而好謙
인정은 가득 차는 것을 미워하고 겸손을 좋아한다. 겸손은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지극한 도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자세히 말을 한 것이니, 가득 채우는 것을 경계하고 겸손할 것을 권하는 것이다.
※ 天道는 해가 중천을 지나면 기울고 달도 차면 이지러지는 것처럼, 지나친 것을 줄여서 부족한 것을 늘려준다. 地道는 높은 산이 무너져 내려서 낮은 계곡으로 토사가 흘러들어 메우게 되는 것처럼 높은 곳은 무너트리고 낮은 곳은 메운다. 神靈은 교만한 자에게는 재앙을 내리고 겸손한 자에게는 복을 내린다. 또한 人情의 상도는 교만한 사람을 미워하고 겸손한 사람을 좋아한다.
謙尊而光, 卑而不可踰, 君子之終也.
겸손은 자신을 낮추어 공손히 하는 것이므로 그 도가 존귀하고 크게 빛이 나며, 자신을 낮추고 구부리지만 그 덕이 실로 높아서 더 할 수 없이 지극하니 (소인이) 넘을 수 없는 큰 덕이다. 군자가 겸손하기를 지성을 다하여 항상하고 변함이 없다면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이므로 그 덕이 존귀하고 또 빛이 나는 것이다.
象曰, 地中有山, 謙, 君子以裒多益寡, 稱物平施.
[상왈]
땅 가운데 산이 솟아 있는 상이 謙이니, 君子가 이를 보고 많은 데는 덜어내고 적은 데는 보태주는 천도의 이치로서 매사를 분별하고 공평하게 대응한다.
裒多益寡, 稱物平施.
여유가 있는 데는 덜어내고 부족한 데는 보충하는 이치에 따라 공평하게 호혜를 베푼다[裒는 쪼갠다(나눈다)는 의미가 있다. 稱物은 裒多益寡의 이치로 평가하는 것(또는 타인을 평가함을 의미하기도 함). 平施는 공평하게 호혜를 베풀다.
[정전]
땅의 體는 낮다. 산이 高大하면서 땅 속에 있다는 것은, 밖으로는 낮추면서 안으로는 고결함을 쌓아두는 상이다. 그러므로 겸이라 하였다. 산이 땅 속에 있다고 하지 않고, 땅 속에 산이 있다고 한 것은 자신을 낮추면서 숭고한 덕을 쌓은 것을 말함이다. 만약 숭고한 덕이 자신을 낮춤에 있다고 한다면 문장의 흐름이 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상이라는 것이 다 그러하므로 글 뜻을 보면 알 수가 있다.
君子以裒多益寡, 稱物平施.
괘에서 산이 땅 아래에 있는 상 즉, 높은 것이 아래로 내려오고 낮은 것이 위로 올라가 있는 모양을 보고 말하는 것이다. 즉 높은 것은 억제하고 낮은 것은 들어 올려주며, 지나친 데에서는 덜어내고 부족한 데에는 더해주는 뜻을 살핀 것이다. 그러므로 일을 시행함에 있어서 많은 것을 덜어서 작은 데에 보태주며, 物의 多寡를 저울질하여 고르게 분배함으로서 형평을 이루도록 하는 뜻을 담은 것이다.
初六, 謙謙, 君子用涉大川, 吉.
[초육]
스스로 겸손하며 또한 겸손한 자를 공경한다. 군자가 이와 같은 도로써 대천을 건너면 길하다.
○謙謙 : 처음의 謙은 겸손한 사람(육사)을 공경함(說文에 謙은 敬이다), 뒤의 겸은 스스로 겸손함이다(謙虛). 즉 스스로 겸손하면서 겸손한 윗사람을 따르는 것이 현 위치에 처한 초육의 作事謀始(訟卦)하는 자질과 之卦의 用晦而明(明夷)하는 모습과 어울리며, 뒤에 나오는 鳴謙, 勞謙, 撝謙 등과도 어법이 균형을 이룬다. 편자.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61장에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겸손이 강한 힘을 누른다
大邦者下流也, 天下之牝, 天下之交也.
큰 나라는 河口와도 같아서 만물이 모여들어 사귀므로 천하의 유순하고 다정한 母性의 골짜기와도 같다.
牝恒以靜勝牡, 爲其靜也.
유순하고 다정한 母性은 고요함으로 겸하하여 강성한 기세(牡)를 이길 수 있다.
故宜爲下, 大邦以下小邦, 則取小邦; 小邦以下大邦, 則取於大邦.
그러므로 큰 나라가 작은 나라에 겸손하면 작은 나라를 얻을 수 있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겸손하면 큰 나라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
故或下以取, 或下而取.
그 모양을 다시 보면 하나는 겸손하여 거두고 하나는 겸손하여 屬한다.
故大邦者, 不過欲兼畜人; 小邦者, 不過欲入事人, 夫皆得其欲, 則大者宜爲下.
겸손하려는 까닭은 큰 나라는 작은 나라를 기르고자 함이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기고자 함이니 대저 두 나라가 모두 뜻을 이루고자 한다면 큰 나라가 먼저 겸손해야 할 것이다.
[정전]
초육은 유순한 성정으로 謙의 도에 처하고 괘의 初下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낮추어 자처함에 지극한 자로 겸손하고 또 겸손하므로 謙謙이라 하였으니, 이와 같이 한다면 군자라 할 것이다. 지극히 겸손하게 자처하면 함께 더불을 사람들이 많아지므로 비록 험난한 일을 치르더라도 해로울 바가 없을 터인데 하물며 평이한 일에 처함에 있어서랴! 어찌 길하지 않음이 있겠는가?
[問]
초육이 겸에 처하고 있으면서 한편 음유한 성정으로 아랫자리에 있으면 겸손이 지나치지 않는가?
[答]
음유가 아래에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상도이므로, 여기에서는 다만 겸손이 지극한 모양만을 볼 따름이기 때문에 겸겸군자라 한 것이며, 이는 잘못이 아니다.
象曰, 謙謙君子, 卑以自牧也.
[상왈]
謙謙君子는 낮추기를 자처하는 것이다.
[주석]
겸겸은 겸손이 지극한 것이다. 곧 군자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도로써 자처함을 말한다. 自牧은 自處와 같다. '시경'에 "자처하기를 삐비 풀처럼 부드럽게 하라(自牧歸荑)"라는 구절에 쓰인 뜻과 같다.
六二, 鳴謙, 貞吉.
[육이]
겸손한 덕이 드러난 군자이다. 점이 길하다.
○鳴謙 : 겸손함이 만천하에 드러난 군자[鳴은 鳴豫와 같은 용법으로 여기에서의 의미는 겸손한 덕이 만천하에 드러난 군자이다. 鳴은 유명하다(聞名)는 뜻이다. 자질은 否(儉德避難 不可榮以祿) 지괘는 升(順德 積小以高大)
[정전]
육이는 유순한 성정으로 中이므로 겸손한 덕이 쌓였다. 謙德이 가득하여 그 덕이 외부로 발현되어 말과 표정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겸덕을 드날린다고 하였다. 중이며 정이기 때문에 중정한 덕이 있어 貞吉이라 하였다. 대저 貞吉은 貞하고 또한 吉함이 하나의 뜻이고, 貞을 얻으므로 吉한 것이 또 하나의 뜻이다. 육이의 정길은 자기 스스로 그러한 덕을 품고 있는 것이다.
象曰, 鳴謙貞吉, 中心得也.
[상왈]
鳴謙貞吉은 겸덕이 쌓였기 때문이다.
[정전]
육이의 겸손한 덕은 참되고 정성스러운 마음이 누적됨으로 말미암아 그 덕성이 외부로 發揚되는 것이다. 이는 정성스런 마음가운데 저절로 발양되는 것이지, 억지로 힘써서 함이 아니다.
九三, 勞謙, 君子有終, 吉.
[구삼]
공적과 지위가 있으면서도 겸손한 자이다. 군자로써 시종일관하므로 길하다.
○勞謙 : 공적과 지위가 있으면서도 겸손한 자이다[勞는 어떤 목적을 이루는 데에 힘쓴 노력이나 수고이다. 즉 직무에서 수고한 결과 공훈과 업적(功勞)을 일구어낸 군자. 자질이 遠小人不惡而嚴(遯卦)하는 군자이고, 之卦는 坤으로 厚德載物함이니 자신의 공과를 다투지 않고 겸허히 처신하는 군자이다. 주석에서도 周公이 바로 이러한 군자라고 설명하고 있으니, 아랫사람으로써 최고최선의 겸손이라 하겠다.
[정전]
구삼은 양강한 덕으로 하체에서 여러 음으로부터 조회를 받고 있다. 또한 지위를 얻어 하괘의 상이므로, 위로는 군주의 신임을 받고 아래로는 大衆의 존경을 받는 공로가 있으면서도 겸손한 덕을 가진 자이다. 그러므로 勞謙이라 하였다. 옛날에 이와 같은 사람이 있었으니 곧 周公이다. 몸소 천하의 大任을 담당하면서도 위로는 유약한 군주를 받들며 겸손과 공경으로 자처하고, 敬愼畏懼 하기를 지극히 하였으니 가히 공로가 있으면서도 겸손하였다고 할 만하다. 능히 노겸하며 군자의 행실에 유종의 미를 거두면 곧 길한 것이다. 대저 올라감을 좋아하고 이기기를 즐기는 것이 인지상정이어서, 평소에도 겸손하기가 어렵고 또 드믄 일인데 하물며 높이 살만한 공로가 있으면서도 겸손의 덕을 확고하게 지키니 이는 곧 성인의 도이다. 비록 겸손이 좋다는 것을 알아서 그리하고자 노력을 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겸덕을 자랑하고 자부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면, 그러한 도는 오래가지 못하여 유종의 미를 거둘 수가 없다. 오직 군자는 겸손과 순리에 따라 편안한 마음으로 나아감이 상도이다. 그러므로 오래되어도 변하지 않으니 시종일관함이며, 이룸이 있으니 길한 것이다. 구삼은 강이 바르게 처하여 능히 마침을 이룰 수 있는 자이니, 본 효의 덕이 가장 성대한 것이다. <상전>의 말이 특히 중요하다.
象曰, 勞謙君子, 萬民服也.
[상왈]
勞謙君子는 만민이 그 덕을 따르고 복종하는 것이다.
[정전]
노겸하는 군자는 만민이 존경하고 따른다. '계사전'에서 "공로가 있어도 자랑하지 않고, 자신의 공로를 덕으로 자부하지 않으므로 후덕이 지극하니, 공로가 있으면서도 남에게 낮추는 사람을 말한다. 덕은 성대함이고, 禮法은 공손함이니(德言盛 禮言恭), 謙은 공손함으로써 지위를 보존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수고하는 바가 있어도 괴로워하거나 자랑하지 않고, 공이 있어도 이를 덕으로 삼지 않는 것은 그만큼 덕이 크고 후한 것이니, 공로가 있으면서도 스스로 겸손하여 남에게 낮추는 것을 말하였다. 앞의 德言盛 禮言恭은 그 덕으로 보면 지극히 성대한 것이고, 그와 같이 자처하는 예법을 보면 지극히 공손한 것이므로 곧 겸손의 덕이다.
대저 겸손이라는 것은 공손한 덕을 지극히 하여 지위를 보전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손한 덕을 가지면 지위가 높아도 위태롭지 않고, 가득 채워도 넘치지 않으므로 이로써 길한 것이다. 무릇 군자가 겸덕을 따르는 것은 常道로서 행동함이지, 자신의 지위를 보존하기 위함이 아니다.
지위를 보존 한다는 뜻은 능히 공손하기를 지극히 하면 자신의 지위가 저절로 보존됨을 뜻한다. 예를 들면 '선을 행하면 좋은 평판이 난다(명예를 얻는다)'고 함에 있어서, 명예를 얻은 것은 명예를 생각하기 이전에 이미 선행을 하였기 때문이지, 명예를 얻을 목적으로 선을 행한 것이 아닌 것과 같다.
六四, 無不利撝謙.
[육사]
(위아래 어디에든지) 이롭지 않음이 없는 겸덕을 발휘한다.
○撝謙 : 자기를 낮추어 겸덕을 發揮하는 군자이다. 撝는 자신을 낮추어 겸양함이다. 초육의 謙謙과 용법이 같다. 그러나 초육은 스스로 겸손하면서 겸손한 윗사람을 섬기는 것이고, 육사의 撝謙은 스스로 겸손하면서 또한 겸손한 덕을 위아래에 모두 베푸는 것이다.
[정전]
구사는 상체에서 군주와 이웃하고 있다. 육오는 겸손하고 유순한 덕으로 자처하고 있으며, 구삼은 공로가 있어서 군주로부터는 신임을 받고 아래 대중들로부터는 존숭을 받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은 한편으로는 공손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군주를 받들며, 한편으로는 자신을 낮추어 노겸의 신하(구삼)에게 겸양의 덕을 베풀기 때문에 이롭지 않음이 없다. 撝는 펼치는(施布) 상으로 마치 사람이 손바닥을 펼치는 것과 같은 뜻이다. 動靜과 진퇴에 있어서 겸손한 덕을 펼치는 것은, 두려움이 많은 지위에 있으면서 또한 노겸하는 賢臣의 윗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象曰, 無不利撝謙, 不違則也.
[상왈]
無不利撝謙은 도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정전]
무릇 사람의 겸손은 마땅히 펼쳐야 할 바(정도)가 있으므로, 그 마땅한 바를 지나치면 안 된다. 예컨대 육오가 혹 군주의 권위로써 侵伐의 수단을 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오직 육사는 군주와 가까운 위치에 있으면서 또한 공로가 있는 현신의 윗자리에 처해 있다. 그러므로 모든 움직임에 겸손의 덕을 펼쳐서 이롭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연후에 도에 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칙을 어기지 않는 것이라 하였으니, 마땅한 바를 지킨 것이 된다.
六五, 不富以其鄰, 利用侵伐, 無不利.
[육오]
무아의 겸덕으로 대업을 이루니, 거스리는 자는 침벌로 다스려도 이롭지 않음이 없다. 飛龍의 謙德이니 겸덕과 위엄을 모두 갖춤이다.
○不富以其隣 : 富以其隣이 財富(權勢)를 기반으로 대업을 이루기 위하여 서로 돕는다는 의미이므로 不富以其隣은 그 부정이다. 財富와 權勢가 아니라면 상호의 굳은 믿음 즉 誠心으로써 서로 돕고 이웃함이다. 겸덕에 誠心이 더하면 무아의 겸덕(飛龍의 謙德)이다. 富는 厚하게 갖추다(備) = 계사전에서 富有之謂大業(經國大業; 나라를 다스리는 대업)이라 하였으므로 富는 大業이다. 또한 家人에서 富家大吉을 祿位가 昌盛하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도 이와 같다.
[참고문]
不富以其鄰의 和諧思想 : 이웃과 함께 평안하기를 바란다면 財富를 뽐내서는 안 된다. 재부를 앞세우면 이웃 간에 서로 시기하는 마음이 생겨서 많은 모순을 유발하고 불안감을 조성하게 되어 건전하고 발전적인 사회의 조성이 불가하게 된다. 오늘날의 사회 환경 속에서 우리는 財富와 權勢를 相得의 조건으로 보아 財富가 있으면 권력이 따르고 權勢가 있으면 財富가 따른다는 공식 아닌 공식을 알고 있다. 財富와 權力의 연결고리는 전체사회의 조화라는 측면에서 살피면 사회 구성원간의 비평등의 전형이다. 곧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간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악습인 것이며, 이와 같은 사회 환경 속에서 사회 성원간의 和諧를 바라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겸손은 사회를 위하여 나를 희생하지만, 이러한 희생이 다시 나를 살리는 길임을 안다면 민중의 화해의 첩경은 무아의 겸덕을 기르고 실천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정치상황이나 사회계층간의 갈등이 더욱 더 심화되어 가고 있는 현실을 살피면 그 내면의 제일의 요인은 겸덕이 없음을 들어 과오가 아닐 것이다. 곧 불부이기린으로 화해사회를 이끌어 내는 기본 이념은 無我의 謙德이다.
노자 도덕경 15장은 화해사회를 일구어 내는 도인의 모습을 이렇게 읊고 있다.
古之善爲道者, 微妙玄通, 深不可識. 夫唯不可識, 故強爲之容. 豫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 儼兮其若客, 渙兮若氷之將釋, 敦兮其若樸, 曠兮其若穀, 混兮其若濁. 孰能濁以靜之徐淸, 孰能安以動之徐生. 保此道者, 不欲盈. 夫唯不盈, 故能蔽不新成.
예로부터 도에 밝은 사람은 현묘하고 신통하여 그 깊이를 알 수가 없으니 신비한 그 모습을 억지로 그려보면 조심스럽기는 한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듯하고, 경계하는 모습은 적에게 둘러싸여 사면이 초가인 듯하고, 삼가는 모습은 남의 집 손님과도 같고, 마음을 헤쳐 내는 모습은 얼음이 녹아내리는 것과도 같고, 돈독하고 질박한 마음은 다듬지 않은 통나무와 같고, 넓고 텅 비운 마음은 심산유곡과 같고, 한데 뒤섞여 어울리는 모습은 마치 탁류와도 같구나. 누가 능히 탁한 곳에서 스스로 고요하여 淸靜할 수 있으며, 누가 능히 편안한 곳에서 움직여 나와 長生할 수 있겠는가? 도를 아는 사람은 욕심을 채우려 하지 않는다. 마음을 비워두면 능히 다시 쓸 수 있으니 새로이 이루지 않는 것이다.
[정전]
財富는 대중이 귀의하는 바이다. 오직 재물만이 사람을 모이게 할 수 있다. 육오는 군주이면서도 겸손하고 유순한 덕으로 아랫사람을 대하고 있으므로 민중이 모두 귀의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재부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이웃과 가까이 지내는 바이다. 隣은 이웃과 가깝게 지낸다는 뜻이므로 재부를 사용하지 않고도 이웃과 和諧를 이룬다는 뜻이다. 즉 군주가 되어 겸손하고 유순한 덕을 지니면 천하가 마음에서 우러나 귀의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군주의 도는 항상 겸손하고 유순한 덕만을 숭상해서는 안 되며, 반드시 위엄과 강건한 덕을 겸한 후에야 능히 천하를 회유하고 복종시킬 수가 있다. 그러므로 '侵伐을 씀이 이롭다'고 하였다. 위엄의 덕이 모두 드러난 뒤에야 君道의 마땅함을 다하여 이롭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육오의 謙柔는 겸손이 지나치는 과실을 예방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뜻을 낸 것이다.
象曰, 利用侵伐, 征不服也.
[상왈]
利用侵伐은 복종하지 않는 者를 권위로써 징벌하는 것이다.
[정전]
문덕과 겸손한 덕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정벌하는 것이다. 문덕에 복종하지 않는데도 위엄과 권세를 쓰지 않는다면 어떻게 천하를 태평하게 통치할 수 있겠는가? 이는 군주의 中道가 아니고 겸손이 지나친 것이다.
上六, 鳴謙, 利用行師, 征邑國.
[상육]
지나친 겸손을 드러내니, 자신을 돌아보아 겸도를 회복함이 이롭다. 謙極은 亢龍有悔의 너무 심한 겸덕이다. 곧 지나친 겸손은 예에 벗어나는(過恭非禮) 것이므로 스스로 자신을 살펴서 도를 회복해야 이롭다.
[정전]
상육은 유위에 있으므로 順이 지극함이다. 또한 겸손의 극이므로 겸손이 지극한 자이다. 지극히 겸손한 자가 도리어(덕에 반하여) 높은 자리에 앉아있기 때문에 겸손한 뜻을 이루지 못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러한 정황이 외부에 聲音으로 發揚되어 나온다. 또한 유순한 덕으로 겸의 극에 처하게 되면, 외부로 발양되는 바가 반드시 목소리와 얼굴빛에 나타나기 때문에 鳴謙이라고 하였다. 비록 높지만 지위가 없는 자리에 처한 것이므로 천하의 일을 맡은 바는 없다. 그러나 사람이 運身함에는 반드시 剛柔의 道가 相濟하며 따르는 것인데, 상육은 겸손이 지극함이 극심하여, 오히려 겸손이 지나친 경우이다. 그러므로 강건하고 굳센 의지로 지나친 겸손을 스스로를 다스려야만 이로움이 있는 것이다. 邑國은 자기의 사사로운 영역(私的領域 = 제후의 領地, 개인의 몸)을 말하고, 行師는 강건하게 自省함을 말하는 것이므로 征邑國은 개개인에 있어서 스스로 자신을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考]
육이의 鳴謙은 스스로 겸손함을 말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들이 그 겸덕을 아는 것이므로 여기에서의 '鳴'은 '운다'가 아니고 '울린다(드날린다)'라고 함이 옳다. 그러나 上六의 '鳴'은 본인 스스로가 겸손하다고 외장을 치지만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기 때문에 울고 있는 것이다.
겸손이 지나침은 예에 벗어난다는 '過恭非禮'의 상황에서 남들로부터 차라리 不遜의 대접을 받는 경우 일 수도 있다. 어떻든 실상과 표현이 일치하지 못함으로 인한 자가당착이므로 이를 개선하는 것은 오직 본인의 의지에 달려있다.
따라서 爻辭에 利用行師하여 征邑國하라 한 것이다. 즉 군사를 써서 邑國(제 고을)을 征(평정)하라고 함은 스스로 자신에게서 失道의 원인을 밝히고 개선하여 謙道를 회복하라고 한 것이다.
일개인의 문제에 대한 大山의 해설을 요약하면... "내 몸에 군주가 있는 곳이 어디일까요? 심장입니다. 그래서 심장은 心君이라고 한다. 일개인에게 있어서는 심장은 한 몸의 邑國으로 擬制될 수 있다. 따라서 한 나라의 邑國은 군주가 다스리듯이, 한 몸의 邑國은 스스로의 정신(自我), 즉 마음이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정신적인 능력(군사)을 동원해서(利用行師) 失道 하도록 유도한 邪心(欲心)을 다스려서(征邑國) 道를 회복하라는 얘기이다."
象曰, 鳴謙, 志未得也, 可用行師, 征邑國也.
[상왈]
鳴謙은 겸손을 실천하지 못했으니, 덕성을 바루어서 자기 스스로를 다스려 도를 회복해야 이롭다.
[정전]
겸손이 극하여 상에 있는 것은 겸손의 덕을 실천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간절함을 못 이기고 우는 데에 이른 것이다. 자리가 마땅하지 않으며, 겸손이 이미 지나쳐 극에 달하였으니 마땅히 자신을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利用行師 征邑國'이라고 하였다.
▶️ 謙(겸손할 겸, 혐의 혐)은 ❶형성문자로 谦(겸)은 간자(簡字), 嗛(겸), 嫌(겸), 慊(겸)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말씀 언(言; 말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모자란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한 兼(겸)으로 이루어졌다. 자기를 미흡한 자라고 말하는 뜻이다. ❷회의문자로 謙자는 '겸손하다'나 '겸허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謙자는 言(말씀 언)자와 兼(겸할 겸)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兼자는 벼 다발을 손에 쥐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아우르다'나 '겸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인격과 소양이 두루 갖춰진 사람은 자신을 낮추고 말을 공손하게 한다. 그래서 謙자는 이렇게 '겸하다'라는 뜻을 가진 兼자와 言자를 결합해 '말에 인격과 소양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라는 의미에서 '겸손하다'라는 뜻을 표현했다. 그래서 謙(겸, 혐)은 ①겸손(謙遜)하다 ②겸허(謙虛)하다 ③사양(辭讓)하다 ④공경(恭敬)하다 ⑤육십사괘(六十四卦)의 하나, 그리고 ⓐ혐의(혐) ⓑ의심하다(혐) ⓒ꺼리다(혐)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겸손할 손(遜),사양할 양(讓)이다. 용례로는 겸손하고 공경하는 모양을 겸겸(謙謙), 남을 높이고 자기를 낮춤을 뜻하는 말을 겸공(謙恭), 육십사괘의 하나인 겸괘(謙卦), 겸손하고 조심성이 많음을 겸근(謙謹), 겸손한 덕을 겸덕(謙德), 겸손하고 청렴함 겸렴(謙廉), 자신을 겸손하여 낮춤을 겸비(謙卑), 겸손하게 삼감을 겸신(謙愼), 겸손한 태도로 사양함을 겸양(謙讓), 겸손한 말을 겸어(謙語), 겸손히 일컬음을 겸칭(謙稱), 겸손한 태도로 어려워함을 겸탄(謙憚), 겸손하게 자기를 낮춤을 겸하(謙下), 겸손하게 자기를 낮춤 겸허(謙虛), 겸손하고 온화함을 겸화(謙和), 겸손하고 말이 없음을 겸묵(謙默), 겸손한 말을 겸사(謙辭), 남을 대할 때에 거만하지 않고 공손한 태도로 제 몸을 낮춤을 겸손(謙遜), 겸손하게 사양하고 물러감을 겸퇴(謙退), 지나치게 격렬함을 과경(過謙), 스스로 자기를 겸손하여 사양함을 자경(自謙), 공로가 있으면서 겸손함을 노경(勞謙), 공경하고 겸양함을 공경(恭謙), 근로하고 겸손하며 삼가고 신칙하면 중용의 도에 이른다는 말을 노겸근칙(勞謙謹勅), 겸손하게 사양하는 미덕을 이르는 말을 겸양지덕(謙讓之德), 언제나 거만하면 손해를 보며 겸손하면 이익을 본다는 뜻을 일컫는 말을 만초손겸수익(慢招損謙受益) 등에 쓰인다.
▶️ 虛(빌 허)는 ❶형성문자로 虚(허)의 본자(本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음(音)을 나타내는 범호 엄(虍; 범의 문채, 가죽, 허)部와 丘(구; 큰 언덕)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큰 언덕은 넓고 넓어 아무것도 없다는 데서 텅 비다의 뜻으로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虛자는 '비다'나 '공허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虛자는 虎(범 호)자와 丘(언덕 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丘자가 다른 글자와 결합할 때는 (구)자로 바뀌기 때문에 虛자는 丘자가 결합한 것으로 풀이해야 한다. 丘자는 '언덕'을 뜻하는 글자이다. 그러니 虛자는 마치 호랑이가 언덕에 있는 듯한 모습이다. 맹수의 왕이 나타났으니 모두 도망가기 바쁠 것이다. 그래서 虛자는 드넓은 언덕에 호랑이가 나타나자 모두 사라졌다는 의미에서 '비다'나 '없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虛(허)는 (1)내용(內容)이 비어 있는 것 (2)방심(放心)하여 게을리 한 곳이나 틈. 허점(虛點) 등의 뜻으로 ①비다, 없다 ②비워 두다 ③헛되다 ④공허(空虛)하다 ⑤약(弱)하다 ⑥앓다 ⑦살다, 거주(居住)하다 ⑧구멍 ⑨틈, 빈틈 ⑩공허(空虛), 무념무상(無念無想) ⑪마음 ⑫하늘 ⑬폐허(廢墟) ⑭위치(位置), 방위(方位) ⑮큰 언덕 ⑯별의 이름,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열매 실(實), 있을 유(有), 찰 영(盈)이다. 용례로는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꾸민 것을 허위(虛僞), 비거나 허술한 부분을 허점(虛點), 사실에 없는 일을 얽어서 꾸밈을 허구(虛構), 몸이 허약하여 기운이 빠지고 정신이 멍함을 허탈(虛脫), 사람됨이 들떠서 황당함을 허황(虛荒), 텅 비어 실상이 없음을 허무(虛無), 실상이 없는 말로 거짓말을 허언(虛言), 텅 빈 공중을 허공(虛空), 피곤하여 고달픔을 허비(虛憊), 마음이나 몸이 튼튼하지 못하고 약함을 허약(虛弱), 쓸 데 없는 비용을 씀을 허비(虛費), 실상은 없이 겉으로 드러내는 형세를 허세(虛勢), 어이없고 허무함 또는 거짓이 많고 근거가 없음을 허망(虛妄), 때를 헛되게 그저 보냄을 허송(虛送), 몹시 배고픈 느낌을 허기(虛飢), 쓸데없는 헛된 생각이나 부질없는 생각을 허상(虛想), 너무 과장하여 실속이 없는 말이나 행동을 허풍(虛風), 겸손하게 자기를 낮춤을 겸허(謙虛), 속이 텅 빔을 공허(空虛), 속이 빔을 내허(內虛), 정신이 허약한 병증을 심허(心虛), 위가 허약함을 위허(胃虛), 원기가 약함을 기허(氣虛), 마음이 맑고 잡된 생각이 없어 깨끗함을 청허(淸虛), 높고 텅 빔으로 지위는 높으면서 직분은 없음을 고허(高虛), 마음이 들뜨고 허황함을 부허(浮虛), 푸른 하늘을 벽허(碧虛),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터놓음을 일컫는 말을 허심탄회(虛心坦懷), 헛되이 목소리의 기세만 높인다는 뜻으로 실력이 없으면서도 허세로만 떠벌림을 이르는 말을 허장성세(虛張聲勢), 세월을 헛되이 보냄을 일컫는 말을 허송세월(虛送歲月), 방을 비우면 빛이 그 틈새로 들어와 환하다는 뜻으로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면 저절로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허실생백(虛室生白), 허를 찌르고 실을 꾀하는 계책으로 싸우는 모양을 이르는 말로써 계략이나 수단을 써서 서로 상대방의 약점을 비난하여 싸움을 이르는 말을 허허실실(虛虛實實), 말하기 어려울 만큼 비고 거짓되어 실상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허무맹랑(虛無孟浪), 허명 뿐이고 실속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허명무실(虛名無實), 예절이나 법식 등을 겉으로만 꾸며 번드레하게 하는 일을 일컫는 말을 허례허식(虛禮虛飾), 사심이 없고 영묘하여 어둡지 않다는 뜻으로 마음의 실체와 작용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허령불매(虛靈不昧) 등에 쓰인다.
▶️ 敬(공경 경)은 ❶회의문자로 등글월문(攵=攴; 일을 하다, 회초리로 치다)部와 苟(구)의 합자(合字)이다. 등글월문(攵)部는 급박하여 다가온다는 뜻이다. 혁은 엄격하게 격려한다는 뜻으로 말을 삼가는 뜻이 있는데 다시 등글월문(攵)部를 더하여 敬(경)은 한층 더 게을리하지 않음을 뜻으로 삼가다, 조심하다의 뜻이 있다. ❷회의문자로 敬자는 '공경하다'나 '정중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敬자는 苟(진실로 구)자와 攵(칠 복)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苟자는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개를 그린 것으로 '진실로'나 '참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진실되다'라는 뜻을 가진 苟자에 攵자가 결합한 敬자는 '진실하도록 하다'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敬자에 쓰인 攵자는 예의를 갖추도록 만든다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강제성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고대에는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글자가 많다. 그래서 敬(경)은 성(姓)의 하나로 ①공경(恭敬) ②예(禮), 감사(感謝)하는 예(禮) ③공경(恭敬)하다 ④삼가다(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하다), 마음을 절제(節制)하다 ⑤정중(鄭重)하다, 예의가 바르다 ⑥훈계(訓戒)하다, 잡도리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공손할 공(恭), 공경할 흠(欽), 공경할 지(祗), 공경할 건(虔)이다. 용례로는 노인을 공경함을 경로(敬老), 공경하는 마음을 경의(敬意), 존경하고 사모함을 경모(敬慕), 남의 말을 공경하는 태도로 듣는 것을 경청(敬聽), 공경의 뜻을 나타내는 인사를 경례(敬禮), 존경하여 일컬음을 경칭(敬稱), 초월적이거나 위대한 대상 앞에서 우러르고 받드는 마음으로 삼가고 조심하는 상태에 있음을 경건(敬虔), 공경하고 중하게 여김을 경중(敬重), 공경하고 사랑함을 경애(敬愛), 존경하여 높이어 부르는 말을 경어(敬語), 속마음과는 달리 겉으로는 존경하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멀리함을 경원(敬遠), 공경하여 삼가 답장한다는 경복(敬復), 존중히 여겨 공경함을 존경(尊敬), 삼가서 공손히 섬김을 공경(恭敬), 존경하는 마음이나 예의가 없음을 불경(不敬), 숭배하고 존경함을 숭경(崇敬), 공경하고 두려워함을 외경(畏敬), 더욱 공경함을 가경(加敬), 항상 마음을 바르게 가져 덕성을 닦음을 거경(居敬), 부모를 잘 섬기고 공경함을 효경(孝敬), 씩씩하고 공경스러움을 장경(莊敬), 공경하되 가까이하지는 아니함 또는 겉으로는 공경하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꺼리어 멀리함을 이르는 말을 경이원지(敬而遠之),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함을 이르는 말을 경천애인(敬天愛人), 하느님을 받들고 백성을 통치하기를 게을리 하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경천근민(敬天勤民), 신을 공경하고 조상을 숭배함을 일컫는 말을 경신숭조(敬神崇祖), 노인을 공경하는 생각을 일컫는 말을 경로사상(敬老思想),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일컫는 말을 경외지심(敬畏之心) 등에 쓰인다.
▶️ 愼(삼갈 신, 땅 이름 진)은 ❶형성문자로 慎(신)의 본자(本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심방변(忄=心; 마음, 심장)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세밀하다는 뜻을 가진 眞(진)으로 이루어졌다. 마음을 세밀히 쓴다는 뜻이다. ❷회의문자로 愼자는 '삼가다'나 '근신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愼자는 心(마음 심)자와 眞(참 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眞자는 신에게 바칠 음식을 정성스럽게 준비했다는 의미에서 '참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참됨을 뜻하는 眞자에 心자가 결합한 愼자는 조심스럽게 신에게 제물을 바친다는 의미에서 '삼가다'나 '근신하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愼(신, 진)은 ①삼가다(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하다) ②근신(謹愼)하다 ③두려워하다 ④근심하다(속을 태우거나 우울해하다) ⑤따르다 ⑥삼감(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함) ⑦성(姓)의 하나 ⑧진실로, 참으로 ⑨부디, 제발, 그리고 ⓐ땅의 이름(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삼갈 각(恪), 원할 원(愿), 삼갈 비(毖), 삼갈 근(謹), 삼갈 욱(頊)이다. 용례로는 매우 조심스러움을 신중(愼重),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삼감을 신독(愼獨), 신중하게 사려함을 신려(愼慮), 신중히 생각함을 신사(愼思), 상사를 당하여 예절을 중시함을 신종(愼終), 삼가고 조심함을 신계(愼戒), 신중하게 가려 뽑음을 신간(愼簡), 말을 삼감을 신구(愼口), 신중하고 면밀함을 신밀(愼密), 여색을 삼감을 신색(愼色), 신중히 다룸을 신석(愼惜), 조심하여 고름 또는 선택을 신중히 함을 신선(愼選), 조심하여 지킴을 신수(愼守), 말을 삼감을 신언(愼言), 기회를 소홀히 하지 않음을 신기(愼機), 삼가서 침묵을 지킴을 묵신(愼默), 근신하여 경거망동을 삼가는 날이란 뜻으로 설날을 일컫는 말을 신일(愼日), 언행을 삼가고 조심함으로 과오나 잘못에 대하여 반성하고 들어앉아 행동을 삼감을 근신(謹愼), 힘써 삼감을 근신(勤愼), 삼가지 아니함이나 신중하게 여기지 아니함을 불신(不愼), 겸손하게 삼감을 겸신(謙愼), 경계하여 삼감을 계신(戒愼), 공경하고 삼감을 경신(敬愼), 혼자서 스스로 근신하는 일을 독신(獨愼), 온화하고 신중함을 온신(溫愼), 두려워하고 삼감을 공신(恐愼), 성품이 질박하고 신중함을 질신(質愼), 어렵게 여기고 조심함을 난신(難愼), 몹시 두려워하고 언행을 삼감을 외신(畏愼), 양친의 상사에는 슬픔을 다하고 제사에는 공경을 다한다는 말을 신종추원(愼終追遠), 일이 마지막에도 처음과 같이 신중을 기한다는 말을 신종여시(愼終如始), 처음 뿐만 아니라 끝맺음도 좋아야 한다는 말을 신종의령(愼終宜令), 마음을 조심스럽게 가지어 언행을 삼감을 이르는 말을 소심근신(小心謹愼) 등에 쓰인다.